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평의 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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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평의 입락은 남송이 몽골의 침략에 맞서 북벌을 시도하고, 결국 실패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종이 친정을 시작하며 북벌을 추진했으나, 몽골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국력 소모로 인해 실패했다. 1235년, 몽골은 사천, 경호, 강회 세 방면에서 남송을 침략하며 장기적인 전쟁이 시작되었고, 남송은 방어 전략을 펼쳤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남송은 멸망하고 사회,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몽골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외세 의존, 민생 안정, 국방력 강화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송나라가 몽골과 처음 접촉한 것은 1214년(가정 7년)이었으나, 초기에는 사절 왕래만 있었을 뿐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23][1] 칭기즈 칸이 서방 원정을 마치고 금나라와 서하 공격을 재개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몽골군의 일부가 송나라 국경을 침범하면서 양국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227년(보경 3년) 봄, 송나라 서북 변경을 침입한 몽골군은 사천 일대를 약탈하며 무력 시위를 벌였으나, 칭기즈 칸이 사망하자 일단 물러났다.[24][2]
남송이 몽골과 처음 접촉한 것은 1214년(가정 7년)이었으나, 사절의 왕래만 있었을 뿐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23] 칭기즈 칸이 서방 원정을 마치고 금나라와 서하 공격을 재개하면서, 몽골군의 일부가 송나라 국경을 침범하며 양국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227년(보경 3년) 봄, 송나라 서북 변경을 침입한 몽골군은 사천 일대를 약탈하며 무력 시위를 벌였으나, 칭기즈 칸이 사망하자 일단 철수했다.[24] 이후 몽골은 서하를 멸망시키고 금나라의 수도 개봉을 위협하게 되었지만, 금나라 군대가 집결한 동관이 큰 장애물이었다. 이에 칭기즈 칸은 사망 전, 금나라와 적대적인 송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면 승낙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25]
[1]
서적
建炎以来朝野雑記
2. 배경
몽골은 서하를 멸망시킨 후 금나라의 수도 개봉을 위협할 수 있게 되었지만, 금나라 군대가 집결한 동관이 큰 장애물이었다. 이에 칭기즈 칸은 임종 직전, 금나라와 적대적인 송나라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면 들어줄 것이라는 유조를 남겼다.[25][3]
새로운 대칸 오고타이 칸은 1230년(소정 3년)부터 금나라 공격을 재개했다. 오고타이는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중군은 직접 지휘하고 좌익군은 산동 방면으로, 우익군은 섬서 방면으로 진격했다. 우익군을 지휘한 톨루이는 칭기즈 칸의 유조에 따라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길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1231년(소정 4년) 7월, 몽골 사신이 면주(면주)에서 송나라 관리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6][27][4][5] 당시 사천제치사는 몽골의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해 몽골군에게 군량과 길 안내 등 편의를 제공했다. 송나라의 도움으로 한수를 건넌 몽골군은 등주에 도달했고, 이듬해 삼봉산 전투에서 금나라 주력군을 격파한 뒤 개봉을 포위했다.[28][6]
1233년(소정 6년) 6월, 몽골은 왕즙(왕집)을 양양(상양)에 파견하여 경호제치사 사숭지와 금나라 협공을 위한 맹약을 맺고, 과거 금나라에 바치던 세공을 몽골에 바칠 것을 논의했다.[29][7] 사숭지의 보고를 받은 송나라 조정에서는 과거 북송과 금나라가 요나라를 협공했던 해상의 맹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오랜 숙적인 금나라에 대한 복수를 위해 몽골과 맹약을 맺기로 결정했다.[30][31][8][9] 같은 해 8월, 금나라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순망치한의 논리를 내세우며 몽골에 맞서 동맹을 맺자고 애원했지만, 이미 방침을 정한 송나라는 이를 거절했다.[32][10] 10월, 강릉부도통 맹공이 이끄는 송나라 군사 2만 명이 북상하여, 금 애종이 피신해 있던 채주(채주)를 몽골군과 함께 포위했다.[33][11]
1234년(단평 원년) 정월, 채주가 함락되고 애종이 자살하면서 금나라는 멸망했다. 맹공은 금 애종의 유골을 임안으로 가져와 태묘에 바치며 국치를 씻었다.[34][12] 금나라 멸망 후, 과거 북송의 근거지였던 하남의 영유권 문제가 부상했다. 3월, 이종은 태상시 관리를 낙양에 보내 북송 황릉을 참배하게 했다. 이때 몽골군이 하남과 섬서에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에 참배를 망설이기도 했으나, 맹공의 호위 덕분에 10일 만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35][36][13][14]
이 무렵 실권자 사미원이 사망하자 친정을 시작한 이종은 승상 정청지와 함께 정국을 쇄신하고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하남 수복을 위한 북벌을 추진했다. 반면 사숭지와 교행간 등 일부 대신들은 기근으로 백성이 지쳤고, 하남을 점령해도 방어와 보급이 어렵다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37][15] 하지만 이종은 황하를 방어선 삼고 동관에 의지하면 개봉, 낙양, 남경 응천부(과거 송의 수도)의 삼경(三京)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 회동제치사 조규의 지지를 받아 출병을 결정했다. 6월 12일, 노주 지주 전자재가 회서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북벌 선봉대로 합비를 출발했고, 조규가 지휘하는 회동 병력 5만 명도 사주와 숙주를 거쳐 하남으로 진입했다.
