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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물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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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물 마립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의 17대 왕이다. 미추 이사금의 조카로, 356년 흘해 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와 일본에 종속되기도 했으며, 전진에 조공을 바치며 보호를 구하기도 했다. 재위 기간 중 국호를 사로에서 신라로 고쳤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402년에 사망했으며, 능은 경주 내물왕릉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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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물 마립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이사금, 마립간
재위 기간356년 - 402년
즉위 년도356년
퇴위 년도402년
국호신라
개인 정보
김내물(金奈勿), 나물(那勿), 나밀(那密)
출생 정보미상
사망 정보402년
사망 장소신라
능묘내물왕릉
가족 관계
부왕각간 김말구(金末仇)
모후휴례부인(休禮夫人)
왕후보반부인(保反夫人)
통치
이전 통치자흘해 이사금
다음 통치자실성 마립간
기타
신라 역대 국왕제17대 신라 마립간
경주 내물왕릉
경주 내물왕릉

2. 생애

내물 마립간에 대한 기록은 주로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다른 이름은 '''나밀'''(尼師今)이며, 미추 이사금의 조카이다. 왕비는 미추 이사금의 딸 보반부인이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내물 마립간'''[4]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미추 이사금의 동생 또는 조카라는 설이 함께 전해진다.

356년 4월, 선대 왕인 흘해 이사금이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자 내물 마립간이 왕위를 이었다. 그의 즉위 이후 신덕왕 대까지 김씨가 신라 왕위를 독점적으로 계승하게 된다.

내물 마립간의 치세는 주변 강대국과의 복잡한 외교 관계 속에서 신라의 생존과 발전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초기에는 고구려에 복속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5], 382년에는 전진에 독자적으로 사신 위두를 파견하여 조공하고 국호를 '사로'에서 '신라'로 변경했음을 알리는 등[6][7] 자주적인 외교를 시도했다.

와는 지속적인 충돌을 겪었다. 364년에는 왜의 침입을 토함산 일대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격퇴하였고, 393년에는 수도 금성(경주시)을 포위한 왜군을 독산(경상북도 경주시 부근)에서 크게 물리쳤다. 그러나 391년에는 왜의 침공으로 어려움을 겪고 왕자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기도 했으며[8], 399년에는 대규모 침입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백제와는 366년368년에 사신을 교환하며 우호 관계를 맺었으나(나제동맹의 초기 형태), 373년 백제 영토에서 투항해 온 이들의 반환을 거부하며 갈등을 빚기도 했다.

고구려와는 392년 왕족인 실성을 인질로 보내는 등 복속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399년 왜의 대규모 침공으로 수도가 위협받자 고구려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400년 고구려군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는 고구려의 강한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재위 47년 만인 402년에 세상을 떠났으며[13], 능은 첨성대 서남쪽, 현재의 경주 내물왕릉(사적 제188호)으로 비정된다.

2. 1. 출신

성은 씨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도 갈문왕의 자손으로, 아버지는 제13대 미추 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김말구(金末仇)이고,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休禮夫人 金氏)이다. 왕후는 미추 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이다. 『삼국사기주석에는 다른 이름으로 '''나밀'''(尼師今)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4]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그가 구도 갈문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전하며, 왕력편에는 '''내물 마립간'''[4]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유사』는 내물 마립간이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라는 설과 조카라는 설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선대 왕인 흘해 이사금356년 4월에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자, 내물 마립간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즉위는 신라 왕위 계승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후 제53대 신덕왕 (재위: 912년 - 917년) 시대까지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계승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2. 2. 즉위 초기

356년, 흘해 이사금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미추 이사금의 사위인 내물이 왕위에 올랐다. 내물 마립간은 즉위 이듬해(357년)에는 과부와 고아 등을 돌보는 등 민생 안정에 힘썼으며, 그 다음 해(358년)에는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대외 관계에서는 주변국들과의 교류 및 충돌이 시작되었다. 364년 4월, 가 침입해 왔으나, 토함산 기슭에 풀 인형 수천 개를 병사로 위장시키고 용사 1,000명을 부현(경주시 남동부 추정) 동쪽에 매복시켜 기습 공격으로 격퇴하였다.

백제와는 초기 우호 관계를 구축했다. 366년과 368년에는 백제 근초고왕과 사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였는데, 이는 이후 나제동맹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373년, 백제의 독산성(경기도 안성시 추정) 성주가 백성 300명을 이끌고 투항해 오자, 근초고왕이 반환을 요구하며 항의했다. 내물 마립간은 "백성은 원하는 곳에 살 따름이다. 왕께서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나를 책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답하며 거절하였다.

