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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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사량은 순주 출신의 환관으로, 당 헌종, 목종, 경종, 문종, 무종 시대에 걸쳐 황실 시종과 여러 직책을 역임하며 권력을 행사했다. 헌종의 측근으로 시작하여, 경종 암살 사건에서 문종 옹립에 기여했으나 왕수징에게 견제당했다. 이후 감로의 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권력을 장악, 무종 대에 이르러 초공에 봉해졌다. 말년에는 은퇴 후 사망했으며, 사후 저택 수색으로 재산을 몰수당했다.
구사량은 후이저우(광둥)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 순종의 재위 기간 동안, 순종의 태자인 당 헌종 이순의 시종이 되었다. 헌종 즉위 후에는 황실 시종이 되었고, 평로군(웨이팡, 산둥)과 봉상(바오지, 산시) 등지의 군대에서 환관 감시관으로 복무했다.[2]
2. 생애
당나라 당선종 연간에 관료이자 한림학사였던 정훈이 지은 신도비의 비명에 따르면, 구사량은 당덕종 건중 2년(781년)에 해풍군(海豊郡, 순주) 흥녕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구상객(仇上客)은 내시성(內侍省) 내급사(內給事)를, 할아버지 구봉전(仇奉詮)은 내시성 내상시(內常侍)를 각각 역임하였다. 그의 아버지 구문성(仇文晟)은 생전에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사후 아들이 출세하면서 특진(特進)·좌감문위(左監門衛)장군에 추증되었다. 언제, 어떻게 환관이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신도비의 비명에 의하면 적어도 20대가 되기 전에는 환관이 되어 동궁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후 환관이 된 그는 황태손 이순(李淳, 훗날의 당헌종. 즉위 후 이순(李純)으로 개명)을 섬겼다.
구사량은 당순종 연간에 액정국(掖庭局) 궁교박사(宮敎博士)에 제수되어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이후 당순종이 승하하고 태자 이순이 당헌종으로 즉위하자, 구사량은 선휘공봉관(宣徽供奉官) 직함을 추가로 제수받아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헌종과 그의 아들 당 목종, 손자 당 경종의 통치 기간 동안, 구사량은 종종 황실 시종(五坊使)의 감독관으로 활동했으며,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대하고 부하들이 그들을 약탈하도록 허용했다고 한다.[2]
835년, 당나라 문종은 측근 관료인 이훈·정주와 함께 환관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환관 중 가장 강력한 왕수징을 먼저 제거하고자 했다. 이훈과 정주는 왕수징과 구사량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문종에게 구사량을 등용하여 왕수징의 권력을 분산시키고 두 환관이 서로 반목하게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 해 음력 5월 21일(6월 20일) 문종은 구사량을 좌신책군 호군중위로 임명하였다. 왕수징은 불쾌해하며, 명목상 지위는 높았으나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밀려나면서 권력을 잃게 되었다. 그 해 10월, 황궁 내 새로 지은 자운루(紫雲樓) 채하정(彩霞亭)의 현판을 곡강지(曲江池)로 가져올때, 구사량은 여러 연기자들을 이끌고 은대문(銀臺門)에서 이를 맞이하였다. 같은 달 음력 10월 9일(11월 3일), 문종은 환관 이호고(李好古)를 보내 왕수징에게 짐주를 하사하였고, 왕수징은 독살당하였다.
왕수징의 죽음은 당 문제가 이훈, 정주와 함께한 계획의 일부였다. 감로의 변을 통하여 환관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환관 세력에게 휘둘리게 되었다. 구사량은 추실량과 함께 환관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당나라 황실을 쥐락펴락 하였다.
