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크 스나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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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듀크 스나이더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활약한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콤프턴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1950년대 다저스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8번의 올스타 선정, 1955년 월드 시리즈 우승, 1956년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1950년대 MLB 타점 1위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960년대에는 뉴욕 메츠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1980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은퇴 후에는 해설자로 활동했고, 2011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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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크 스나이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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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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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중견수 |
타석 | 좌타 |
투구 | 우투 |
출생일 | 1926년 9월 19일 |
출생지 |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 미국 |
사망일 | 2011년 2월 27일 |
사망지 | 에스콘디도, 캘리포니아주, 미국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MLB |
데뷔일 | 1947년 4월 17일 |
데뷔 팀 | 브루클린 다저스 |
마지막 리그 | MLB |
마지막 경기일 | 1964년 10월 3일 |
마지막 팀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소속 팀 | 브루클린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47–1962) 뉴욕 메츠 (196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64) |
기록 | |
리그 | MLB |
타율 | .295 |
안타 | 2,116 |
홈런 | 407 |
타점 | 1,333 |
수상 및 업적 | |
올스타 | 8회 (1950–1956, 1963) |
월드 시리즈 우승 | 2회 (1955, 1959) |
내셔널 리그 홈런왕 | 1956년 |
내셔널 리그 타점왕 | 1955년 |
영구 결번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No. 4 |
명예의 전당 헌액 | 국립 야구 명예의 전당 및 박물관 |
헌액 유형 | 전국구 |
헌액 년도 | 1980 |
득표율 | 86.5% (11번째 투표) |
2. 어린 시절
로스앤젤레스에서 준프로 야구 선수였던 아버지 와드 스네이드와 어머니 플로렌스 존슨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듀크"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마치 왕족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1] 스나이더는 원래 오른손잡이였지만, 아버지는 오른손 투수를 상대할 때 유리하도록 그를 왼손 타자로 훈련시켰다.
듀크 스나이더는 고등학교 시절 여러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특히 미식축구에서는 강한 어깨를 가진 쿼터백이었다고 전해진다. 졸업 후 야구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1944년 콤프턴 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는 농구, 미식축구, 야구 등 여러 종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만능 스포츠 선수였다. 특히 미식축구에서는 강한 어깨를 가진 쿼터백으로 활약하며 약 64.01m까지 공을 던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야구에 전념하기로 결정했다.
3. 선수 경력
1944년 마이너 리그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나,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징병되어 미국 해군에서 복무했고 1946년 야구계로 복귀했다. 1947년 4월 17일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지만, 초기에는 메이저 리그와 마이너 리그를 오갔다.
1949년부터 주전 선수로 자리매김하며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했고, 23홈런 92타점을 기록했다. 1950년에는 31홈런 107타점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이후 총 8번의 올스타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50년대 재키 로빈슨, 로이 캄파넬라, 길 호지스 등과 함께 다저스의 강력한 타선을 이끌었으며, 팀은 여러 차례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다. 특히 1955년에는 타율 .309, 42홈런, 136타점(리그 1위)을 기록하며 팀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는 다저스 구단 역사상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이었다. 1956년에는 개인 최다인 43홈런으로 내셔널 리그 홈런왕에 올랐다.
1958년 다저스가 스나이더의 고향인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에도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 비록 나이와 새로운 구장 환경의 영향으로 이전만큼의 홈런 생산력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팀이 투수력과 기동력을 중심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59년 팀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62년 시즌을 끝으로 다저스를 떠나 뉴욕 메츠(1963년)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1964년)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고, 1964년 시즌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1973년부터 1986년까지 몬트리올 엑스포스(현 워싱턴 내셔널스)의 전속 해설자로 활동했다. 1980년에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같은 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는 그의 등번호 '''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다저스 구단 역사상 통산 최다 홈런(389), 타점(1,271), 삼진(1,123), 장타(814) 기록은 여전히 스나이더가 보유하고 있다.
