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상 (후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도상(度尚)은 후한 시대의 관료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환관 후란의 추천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그는 엄격한 통치와 반란 진압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형주 자사, 계양 태수를 거쳐 요동 태수를 역임했다. 형주 자사 재직 중 모함으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나, 공을 인정받아 복귀했다. 요동 태수 재임 중 선비족을 격퇴했으나 166년에 사망했으며, 왕고, 유유 등과 함께 팔주로 불렸다.
도상은 수많은 도적들을 토벌하여 그 공으로 우향후에 책봉되었다.[1] 그는 왕고(王考), 유유(劉儒), 호모반(胡母班), 진주(秦周), 번향(蕃向), 왕장(王章), 장막(張邈)과 함께 팔주(八廚)라고 불렸다.
도상은 수많은 도적들을 토벌하여 그 공으로 우향후에 책봉되었다. 이후 형주자사에 임명되었으며 166년에 5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왕고, 유유, 호모반, 진주, 번향, 왕장, 장막과 함께 팔주(八廚)라고 불린다.
2. 생애
이후 요동 태수가 되었다. 몇 달 후, 선비가 침공해 오자, 도상은 선비와 싸워 격파했다. 166년(연희 9년), 50세의 나이로 재임 중 사망하였다.[1]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도상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문과 수양을 쌓지 못했고, 고향에서 추천을 받지 못했다. 환관 후란에게 발탁되어 군의 상계리가 되었고, 낭중에 임명되었다. 후에 상우 현의 현령으로 부임했다. 그는 엄격한 통치로 죄인을 적발하여 그 잘못을 분명히 했고, 관리와 백성들에게 신명으로 평가받았다. 문안 현의 현령으로 전출되자 역병이 유행하고 곡물 가격이 폭등하여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도상은 관창을 열어 식량을 풀어주고 병자를 위한 구호소를 운영했다. 이 때문에 기주자사 주무에게 높이 평가받았다.[1]
162년(연희 5년), 장사군과 영릉군의 반란군이 계양군, 창오군, 남해군, 교지군으로 진입하여 교지 자사와 창오 태수가 도망쳐 이 두 군이 함락되었다. 낙양의 조정에서 어사중승 성수가 파견되어 반란을 토벌했지만 패퇴했다. 예장군애현의 600여 명이 관군에 응모하여 싸웠지만, 상여를 받지 못하여 이반하여 장사군의 현을 불태우고, 익양현을 침공하여 현령을 살해했다. 조정에서 마목을 파견하여 형주 자사 유도를 지휘하여 반란군을 공격했지만, 역시 패배하여 마목과 유도는 도주했다. 환제가 유도를 대신할 자를 추천하도록 공경에게 명하자, 상서 주무가 도상을 추천했다. 이로 인해 도상은 우교령에서 발탁되어 형주 자사가 되었다.
2. 2. 형주자사 부임과 반란 진압
162년(연희 5년)[1], 장사군과 영릉군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계양군, 창오군, 남해군, 교지군으로 진입했다. 교지 자사와 창오 태수는 도망쳤고, 이 두 군은 함락되었다. 낙양 조정에서는 어사중승 성수를 파견해 반란을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예장군애현의 600여 명이 관군에 지원했지만, 상여를 받지 못해 이반하여 장사군의 현들을 불태우고, 익양현을 침공하여 현령을 살해했다. 조정에서는 마목을 파견하여 형주 자사 유도를 지휘하게 했으나, 이 역시 패배하여 마목과 유도는 도주했다. 환제가 공경들에게 유도를 대신할 사람을 추천하라 명하자, 상서 주무가 도상을 추천했다.
