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란스크로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란스크로나는 스웨덴 스코네 지방에 위치한 도시로, 1413년 도시 지위를 얻은 이후 스웨덴과 덴마크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자동맹과의 무역 경쟁, 란스크로나 성채 건설, 스웨덴으로의 편입 등 격동의 역사를 거치며 군사적 요충지에서 상업 및 공업 도시로 발전했다. 1800년대 이후에는 근대 도시로 빠르게 전환되었으며, 조선업의 발달과 쇠퇴, 삭스토르프 TT 레이스와 같은 스포츠 행사 개최 등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현재는 페리와 철도 교통의 요지이며, 란스크로나 미술관, 다양한 출신 인물, 란스크로나 BoIS와 같은 스포츠 클럽, 그리고 텃밭으로도 유명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웨덴의 도시 - 스톡홀름
    스톡홀름은 발트해와 멜라렌호 사이에 위치한 스웨덴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며, 14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유럽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 중 하나이다.
  • 스웨덴의 도시 - 말뫼
    말뫼는 스웨덴 남서부에 위치한 역사적인 항구 도시로, 한자 동맹의 무역 중심지로 번성했으나 산업혁명 이후 쇠퇴를 겪었지만, 외레순 다리 건설과 말뫼대학교 설립 등으로 재도약을 시도하며 다문화적인 국제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란스크로나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성 올라프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본 오래된 급수탑
성 올라프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본 오래된 급수탑
스웨덴의 지방 자치체란스크로나 시
스웨덴의 주스코네 주
스웨덴의 지방스카니아
헌장 제정15세기
면적12.95km²
인구 (2020년 12월 31일)33,372명
인구 밀도2572명/km²
시간대CET (+1)
일광 절약 시간CEST (+2)
기타 정보

2. 역사

스코네 지방의 천연항으로 널리 알려진 란스크로나는 1413년 도시 지위를 부여받은 이래 스웨덴과 덴마크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428년 한자 동맹 세력에 의해 파괴되기도 했지만 15세기 초반에 재건되었다.

1540년대에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3세의 명령에 따라 란스크로나 성채 건설이 시작되어 1559년에 완공되었으며, 주변 벽과 해자를 갖춘 요새로 구성되었다.[6] 1658년 로스킬레 조약으로 스코네 지방이 스웨덴에 넘어가면서 란스크로나는 크게 발전하여 좋은 항구와 상점, 요새가 들어섰다.[2] 그러나 1676년 7월 8일부터 8월 2일까지는 덴마크에 잠시 점령되기도 했다.

스쿠네 전쟁 이후 란스크로나의 군사적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 지속적인 스웨덴-덴마크 전쟁으로 인해 칼스크로나가 란스크로나를 대체하여 해군 기지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덴마크에서 더 안전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1822년에는 요새가 폐쇄되었고, 1869년에는 주둔군도 철수했다.

1800년대 이후, 란스크로나는 요새 도시에서 벗어나 공업 및 상업 도시로 빠르게 변화했다. 산업 혁명과 도시화의 영향으로 도시는 빠르게 성장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대형 조선소인 외레순드스바르베트가 건설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이 조선소에서 3만 명의 주민 중 3,500명 이상을 고용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러나 1970년대 스웨덴에 조선 위기가 닥치면서 란스크로나 역시 영향을 받았고,[62] 조선소는 1970년대 후반부터 단계적으로 문을 닫아 1983년에 최종적으로 폐쇄되었다.[14]

1919년 5월 14일, 란스크로나에서 거주하며 일했던 스웨덴 엔지니어이자 비행 개척자인 에녹 툴린이 "Södra Fäladen" 들판에서 자신의 비행기를 추락시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소피아 알베르티나 교회에서 거행되었다.[15] 1930년에서 1939년 사이에는 삭스토르프 TT 레이스가 도시 바로 남쪽에서 개최되었다. 이 레이스에는 최대 160,000명의 참석자가 몰렸으며, 스웨덴에서 개최된 역대 최대 규모의 스포츠 행사로 간주된다.[16][17]

란스크로나 성채


에녹 툴린의 장례식, 1919년 5월. 이 도시는 비행 개척자를 기린다


1933년 삭스토르프 TT 오토바이 경주 출전 선수

2. 1. 기원

스코네 지방의 천연항으로 널리 알려진 란스크로나는 1413년 도시 지위를 부여받은 이래 스웨덴과 덴마크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2] 1428년 한자 동맹 세력에 의해 파괴되기도 했지만 15세기 초반에 재건되었다.