2011년 2월 27일, 노쇠로 인해 캘리포니아주의 병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0][21]
3. 1. 초기 경력
콤프턴 고등학교 시절 여러 스포츠에서 뛰어난 선수였으며, 특히 미식축구에서는 쿼터백으로 약 54.86m를 던질 수 있는 강한 어깨를 가졌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야구에 전념하기로 결정, 1943년 750USD의 계약금을 받고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했다.[1]
1944년 17세의 나이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클래스 B 피에몬트 리그의 뉴포트 뉴스 다저스에서 뛰며 2루타와 홈런 부문 리그 1위를 기록했고, 같은 해 인터내셔널 리그의 몬트리올 로열스에서도 잠시 뛰었다(타석 2번).[1]
1945년 징병되어 1946년 일부 기간까지 약 18개월 동안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군에서 복무했다.[1] 제대 후 야구계로 복귀하여 1946년 시즌 대부분을 AA 텍사스 리그의 포트워스 캐츠 (텍사스 리그)에서 보냈으나 타율 .250에 그쳤다.[1] 뛰어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스나이더는 감정적으로 미숙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 1947년에는 세인트폴 세인츠 (1901-1960)에서도 뛰었다.[1]
1947년 4월 17일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하지만 그 해에는 40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쳤고 다시 마이너 리그로 내려갔다. 다음 해인 1948년에도 마이너 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했지만, 시즌 후반 다시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었다.
3. 2. 메이저 리그 경력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나, 초기에는 마이너 리그를 오갔다. 1949년부터 주전 중견수로 자리 잡았고, 재키 로빈슨, 로이 캄파넬라, 길 호지스 등과 함께 다저스 강타선의 핵심 선수였다. 1950년대 전성기를 누리며, 뉴욕 양키스의 미키 맨틀, 뉴욕 자이언츠의 윌리 메이스와 함께 뉴욕의 3대 중견수로 꼽혔고, '플랫부시의 공작(The Duke of Flatbush)'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53년부터 5년 연속 40홈런 이상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타격을 선보였고, 홈런왕과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1955년 다저스의 창단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58년 팀이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에는 무릎 부상과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의 넓은 구장 환경 등으로 이전만큼의 활약을 보이진 못했으나, 1959년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선수 생활 말년에는 뉴욕 메츠(1963년)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1964년)에서 뛰며 개인 통산 2,000안타와 400홈런을 달성했고, 1964년 시즌 후 은퇴했다.
3. 2. 1. 브루클린/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47년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4월 17일 메이저 리그 데뷔 첫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했으며, 그해 40경기에 출전했다. 시즌 중 마이너 리그 AAA팀 세인트폴로 내려가기도 했으나, 시즌 초 재키 로빈슨과 친구가 되었다.[20][21] 시즌 말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 시리즈를 앞두고 다저스로 복귀했다. 1948년에는 몬트리올에서 시즌을 시작하여 .327의 타율을 기록한 후 8월에 브루클린으로 복귀, 53경기에 출전해 .244의 타율로 시즌을 마쳤다.
1949년, 22세의 나이로 주전 자리를 확보하며 타율 .292, 23홈런, 92타점을 기록했고, 다저스의 내셔널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다저스의 홈구장 에베츠 필드는 우익수 펜스까지의 거리가 약 90.53m로 짧아 그의 왼손 타격에 유리했다. 그는 로저 칸의 책 《여름의 소년들》(1972년)로 유명해진 다저스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 잡았다. 1950년에는 타율 .321을 기록하고, 안타 (199개)와 총 루타 (343개)에서 내셔널 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생애 첫 올스타전에 선정되었다.
1951년 미키 맨틀(뉴욕 양키스)과 윌리 메이스(뉴욕 자이언츠)가 데뷔하면서 뉴욕은 세 명의 뛰어난 중견수를 중심으로 한 야구 황금기를 맞이했다. 이는 훗날 테리 캐시먼의 1981년 히트곡 "Talking Baseball"에서 "Willie, Mickey, and Duke"라는 가사로 기념되기도 했다. 그러나 1951년 다저스가 큰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자이언츠에게 역전패하며 페넌트를 놓치자 (이른바 세상을 뒤흔든 한 방), 스나이더는 압박감에 시달려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할 생각까지 했다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1950년대는 그의 전성기였다. 1953년부터 5년 연속으로 40홈런 이상을 기록했으며, 1954년에는 .341의 높은 타율을 기록했으나 타격왕 타이틀은 메이스에게 아쉽게 내주었다. 1955년에는 타율 .309, 42홈런, 136타점(리그 1위)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월드 시리즈에서는 숙적 뉴욕 양키스를 꺾고 구단 역사상 첫 우승을 차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해 스포팅 뉴스는 그를 "올해의 선수"로 선정했지만, MVP 투표에서는 팀 동료 로이 캄파넬라에 이어 2위에 머물렀다. 1956년에는 개인 최다인 43홈런으로 내셔널 리그 홈런왕에 올랐다. 이는 2001년 숀 그린이 49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다저스 구단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1957년에도 40홈런을 기록하며 5년 연속 40홈런 이상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1958년 다저스는 브루클린을 떠나 스나이더의 고향인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스나이더는 에베츠 필드에서 마지막 홈런을 친 선수였으며, 정들었던 브루클린을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새로운 홈 구장인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은 미식축구 경기장을 개조한 탓에 좌우 비대칭 구조였고, 특히 우중간(약 약 134.11m)이 매우 넓어 그의 홈런 생산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적 첫해인 1958년에는 15홈런에 그쳤다. 그러나 1959년에는 타율 .308, 23홈런, 88타점을 기록하며 반등했고, 팀은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꺾고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로스앤젤레스 연고 이전 후 첫 정상에 올랐다.