중국 왕조와의 교류도 시작하여, 377년과 381년에는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태평어람에 인용된 진서 기록에 따르면, 382년(건원 18년) 신라 국왕 누한(樓寒, 내물 마립간으로 추정)이 위두(衛頭)를 사신으로 보내 전진 황제 부견에게 조공하였다고 한다. 이때 부견이 '해동(海東)의 일이 예전과 다르다'고 묻자, 위두는 '중국처럼 시대가 변하여 이름(국호)을 바꾼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한 이 기록에는 신라가 백제 동쪽에 있고, 미인이 많으며 머리카락 길이가 장여(약 3m)에 달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382년에는 고구려를 통하지 않고 위두를 직접 전진에 파견하여 독자적인 조공 외교를 시도했다[6]. 이 때 국호를 '사로'에서 '신라'로 변경했음을 알렸다고도 한다[7].

한편, 고구려와의 관계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따르면 391년신묘년, 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공격하고 복속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해 신라는 에 왕자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는데[8], 이는 당시 신라가 왜의 압박 하에 있었음을 시사한다[5].

하지만 392년임진년 정월, 고구려의 사신이 오자 강성한 고구려를 의식하여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고 다시 복속하였다. 신라의 이러한 외교적 전환은 의 반발을 사, 393년계사년 5월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수도 금성(경주시)을 포위했다. 신라는 농성 끝에 왜군이 물러가려 하자 기병 200명과 보병 1,000명으로 독산(경상북도 경주시 부근 추정)에서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399년기해년, 가 다시 대규모로 침입하여 성들을 함락시키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400년경자년, 왜군이 금성까지 진격했으나 광개토대왕이 보낸 고구려 구원군이 도착하자 가야 지역으로 물러났다.

2. 3.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의 위기

고구려백제와의 경쟁에서 밀려 황해도 지역의 주도권을 잃었으나, 광개토대왕 즉위 이후 세력을 회복하여 다시 남진 정책을 추진했다. 백제는 고구려의 압박에 맞서 신라, , 가야와 연합하려 했지만, 신라는 낙동강 유역을 두고 가야와 경쟁하고 있었고 오히려 백제의 독산성을 차지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물 마립간은 고구려와의 관계를 중시하여, 392년에는 왕족인 실성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기도 했다.[10]

광개토대왕릉비 기록에 따르면 391년 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공격하고 복속시켰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이때 신라가 왕자 미사흔을 왜에 인질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8] 그러나 신라는 다음 해인 392년 고구려에 실성을 인질로 보내며 다시 고구려에 복속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왜는 393년 다시 신라를 침공하여 수도 금성(경주시)을 포위했지만, 신라군은 왜군이 물러날 때 기병 200명과 보병 1000명을 동원하여 독산(경상북도 경주시 부근)에서 크게 격파했다.

396년 광개토대왕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58개의 성을 빼앗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아신왕은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해 신라와 경쟁 관계에 있던 가야를 부추겨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11] 거듭된 의 침입과 천재지변으로 국력이 약해진 신라는 399년 왜의 대규모 침공을 받아 국경 지역이 유린당하고 많은 백성이 잡혀가는 등 큰 위기에 처했다. 신라는 남천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고, 수도 금성까지 포위당했다.

이에 내물 마립간은 평양에 있던 광개토대왕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며 스스로 고구려의 보호를 받는 신하(노객)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400년 광개토대왕은 5만 명의 대규모 군대를 보내 신라를 구원했다. 고구려군은 금성에 주둔하던 왜군을 격퇴하고, 도망치는 왜군을 추격하여 임나가야 지역까지 진출하여 왜와 가야 세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10][12]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는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고구려는 신라 영토 내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정치적 간섭을 했고, 내물 마립간은 직접 광개토대왕을 찾아가 신하로서의 예를 표해야 했다. 이로써 신라는 고구려와 대등한 관계를 맺으려던 초기 외교 노선에서 벗어나 고구려에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10]

2. 4. 죽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내물 마립간이 402년 5월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재위 47년인 402년 2월에 훙거(薨去)했다고 전한다.[13]

사망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401년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온 실성이 내물 마립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실성 마립간이다.

내물 마립간의 능은 첨성대 서남쪽에 조성되었다고 전해지며,[13] 현재 경주시 교동에 위치한 대한민국 사적 제188호 경주 내물왕릉이 내물 마립간의 능으로 비정되고 있다.

