눌지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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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눌지 마립간은 417년부터 458년까지 신라의 왕으로 재위했다. 그는 내물 마립간의 아들이며, 392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졌다가 실성에 의해 살해된 실성을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 왜와의 외교적 갈등을 겪었으며, 백제와는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했다. 458년 8월에 사망했으며, 매장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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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지 마립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눌지 마립간 |
한자 표기 | 訥祇麻立干 |
로마자 표기 | Nulji Maripgan |
즉위 | 417년 |
퇴위 | 458년 |
칭호 | 마립간 |
신라의 군주 | |
개인 정보 | |
아버지 | 내물 이사금 |
어머니 | 보반부인 |
사망 | 458년 |
매장지 | 황남대총(추정) |
가계 | |
부 | 내물 이사금 |
모 | 보반부인 |
형제자매 | 김복호, 김미사흔 |
배우자 | 실성 이사금의 딸 |
자녀 | 자비 마립간, 조생부인 |
생애 | |
왕위 계승 | 실성 이사금을 이어 왕위에 오름 |
주요 업적 | 나제동맹 강화 왕권 강화 박제상의 활약 |
기타 | |
종교 | 불교 |
2. 생애
내물 이사금의 아들로,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서 탁부 내지왕(喙部 乃智王)이라 칭한 대목이 발견되어 신라의 수도인 금성에서 태어난 것이 확인되었다. 그동안 그의 출생지에 대한 기록은 미상이었다.[8] 삼국유사에는 박제상을 시켜 복호와 미사흔을 돌려보낸 일화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8]
2. 1. 재위 기간
내물 이사금 재위 37년인 392년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는데, 실성이 이에 한을 품고 내물의 첫째 아들 눌지를 몰아내고 내물의 둘째 아들 복호와 셋째 아들 미사흔을 각각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냈다. 그 뒤 고구려 사람을 시켜 눌지를 살해하려 했으나 오히려 눌지가 실성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복호와 미사흔은 418년 박제상을 시켜 돌아오게 했다.[8]424년 음력 2월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431년 음력 4월 왜가 동쪽을 침범하고 명활성을 둘러쌌으나 소득 없이 물러났다. 432년 봄에 기근이 발생했다. 433년 미사흔이 죽었는데, 임금이 서불한에 추증했다. 그해 음력 7월 백제와 화친을 맺었다(나-제 동맹). 이듬해 434년 비유왕이 음력 2월에 말 두 필을, 음력 9월에 흰 매를 보냈고 음력 10월에 눌지가 황금과 명주를 보내 답례했다.
440년 왜가 두 차례에 걸쳐 남쪽과 동쪽 변경을 침입, 백성들을 납치했다. 444년 음력 4월에는 왜가 보다 대규모로 쳐 와, 금성을 열흘간 에워쌌으나 군량이 떨어져 도망쳤다. 임금이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추격해 독산 동쪽에서 싸웠으나, 신라군 장병 절반이 넘게 죽었다. 임금이 패해 말을 버리고 산 위에 올라, 적들이 여러 겹으로 에워싸는데, 안개가 짙게 끼어 간신히 왜군의 눈으로부터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450년 음력 7월 고구려의 한 장수가 실직의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하슬라성주 삼직이 그를 죽였다. 장수왕이 노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마립간이 사죄하자 그대로 물렀다. 그러나 454년 음력 8월 다시 고구려가 침공했으며, 455년 음력 10월엔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는 것을 마립간이 군사를 보내 구원했다.[8]
눌지 마립간은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보내졌던 왕제가 즉위 이듬해(418년)에 귀국한 후, 점차 고구려로부터의 종속적 체제를 벗어나려 했다. 백제의 비유왕은 433년 이래로 빈번하게 사신과 공물을 보내왔으며, 신라 역시 백제에 답례를 보내 양국은 동맹(나제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는 자세를 강화해갔다.[8]
450년 7월에는 고구려의 변방 수장이 실직(강원도삼척시) 부근에서 사냥을 하던 중, 하슬라(강원도강릉시)의 성주 삼직이 급습하여 살해했고, 갑자기 고구려와의 긴장을 초래했다. 분노한 고구려의 장수왕은 신라 북서부 국경에 군사를 파견해왔지만, 신라에서는 정중한 사죄를 하여 일단 고구려는 퇴각했다. 이후, 고구려가 454년 8월에 신라 북부 변경에 침입해온 일도 있었고, 455년 10월에 고구려가 백제에 침입했을 때, 눌지 마립간은 백제에 구원병을 파견했다.[8]
또한, 왜와의 교전도 자주 발생했다. 431년 4월, 440년 6월, 444년 4월에 왜인의 침입을 받았으며, 444년의 침입 때에는 수도 금성(경주시)을 열흘 남짓 포위당했다. 식량이 다 떨어져 철수하려던 왜군에 대해,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듣지 않고 추격하여 수천 기의 장병의 대부분을 잃었다.[8]
재위 42년 만인 458년 8월에 사망했다.
