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코치 페렌츠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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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코치 페렌츠 2세는 1676년 헝가리의 명문 귀족 가문 출신으로, 트란실바니아 공작을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합스부르크 왕가의 감시를 받으며 성장했고,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계기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 1703년 쿠루츠군을 이끌고 봉기를 일으켜 한때 헝가리 국토 대부분을 지배했지만, 1708년 트렌친 전투에서 패배하고 1711년 폴란드로 망명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하여 망명 생활을 하다가 1735년 사망했으며, 헝가리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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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코치 페렌츠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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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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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트란실바니아 공작, 전시 헝가리 통치 공 |
이름 | 러코치 페렌츠 2세 |
헝가리어 | II. Rákóczi Ferenc |
헝가리어 발음 | ˈraːkoːt͡si ˈfɛrɛnt͡s |
칭호 (헝가리어) | fejedelem |
슬로바키아어 | František II. Rákoci |
독일어 | Franz II. Rákóczi |
크로아티아어 | Franjo II. Rákóczy, Rakoci, Rakoczy |
루마니아어 | Francisc Rákóczi al II-lea |
세르비아어 | Ференц II Ракоци |
통치 | |
트란실바니아 공작 즉위 | 1704년 – 1711년 |
전임 | 레오폴트 1세 |
후임 | 카를 6세 |
가문 | |
가문 | 러코치 가문 |
아버지 | 러코치 페렌츠 1세 |
어머니 | 즈리니 일로너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676년 3월 27일 |
출생지 | 헝가리 왕국 보르시 (현재의 슬로바키아 보르샤) |
사망일 | 1735년 4월 8일 (향년 59세) |
사망지 | 오스만 제국 테키르다 |
배우자 | 샤를로테 아말리에 폰 헤센-반프리트 |
자녀 | 레오폴트 러코치 요제프 러코치 죄르지 러코치 샤롤터 러코치 |
매장 장소 | 성 엘리자베트 대성당, 코시체, 헝가리 왕국 (현재의 슬로바키아) |
매장일 | 19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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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676년 헝가리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694년부터 사로스현 백작이었다. 현재는 슬로바키아 북동부에 위치한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공국(1570~1711)의 선출된 통치자인 라코치 페렌츠 1세와 크로아티아 반(Ban)인 페타르 즈린스키의 딸이자 페타르의 형인 미클로시 즈린스키의 조카딸인 즈리니 일로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 라코치 죄르지 2세와 증조부 라코치 죄르지 1세 또한 트란실바니아 공작이었다.[1] 그는 유아기에 사망한 형 죄르지와 누나 줄리아나 라코치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네 달이 되었을 때 사망했다.[1]
프란치스코 1세가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은 자녀들의 후견권을 요청했지만, 레오폴트 1세 황제의 고문들은 프란치스코 1세가 사망 전에 유언으로 남겼기 때문에 프란치스코와 그의 누이 모두에 대한 후견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즈린스키는 황제가 법적 후견권을 유지하는 동안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었다. 가족은 1680년 프란치스코의 외할머니인 소피아 바토리가 사망할 때까지 문카치 성(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무카체보), 샤로슈파탁 및 레게츠에 살았다. 그 후 그들은 문카치 성으로 영구히 이사했다. 라코치는 평생 동안 이곳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간직했다. 어머니 외에도 라코치의 주요 교육자는 가문의 성주였던 죄르지 쾨뢰시와 야노시 바디니였다.[1]
1686년 안토니오 카라파는 그들의 거주지인 문카치 성을 포위했다. 츠린이는 3년 동안 성공적으로 성을 방어했지만 1688년 항복했다. 두 라코치 자녀는 다시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의 후견하에 놓였고 어머니와 함께 비엔나로 이주했다. 그들은 재산을 되찾았지만 황제의 허락 없이는 도시를 떠날 수 없었다.