란스크로나시는 1413년 덴마크의 에리크 폰 포메른 왕이 한자 동맹의 통제를 받는 덴마크 도시들과 경쟁할 무역 도시로 설립했다고 알려져 있다.[2] 하지만 1405년에 "Landzcrone"이라는 이름으로 이 도시를 언급하는 덴마크 국립 기록 보관소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당시 덴마크의 일부였던 스칸의 몇 안 되는 자연 항구 중 하나였다. 설립 당시에는 "Sønder Sæby"라는 어촌이 있었다.[3] 공식적으로 설립된 도시의 원래 이름은 "Landszcrone"이었으며, 1450년 이전에 "Landskrone"으로 변경되었다.[4]

1410년에는 갈멜 수도회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1412년에는 영국 상인들이 왕실 칙허를 받았으며, 1413년에는 도시 자체가 특허를 받았다. 종교 개혁 이후 크리스티안 3세 왕에 의해 수도원은 폐쇄되었지만 "Karmelitergatan"이라는 거리 이름으로 남아 있다.[5]

1300년대 이전에는 세드라 세비(Södra Säby)라고 불리는 작은 어촌이었으며, 주요 산업은 청어 어업이었다.

1413년, 세드라 세비는 칼마르 동맹의 군주 에리크 아브 포메른 (덴마크 국왕 에리크 7세)으로부터 도시(Stad)의 권리를 부여받아 란스크로나(Landskrona)로 명명되었다. 에리크 왕은 "나라의 왕관(Landets krona)"이 될 거대한 상업 도시를 건설하여 한자동맹과의 경쟁에서 강력한 무기로 삼으려 했다. 특히, 발트해로 향하는 자연스러운 입구인 외레순 해협의 통치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에리크 아브 포메른은 도시를 건설하고 성 요한 세례자(S:t Johannes Baptistae) 교회를 건설했다. 이 교회는 룬드 대성당과 거의 같은 규모로, 도시의 발전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란스크로나가 급속히 발전함에 따라 한자동맹과의 대립도 심해져 1428년, 한자동맹 함대가 란스크로나를 공격하여 약탈과 화재로 인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도시는 곧 재건되었지만, 수십 년 후 스웨덴 국왕 칼 크누트손에게 점령당하여 다시 전화를 입게 되었다. 다행히, 이때 란스크로나는 전체적인 파괴는 면했다.

1400년대 말에 란스크로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상업의 중심지로서 많은 무역상들이 방문하게 되었다.

2. 2. 한자동맹과의 관계

란스크로나시는 1413년 덴마크의 에리크 폰 포메른 왕에 의해 한자 동맹의 통제를 받는 덴마크 도시들과 경쟁할 무역 도시로 설립되었다고 알려져 있다.[2] 하지만 1405년에 "Landzcrone"이라는 이름으로 이 도시를 언급하는 덴마크 국립 기록 보관소의 증거가 발견되었다.

란스크로나는 당시 덴마크의 일부였던 스칸의 몇 안 되는 자연 항구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설립 당시에는 "Sønder Sæby"라는 어촌이 있었다.[3] 공식적으로 설립된 도시의 원래 이름은 "Landszcrone"이었으며, 1450년 이전에 "Landskrone"으로 변경되었다.[4]

1428년 한자 동맹 세력에 의해 파괴되기도 했지만, 15세기 초반에 재건되었다.

2. 3. 스웨덴 편입과 발전

1658년 로스킬레 조약을 통해 스코네 지방이 스웨덴에 넘어가면서 란스크로나는 크게 발전했다. 좋은 항구와 상점, 요새가 들어섰다.[2] 스웨덴은 란스크로나를 획득한 영토의 상업 중심지로 만들고 대외 무역에 특권을 부여할 계획을 세웠다. 란스크로나 성채는 보루로 강화되었고, 해자 안의 면적은 400x400미터로 확장되었다. 이 성은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강력하고 현대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1676년 7월 8일부터 8월 2일까지 덴마크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당하기도 했다. 당시 사령관이었던 히에로니무스 린데베르크 대령은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6] 1676-1679년 덴마크의 재정복 동안 란스크로나 성채는 스나프한과 같은 친덴마크 게릴라 병사들의 공식 입대를 위한 동원 센터를 구성했다.[6]

1753년 스웨덴 군 사령관은 란스크로나의 성 요한 침례교 교회의 탑이 성채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여 교회의 철거를 요구했다.[9] 그 다음 해에 새로운 소피아 알베르티나 교회의 주춧돌이 놓였지만, 1788년에야 봉헌되었고 1812년에 완공되었다. 교구 의석이 아닌 교회로서는 이례적으로, 새로운 교회는 이전의 훨씬 더 큰 중세 시대의 교회를 보상하기 위해 두 개의 탑으로 지어졌다.

