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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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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 무종은 당나라의 황족으로, 목종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문종 사후 환관들의 옹립으로 황위에 올랐다. 그는 이덕유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당나라의 중흥을 꾀하고 환관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며, 도교를 숭상하여 불교를 탄압하는 회창폐불을 단행했다. 말년에는 도교 단약을 복용하다 중독되어 재위 6년 만에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숙부인 선종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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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무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당 무종의 초상화, 《삼재도회》 수록
당 무종의 초상화 (삼재도회 수록)
묘호무종(武宗)
시호지도소숙효황제(至道昭肅孝皇帝)
단릉(端陵)
종교도교
개인 정보
이름이염(李炎)
다른 이름이전(李瀍)
출생일814년 7월 2일
사망일846년 4월 22일 (31세)
정치
재위 기간840년 2월 20일 ~ 846년 4월 22일
연호회창(會昌): 841년 1월 27일 ~ 847년 1월 21일
선대 황제문종
후대 황제선종
가계
왕조당나라
가문이씨
아버지목종
어머니선의황후
중국어 정보
묘호 (한자)唐武宗
묘호 (병음)Táng Wǔzōng
묘호 (로마자 표기)Tang Ujong
휘 (한자)李瀍
휘 (병음)Lǐ Chán
휘 (로마자 표기)Ri Chan
다른 휘 (한자)李炎
다른 휘 (병음)Lǐ Yán
다른 휘 (로마자 표기)Ri Yan

2. 생애

문종이 붕어하자, 환관 구사량 등의 옹립으로 황제가 되었다. 문종은 경종의 막내 아들 이성미를 황태자로 삼았으나, 구사량을 중심으로 한 신책군 파 환관들이 이瀍을 황태제로 옹립하고 이성미는 진왕으로 봉했다가 후에 살해했다.[3]

무종은 냉정하고 침착하며 명석한 결단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덕유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환관 세력을 억제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재건하고자 했다. 그러나 도사 조귀진을 신임하여 도교에 심취, "회창의 폐불"로 불리는 불교 탄압령을 내렸다. 당시 사찰은 장원을 대규모로 소유하고 면세 혜택을 받았으며, 구리 부족으로 인한 동전 부족으로 경제 혼란이 있었다. 불교 측에서 대량의 구리를 사용해 불상과 불교 용품을 제조한 것도 문제로 지적되어, 이는 순수한 경제 정책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황위를 다투던 숙부 이怡(후의 선종)가 신변 안전을 위해 불교를 이용한 것도 불교 공격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회창 6년(846년), 단약 중독으로 33세에 붕어했다. 죽기 직전 염(炎)으로 개명했다.[13]

2. 1. 즉위 전

목종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비(貴妃) 위씨(韋氏)이다. 당 경종, 당 문종의 이복 동생이었다. 어릴 적 작호는 의왕(頴王)이었다. 병약했던 이복형 문종이 병으로 앓아 눕자, 환관 구사량(仇士良)의 계략으로 경종의 막내 아들이자 원래 황태자였던 한왕 이성미(成美)를 제치고 문종에 의해 황태제(皇太弟)로 봉해졌다. 문종이 환관들과의 권력 다툼 중 독살당하자, 건왕 이진, 익왕 이승 등 두 조카를 제치고 황위를 계승하였다. 이성미는 진왕(陳王)으로 봉해진 뒤 살해되었다.[3]

이름은 이찬(李瀍)으로, 814년에 태어났다. 당시 할아버지 당 헌종 재위 시절 태자였던 당 목종의 아들 이형(李 Heng)의 아홉 번째 아들이었다.[5] 동궁(태자의 궁)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위(Wei) 비(妃)였으며, 그녀의 품계는 역사에 전해지지 않는다.[2] 821년 이형이 당 목종이 된 후, 이찬은 영왕(英王)에 봉해졌다.[6]

이찬은 당 목종 또는 이찬의 형들인 당 경종(당 목종의 장남)과 당 문종(당 목종의 차남) 재위 기간 동안의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당 문종의 개성(開成) 연간(836~840) 중 명예직인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이부상서(吏部尚書)의 직함을 수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2]

이찬은 과묵하고, 총명하며, 결단력이 있었고,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당 문종은 그와 또 다른 형제인 이롱 안왕(安王)을 다른 왕자들보다 더 각별히 대했다고 한다.[3]

당 문종은 원래 그의 아들 이영을 태자로 삼았지만, 이영이 838년에 사망한 후, 후계자를 누구로 정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당 문종이 가장 총애했던 후궁인 양비는 이롱을 추천했지만, 당 문종이 재상들에게 자문을 구했을 때, 이각이 이 제안에 반대했다. 이에 당 문종은 839년에 당 경종의 막내 아들 이성미를 진왕(陳王)으로 태자로 책봉했다.