17세가 되자 황제는 라코치를 어머니로부터 독립시켜 재산을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누이 줄리아나는 강력한 오스트리아 장군 아스프레몽과 결혼한 후 그를 위해 중재했다. 라코치는 1694년 9월 15세의 헤세-반프리트 공주 헤세-반프리트의 샤를로테 아말리와 결혼할 때까지 아스프레몽 가족과 함께 살았다. 그녀는 헤세-반프리트의 칼의 딸이자 성녀 헝가리의 엘리자베트의 후손이었다. 부부는 사로스파탁에 있는 라코치 성으로 이사했고, 라코치는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퇴쾨이 임레와 츠린이는 망명길에 올랐다. 라코치는 황제의 감시하에 비엔나에 남았다. 만연한 반합스부르크 정서에 기대어 퇴쾨이의 농민군 잔당은 오늘날 헝가리 북동부에 있는 토카이-헤기알야 지역에서 새로운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 지역은 라코치 가문의 재산 일부였다. 그들은 토커이, 샤로슈퍼턱, 샤토랄야우헬리 성을 점령하고 라코치에게 지도자가 될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사소한 농민 반란으로 보이는 것을 이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비엔나로 돌아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2]
그 후 라코치는 베르체니 미클로슈 백작과 친분을 맺었는데, 그의 웅바르 재산은 자신의 재산과 인접해 있었다. 베르체니는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왕국에서 세 번째로 부유한 사람이었으며 대부분의 헝가리 귀족과 관련이 있었다.[1]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에서 멸망 직전에 놓이자,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패권에 맞서 싸우는 데 동맹을 찾고 있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라코치와 접촉하여 그가 헝가리 독립의 대의를 맡으면 지원을 약속했다. 오스트리아 스파이가 이 서신을 압수하여 황제에게 알렸다. 이로 인해 라코치는 1700년 4월 18일 체포되어 비엔나 남쪽의 비엔나 신도시 요새에 투옥되었다. 예비 심문 과정에서 그의 할아버지 페테르 즈린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프란츠에게 내릴 수 있는 유일한 형벌은 사형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임신한 아내 아멜리아와 감옥 사령관의 도움으로 라코치는 탈출하여 폴란드로 도망쳤다. 그는 여기서 베르체시니를 다시 만났고, 함께 프랑스 궁정과 접촉을 재개했다.[1]
3년 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헝가리 왕국의 오스트리아군 상당수가 일시적으로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쿠루츠 세력은 문카치에서 새로운 봉기를 시작했고, 라코치에게 그 지휘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민족 해방 전쟁에 모든 에너지를 쏟기로 결정하고 요청을 수락했다. 1703년 6월 15일, 타마시 에세가 이끄는 약 3,000명의 무장 병력이 폴란드 도시 라보흐네 근처에서 그에게 합류했다. 베르체시니도 프랑스 자금과 600명의 폴란드 용병을 이끌고 도착했다.[1]
헝가리 귀족 대부분은 라코치의 봉기를 단순한 농민 반란으로 여겨 지지하지 않았다. 라코치가 서볼치주 귀족들에게 보낸 유명한 호소는 헛수고였던 것 같다. 그는 하이두크(해방된 농민 전사)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군대에 합류하게 하는 데 성공하여 1703년 9월 말까지 헝가리 왕국의 도나우 강 동쪽과 북쪽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는 이어서 곧 트란스다누비아를 정복했다.[1]
오스트리아는 여러 전선에서 라코치와 싸워야 했기 때문에 그와 협상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1704년 8월 13일 블레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영국 연합군이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을 물리친 승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만 이점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라코치의 군대와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의 연합을 막는 데에도 기여했다.[1]