3. 대외 관계

내물 마립간 시기 신라는 주변의 강대국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모색했다. 초기에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이후에는 일본에도 왕자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는 등[8] 여러 세력의 압박을 받았다. 동시에 중국의 전진과 독자적인 조공 관계를 맺으며 외교적 활로를 찾으려 노력하기도 했다.[6][21] 이 시기 국호를 "사로"에서 "신라"로 변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백제와는 366년368년 사신을 교환하며 초기에는 우호적인 관계(나제동맹)를 유지했으나,[14][15] 373년 독산성 주민 투항 사건[16] 등으로 점차 긴장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일본()과는 지속적인 충돌을 겪었다. 364년에는 기지를 발휘하여 왜의 침입을 격퇴했으며,[19] 393년에도 수도 금성을 포위했던 왜군을 물리쳤다.[20] 그러나 391년에는 왜의 압력에 굴복하여 왕자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기도 했다.[8]

한편, 392년에는 강성해진 고구려의 요구에 따라 왕족 실성을 인질로 보내며 다시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10][17] 399년에는 백제, 가야, 연합 세력의 대규모 침공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았고, 결국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11][10][12] 400년 고구려의 도움으로 왜군을 격퇴하고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적·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10][12][18] 이러한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도 신라는 전진과의 직접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려는 노력을 보였다.[6][21]

3. 1. 백제

366년 음력 3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동맹을 맺었다.[14] 368년 봄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명마 두 필을 보내왔다.[15] 이는 초기 신라와 백제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나제동맹)

373년에는 백제의 독산성(경기도 안성시로 추정) 성주가 주민 300여 명을 이끌고 신라로 투항해 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내물 마립간은 이들을 받아들여 진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에 근초고왕이 국서를 보내 항의하며 이들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내물 마립간은 "백성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살 따름이다. 왕께서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나를 책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취지로 답하며 거절하였다.[16] 이는 당시 신라가 백제의 요구에 단호히 대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3. 2. 고구려

고구려대방군이 위치했던 지역의 주도권을 두고 백제와 경쟁하였으나,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내부를 안정시킨 고구려는 다시 백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백제는 고구려의 압박에 맞서 신라, , 가야 등과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신라는 낙동강 유역을 두고 가야와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고구려에 의지하는 외교 노선을 선택했다.

392년, 신라는 강성해진 고구려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왕족인 실성(이찬 대서지의 아들)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10][17] 이는 신라가 점차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99년,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의 연합 세력이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11] 잇단 천재지변과 왜의 침략으로 국력이 소진된 신라는 이 공격으로 큰 위기에 처했으며, 국경의 성들이 함락되고 백성들이 잡혀가는 피해를 입었다. 다급해진 내물 마립간은 당시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광개토대왕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며, 스스로 고구려의 보호 아래에 들어갈 것(노객, 奴客이 될 것)을 청했다.[10][12]

이에 400년, 광개토대왕은 5만 명의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했다. 고구려군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까지 진격했던 왜군을 격퇴하고, 남쪽으로 추격하여 가야 지역까지 진출하여 왜와 백제, 가야 연합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10][12] 이 사건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기록되어 있어 당시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과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이 전쟁을 계기로 신라는 왜의 위협에서는 벗어났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적·정치적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고구려는 신라 영토 내에 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했으며,[18] 내물 마립간은 직접 고구려를 방문하여 광개토대왕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표해야 했다.[10] 이는 신라가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자주성을 상당 부분 상실했음을 의미했다.

401년, 주변국의 계속된 침공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고 건강이 악화된 내물 마립간을 대신하여 고구려는 볼모로 와 있던 실성을 신라로 돌려보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18] 이는 신라의 왕위 계승 문제에까지 고구려의 의중이 반영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고구려를 통해 보다 발전된 문물과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국가 발전의 기반을 다져나갔다.[18]

3. 3. 왜(倭)

364년 음력 4월, 가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침공하였다.[19] 이에 신라는 토함산 기슭에 수천 개의 허수아비(또는 풀 인형)를 세워 병사처럼 위장하고, 용맹한 군사 1천 명을 경주시 남동쪽으로 추정되는 부현(鳧峴) 동쪽 들판에 매복시켰다. 왜군은 토함산에 신라군이 많은 것으로 오인하고 곧장 들판으로 향했다가 매복한 신라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19]