840년 초, 당 문종이 심각한 병에 걸리자, 그는 믿음직한 환관인 유홍일(劉弘逸)과 설길릉(薛季稜)에게 재상 양사부와 이각을 궁으로 소환하여 이성미를 그들에게 위탁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결정에 관여하지 않은 실세 환관인 추사량과 어홍지(魚弘志)는 이성미를 반대했고, 이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성미가 너무 어리다는 핑계로 그를 폐위하고 이찬을 대신 태자로 세우라는 조서를 당 문종의 이름으로 위조했다. 그 후, 추와 어는 군사들을 시켜 이찬을 그의 저택에서 궁으로 호위하게 했고, 당 문종이 사망한 후, 이찬을 설득하여 양비, 이성미, 이롱에게 자결을 명하게 했다. 짧은 애도 기간을 거쳐, 이찬은 황위에 올랐다.[3]

2. 2. 치세

목종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비(貴妃) 위씨(韋氏)이다. 당 경종, 당 문종의 이복 동생이었다. 어려서 의왕(頴王)에 책봉되었는데, 병약했던 이복형 문종이 병으로 눕자 환관 구사량의 획책으로 경종의 막내 황자이자 원래 황태자였던 한왕 성미(成美)를 제치고 황태제(皇太弟)로 봉해졌다. 문종이 환관들과의 정쟁 중 독살당하자 건왕 이진, 익왕 이승 등 두 조카를 제치고 황위를 승계하였다. 성미는 진왕(陳王)으로 봉해진 뒤 살해되었다.

냉정하고 침착하며 결단력이 있었던 무종은 이덕유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환관 세력 억제와 중앙 집권 체제 재건에 힘썼다. 이덕유는 환관 세력의 배제를 외친 정귀중서(政歸中書)를 정책 기조로 내세웠고, 그의 집정 아래서 당나라는 조금씩 원기를 회복해갔다. 이를 회창중흥(會昌中興)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환관 구사량 등의 권세는 여전히 강했고, 그를 정치 무대에서 내쫓는 것은 불가능했다.

회창 원년(841년) 7월, 신라에서 와서 빈공과에 급제해 당나라의 벼슬을 맡고 있던 신라인 김운경(金雲卿)이 당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무종은 도사들의 말에 따라 장수하게 도와준다는 단약을 지나치게 남용한 나머지 중독을 일으켜 재위 6년 만에 33세로 죽었다.[4]

만년에 무종은 도교 연금술사들이 만든 불로장생약을 복용하기 시작했고, 부작용으로 기분이 거칠고 예측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845년 말에 그는 심각한 병을 앓게 되었고, 846년 초, 병을 막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이염(李炎)으로 바꿨다. 이는 오행 우주론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환관들은 무종의 삼촌 이의 광왕(廣王)이 단순하다고 판단하고 그를 무종의 후계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종의 이름으로 이의를 태자로 봉하고 (이의의 이름을 이진(李忱)으로 바꿈) 조서를 발표했다. 그 후, 무종은 불로장생약을 마신 후 사망했고, 이진은 선종(宣宗)으로 즉위했다.[13]

2. 2. 1. 외치

당 무종이 즉위할 즈음, 그의 어머니 위(韋) 비는 이미 사망했고, 그는 그녀를 황태후로 추존했다. 또한 양사부와 이각당 문종의 후계자로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대신 그는 문종 치세의 전 재상이었던 이덕유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사실상 통치의 대부분의 책임을 그에게 맡겼다.[3]