이로 인해 라코치는 어려운 군사적, 재정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지원은 점차 줄어들었고, 이미 획득한 땅을 점령하려면 더 큰 군대가 필요했다. 한편, 현재 군대에 무기와 식량을 공급하는 것은 그의 능력을 벗어났다. 그는 새로운 구리 기반의 화폐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은화에 익숙했기 때문에 헝가리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코치는 한동안 군사적 우위를 유지했지만, 1706년 이후 그의 군대는 후퇴를 강요당했다.[1]
1705년 9월 셰체니(노그라드주) 근처에서 열린 헝가리 의회(6명의 주교, 36명의 귀족, 25개 주의 하급 귀족 대표 약 1,000명으로 구성)는 라코치를 헝가리 왕국의 연합 지방의 "베제를뢰 페예델렘"(통치) 공으로 선출했으며, 24명의 상원 의원이 그를 보좌했다. 라코치와 상원은 외교, 즉 평화 회담을 포함한 외교 업무에 대한 공동 책임을 맡았다.[1]
영국과 네덜란드의 격려로 1705년 10월 27일 헝가리와 황제 사이에 평화 회담이 다시 시작되었다. 양측은 군사 상황에 따라 전략을 바꿨다. 걸림돌 중 하나는 트란실바니아에 대한 주권이었는데, 어느 쪽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라코치가 제안한 프랑스와의 조약이 지연되자, 그는 독립 선언만이 여러 강대국이 그와 협상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1706년 그의 아내와 그의 여동생이 모두 평화 대사로 파견되었지만, 라코치는 황제를 대신한 그들의 노력을 거부했다.[1]
1707년 대북방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엘즈비에타 시엔야프스카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왕위 후보 중 한 명이었다.[1]
라코치의 권고와 베르체시니의 지원으로 오노드(보르쇼드주)에서 열린 의회는 1707년 6월 13일 합스부르크 가문을 헝가리 왕좌에서 폐위시켰다. 그러나 이 행위도, 통화 인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해 발행된 구리 화폐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루이 14세는 라코치 공과 조약을 맺기를 거부하여 헝가리는 동맹국 없이 남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 가능성이 남아 있었지만, 이것도 실현되지 않았다.[1]
트렌친 전투(오늘날 슬로바키아의 트렌친)에서 1708년 8월 3일 라코치의 말이 발을 헛디뎌 땅에 떨어졌고, 그는 의식을 잃었다. 쿠루츠 군대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도망쳤다. 이 패배는 봉기에 치명적이었다. 수많은 쿠루츠 지도자들은 관대함을 바라며 황제에게 충성을 바쳤다. 라코치의 군대는 문카치와 서볼치주 주변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반군과 협상을 맡은 황제의 특사인 야노시 팔피의 말을 믿지 못한 공은 1711년 2월 21일 헝가리 왕국을 떠나 폴란드로 갔다.[1]
라코치의 부재 중, 카로이 샨도르가 헝가리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팔피 야노시와 신속하게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 조항에 따라 1711년 5월 1일, 서트마르 주 마이테니 외곽 들판에서 반군 1만 2천 명이 무기를 내려놓고 깃발을 넘겨주고 황제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1]
서트마르 조약은 라코치를 특별히 나쁘게 다루지 않았다. 그는 황제에게 충성 맹세를 하면 관용을 보장받고, 헝가리 왕국을 떠나고 싶다면 폴란드로 이동할 자유도 보장받았다. 그는 합스부르크 궁정의 정직성을 의심하여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1711년 4월 17일 황제 요제프 1세의 사망 이후에 서명되었기 때문에 평화 조약의 합법성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 후 그의 헝가리 재산은 몰수되었다.[1]
라코치 페렌츠 2세는 러시아 차르 표트르 1세의 지원을 받아 두 차례나 폴란드 왕위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1712년까지 폴란드에 머물렀다. 그는 폴란드 귀족들의 존경받는 손님이었다. 한동안 그는 단치히(Gdańsk)에서 "사로스 백작"이라는 가명으로 살았다.[2]