광개토대왕릉비 기록에 따르면 391년, 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백제, 가야를 공격하여 복속시켰다고 전해진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같은 해 신라가 왜에 대한 신종의 표시로 제3왕자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8] 이는 당시 신라가 왜의 압박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92년 신라가 고구려에 왕족 실성을 인질로 보내 다시 고구려에 복속하자, 왜는 이를 문제 삼아 393년 음력 5월 다시 신라를 침공하여 수도 금성을 포위했다. 닷새 동안 포위가 계속되자 신라군은 출전하기를 청했으나, 내물 마립간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농성을 택했다. 왜군의 식량이 떨어져 퇴각하기 시작하자, 기병 200기로 퇴로를 차단하고 보병 1천 명을 보내 경상북도 경주시 부근의 독산(獨山)에서 협공하여 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20]

399년에도 왜의 침공이 있었다. 왜군이 신라 국경을 넘어 성들을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노예처럼 끌고 가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듬해인 400년 왜군이 금성을 다시 포위했지만, 광개토대왕이 보낸 고구려 구원군이 도착하자 왜군은 임나 가야 지역으로 물러나면서 위기를 넘겼다.

3. 4. 전진(前秦)

377년정축,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6] 이후 381년신유, 위두(衛頭)를 전진에 사신으로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21] 이는 고구려를 통하지 않고 신라가 독자적으로 중국 왕조와 교류를 시도한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이 파견에 대한 기록은 진서와 이를 인용한 태평어람 등에 남아 있다. 태평어람 제781권 사이부(四夷部) 동이(東夷) 신라 조항에는 진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견 건원(建元) 18년(382년)에 신라 국왕 누한(樓寒, 내물 마립간을 지칭)이 위두를 보내 미녀를 바쳤다. 신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으며, 미인이 많고 머리카락이 길다."

또한, "부견의 때에, 신라 국왕 누한이 위두를 보내 조공하였다. 부견이 '경이 말하는 해동(海東)의 일이 예전 같지 않음은 어찌된 까닭인가?'라고 묻자, 위두는 '중국과 같이 시대가 변혁하고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 사건을 381년의 일로 기록하며, 전진의 황제 부견(재위 357년~385년)이 위두에게 "해동의 사정을 말하는데 언어가 예전과 다르니 어찌 된 일인가?"라고 묻자, 위두가 "이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바뀌며 말과 이름이 변하니 오늘의 말이 어찌 옛과 같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21]

태평어람이 인용한 진서 기록에는 이때 신라가 국호를 "사로"에서 "신라"로 고친 것을 전진에 보고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7]

4. 가계

성은 씨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그의 가계에 대한 기록이 일부 다르게 나타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아버지는 미추 이사금의 동생인 김말구 각간이며,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이다. 왕후는 미추 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 김씨이다.[4] 『삼국사기』의 주석에는 다른 이름으로 '''나밀'''(尼師今)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선대 왕인 흘해 이사금356년 4월 아들 없이 사망하자 왕위를 이었다. 내물 마립간 이후 신덕왕 (재위: 912년 - 917년) 시대까지 신라의 왕위는 김씨가 독점적으로 계승하게 되었다.

4. 1. 가계도



삼국사기』의 주석에 따르면, 다른 이름으로 '''나밀'''(尼師今)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제13대 미추 이사금의 조카(아버지는 구도 갈문왕의 아들인 김말구 각간,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며, 왕비는 미추 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삼국유사』 왕력에는 '''내물 마립간'''[4]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미추 이사금의 동생 또는 일설에는 조카로 기록되어 있다.

5. 관련 문화재

참조

[1] 웹사이트 신라내물왕릉 新羅奈勿王陵 http://100.nate.com/[...]
[2] 문서 Nihon Shoki (日本書紀) 기록
[3] 뉴스 신라 : 17대 내물 마립간, 나도 시조 https://www.su-wan.c[...] 2020-01-23
[4] 문서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기록
[5] 문서 諸番職貢圖巻 기록
[6] 문서 태평어람 및 삼국사기 기록 비교
[7] 문서 奈勿 발음 변화
[8] 문서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기록 비교 (미사흔)
[9]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10] 서적 신라사대계 경상북도청 2016-11-01
[11] 웹인용 생존 위해 왜를 이용했던 가야 소국들 https://n.news.naver[...] 2024-04-17
[12] 문서 광개토대왕릉비
[13] 서적 삼국사기
[14] 서적 삼국사기
[15] 서적 삼국사기
[16] 서적 삼국사기
[17] 서적 삼국사기
[18]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19] 서적 삼국사기
[20] 서적 삼국사기
[21] 서적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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