이후 무릎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출전 시간이 줄어들었다. 1961년까지 부상과 나이는 그의 출전 시간을 감소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62년 새로운 다저 스타디움이 개장했을 때 첫 안타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그해 5홈런에 그치며 주로 대타나 플래툰 시스템 하에서 출전했다. 시즌 막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리그 우승 결정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월터 앨스턴 감독에게 돈 드라이스데일 기용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팀은 결국 역전패하며 월드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1962년 시즌 종료 후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되었다. 그의 룸메이트였던 드라이스데일은 스나이더의 이적 소식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1980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같은 해 다저스는 그의 등번호 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영구 결번으로 1980년 지정.
그는 다저스 구단 역사상 통산 최다 홈런(389개), 최다 타점(1,271개), 최다 장타(814개), 최다 삼진(1,123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20][21]
연도 | 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패 | 희생타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47 | BRO LAD | 40 | 89 | 83 | 6 | 20 | 3 | 1 | 0 | 25 | 5 | 2 | -- | 2 | -- | 3 | -- | 1 | 24 | 0 | .241 | .276 | .301 | .577 |
1948 | 53 | 172 | 160 | 22 | 39 | 6 | 6 | 5 | 72 | 21 | 4 | -- | 0 | -- | 12 | -- | 0 | 27 | 4 | .244 | .297 | .450 | .747 | |
1949 | 146 | 615 | 552 | 100 | 161 | 28 | 7 | 23 | 272 | 92 | 12 | -- | 3 | -- | 56 | -- | 4 | 92 | 8 | .292 | .361 | .493 | .854 | |
1950 | 152 | 684 | 620 | 109 | 199 | 31 | 10 | 31 | 343 | 107 | 16 | -- | 6 | -- | 58 | -- | 0 | 79 | 9 | .321 | .379 | .553 | .932 | |
1951 | 150 | 672 | 606 | 96 | 168 | 26 | 6 | 29 | 293 | 101 | 14 | 10 | 4 | -- | 62 | -- | 0 | 97 | 23 | .277 | .344 | .483 | .828 | |
1952 | 144 | 598 | 534 | 80 | 162 | 25 | 7 | 21 | 264 | 92 | 7 | 4 | 9 | -- | 55 | -- | 0 | 77 | 17 | .303 | .368 | .494 | .863 | |
1953 | 153 | 680 | 590 | 132 | 198 | 38 | 4 | 42 | 370 | 126 | 16 | 7 | 5 | -- | 82 | -- | 3 | 90 | 10 | .336 | .419 | .627 | 1.046 | |
1954 | 149 | 679 | 584 | 120 | 199 | 39 | 10 | 40 | 378 | 130 | 6 | 6 | 1 | 6 | 84 | -- | 4 | 96 | 12 | .341 | .423 | .647 | 1.071 | |
1955 | 148 | 653 | 538 | 126 | 166 | 34 | 6 | 42 | 338 | 136 | 9 | 7 | 4 | 6 | 104 | 19 | 1 | 87 | 9 | .309 | .418 | .628 | 1.046 | |
1956 | 151 | 652 | 542 | 112 | 158 | 33 | 2 | 43 | 324 | 101 | 3 | 3 | 6 | 4 | 99 | 26 | 1 | 101 | 16 | .292 | .399 | .598 | .997 | |
1957 | 139 | 592 | 508 | 91 | 139 | 25 | 7 | 40 | 298 | 92 | 3 | 4 | 3 | 3 | 77 | 12 | 1 | 104 | 17 | .274 | .368 | .587 | .955 | |
1958 | 106 | 365 | 327 | 45 | 102 | 12 | 3 | 15 | 165 | 58 | 2 | 2 | 1 | 4 | 32 | 4 | 1 | 49 | 11 | .312 | .371 | .505 | .875 | |
1959 | 126 | 435 | 370 | 59 | 114 | 11 | 2 | 23 | 198 | 88 | 1 | 5 | 5 | 2 | 58 | 13 | 0 | 71 | 8 | .308 | .400 | .535 | .935 | |