3. 마립간 호칭
김대문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눌지마립간기 및 『삼국유사』 기이·제2 남해왕조에서 "마립"은 궐(그루터기)의 방언으로 좌석을 가리키는 것이며, 왕을 중심으로 신하가 둘러앉았기 때문에 "마립간"이라고 명명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눌지왕은 최초로 마립간 호칭을 사용했다. 마립간이라는 표현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길 “마립간이란 방언으로 말뚝을 이른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는데 관위에 따라 배치했다. 즉 임금의 말뚝을 위주로 신하의 말뚝들을 그 아래 벌였으니 왕호를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마립"을 수장(간)으로 보는 설이나 신라인의 인명 존칭 어미로 보는 설, 막리지를 기원으로 하는 설 등이 있다.
4. 외교 관계
내물 이사금이 392년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는데, 실성은 이에 한을 품고 내물의 둘째 아들 복호와 셋째 아들 미사흔을 각각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냈다. 그 뒤 고구려 사람을 시켜 눌지를 살해하려 했으나 오히려 눌지가 실성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418년 박제상을 시켜 복호와 미사흔을 돌아오게 했다.[8]
432년 봄에 기근이 발생했다. 433년 미사흔이 죽자 임금이 서불한에 추증했다.
4. 1. 고구려와의 관계
내물 이사금은 392년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는데, 실성은 이에 한을 품고 내물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418년 박제상을 시켜 복호를 돌아오게 했다.[8]424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433년 백제와 화친을 맺고(나제동맹) 455년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자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하는 등 나제동맹을 통해 고구려에 대항했다.[8]
450년 고구려 장수가 실직에서 사냥하던 중 하슬라성주 삼직이 그를 죽였다. 장수왕이 군사를 일으켰으나, 마립간이 사죄하여 물러났다. 454년 고구려가 다시 침공하기도 했다.[8]
눌지 마립간은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졌던 왕제가 즉위 이듬해인 418년에 귀국한 후, 점차 고구려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433년 이래로 백제의 비유왕과 사신, 공물을 주고받으며 동맹(나제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했다.[8]
450년 7월, 고구려의 변방 수장이 실직(강원도삼척시) 부근에서 사냥하던 중, 하슬라(강원도강릉시)의 성주 삼직에게 살해당해 고구려와의 긴장이 높아졌다. 고구려 장수왕이 신라 북서부 국경에 군사를 파견했지만, 신라의 사죄로 일단 퇴각했다. 이후 454년 8월에 고구려가 신라 북부에 침입했고, 455년 10월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했을 때 눌지 마립간이 백제에 구원병을 보냈다.[8]
4. 2. 백제와의 관계
433년부터 백제의 비유왕은 자주 사신과 공물을 보내왔고, 신라 역시 백제에 답례를 보내 양국은 동맹(나제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는 자세를 강화해갔다.[8] 455년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했을 때, 눌지 마립간은 백제에 구원병을 파견했다.[8]4. 3. 왜와의 관계
431년 음력 4월 왜가 동쪽을 침범하고 명활성을 둘러쌌으나 소득 없이 물러났다.[8] 440년 왜가 두 차례에 걸쳐 남쪽과 동쪽 변경을 침입, 백성들을 납치했다.[8] 444년 음력 4월에는 왜가 보다 대규모로 쳐 와, 금성을 열흘간 에워쌌으나 군량이 떨어져 도망쳤다.[8] 눌지 마립간이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추격해 독산 동쪽에서 싸웠으나, 신라군 장병 절반이 넘게 죽었다.[8] 눌지 마립간은 패해 말을 버리고 산 위에 올라, 적들이 여러 겹으로 에워싸는데, 안개가 짙게 끼어 간신히 왜군의 눈으로부터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8]이처럼 눌지 마립간 제위 기간 동안 왜와의 교전이 자주 발생했다. 431년, 440년, 444년에 왜인의 침입을 받았으며, 특히 444년의 침입 때에는 수도 금성(경주시)을 열흘 남짓 포위당했다.[8] 식량이 다 떨어져 철수하려던 왜군에 대해,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듣지 않고 추격하여 수천 기의 장병의 대부분을 잃었다.[8]
5. 가계
관계 | 이름 |
---|---|
부왕 | 내물 마립간 (? ~402, 재위: 356~402) |
모후 | 보반부인 김씨 |
왕후 | 아로부인 김씨 (실성 마립간의 딸) |
아들 | 자비 마립간 (? ~479, 재위: 458~479) |
딸 | 조생부인 |
사위 | 김습보 (동생 복호의 아들) |
후궁 | 치술공주 김씨 |
딸 | 황아공주 |
조부 | 김말구 (미추 이사금의 이복 형제) |
조모 | 헌례부인 김씨 |
손자 | 지증 마립간 (437~514) |
손녀 | 선혜부인 김씨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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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三國史記(Samguk sagi) 百濟本紀 毗有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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