당 무종이 처리해야 했던 첫 번째 일 중 하나는 수십 년 동안 당나라를 여러 차례 지원했던 당의 옛 봉신이자 동맹이었던 회흘의 붕괴였다. 840년, 내부 권력 투쟁으로 인해 회흘은 약화되었고, 하사가스 (키르기스) 칸 아열(阿熱)이 공격하자 회흘 칸 야오뤄거 허사 (藥羅葛闔馺)가 살해되었다. 회흘 부족민들은 흩어져 여러 방향으로 도망쳤다. 와모시 왕자와 귀족 츠신(赤心), 푸구(僕固), 나자이추오(那頡啜)가 이끄는 한 주요 세력은 당나라 국경 도시인 천덕(天德, 현대의 후허하오터, 내몽골 자치구)으로 향하여 당에 복속하려 했다. 또 다른 주요 세력의 지도자인 귀족 야오뤄거 우시는 스스로 칸의 칭호를 주장했다(오계 칸). 오계 칸은 이후 당 무종의 고모인 태화공주를 붙잡아 인질로 삼았는데, 태화공주는 이전 칸(숭덕칸)과 결혼한 상태였다. 다양한 회흘 잔당들이 당나라 국경 지역을 약탈하여 당나라 백성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했다. 이덕유의 제안에 따라, 당 무종은 와모시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회흘 잔당들에게 식량을 공급했다. 오계 칸이 이후 당나라에 와모시를 반역자로 넘겨줄 것을 요구하자 당 무종은 이를 거절했다.[3]

이후, 오계 칸의 군대와 당나라의 국경 방어군은 양측이 협상을 계속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인 전투에 돌입했다.[3] 843년, 당나라 장군 유면은 그의 부관 사웅이 이끄는 오계 칸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사웅은 오계 칸의 군대를 격파하고 태화공주를 구출했다. 오계 칸은 도망쳤고, 이후 회흘 잔당들은 당나라에 사소한 골칫거리를 안겨주었을 뿐 더 이상 주요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11]

회흘의 위협이 사라진 직후 당 무종은 또 다른 종류의 위기에 직면했다. 843년, 사실상 황실 정부로부터 독립하여 자오이 절도사(昭義, 본부는 현대 장지, 산시성)를 다스렸고, 추스량과 심한 경쟁 관계에 있던 류충젠이 심각한 병에 걸렸다. 류충젠은 양자(이자 생물학적 조카) 류전에게 절도사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했고, 절차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군의 권력 구조를 구축했다. 그는 류전이 군을 승계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 그 후 류충젠이 사망하자 류전은 군을 물려받으려 했다. 이덕유는 이를 황실 정부가 자오이 군을 장악할 절호의 기회라고 믿고 류전에 대한 토벌을 주장했고, 무종은 이에 동의했다.[11]

초기에 황실 정부는 황하 북쪽에 있는 다른 세 개의 사실상 독립적인 군(당시 허훙징이 다스리던 웨이보(魏博, 본부는 현대 한단, 허베이성), 왕위안쿠이가 다스리던 청더(成德, 본부는 현대 스자좡, 허베이성), 그리고 장중우가 다스리던 루룽(盧龍, 본부는 현대 베이징)이 자오이 편을 들 가능성을 우려했다. 무종은 세 군에게 그들의 독립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그들의 협력을 확보했다. 사실상 그는 자오이의 동쪽 세 주(타이항 산맥 동쪽)를 왕위안쿠이와 허훙징에게 맡김으로써 웨이보와 청더의 군사적 협력을 얻어냈다. 왕자이, 사웅, 유면을 포함한 다른 황실 장군들은 자오이의 서쪽 두 주, 즉 수도 루저우(潞州중국어)에 집중했다. 초기에 황실군은 자오이군에 맞서 제대로 진격하지 못했고, 844년 초 허둥 절도사 (河東, 본부는 현대 타이위안, 산시성)에서 장교 양볜()의 반란으로 인해 이 작전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러나 양볜의 반란은 즉시 진압되었고, 황실군은 자오이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11] 844년 가을, 동쪽 세 주는 허훙징과 왕위안쿠이에게 항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류전은 자신의 부관 궈이(郭誼중국어)에 의해 살해당했고, 궈이는 항복했다.[4]

2. 2. 2. 회창폐불

무종은 도사 조귀진(趙歸眞)을 신임하여 도교를 몹시 신봉하였는데, 회창 5년(845년)에 전국적인 불교 타도 정책을 시작하였다. 이를 회창폐불이라고 한다.[4] 수도 장안의 사찰을 제외하고 전국의 불교 사찰은 모두 철훼되었고, 승려들은 강제로 환속되었으며, 사찰이 소유했던 장원은 국유화되고 노비들은 풀려났다.