그는 1712년 11월 16일 단치히를 떠나 영국으로 갔지만, 합스부르크가의 압력을 받은 앤 여왕(Anne, Queen of Great Britain)은 그를 만나주기를 거부했다. 라코치는 그 후 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가서 1713년 1월 13일 디에프(Dieppe)에 상륙했다. 4월 27일 그는 루이 14세(Louis XIV of France)에게 과거 프랑스에 대한 그의 공로를 상기시키고 다가오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평화 협상에서 헝가리를 잊지 말 것을 요청하는 각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과 1714년의 라슈타트 조약 모두 헝가리나 라코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2]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라코치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프랑스 궁정에서 상당한 호의를 얻었다. 그러나 1715년 9월 1일 루이 14세(Louis XIV of France)가 사망한 후, 그는 (여전히 합스부르크가와 전쟁 중이던) 오스만 제국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곳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1717년 9월 40명의 수행원과 함께 프랑스를 떠나 1717년 10월 10일 갈리폴리(Gallipoli)에 상륙했다. 그는 영예로운 대접을 받았지만, 합스부르크가에 대한 싸움을 돕기 위해 별도의 기독교 군대를 이끌고자 하는 그의 희망은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았다.[2]
오스만 제국은 1718년 7월 21일 오스트리아와 파사로비츠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항 중에는 망명한 헝가리인들을 터키가 인도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2년 후, 오스트리아 사절은 망명자들을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술탄은 명예의 문제로 거절했다. 라코치와 그의 수행원들은 이스탄불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테키르다르(Tekirdağ) 마을에 정착했고, 이 마르마라 해 연안 마을 주변에는 큰 헝가리 식민지가 생겨났다. 베르체니, 시몬 포르가치 백작, 안탈 에스터하지 백작, 미하이 차키 백작, 미클로시 시브리크, 지그몬드 자이, 두 명의 파파이, 아담 야보르카 대령 등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정착했다.[2]
라코치는 18년 동안 터키의 테키르다르(Tekirdağ)에서 살았다. 그는 일찍 일어나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아침에는 글을 쓰고 읽고 오후에는 목공을 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그의 아들 죄르죄 라코치가 가끔 방문했다. 1733년 폴란드에서 일어난 추가적인 군사적 문제는 그가 헝가리로 돌아갈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라코치는 1735년 4월 8일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1733년 10월 27일 자 라코치의 유언장에는 그의 모든 가족 구성원뿐만 아니라 함께 망명한 사람들에게도 재산이 남겨져 있었다. 그는 술탄과 콘스탄티노플 주재 프랑스 대사에게 보낼 별도의 편지를 남겨 그의 동료 망명자들을 잊지 말 것을 부탁했다. 그의 내장은 로도스토(Rodosto)의 그리스 정교회에 묻혔고, 그의 심장은 프랑스로 보내졌다. 터키 당국의 허가를 받은 후, 라코치의 시신은 그의 충실한 시종 미케시 켈레멘에 의해 1735년 7월 6일 장례를 위해 이스탄불로 옮겨졌고, 그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 일로나 지리니 옆에 이스탄불 생 베누아 교회(Church of Saint Benoit, Istanbul) 프랑스 교회 갈라타(Galata)에 안장되었다.[2]
그의 유해는 1906년 10월 29일 헝가리 왕국(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코시체(Kassa)의 성 엘리자베트 대성당으로 옮겨져 어머니 일로나와 아들과 함께 안장되었다.[2]
2. 1. 어린 시절과 성장 배경
1676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작 라코치 페렌츠 1세와 즈리니 일로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코치 가문은 헝가리의 명문 귀족 가문으로, 증조부 라코치 죄르죄 1세, 조부 라코치 죄르죄 2세 등 트란실바니아 공작을 배출하는 등 헝가리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 그러나 조부는 실정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개입을 초래하여 전사하였고, 아버지는 공작위를 계승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1670년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베셰레니 음모에 연루되어 처지가 좋지 않았다.형 죄르죄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기 때문에, 차남인 페렌츠가 가주를 계승하게 되었다. 다른 형제자매로는 4살 위의 누나 유리아나(hu)가 있었다.