도상은 우교령에서 발탁되어 형주 자사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 부곡을 이끌고, 보상을 명시하며 소수 민족 병사를 모집했다. 진군하여 반란군을 격파하고 수만 명을 항복시켰다. 계양군에서 오랫동안 반란을 일으키던 卜陽(복양)과 潘鴻(반홍) 등은 도상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산골짜기로 도망쳤다. 도상은 수백 리를 추격하여 남해군에 들어가 반란군의 삼둔을 격파했다. 복양과 반홍의 무리는 여전히 강성했기에 도상이 공격하려 했지만, 자군(自軍)의 사기가 떨어져 전투를 견딜 상황이 아니었다. 도상은 묘책을 내어 수렵을 허가하여 병사들을 기쁘게 했다. 또한 반란군이 재물과 보물을 축적하고 있다는 정보를 흘려, 사행심에 이끌린 부대가 진격하여 반란군의 진영을 습격해 격파하도록 했다.
164년 (연희 7년), 도상은 우향후에 봉해지고 계양 태수로 전임되었다. 165년 (연희 8년), 낙양으로 소환되었다. 이때 형주의 병사 주개 등은 군역이 긴데도 보상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주개 등은 계양군의 호란 등 반란군 3000여 명과 함께 계양군을 공격하고 군현을 불태웠다. 계양 태수 임인(任胤)은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반란군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영릉군을 공격했다. 영릉 태수 진구는 군성을 굳게 지키며 항전했다. 도상은 중랑장이 되어 유주, 기주, 여양현, 오환의 병사 26000명을 이끌고 진구를 구원했다. 또한 장사 태수 항서 등과 함께 여러 군의 병사를 동원하여 반란군을 격파했다. 호란 등 3500명을 참수하고, 나머지 반란병은 창오군으로 도주했다.
도상은 다시 형주 자사가 되었다. 호란의 잔당이 창오군으로 도주하자, 도상은 자신의 실점을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창오군의 반란군이 형주로 진입했다고 조정에 보고하고, 교지 자사 장반을 낙양으로 소환하여 정위의 옥에 가두었다. 잘못이 바로잡히지 않은 채, 장반은 사령을 만나 원직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장반은 출옥을 거부하고, 실제로 있었던 일을 옥리에게 전했다. 정위가 장반의 주장을 상주하자, 환제는 도상을 낙양으로 소환하여 정위에 구금했다. 도상은 자기 변호를 하지 못하고 죄를 받았지만, 이전의 공적으로 원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2. 3. 계양태수 부임과 주개(周蓋)의 난
164년(연희 7년), 도상은 우향후에 봉해지고 계양 태수로 전임되었다.[1] 165년(연희 8년), 낙양으로 소환되었다. 이때 형주의 병사 주개 등은 군역이 긴데도 보상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주개 등은 호란 등 반란군 3000여 명과 함께 계양군을 공격하고, 군현을 불태우자 계양 태수 임인(任胤)은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반란군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영릉군으로 진격하여 공격했다. 영릉 태수 진구는 군성을 굳게 지키며 항전했다. 도상은 중랑장이 되어 유주, 기주, 준현, 오환의 병사 26000명을 이끌고 진구를 구원했다. 또한 장사 태수 항서 등과 함께 여러 군의 병사를 발동하여 반란군을 격파했다. 호란 등 3500명을 참수하고, 나머지 반란병은 창오군으로 도주했다.
2. 4. 재차 형주자사 부임과 모함
도상은 다시 형주자사로 임명되었다. 호란의 잔당이 창오군으로 도주하자, 도상은 자신의 실책을 숨기기 위해 거짓으로 창오군의 반란군이 형주로 쳐들어왔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그리고 교지자사 장반을 낙양으로 소환하여 정위의 감옥에 가두었다.[1] 장반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지만, 사형은 면하고 원래 직책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반은 출옥을 거부하고, 실제로 있었던 일을 옥리에게 알렸다. 정위가 장반의 주장을 황제에게 보고하자, 환제는 도상을 낙양으로 불러들여 정위에 구금했다. 도상은 변명하지 못하고 죄를 받았지만, 이전의 공적 덕분에 원래 직책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1]
2. 5. 요동태수 부임과 죽음
요동 태수가 된 후, 몇 달 뒤 선비가 침공해 오자 이들과 싸워 격파하였다. 166년(연희 9년)에 재임 중 5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
3. 평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