무종이 불교를 탄압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먼저 무종 본인이 도교를 신봉했기 때문에 불교를 상대적으로 멀리한 원인이 지적된다. 또한 "사찰 하나의 규모가 황궁과도 맞먹는" 정도로 불교 세력이 비정상적으로 커진 것에 대한 정치적인 공세였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요역이 법적으로 면제되었을 뿐 아니라 불상이나 불구를 제조하기 위해 대량의 구리를 소모하던 사찰의 존재가 국가 재정에 중대한 손실을 가져왔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7] 당시 무종의 숙부로서 황위 계승을 노릴 가능성이 있었던 침(忱, 훗날의 선종)이 무종과의 정쟁에 밀리게 되자 달아나 불문에 들었는데, 이것도 무종이 폐불을 시행하게 된 한 원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842년, 무종은 황제의 칙령을 발동하여 불교 승려와 비구니 중에서 마법사와 죄수를 색출하여 속세로 돌려보냈다. 승려와 비구니는 속세로 돌아가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정부에 재산을 넘겨야 했다.[8] 종교 박해는 845년에 절정에 달하여 불교 사찰 재산을 몰수하고 4,600개의 불교 사찰과 4만 개의 사당을 파괴했으며, 26만 500명의 승려와 비구니를 사찰에서 쫓아냈다.[9]

열렬한 도교 신자였던 무종은 불교를 중국 사회에 해로운 외래 종교로 간주했다. 박해는 불교뿐만 아니라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마니교와 같은 다른 외래 종교를 향했다.[10] 중국의 토착 이념인 유교도교만이 이 격변 속에서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남았다. 무종은 중국에서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를 거의 파괴했고, 급성장하는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교회를 박해하여 중국 기독교를 회복 불가능한 쇠퇴의 길로 이끌었다.

2. 3. 죽음

무종은 냉정하고 침착하며 결단력이 있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도사들의 말에 따라 장수를 위해 단약을 지나치게 많이 복용하다가 중독을 일으켜 재위 6년 만에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무종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이름을 염(炎)으로 바꾸었다.[13]

3. 연호

연호기간
개성(開成)841년
회창(會昌)841년 ~ 846년


4. 가계

비(妃) 양씨(楊氏), 소의(昭儀) 장씨(張氏), 소의(昭儀) 조씨(趙氏)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4. 1. 조부모와 부모


  • '''조부''' : 헌종 장무황제(章武皇帝) 이순
  • '''조모''' : 의안황후(懿安皇后) 곽씨
  • '''부친''' : 목종 문혜황제(文惠皇帝) 이항
  • '''모친''' : 선의황후(宣懿皇后) 위씨

4. 2. 황후와 후궁


  • 황후 정씨(鄭氏)는 《구당서》에 기록이 없다.[14]
  • 현비 왕씨 (賢妃 王氏, ? ~ 846)
  • 덕비(德妃) 유씨(劉氏)
  • 숙비(淑妃) 왕씨(王氏)
  • 현비(賢妃) 유씨(劉氏)
  • 소의(昭儀) 오씨(吳氏)
  • 소의(昭儀) 심씨(沈氏)
  • 수의(修儀) 동씨(董氏)
  • 첩여(婕妤) 장씨(張氏)
  • 첩여(婕妤) 조씨(趙氏)
  • 재인(才人) 맹씨(孟氏)

4. 3. 황자

순서봉호이름비고
장남기왕(杞王)이준
차남익왕(益王)이현
3남연왕(兗王)이기
4남덕왕(德王)이역
5남창왕(昌王)이차


4. 4. 황녀

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별칭비고
장녀창락공주(昌樂公主)
차녀수춘공주(壽春公主)
3녀영녕공주(永寧公主)[15]
4녀연경공주(延慶公主)
5녀정락공주(靖樂公主)[16]
6녀낙온공주(樂溫公主)
7녀장녕공주(長寧公主)


5. 등장 작품

소유 영웅전에서 무종은 소유가 연기했으며, 2009년 홍콩 TVB 텔레비전 드라마 궁심계에서 묘사되었다.


  • 궁심계 (2009년, 홍콩 드라마, 미개봉, 연기: 샤오정난)

참조

[1]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db1x.sinica.e[...] 2010-05-22
[2] 서적 Old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문서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문서 Philip
[8] 문서 Reischauer
[9] 웹사이트 Buddhism http://library.eb.co[...] Encyclopædia Britannica 2009-11-26
[10] 서적 Governing China: 150-1850 https://books.google[...] Hackett Publishing 2010-09-10
[1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2] 서적 Old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13] 간행물 The Madness of Emperor Wuzong 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2004
[14] 문서
[15] 문서 영청공주(永淸公主)
[16] 문서 정락공주(靜樂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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