생후 4개월 만에 아버지가 급사하자,[1] 어머니 일로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두 아이의 새로운 후견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제의 고문관은 페렌츠 1세가 생전 유언으로 페렌츠 2세와 누나 유리아나를 황제에게 맡겼기 때문에, 후견인은 황제가 계속해서 맡는다고 주장했다. 어머니와 황제 사이의 후견권을 둘러싼 갈등은 점점 깊어졌지만, 황제가 후견인으로 남은 채, 일로나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1682년 어머니 즈리니 일로나는 상(上)헝가리 공작을 역임했던 퇴쾨이 임레와 재혼했다.[2] 퇴쾨이는 정치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라코치의 교육에 별 관심이 없었다.
가족은 라코치의 할머니 바토리 조피아(hu)가 사망한 1680년까지 문카치 성(현재 우크라이나 무카체보)과 샤로슈파탁, 레제츠에서 살았고, 라코치는 어린 시절을 보낸 문카치에 평생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유년기를 지나 어머니 곁을 떠나자, 가문의 가신인 케레시 죄르죄와 바디니 야노시가 훈육을 맡았다.
1686년 안토니오 카라파가 문카치 성을 포위하자, 즈리니 일로나는 3년 동안 성을 방어했지만 1688년 항복했다. 이 사건으로 두 라코치 남매는 다시 레오폴트 1세의 후견하에 놓였고 어머니와 함께 빈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재산을 되찾았지만 황제의 허락 없이는 도시를 떠날 수 없었다.
17세가 되자 황제는 라코치를 어머니로부터 독립시켜 재산을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누이 줄리아나는 강력한 오스트리아 장군 아스프레몽과 결혼한 후 그를 위해 중재했다. 라코치는 1694년 9월 15세의 헤세-반프리트 공주 헤세-반프리트의 샤를로테 아말리와 결혼할 때까지 아스프레몽 가족과 함께 살았다. 그녀는 헤세-반프리트의 칼의 딸이자 성녀 헝가리의 엘리자베트의 후손이었다. 부부는 샤로슈파탁에 있는 라코치 성으로 이사했고, 라코치는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1694년 9월 26일 쾰른에서 헤세-반프리트 가문 출신으로, 헤세-반프리트 방백 찰스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라이닝겐-다그스부르크 백작 부인 알렉산드리네 줄리아네(1651-1703)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자 장녀인 헤세-반프리트의 샤를로테 아말리와 결혼하였다.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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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라요슈 죄르죄 라코치 | 1696-1699 | |
라코치 요제프 | 1700-1738 | 문카치 공작, 사생녀 마리아 엘리자베타(1736-1786) |
죄르죄 라코치 | 1701-1752 | 마코비차 공작, 슬하에 아들 죄르죄 라코치(1740-1743) |
사롤타 라코치 | 1706-1706 |
2. 2. 퇴쾨이 임레 봉기의 실패와 그 영향
1682년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어머니 즈리니 일로나는 퇴쾨이 임레와 재혼했다. 퇴쾨이 임레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맞서 상(上)헝가리 공국을 세우려 했으나, 1683년 빈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면서 좌절되었다.[2]1686년 안토니오 카라파가 문카치 성을 포위하자 즈리니 일로나는 3년 동안 저항했지만 1688년에 투항했다. 이후 라코치 페렌츠 2세는 레오폴트 1세의 후견하에 어머니와 함께 빈으로 이주했고, 황제의 허락 없이는 빈을 떠날 수 없었다.[2]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 이후 퇴쾨이 임레와 즈리니 일로나는 망명길에 올랐고, 라코치 페렌츠 2세는 빈에 남게 되었다.[2] 퇴쾨이 임레의 봉기 실패는 훗날 라코치 페렌츠 2세에게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반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2. 3. 라코치의 독립 전쟁 발발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면서 헝가리에 주둔하던 합스부르크 군대의 상당수가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가의 패권에 맞서기 위한 차원에서 라코치와 협약을 맺고, 라코치가 헝가리 독립 전쟁을 일으키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1703년, 쿠루츠군(Kuruc)은 문카치 성에서 새로운 봉기를 준비하는 한편 자신들을 지휘했던 라코치를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했다. 라코치는 에세 터마시가 이끄는 무장 군인, 베르체니 미클로시가 이끄는 폴란드인 용병과 함께 봉기를 시작했다.[1]2. 4. 라코치의 독립 전쟁 전개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면서 헝가리에 주둔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군주국 군대의 상당수가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가의 패권에 맞서기 위한 차원에서 라코치와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 따라 프랑스는 라코치가 헝가리 독립 전쟁을 일으키면 라코치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쿠루츠군(Kuruc)은 문카치 성에서 새로운 봉기를 준비했고, 라코치를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했다.1703년 6월 15일 에세 터마시(Esze Tamás)가 이끄는 3,000명의 무장 군인이 폴란드 라보치네(Lawoczne)에서 라코치 군단에 합류했다. 프랑스로부터 원조금을 받은 베르체니 미클로시(Bercsényi Miklós) 백작도 600명의 폴란드인 용병과 함께 가세했다.[1]