835년 말, 수도 장안의 시장인 설원상이 재상 이사에게 불경스러운 신책군 장교를 처형한 것에 대해 사과했지만, 당시 권력을 쥔 환관 추실량에게 감히 맞서는 관리는 거의 없었다. 추실량은 장교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설원상과 잔치를 벌였다. 836년, 추실량은 신책군 병사들에게 금오군 대신 궁성을 지키도록 제안했지만, 자문관 풍정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다.[5]
추실량과 우홍지는 문종 황제를 폐위하려는 생각까지 했으나, 최심유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2]
836년 봄, 영호초의 제안으로 문종 황제는 왕야 등 처형된 관리들의 시신을 매장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추실량은 몰래 병사들을 보내 시신을 파내 위수에 던져 버렸다.[5]
추실량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며 정책을 통제했다. 그러나 유총건이 왕야를 옹호하고 추실량과 다른 환관들의 죄를 고발하는 청원을 제출한 후, 추실량과 환관들은 불안해하며 문종 황제와 재상 이사, 정담에게 통치 여지를 더 주었다. 그러나 문종 황제가 군대 지휘권을 재상에게 주려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다. 이사의 제안으로 문종 황제와 재상, 환관 간의 회의가 소집된 후에야 추실량 등은 재상에 대한 의심을 덜었다.[5]
추실량은 부방절도사 소홍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소홍은 문종 황제의 어머니 소태후의 진짜 형제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칭하며 공식 임명을 받았고, 이전 후임자가 신책군 장교들에게 주기로 한 뇌물을 이순의 보호를 받으며 거부했었다. 추실량은 소홍이 소태후의 진짜 형제가 아니라는 것을 폭로했고, 소홍은 유배되어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5]
추실량은 이사가 정책 문제에 대해 환관에게 맞섰기 때문에 원망했다. 838년, 추실량은 자객을 보내 이사를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사는 두려워하며 재상직에서 사임하겠다고 제안했고, 문종 황제는 이사를 형남절도사로 임명했다.[7]
838년, 문종 황제의 아들 이영이 사망하면서 후계 문제가 제기되었다. 문종 황제가 총애하는 양비는 이융 안왕을 지지했지만, 재상 이각의 반대로 이성미 진왕을 태자로 삼았다. 840년 봄, 문종 황제가 위독해지자 환관 유홍일과 설계릉에게 이각과 양사부를 불러 이성미를 맡기려 했다. 그러나 추실량과 우홍지는 이성미를 반대하며 이각과 양사부에게 태자를 바꿀 가능성을 논의했고, 이각의 반대에도 문종 황제의 이름으로 칙서를 발표해 이성미를 폐위하고 이찬 영왕을 태자로 삼았다. 문종 황제가 사망한 후, 추실량의 권고로 이찬은 양비, 이융, 이성미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추실량과 환관들은 문종 황제가 총애하는 환관과 음악가들을 대량으로 처형하고 유배했다. 곧 이찬은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다(무종 황제).[7]
구사량은 당나라 무종 재위 기간 동안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무종은 그에게 초공(楚公)이라는 작위를 내렸다.[2]
840년, 구사량은 당나라 제도에 따라 고위 관리의 자제를 관직에 추천할 수 있게 되자, 양아들을 황실 경비대 장교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시중(侍中) 이중민(李中敏)은 환관이 어떻게 아들을 가질 수 있냐며 반대했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구사량은 재상 이덕유와 함께 이중민을 유배 보냈다.[7]
구사량은 문종과 가까웠던 유홍이(劉弘易)와 설기릉(薛季稜)을 미워하여, 이들뿐만 아니라 양사부(楊嗣復)와 이절(李珏)까지 비난했다. 841년, 무종은 유홍이와 설기릉에게 자결을 명하고, 양사부와 이절에게도 자결을 명하려 했다. 그러나 이덕유와 다른 재상들의 간청으로 양사부와 이절은 목숨을 건졌지만, 강등되어 유배되었다.[7][8]
841년 가을, 구사량은 감군용사(觀軍容使)라는 직함을 추가로 받았다. 그러나 이덕유의 권력 장악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842년, 무종의 대사면 선포를 앞두고 신책군(神策軍)의 의복과 식량 지급을 줄이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구사량은 군인들의 시위를 언급하며 반발했다. 무종은 이에 분노하여 구사량을 꾸짖었고, 구사량은 사과했다.[7]
구사량과 유congjian은 적대적인 관계였다. 유congjian은 구사량의 범죄를 고발했고, 구사량은 유congjian이 반역을 꾀한다고 비난했다. 한번은 유congjian이 무종에게 말을 조공했으나, 무종이 거부하자 유congjian은 분노하여 말을 죽였다. 843년, 유congjian이 병에 걸리자 양자인 유진에게 조의절도사(趙義節度使)를 물려주려 했으나, 무종은 이를 거부하고 유진에게 유congjian의 관을 낙양으로 호송하라고 명령했다. 유진은 구사량과의 적대 관계를 이유로 저항했고, 무종은 유진에 대한 토벌령을 선포했다.[9]