1960 | 101 | 285 | 235 | 38 | 57 | 13 | 5 | 14 | 122 | 36 | 1 | 0 | 1 | 2 | 46 | 8 | 1 | 54 | 7 | .243 | .366 | .519 | .885 | |
1961 | 85 | 266 | 233 | 35 | 69 | 8 | 3 | 16 | 131 | 56 | 1 | 1 | 2 | 1 | 29 | 3 | 1 | 43 | 6 | .296 | .375 | .562 | .937 | |
1962 | 80 | 196 | 158 | 28 | 44 | 11 | 3 | 5 | 76 | 30 | 2 | 0 | 0 | 0 | 36 | 6 | 2 | 32 | 5 | .278 | .418 | .481 | .899 | |
1963 | NYM | 129 | 415 | 354 | 44 | 86 | 8 | 3 | 14 | 142 | 45 | 0 | 1 | 0 | 4 | 56 | 9 | 1 | 74 | 2 | .243 | .345 | .401 | .746 |
1964 | SF | 91 | 189 | 167 | 16 | 35 | 7 | 0 | 4 | 54 | 17 | 0 | 0 | 0 | 0 | 22 | 4 | 0 | 40 | 2 | .210 | .302 | .323 | .625 |
통산: 18년 | 2143 | 8237 | 7161 | 1259 | 2116 | 358 | 85 | 407 | 3865 | 1333 | 99 | 50 | 52 | 32 | 971 | 104 | 21 | 1237 | 166 | .295 | .380 | .540 | .919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BRO(브루클린 다저스)는 1958년에 LAD(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구단명을 변경
3. 2. 2. 뉴욕 메츠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63년 뉴욕 메츠로 이적한 스나이더는 이 신생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개인 통산 2000번째 안타와 400번째 홈런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메츠 입단 당시 찰리 닐이 그의 등번호 4번을 사용하고 있어, 시즌 전반기에는 11번을 달고 뛰다가 닐이 트레이드된 후 다시 4번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메츠를 응원하는 과거 다저스 팬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었다.1963년 4월 16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크로슬리 필드 경기에서 짐 말로니를 상대로 2회에 안타를 쳐 개인 통산 2,000안타를 기록했다.[3] 6월 14일에는 같은 레즈를 상대로 1회에 밥 퍼키에게 홈런을 쳐 개인 통산 400홈런을 달성했다.[4] 그는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196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 통산 8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선발되었으며, 9회 초 토미 데이비스의 대타로 출전했으나 딕 라다츠에게 루킹 삼진을 당했다.[5] 1963년 메츠에서 그는 129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43, 출루율 .345, 장타율 .401, 14홈런, 45타점, 45볼넷, 56삼진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스나이더는 우승 경쟁이 가능한 팀으로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스나이더는 1964년 개막일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자이언츠의 전설적인 선수 멜 오트의 등번호 4번이 영구 결번이었기 때문에, 스나이더는 28번을 선택했다. 자이언츠 소속으로 9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10, 출루율 .302, 장타율 .323, 4홈런, 17타점을 기록했다. 이 해 그는 선수 경력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3루타를 기록하지 못했다. 수비에서는 우익수로 26경기, 좌익수로 18경기에 출전하며 .979의 수비율을 기록했다. 그는 1964년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3. 3. 주요 기록 및 수상
- 내셔널 리그 올스타 8회 선정 (1950–1956, 1963)
- 내셔널 리그 MVP 준우승 (1955년)
- 내셔널 리그 홈런왕 1회 (1956년)
- 내셔널 리그 타점왕 1회 (1955년)
- 내셔널 리그 중견수 수비율 1위 3회 (1951년, 1952년, 1955년)
- 월드 시리즈 우승 2회 (1955, 1959)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구단 통산 기록 보유: 홈런(389), 타점(1,271), 삼진(1,123), 장타(814)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한 시즌 최다 고의사구 기록 보유 (26개, 1956년)
- 서로 다른 두 번의 월드 시리즈(1952, 1955)에서 4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