헝가리 귀족 대부분은 라코치의 봉기가 농민 봉기와 다름없다며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코치는 해방된 농민 전사 계층인 허이두크(Hajduk)를 군대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라코치 군대는 한동안 헝가리 국토 대부분을 지배했지만,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반격하면서 전황이 불리해졌다. 1704년 8월 13일 블레넘 전투(블렌하임 전투)에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신성 로마 제국-합스부르크 군주국 연합군이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에 승리하면서 라코치는 큰 타격을 입었다.[1]
1705년 9월 세체니(Szécsény)에서 소집된 헝가리 의회(주교 6명, 상급 귀족 36명, 25개 주에서 소집된 하급 귀족 대표 1,000명)는 라코치를 헝가리 왕국의 통치공(vezérlő fejedelem)으로 추대했다. 라코치와 원로원은 평화 협상을 포함한 외교에서 공동 책임을 지기로 결의했다.[1]
헝가리 의회는 1707년 6월 13일 합스부르크 가를 헝가리 왕위에서 배제하고, 동전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억제를 결의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라코치와의 조약 체결을 거부했고, 헝가리는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을 원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1]
1708년 8월 3일 트렌친 전투에서 라코치는 말이 휘청거리면서 땅에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쿠루츠군 병사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도망쳤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전권대사 팔피 야노시(Pálffy János)는 라코치가 합스부르크 가에 충성하면 사면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라코치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1711년 2월 21일 폴란드로 망명했다.[1]
2. 5. 망명과 죽음
1712년 11월 16일, 라코치는 폴란드 그단스크를 떠났고, 1713년 1월 13일에는 프랑스 디에프로 이주했다. 1717년 10월 10일에는 자신의 측근 40명과 함께 오스만 제국의 갈리폴리(겔리볼루)로 이주했다.[2]1718년 7월 21일,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와 파사로비츠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는 튀르크인이 헝가리인의 망명을 거부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2년 뒤, 오스트리아 대사는 오스만 제국 측에 망명자 송환을 요구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명예와 관련된 문제라며 거절했다.[2]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면서 헝가리로 귀환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지만, 뜻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1735년 4월 8일, 망명지였던 테키르다에서 향년 5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2]
라코치는 1733년 10월 27일에 자신의 가족 전원과 함께 망명한 동료들 전원에게 유언을 남겼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콘스탄티노폴리스 주재 프랑스 대사에게 각각 편지를 전달했으며, 자신과 함께 망명한 사람들을 잊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의 내장은 로도스섬에 있는 그리스 정교 교회에 안치되었으며, 그의 심장은 프랑스에 안치되었다.[2]
1735년 7월 6일, 그의 충성심 깊은 시종이었던 미케시 켈레멘이 터키 당국의 승인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프랑스 출신 사제들의 유해가 안치된 갈라타 생브누아(Saint-Benoît) 교회에 주인의 유해를 안장했다. 이 교회 안에는 라코치의 어머니였던 즈리니 일로너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라코치의 유해는 어머니의 관 옆에 안치되었다.[2]
라코치의 유해는 1906년 10월 29일 슬로바키아 코시체에 있는 엘리자베트 성당(Dóm svätej Alžbety)에 안치되었다. 성당 안에는 라코치와 아들, 어머니 일로너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2]
3. 유산과 평가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오늘날까지도 헝가리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부다페스트를 비롯한 헝가리 국내 여러 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또한 500포린트 지폐에는 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페렌츠는 외국과의 협상 시, 토카이(Tokaj) 특산의 귀부 와인을 선물로 가져갔다. 그 맛에 감탄한 루이 14세(Louis XIV)는 "왕의 와인, 와인의 왕"이라고 칭찬했다. 현재에도 토카이 와인(Tokaji wine)은 최상급 귀부 와인으로 유명하며, 토카이 와인 산지의 역사적·문화적 경관(Tokaj wine region)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페렌츠는 음악을 사랑했으며, 그중 한 곡은 작곡자와 제목이 잊혔지만, 『라코치 행진곡(Rákóczi-marsch)』으로 전해진다.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헝가리 랩소디(Hungarian Rhapsodies)」),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파우스트의 겁벌(La damnation de Faust)」),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등이 이 선율을 인용한 곡을 작곡했다.