무종은 겉으로는 구사량을 존경했지만, 실제로는 의심하고 경멸했다. 이를 안 구사량은 병을 핑계로 덜 중요한 관직을 요청했고, 무종은 동의했다. 843년 여름, 구사량은 은퇴했다. 은퇴 당시 다른 환관들에게 천자를 사치와 쾌락으로 바쁘게 하고, 학문을 멀리하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남겼다.[9]
구사량은 그해 늦게 사망했다.[2] 그러나 844년, 다른 환관들의 보고로 구사량의 저택에서 수천 세트의 갑옷이 발견되었고, 무종은 구사량의 작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했다.[9]
2. 1. 배경과 초창기 벼슬길
추시량(仇士良)은 후이저우(광둥)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 순종의 재위 기간 동안, 순종의 태자인 당 헌종 이순의 시종이 되었다. 헌종 즉위 후에는 황실 시종이 되었고, 평로군(웨이팡, 산둥)과 봉상(바오지, 산시) 등지의 군대에서 환관 감시관으로 복무했다.[2]
어느 날, 추시량은 어사 원진과 황실 사신 주둔지인 부수(敷水, 현대 웨이난, 산시)에서 주 침실 사용 권한을 두고 다투다가 원진을 구타하여 부상을 입혔다.[2][3] 이 사건 이후, 원진의 상사였던 왕보는 황실 어사와 황실 사신이 같은 장소에 도착했을 경우 먼저 도착한 사람이 우선권을 갖는다는 이전의 공식 정책에 따라 처리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헌종은 추시량을 편애하여 원진을 강등시켰다.[2]
헌종과 그의 아들 당 목종, 손자 당 경종의 통치 기간 동안, 추시량은 종종 황실 시종(五坊使)의 감독관으로 활동했으며,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대하고 부하들이 그들을 약탈하도록 허용했다고 한다.[2]
2. 1. 1. 정사의 기록
시기 | 직책 |
---|---|
806년 (원화 원년) 윤6월 | 종5품 하계(下階) 조산대부(朝散大夫), 내시성 내급사 |
806년 (원화 원년) 10월 | 내시성 내상시(內常侍) |
808년 (원화 3년) | 내외오방사(內外五坊使), 선휘공봉관(宣徽供奉官) |
810년 (원화 5년) | 토돌승최를 따라 왕승종 토벌 작전 종군, 노종사 체포 작전 참여 |
815년 (원화 10년) | 종3품 태중대부(太中大夫), 내시성 내상시, 평로군(平盧軍) 감군사(監軍使) |
816년 (원화 11년) | 회남서도(淮南西道) 행(行) 선위사(宣慰使), 오원제 토벌 작전 참여 |
820년 (원화 15년) | 종3품 운휘장군(雲麾將軍), 우감문위(右監門衛)장군, 내외오방사, 상주국(上柱國), 남안현 개국남(開國男) (식읍 300호), 정3품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
당목종 장경 연간 초 | 남안현 개국자, 남안현 개국후 (식읍 1,000호) |
822년 (장경 2년) | 봉상(鳳翔) 감군사, 남안현 개국공 (식읍 1,500호) |
당경종 보력 2년(826년) | 선휘봉공관, 남안군 개국공 (식읍 2,000호), 무창군(武昌軍) 감군사 |
당문종 대화 원년(827년) | 선휘공봉관, 내시성 내방령(內坊令), 우신책군(右神策軍) 부사(副使) |
828년 (대화 2년) | 우령군위(右領軍衛)장군·내외오방사 |
832년 (대화 6년) | 내시성 지성사(知省事) |
833년 (대화 7년) | 대영고사(大盈庫使) 겸 염방(染坊) 사무, 우비룡사(右飛龍使) |
2. 1. 2. 신도비의 비명
당나라 당선종 연간에 관료이자 한림학사였던 정훈이 지은 신도비의 비명에 따르면, 구사량은 당덕종 건중 2년(781년)에 해풍군(海豊郡, 순주) 흥녕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구상객(仇上客)은 내시성(內侍省) 내급사(內給事)를, 할아버지 구봉전(仇奉詮)은 내시성 내상시(內常侍)를 각각 역임하였다. 그의 아버지 구문성(仇文晟)은 생전에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사후 아들이 출세하면서 특진(特進)·좌감문위(左監門衛)장군에 추증되었다. 언제, 어떻게 환관이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신도비의 비명에 의하면 적어도 20대가 되기 전에는 환관이 되어 동궁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후 환관이 된 그는 황태손 이순(李淳, 훗날의 당헌종. 즉위 후 이순(李純)으로 개명)을 섬겼다.구사량은 당순종 연간에 액정국(掖庭局) 궁교박사(宮敎博士)에 제수되어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이후 당순종이 승하하고 태자 이순이 당헌종으로 즉위하자, 구사량은 선휘공봉관(宣徽供奉官) 직함을 추가로 제수받아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원화 원년(806년) 윤6월 구사량은 산계로는 종5품 하계(下階)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서임되었고, 내시직으로는 내시성 내급사로 전임되었다. 선휘공봉관 직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내시성 내상시에 제수되었고, 나머지 관직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원화 3년(808년) 구사량은 본 관직으로 내외오방사(內外五坊使)에 보직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선휘공봉관(宣徽供奉官)으로 전임되었다.