회수를 건너 북상한 전자재의 선봉대는 별다른 전투 없이 7월 5일 개봉에 입성했다. 당시 개봉에는 몽골에 항복했던 옛 금나라 원수 최립이 있었으나, 송나라 군대가 온다는 소식에 성 주민들이 최립을 죽이고 항복했다. 그러나 송나라 군대가 마주한 개봉은 청명상하도에 그려진 번화한 도시가 아니었다. 한때 100만 명이 넘던 인구는 수비군 600여 명과 주민 1,000여 명만 남은 폐허였고, 대상국사와 옛 궁궐 터만 남아있었다. 오랜 전란으로 하남 일대는 예상보다 훨씬 황폐해져 있었다.[38][16] 7월 20일, 조규의 군대가 개봉에 도착했고, 병사들에게 5일치 식량만 지급하고 낙양 탈환에 나섰다. 7월 28일, 낙양은 저항 없이 점령했지만, 곧 식량이 바닥나 병사들은 쑥과 밀가루로 연명하고 군마까지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몽골 복병이 낙양을 기습하자 고립된 송나라 군대는 궤멸하여 패주했고, 도중에 황하 제방까지 무너져 전체 병력의 80~90%를 잃는 참담한 피해를 입고 강남으로 귀환했다.[39][40][17][18]
북벌군이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오자 조규와 전자재 등 장수들은 문책을 받아 관직이 깎이거나 파면되었다.[41][19] 12월, 몽골은 왕즙(왕집)을 다시 임안에 보내 송나라가 맹약을 어겼다고 질책했다. 송나라는 답례사를 보내 삼경 회복 시도의 경위를 설명하며 새로운 화의를 모색했으나, 몽골은 송나라의 항복을 요구하며 교섭은 결렬되었다.[42][43][20][21]
1235년(단평 2년) 6월, 몽골군은 사천, 경호, 강회 세 방면에서 송나라를 침공하며, 이로써 두 나라는 40년에 걸친 긴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44][22]
3. 전개
몽골의 새로운 대칸 오고타이 칸은 1230년(소정 3년)부터 금나라 공격을 재개했다. 오고타이는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중군은 직접 지휘하고 좌익군은 산동 방면으로, 우익군은 섬서 방면으로 진격했다. 우익군을 지휘한 톨루이는 칭기즈 칸의 유언에 따라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길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1231년(소정 4년) 7월, 몽골 사신이 면주에서 송나라 관리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6][27] 이에 사천제치사는 몽골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몽골군에게 군량과 길 안내 등 편의를 제공했다. 송나라의 도움으로 한수를 건넌 몽골군은 등주에 도달했고, 이듬해 삼봉산 전투에서 금나라 주력군을 격파한 뒤 개봉을 포위했다.[28]
1233년(소정 6년) 6월, 몽골은 금나라 협공을 위한 동맹 체결과 기존에 금나라에 보내던 세공을 몽골에 바칠 것을 논의하기 위해 왕즙을 양양에 파견했다.[29] 보고를 받은 송나라 조정에서는 과거 해상의 맹의 실패를 교훈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오랜 숙적인 금나라에 대한 복수를 위해 몽골과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다.[30][31] 같은 해 8월, 금나라도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순망치한의 논리를 내세우며 몽골에 맞서 동맹을 맺자고 호소했으나, 이미 방침을 정한 송나라는 이를 거절했다.[32] 10월, 강릉부도통 맹공이 이끄는 송나라군 2만 명이 북상하여 금 애종이 피신해 있던 채주를 몽골군과 함께 포위했다.[33]
1234년(단평 원년) 정월, 채주가 함락되고 금 애종이 자살하면서 금나라는 멸망했다. 맹공은 금 애종의 유골을 수도 임안으로 가져와 태묘에 바치며 정강의 변의 국치를 설욕했다.[34] 금나라 멸망 후, 과거 송나라의 근거지였던 하남 지역의 영유권 문제가 대두되었다. 3월, 이종은 태상시 관리를 낙양에 보내 북송 시대 황릉을 참배하게 했다. 이때 몽골군이 하남과 섬서에 집결했다는 첩보에 참배를 망설였으나, 맹공의 호위 아래 10일 만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35][36] 이 무렵 실권자 사미원이 사망하자 친정을 시작한 이종은 재상 정청지와 함께 정국을 쇄신하고, 북벌 성공을 통해 권력 기반을 다지고자 하남 출병을 추진했다. 사숭지와 교행간 등 일부 대신들은 기근으로 백성이 지쳤고, 하남을 점령해도 방어와 보급이 어렵다며 반대했다.[37] 하지만 이종은 황하를 방어선 삼고 동관에 의지하면 옛 수도인 삼경(개봉, 낙양, 남경)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 회동제치사 조규의 지지를 받아 출병을 결정했다. 6월 12일, 전자재가 회서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북벌 선봉대로 합비를 출발했고, 조규가 지휘하는 회동 병력 5만 명도 사주와 숙주를 거쳐 하남으로 진입했다.