3. 1. 헝가리 내에서의 평가
라코치 페렌츠 2세는 헝가리에서 국민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헝가리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를 기념하고 있다.

1937년 코수트 라요시 광장의 헝가리 국회의사당 앞에는 그의 기마상이 세워졌다. 이 동상에는 "Cum Deo Pro Patria et Libertate"("하느님과 조국과 자유를 위하여")라는 유명한 문구가 붉은 대리석 기단에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1950년대에 "Cum Deo"("하느님과")라는 부분이 제거되었다가 1989년에 복원되었다.[3] 1953년에는 영웅광장의 밀레니엄 기념비에 레오폴트 2세를 대신하여 라코치 2세의 새로운 동상이 세워졌다.
부다페스트에는 라코치의 이름을 딴 11개의 거리와 3개의 광장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거리 중 하나는 7구와 8구의 경계를 이루는 '''라코치 가(Rákóczi út)'''이다. 이 거리는 1906년 10월 28일 그의 유해가 튀르키예에서 헝가리로 돌아오고 그의 장례 행렬이 동부 기차역까지 이어졌을 때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8구에 있는 라코치 광장(Rákóczi tér) 또한 1874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부다페스트의 도나우 강에는 그를 기리는 라코치 다리(Rákóczi Bridge)가 있다.
헝가리에는 라코치라는 이름을 가진 두 개의 마을이 있다. 야스-나지쿤-솔노크 주에 있는 라코치팔바(Rákóczifalva)는 1883년 라코치가 사냥용 별장을 가지고 있던 그의 전 재산 위에 세워졌다. 인접한 라코치우이팔루(Rákócziújfalu)는 1950년에 독립적인 마을이 되었다.
미슈콜츠(Miskolc)에 있는 보르쇼드-아바우이-젬플렌주(Borsod-Abaúj-Zemplén)의 도서관(II. Rákóczi Ferenc Megyei Könyvtár|II. 라코치 페렌츠 주립 도서관hu)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가 살았던 집은 테키르다의 라코치 박물관(Rákóczi Museum, Tekirdağ)으로 바뀌어 방문객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라코치의 초상화는 헝가리 지폐에도 등장한다. 50포린트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있었으나 유통이 중단된 이후에는 500포린트 지폐로 옮겨졌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그의 이름을 딴 라코치 행진곡이 유명했는데, 그의 애창곡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730년대에 작곡되었다.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가 이 곡을 오케스트레이션했으며,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도 그의 헝가리 랩소디 제15번의 기초로 사용했다. 라코치 행진곡은 여전히 헝가리 국가 및 군사 행사에서 인기 있는 곡이다.