원화 5년(810년) 구사량은 환관 좌신책군(左神策軍) 호군중위(護軍中尉) 토돌승최를 따라, 절도사직 임명과 세습을 주장하며 당헌종의 번진(藩鎭) 정책에 반항하던 군벌인 성덕군(成德軍, 본부는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에 있었다) 왕승종 토벌 작전에 종군하였다. 이때 구사량은 왕승종과 비밀리에 내통하여 당나라 정부군의 군사행동을 방해하던 군벌인 소의군(昭義軍, 본부는 산서성 장치시에 있었다) 절도사 노종사(盧從史)를 토돌승최가 계략을 써서 사로잡는 데 참여하였다.
원화 10년(815년) 구사량은 산계로는 종3품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서임되었고, 본 관직으로는 내시성 내상시에 임명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평로군(平盧軍, 본부는 지금의 산동성 태안시에 있었다) 감군사(監軍使)로 보직되어 장안을 떠나게 되었다.
원화 11년(816년) 구사량은 헌종의 칙명을 받고 장안으로 복귀하여 본 관직으로 회남서도(淮南西道) 행(行) 선위사(宣慰使)에 보직되었다. 내시직으로는 종전대로 선휘공봉관 직을 유지하였다. 이때 당나라 조정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군벌인 창의군(彰義軍, 본부는 지금의 하남성 주마점시에 있었다) 오원제 토벌 작전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원화 15년(820년) 구사량은 산계로는 종3품 운휘(雲麾)장군에 서임되었고, 본 관직으로는 우감문위(右監門衛)장군으로 전임되어 내외오방사에 보직되었다. 동시에 상주국(上柱國)의 칭호를 받고 남안현(南安縣) 개국남(開國男)에 책봉되어 식읍 300호(戶)가 주어졌다. 그 해 겨울에는 정3품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으로 품계와 산계가 승진되었다.
당목종 장경 연간 초, 당목종이 오방사를 철폐하면서 구사량은 해당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이때 작위가 남안현 개국자로 승격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남안현 개국후로 승격되었고, 식읍 1,000호가 주어졌다. 선휘공봉관 등 나머지 기존의 직함들은 모두 종전대로 유지하였다.
장경 2년(822년) 구사량은 봉상(鳳翔, 본부는 지금의 산시성 바오지시에 있었다) 감군사에 제수되었다. 이와 동시에, 남안현 개국공으로 작위가 승격되었고, 식읍 1,500호가 주어졌다.
당경종 보력 2년(826년) 장안으로 복귀하여 선휘봉공관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남안군 개국공으로 작위가 승격되었고, 식읍 2,000호가 주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창군(武昌軍, 본부는 지금의 호북성 무한시에 있었다) 감군사 직에 제수되었다. 그는 재직 중에 무창군 절도사 우승유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11]
당문종 대화 원년(827년) 다시 장안으로 복귀하여 선휘공봉관이 되었다가, 내시성 내방령(內坊令, 태자궁의 궁내 사무를 관리하는 내시성 소속 관서인 내방국(內坊局)의 수장)으로 전임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우신책군(右神策軍) 부사(副使)에 제수되었다.
대화 2년(828년) 우령군위(右領軍衛)장군·내외오방사로 승진하였다.
대화 6년(832년) 정식으로 내시성 지성사(知省事)에 제수되었다.