- 1950년대 MLB 타점 선두 (1,031타점)[18]
- 1950년대 1,000타점 이상 기록 (다른 한 명은 길 호지스)
- 단일 투수 상대 최다 홈런 기록: 로빈 로버츠 상대 19홈런[19]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80년)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영구 결번: 4번 (1980년)
4. 은퇴 이후
은퇴 후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으나, 볼링장 투자가 실패하면서 아보카도 농장을 팔아야 했다.[9] 1968년까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마이너 리그에서 스카우트와 감독을 맡았고,[9] 이후 방송 해설자로 활동했다. 1969년부터 3년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중계를 맡았으며,[9] 1973년부터 1986년까지 14년 동안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중계를 담당하며 부드럽고 차분한 스타일로 인기를 얻었다.[9]
1980년, 11번째 도전 만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9] 같은 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는 그의 등번호 '''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14]
1987년에는 심장 마비를 겪었고, 오랜 다리 부상 문제로 골프를 그만두게 되었다.[9] 1995년에는 야구 카드 사인회 및 기념품 판매로 얻은 소득을 제대로 신고하지 않아 연방 소득세 탈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0][11] 그는 1984년부터 1993년까지 10만달러 이상의 소득을 의도적으로 누락했음을 인정했으며,[12] 미납 세금과 벌금, 이자를 합쳐 약 5.7만달러를 납부하고 2년간의 보호 관찰을 선고받았다.[13] 2017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스나이더와 윌리 맥코비에게 사면을 발급했다.[12]
은퇴 후 가끔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본인 또는 야구선수 역할로 출연하기도 했다. 텔레비전 시리즈 ''아버지의 슬기로운 충고'' (1956년), ''더 라이플맨'' (1959년) 등에 출연했으며,[9] 테리 캐시먼의 노래 "토킹 베이스볼" (1981년)에서는 미키 맨틀, 윌리 메이스와 함께 언급되기도 했다. 1999년 ''더 스포팅 뉴스''는 스나이더를 "100명의 위대한 야구 선수" 중 83위로 선정했으며,[15]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 후보에도 올랐다.
2011년 2월 27일, 캘리포니아주 에스콘디도의 발레 비스타 요양 병원에서 지병으로 84세의 나이에 사망했다.[16] 그는 1955년 월드 시리즈 우승 당시 현장에 있었던 마지막 생존 브루클린 다저스 선수였다.[16] 사후인 2013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군에서 복무한 공로를 인정받아 밥 펠러 용감상 수상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17]
5. 논란
1955년 전미 야구 기자 협회(BBWAA)가 실시한 최우수 선수(MVP) 투표에서 스나이더는 팀 동료인 로이 캄파넬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는 캄파넬라에게 226점 대 221점, 단 5점 차이로 뒤졌으며, 두 선수 모두 1위 표를 8표씩 받았다. 당시 트레이시 링골스비 칼럼니스트의 기사에 따르면[6], 필라델피아에서 입원 중이던 한 기자가 투표용지에 캄파넬라의 이름을 1위와 5위에 중복 기재하고 스나이더의 이름은 누락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이 기자는 실수로 스나이더 대신 캄파넬라의 이름을 적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BBWAA는 해당 기자의 건강 문제로 사실 확인이 어렵자 투표를 무효 처리하는 대신, 1위 표는 캄파넬라에게 주고 5위 표는 공란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이 투표가 무효 처리되었다면 스나이더가 221점 대 212점으로 MVP를 수상했을 것이고, 스나이더가 공란 처리된 5위 표를 받았다면 227점 대 226점으로 수상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스포츠 기자 조 포스난스키는 이 이야기가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7] 포스난스키에 따르면, 스나이더를 누락하고 캄파넬라를 두 번 기재한 기자는 캄파넬라를 1위와 6위에 적었다. 따라서 만약 스나이더가 누락된 6위 표를 받았다면 결과는 스나이더의 승리가 아닌 동점이 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해당 투표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투표용지의 하위 순위 선수들이 한 단계씩 올라갔고, 투수 잭 마이어가 10위 표를 받아 새로 명단에 포함되었다고 밝혔다.