회수를 건너 북상한 전자재의 선봉대는 전투 없이 7월 5일 개봉에 입성했다. 당시 개봉에는 금나라의 옛 서면원수였던 최립이 몽골에 항복하여 주둔하고 있었으나, 송군 접근 소식에 성 주민들이 최립을 살해하고 항복했다. 그러나 송나라 군대가 마주한 개봉은 청명상하도에 그려진 번화한 도시가 아니었다. 수비군 600여 명과 주민 1,000여 명만이 남은 폐허였고, 대상국사와 옛 궁궐 터만이 남아 있었다. 오랜 전란으로 하남 일대는 예상보다 훨씬 황폐해져 있었다.[38] 7월 20일, 조규의 군대가 개봉에 도착했고, 병사들에게 5일치 식량만 지급하고 낙양 탈환에 나섰다. 8일 만에 낙양을 저항 없이 점령했지만, 식량이 바닥나 병사들은 쑥과 밀가루로 연명하고 군마까지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곧 몽골 복병이 낙양을 기습하자 고립된 송나라 군대는 패주했고, 도중에 황하 제방까지 무너져 병력의 80~90%를 잃는 참담한 피해를 입고 강남으로 돌아왔다.[39][40]
북벌이 소득 없이 끝나자 조규와 전자재 등 장수들은 문책을 받아 관직이 깎이거나 파면되었다.[41] 12월, 몽골은 왕즙을 임안에 보내 송나라가 맹약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송나라는 답례사를 보내 삼경 회복 시도의 경위를 설명하고 새로운 화의를 모색했으나, 몽골은 송나라의 항복을 요구하며 교섭은 결렬되었다.[42][43]
1235년(단평 2년) 6월, 몽골군은 사천, 경호, 강회 세 방면에서 송나라를 침공하면서, 이후 40년에 걸친 몽송전쟁이 시작되었다.[44]
참조
[2]
서적
可斎雑稿
[3]
서적
元史
[4]
서적
宋史紀事本末
[5]
서적
元史
[6]
서적
元史
[7]
서적
四庫全書総目提要
[8]
서적
続資治通鑑
[9]
서적
続資治通鑑
[10]
서적
金史
[11]
서적
宋史紀事本末
[12]
서적
宋史
[13]
서적
宋史
[14]
서적
続資治通鑑
[15]
서적
宋史紀事本末
[16]
서적
斉東野語
[17]
서적
宋史紀事本末
[18]
서적
斉東野語
[19]
서적
宋史紀事本末
[20]
서적
続資治通鑑
[21]
서적
西山文集
[22]
서적
宋史紀事本末
[23]
서적
건염이래조야잡기
[24]
서적
가재잡고
[25]
서적
원사 (역사서)
[26]
서적
송사기사본말
[27]
서적
원사
[28]
서적
원사
[29]
서적
사고전서총목제요
[30]
서적
속자치통감
[31]
서적
속자치통감
[32]
서적
금사
[33]
서적
송사기사본말
[34]
서적
송사
[35]
서적
송사
[36]
서적
속자치통감
[37]
서적
송사기사본말
[38]
서적
제동야어
[39]
서적
송사기사본말
[40]
서적
제동야어
[41]
서적
송사기사본말
[42]
서적
속자치통감
[43]
서적
서산문집
1226-11-24
[44]
서적
송사기사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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