대화 7년(833년) 대영고사(大盈庫使, 당나라 황제의 개인 보물창고 관리 담당관)로 전임되어 염방(染坊, 피복과 옷감의 염색을 담당하는 관서)의 사무도 겸무하게 되었다. 내시성 지성사 직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후에 우비룡사(右飛龍使, 황제의 마구간 관리 담당관)로 전임되었다.
2. 2. 당 문종 연간
835년, 당나라 문종은 측근 관료인 이훈·정주와 함께 환관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환관 중 가장 강력한 왕수징을 먼저 제거하고자 했다. 이훈과 정주는 왕수징과 구사량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문종에게 구사량을 등용하여 왕수징의 권력을 분산시키고 두 환관이 서로 반목하게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 해 음력 5월 21일(6월 20일) 문종은 구사량을 좌신책군 호군중위로 임명하였다. 왕수징은 불쾌해하며, 명목상 지위는 높았으나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밀려나면서 권력을 잃게 되었다. 그 해 10월, 황궁 내 새로 지은 자운루(紫雲樓) 채하정(彩霞亭)의 현판을 곡강지(曲江池)로 가져올때, 구사량은 여러 연기자들을 이끌고 은대문(銀臺門)에서 이를 맞이하였다. 같은 달 음력 10월 9일(11월 3일), 문종은 환관 이호고(李好古)를 보내 왕수징에게 짐주를 하사하였고, 왕수징은 독살당하였다.왕수징의 죽음은 당 문제가 이훈, 정주와 함께한 계획의 일부였다. 감로의 변을 통하여 환관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환관 세력에게 휘둘리게 되었다. 구사량은 추실량과 함께 환관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당나라 황실을 쥐락펴락 하였다.
2. 2. 1. 감로의 변 이전
835년, 당나라 문종은 측근 관료인 이훈·정주와 함께 강력한 환관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환관 중 가장 강력한 왕수징을 먼저 제거하고자 했다. 이훈과 정주는 왕수징과 구사량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문종에게 구사량을 등용하여 왕수징의 권력을 분산시키고 두 환관이 서로 반목하게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 해 음력 5월 21일(6월 20일) 문종은 구사량을 좌신책군 호군중위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왕수징은 불쾌해하였다. 결국 왕수징은 명목상 지위는 높았으나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밀려나면서 권력을 잃게 되었다. 그 해 10월, 황궁 내 새로 지은 자운루(紫雲樓) 채하정(彩霞亭)의 현판을 곡강지(曲江池)로 가져왔다. 이때 구사량은 여러 연기자들을 이끌고 은대문(銀臺門)에서 이를 맞이하였다. 같은 달 음력 10월 9일(11월 3일), 문종은 환관 이호고(李好古)를 보내 왕수징에게 짐주를 하사하였고, 왕수징은 그날로 독살당하였다.2. 2. 2. 감로의 변
왕수징의 죽음은 당 문제(唐文宗)가 이훈(李訓)·정주(鄭注)와 함께한 계획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왕수징이 실권을 박탈당한 것을 전후로 하여 정주는 봉상절도사로 전출되었고, 이훈은 재상이 되었다. 그들은 왕수징의 장례식을 틈타 구사량 등 환관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한 뒤, 당시 봉상절도사였던 정주의 군대를 동원하여 환관들을 학살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문종과 정주는 이훈이 이때 정주를 시기하기 시작하였고, 그 대신 자신이 정주보다 먼저 공을 차지하려고 자신의 측근들인 빈녕(邠寧, 본부는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에 있었다)절도사 곽행여(郭行餘)·하동(河東, 본부는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에 있었다)절도사 왕번(王璠)·경조부 소윤(少尹) 나립언(羅立言)·좌금오위(左金吾衛)대장군 한약(韓約)·어사중승 이효본(李孝本) 등이 지휘하는 군대를 소집하여 먼저 환관들에 대한 학살부터 감행하고, 이 학살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에는 정주까지도 죽이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835년 12월 14일,[6] 왕수징의 예정된 장례 6일 전에 한약은 당 문제에게 황제의 회의실 자진전(紫宸殿)에서 좌금오(左金吾)의 사령부 밖에 있는 석류나무에 감로(甘露)가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이는 하늘의 총애의 징표로 여겨졌다. 당 문제는 그 후 근처 함원전 (含元殿)으로 가서 이훈을 포함한 황실 관리들에게 감로를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이훈은 곧 돌아와 감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훈의 제안에 따라 당 문제는 구사량과 그의 동료인 신책군 지휘관 어홍지(魚弘志)에게 환관들을 이끌고 감로를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구사량과 어홍지가 좌금오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한약은 침착함을 잃었고, 구사량은 병사들이 모여들고 무기 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다른 환관들과 함께 즉시 함원전으로 달려가 당 문제를 붙잡았다. 나립언과 이효본 휘하의 병사들은 환관들과 싸워 다수를 죽였지만, 환관들은 당 문제를 황궁으로 호송할 수 있었다. 이 계략을 실패했음을 알고 이훈은 도망쳤다.[5]