3. 2. 국제적인 평가
라코치 페렌츠 2세는 헝가리뿐 아니라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등 주변 국가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독립 전쟁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저항 운동의 중요한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진다. 라코치가 망명 생활 중 오스만 제국, 프랑스 등과 맺었던 외교 관계는 당시 유럽의 국제 정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프란치스크 2세는 헝가리의 국민 영웅으로, 현대 헝가리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를 기념한다. 그의 기마상은 야노시 파스토르의 작품으로 1937년 코수트 라요시 광장의 헝가리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졌는데, "Cum Deo Pro Patria et Libertate"("하느님과 조국과 자유를 위하여")라는 모토가 새겨져 있다. 1950년대에 "Cum Deo"("하느님과")라는 단어가 제거되었다가 1989년에 복원되었다.
부다페스트에는 라코치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이 여러 개 있다. 특히 7구와 8구의 경계를 이루는 라코치 가(Rákóczi út)는 1906년 그의 유해가 튀르키예에서 헝가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 8구의 라코치 광장(Rákóczi tér) 또한 1874년에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부다페스트의 도나우 강에는 그를 기리는 라코치 다리(Rákóczi Bridge)가 있다.
헝가리에는 라코치라는 이름을 가진 두 마을, 라코치팔바(Rákóczifalva)와 라코치우이팔루(Rákócziújfalu)가 있다. 우크라이나의 베레츠키 고개(Veretski Pass) 옆 자바드카 마을은 1889년 라코치살라시(Rákócziszállás)로, 인접 마을 포드폴로츠(Podpolóc, 현재 피드폴로지야(Pidpolozzya))는 베제르살라시(Vezérszállás)로 개명되었다가 1918년 이후 이전 이름을 되찾았다.
우크라이나의 보브카르 산(Mount Bovcar)(오늘날 보브차르스키 베르흐(Bovtsars'kyy Verkh))과 인접한 보브카르 샘(Bovcar Spring)은 라코치를 기리는 현지 루신인들이 이름을 지었다. (Бовцарrue)는 루신어(Rusyn language)로 "황제가 여기에 있었다"는 뜻이다.
미슈콜츠(Miskolc)에 있는 보르쇼드-아바우이-젬플렌주(Borsod-Abaúj-Zemplén)의 도서관(II. Rákóczi Ferenc Megyei Könyvtár)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가 살았던 집은 테키르다의 라코치 박물관(Rákóczi Museum, Tekirdağ)으로 바뀌어 방문객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라코치의 초상화는 헝가리 지폐에도 등장하는데, 50포린트 지폐에서 500포린트 지폐로 옮겨졌다.
18세기와 19세기에 잘 알려진 애국가(작곡가 미상)는 라코치 2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그의 애창곡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730년대에 작곡되었다.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가 이 곡을 오케스트레이션했으며,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도 그의 헝가리 랩소디 제15번의 기초로 사용했다. 라코치 행진곡은 여전히 헝가리 국가 및 군사 행사에서 인기 있는 곡이다.
3. 3. 예술 작품에서의 묘사
라코치 페렌츠 2세는 헝가리의 국민 영웅으로, 그의 생애와 독립 전쟁은 헝가리 문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18세기와 19세기에는 작곡가 미상의 애국가가 라코치 2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이 곡은 그의 애창곡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730년대에 작곡되었다.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이 곡을 오케스트레이션했으며, 프란츠 리스트도 그의 헝가리 랩소디 제15번의 기초로 사용했다. 이 곡은 '라코치 행진곡'으로 불리며, 오늘날에도 헝가리 국가 및 군사 행사에서 연주되는 인기곡이다.
헝가리 화가 벤추르 쥴러는 '나지샤로스 성에서 체포되는 라코치'를 그려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묘사했다.(해당 내용은 원문에 없어 삭제)
참조
[1]
웹사이트
Hungary
http://encarta.msn.c[...]
2008-10-31
[2]
웹사이트
Without Special Ceremony: The Cult of Rákóczi – Bringing Home the Prince's Mortal Remains
http://epa.oszk.hu/0[...]
[3]
서적
Budapest City Atlas
Szarvas-Dimap
2011
[4]
웹사이트
Ferenc Rákóczi, II prince of Transylvania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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