비록 MVP 투표에서는 논란 끝에 2위에 머물렀지만, 스나이더는 1955년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내셔널 리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뉴욕 BBWAA 지부가 수여하는 시드 머서 상을 통해 1955년 내셔널 리그 최고 선수로 인정받았다.[8]
1995년, 스나이더는 윌리 맥코비와 함께 스포츠 카드 쇼 및 기념품 판매로 얻은 소득을 제대로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 연방 소득세 탈세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10][11] 그는 1984년부터 1993년까지 10만달러 이상의 소득을 의도적으로 누락했다고 시인했으며, 이는 실패한 투자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2] 스나이더는 미납 세금 3만달러와 벌금 5천달러를 납부하고 2년간의 보호 관찰을 선고받았다.[13] 맥코비 역시 비슷한 처벌을 받았다.[13] 이후 2017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스나이더와 맥코비에 대한 사면을 결정했다.[12]
6. 평가
듀크 스나이더는 1950년대 뉴욕 야구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강타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주로 3번 타자로 활약하며 뛰어난 타격 능력을 선보였으며, 첫 풀 시즌이었던 1949년부터 23홈런, 92타점을 기록했고, 1950년에는 31홈런, 107타점으로 첫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이후 총 8번 올스타로 뽑혔다.
1955년에는 타율 .309, 42홈런, 136타점으로 타점왕에 오르며 팀의 리그 우승과 사상 첫 월드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1956년에는 개인 최다인 43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에 올랐는데, 이 기록은 2001년 숀 그린이 경신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다저스의 구단 기록이었다. 월드 시리즈에서도 강한 면모를 보여, 1952년과 1955년에 각각 4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며, 다저스에서 기록한 통산 389홈런, 1,271타점, 1,123삼진, 814장타는 모두 현재까지 구단 기록으로 남아있다.[20][21]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80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같은 해 그의 등번호 4번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14]
1999년, ''더 스포팅 뉴스''는 스나이더를 "100명의 위대한 선수" 목록에서 83위로 선정했으며,[15]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의 후보이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오랫동안 TV/라디오 해설자로 활동하며 부드럽고 차분한 스타일로 인기를 얻고 존경받았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해군에서 복무한 경력을 인정받아, 사후인 2013년 밥 펠러 용감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17]
참조
[1]
뉴스
Hall of Famer Duke Snider, 84, dies
https://www.espn.com[...]
2011-02-11
[2]
웹사이트
Duke Snider's Story
https://web.archive.[...]
SPORT magazine
2011-12-05
[3]
웹사이트
New York Mets at Cincinnati Reds Box Score, April 16, 1963
https://www.baseball[...]
[4]
웹사이트
New York Mets at Cincinnati Reds Box Score, June 14, 1963
https://www.baseball[...]
[5]
웹사이트
1963 All-Star Game Box Score, July 9
https://www.baseball[...]
[6]
웹사이트
Ringolsby: Don't forget the Duke
http://msn.foxsports[...]
[7]
웹사이트
Joe Posnanski » Posts 1955 MVP: A Detective Story «
https://web.archive.[...]
2011-03-03
[8]
서적
The Duke of Flatbush
[9]
웹사이트
The Rifleman – The Retired Gun, Episode 17, Season 1
https://web.archive.[...]
[10]
뉴스
The Duke muffs an easy one
http://findarticles.[...]
[11]
뉴스
Tax Fraud: Two Baseball Legends Say It's So
https://select.nytim[...]
1995-07-21
[12]
뉴스
McCovey, Snider Pardoned for Autograph Show Tax Evasion
https://www.sportsco[...]
2017-01-18
[13]
뉴스
Duke Snider Received a Presidential Pardon Yesterday
https://www.dodgersb[...]
2017-01-18
[14]
웹사이트
Dodgers Retired Numbers
https://www.mlb.com/[...]
[15]
간행물
The Sporting News Selects Baseball's 100 Greatest Players
http://www.sportingn[...]
1999-04-26
[16]
뉴스
Duke Snider, a Prince of New York's Golden Age of Baseball, Dies at 84
https://www.nytimes.[...]
2011-02-27
[17]
웹사이트
WWII HOF Players – Act of Valor Award
https://web.archive.[...]
2021-08-11
[18]
웹사이트
Duke Snider Stats
https://www.baseball[...]
[19]
웹사이트
Snider, Duke
https://baseballhall[...]
Baseball Hall of Fame
2019-05-02
[20]
웹사이트
Hall of Famer Snider passes away at 84
https://web.archive.[...]
2011-02-27
[21]
웹사이트
殿堂入りのデューク・スナイダー氏死去
https://www.nikkansp[...]
2011-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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