환관들이 당 문제를 궁궐로 데려온 후, 그들은 당 문제가 자신들을 학살하려는 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를 저주하며 붙잡았다. 구사량은 신책군 장교 유태륜(劉泰倫)과 위중경(魏仲卿)에게 이훈을 수색하고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신책군 병사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많은 황실 관리와 위군 병사들을 학살했다. 결국, 이훈과 그의 공모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이 음모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구사량과 다른 환관들이 책임이 있다고 여긴 재상 왕아, 가소, 속원유도 함께 처형되었다. 구사량의 명령에 따라 정주는 풍상(鳳翔)의 환관 감시관 장중경(張仲卿)에게 살해되었다. 이 시점부터 구사량은 황실의 주도자가 되었고, 심지어 당 문제조차 환관들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5] 구사량은 명예로운 장군 직함과 특진(特進)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2]
2. 2. 3. 감로의 변 이후
835년 말, 수도 장안의 시장인 설원상이 재상 이사에게 불경스러운 신책군 장교를 처형한 것에 대해 사과했지만, 당시 권력을 쥔 환관 추실량에게 감히 맞서는 관리는 거의 없었다. 추실량은 장교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설원상과 잔치를 벌였다. 836년, 추실량은 신책군 병사들에게 금오군 대신 궁성을 지키도록 제안했지만, 자문관 풍정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다.[5]추실량과 우홍지는 문종 황제를 폐위하려는 생각까지 했다. 그들은 어사 최심유에게 곽태후의 이름으로 문종 황제가 통치하기에는 병약하다는 핑계로 폐위하는 칙서를 쓰도록 요청했지만, 최심유는 부적절하다며 거부했다. 추실량과 우홍지는 최심유를 데리고 문종 황제에게 가서 혐의를 제기했지만, 문종 황제는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추실량은 "만약 어사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왕좌에 머무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최심유는 이 사건을 비밀로 했지만, 비밀 기록을 써서 아들 최은에게 남겼다.[2]
836년 봄, 영호초의 제안으로 문종 황제는 왕야 등 처형된 관리들의 시신을 매장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추실량은 몰래 병사들을 보내 시신을 파내 위수에 던져 버렸다.[5]
추실량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며 정책을 통제했다. 그러나 유총건이 왕야를 옹호하고 추실량과 다른 환관들의 죄를 고발하는 청원을 제출한 후, 추실량과 환관들은 불안해하며 문종 황제와 재상 이사, 정담에게 통치 여지를 더 주었다. 그러나 문종 황제가 군대 지휘권을 재상에게 주려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다. 이사의 제안으로 문종 황제와 재상, 환관 간의 회의가 소집된 후에야 추실량 등은 재상에 대한 의심을 덜었다.[5]
추실량은 부방절도사 소홍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소홍은 문종 황제의 어머니 소태후의 진짜 형제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칭하며 공식 임명을 받았고, 이전 후임자가 신책군 장교들에게 주기로 한 뇌물을 이순의 보호를 받으며 거부했었다. 추실량은 소홍이 소태후의 진짜 형제가 아니라는 것을 폭로했고, 소홍은 유배되어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5]
추실량은 이사가 정책 문제에 대해 환관에게 맞섰기 때문에 원망했다. 838년, 추실량은 자객을 보내 이사를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사는 두려워하며 재상직에서 사임하겠다고 제안했고, 문종 황제는 이사를 형남절도사로 임명했다.[7]
838년, 문종 황제의 아들 이영이 사망하면서 후계 문제가 제기되었다. 문종 황제가 총애하는 양비는 이융 안왕을 지지했지만, 재상 이각의 반대로 이성미 진왕을 태자로 삼았다. 840년 봄, 문종 황제가 위독해지자 환관 유홍일과 설계릉에게 이각과 양사부를 불러 이성미를 맡기려 했다. 그러나 추실량과 우홍지는 이성미를 반대하며 이각과 양사부에게 태자를 바꿀 가능성을 논의했고, 이각의 반대에도 문종 황제의 이름으로 칙서를 발표해 이성미를 폐위하고 이찬 영왕을 태자로 삼았다. 문종 황제가 사망한 후, 추실량의 권고로 이찬은 양비, 이융, 이성미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추실량과 환관들은 문종 황제가 총애하는 환관과 음악가들을 대량으로 처형하고 유배했다. 곧 이찬은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다(무종 황제).[7]
2. 3. 당 무종 연간
구사량은 당나라 무종 재위 기간 동안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무종은 그에게 초공(楚公)이라는 작위를 내렸다.[2]840년, 구사량은 당나라 제도에 따라 고위 관리의 자제를 관직에 추천할 수 있게 되자, 양아들을 황실 경비대 장교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시중(侍中) 이중민(李中敏)은 환관이 어떻게 아들을 가질 수 있냐며 반대했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구사량은 재상 이덕유와 함께 이중민을 유배 보냈다.[7]
구사량은 문종과 가까웠던 유홍이(劉弘易)와 설기릉(薛季稜)을 미워하여, 이들뿐만 아니라 양사부(楊嗣復)와 이절(李珏)까지 비난했다. 841년, 무종은 유홍이와 설기릉에게 자결을 명하고, 양사부와 이절에게도 자결을 명하려 했다. 그러나 이덕유와 다른 재상들의 간청으로 양사부와 이절은 목숨을 건졌지만, 강등되어 유배되었다.[7][8]
841년 가을, 구사량은 감군용사(觀軍容使)라는 직함을 추가로 받았다. 그러나 이덕유의 권력 장악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842년, 무종의 대사면 선포를 앞두고 신책군(神策軍)의 의복과 식량 지급을 줄이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구사량은 군인들의 시위를 언급하며 반발했다. 무종은 이에 분노하여 구사량을 꾸짖었고, 구사량은 사과했다.[7]
구사량과 유congjian은 적대적인 관계였다. 유congjian은 구사량의 범죄를 고발했고, 구사량은 유congjian이 반역을 꾀한다고 비난했다. 한번은 유congjian이 무종에게 말을 조공했으나, 무종이 거부하자 유congjian은 분노하여 말을 죽였다. 843년, 유congjian이 병에 걸리자 양자인 유진에게 조의절도사(趙義節度使)를 물려주려 했으나, 무종은 이를 거부하고 유진에게 유congjian의 관을 낙양으로 호송하라고 명령했다. 유진은 구사량과의 적대 관계를 이유로 저항했고, 무종은 유진에 대한 토벌령을 선포했다.[9]
무종은 겉으로는 구사량을 존경했지만, 실제로는 의심하고 경멸했다. 이를 안 구사량은 병을 핑계로 덜 중요한 관직을 요청했고, 무종은 동의했다. 843년 여름, 구사량은 은퇴했다. 은퇴 당시 다른 환관들에게 천자를 사치와 쾌락으로 바쁘게 하고, 학문을 멀리하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남겼다.[9]
구사량은 그해 늦게 사망했다.[2] 그러나 844년, 다른 환관들의 보고로 구사량의 저택에서 수천 세트의 갑옷이 발견되었고, 무종은 구사량의 작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했다.[9]
2. 4. 사후
구사량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뛰어난 무신이었지만, 그의 사후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남아있지 않다. 현재 이 부분은 비어 있으며, 내용을 추가해야 한다.3. 논란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논란' 섹션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이전 답변과 동일하게 빈 섹션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추가적인 수정이나 내용 추가가 불가능하다.
4. 평가
5. 가족 관계
해당 문단은 비어 있다. 내용을 추가해 주기 바란다.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2]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3]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웹사이트
Academia Sinica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db1x.sinica.e[...]
2010-05-22
[7]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8]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9]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0]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1]
간행물
당나라 고(故) 태자소사(太子少師) 기장군 개국공(奇章郡開國公) 증(贈) 태위(太尉) 우승유(牛僧孺) 공(公) 묘지명(墓誌銘)과 서문(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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