18세기 이후 란스크로나의 군사적 중요성은 감소했다. 지속적인 스웨덴-덴마크 전쟁으로 인해 칼스크로나가 란스크로나를 해군 기지로 대체했는데, 이는 덴마크에서 더 안전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1747년에서 1788년 사이에 란스크로나의 요새가 상당히 확장되었지만, 1822년에 비난을 받았고, 이후 1869년에 주둔군이 폐지되었다. 마지막 군대 연대인 "Skånska Husarregimentet, K5"는 1926년 란스크로나에서 웁살라로 이전되었다.[10][11] 오늘날 란스크로나 성채 요새의 벽과 해자는 휴양지이며, 성에는 박물관이 있다. 북쪽에는 19세기 말에 별장 할당 정원 지역이 설립되었으며, 오늘날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종류이다.[12] 군대의 대규모 훈련장은 공공 건강 시설이 되었고, 오늘날 "Exercisfältet" 또는 "Exan"이라고 불린다.[13]

산업 혁명과 그에 따른 도시화 이후 이 도시는 빠르게 성장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대형 조선소인 외레순드스바르베트가 건설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이 조선소에서 3만 명의 주민이 있는 도시에서 3,500명 이상을 고용했다. 조선소는 1970년대 후반부터 단계적으로 폐쇄되어 1983년에 최종적으로 폐쇄되었다.[14]

1663년에 란스크로나는 스쿠네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1675년에 스쿠네 전쟁이 발발하면서, 영광의 시대는 곧 막을 내렸다. 4년간의 전쟁으로 란스크로나는 황폐해졌다.

2. 4. 스쿠네 전쟁

1658년 로스킬레 조약으로 스코네 지방이 스웨덴에 넘어가면서 란스크로나는 좋은 항구와 요새를 갖춘 상업 중심지로 발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676년 7월 8일부터 8월 2일까지 덴마크에 일시적으로 점령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란스크로나 성채는 스나프한과 같은 친 덴마크 게릴라 병사들의 공식적인 동원 센터 역할을 했다.[6]

스쿠네 전쟁 이후 란스크로나의 군사적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 지속적인 스웨덴-덴마크 전쟁으로 인해 칼스크로나가 란스크로나를 대체하여 해군 기지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덴마크에서 더 안전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1822년에는 요새가 폐쇄되었고, 1869년에는 주둔군도 철수했다.

2. 5. 근대 도시로의 전환

1800년대 이후, 란스크로나는 요새 도시에서 벗어나 공업 및 상업 도시로 빠르게 변화했다. 이 시기 스웨덴의 기업가 유스투스 트란첼(Justus Tranchell)과 그의 아들 칼은 란스크로나에서 설탕 산업을 발전시켜 "설탕 왕"으로 불렸다.

항구에서는 조선업이 발전했으며, 1920년대부터 1930년대의 불황기를 제외하고 1970년대까지 꾸준히 성장했다. 산업 혁명과 도시화의 영향으로 도시는 빠르게 성장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대형 조선소인 외레순드스바르베트가 건설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이 조선소에서 3만 명의 주민 중 3,500명 이상을 고용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러나 1970년대 스웨덴에 조선 위기가 닥치면서 란스크로나 역시 영향을 받았고,[62] 조선소는 1970년대 후반부터 단계적으로 문을 닫아 1983년에 최종적으로 폐쇄되었다.[14]

3. 지리

란스크로나는 스코네 지방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헬싱보리, 남쪽으로는 룬드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서쪽으로는 덴마크와의 국경 역할을 하는 외레순 해협과 마주하고 있으며, 해협에 있는 벤 섬으로 가는 배편이 있다.

코펜하겐을 오가는 배편은 1951년부터 1980년까지 SL 페리가 투보르 항구와 란스크로나 사이를, ''바이킹 보데네''[33][34][35][36]는 코펜하겐 항구의 내항과 란스크로나 사이를 운항했다. 1973년 에너지 위기로 운항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1985년 스칼렛 라인이 투보르 항구로 다시 항해했다. 1993년 운송 회사가 파산하면서 자동차 및 트럭 페리 운송이 중단되었고, 이후 수중익선 ''플리그보타르나 AB''가 2002년까지 운항했다.[38][39]

코펜하겐 공항에 착륙하는 항공기들은 란스크로나 북부를 통과하며, 이 때문에 붐비는 시간에는 항공기들이 1분도 채 안 되는 간격으로 란스크로나 상공을 지나갈 수 있다.[41][42][43]

란스크로나는 시내 안팎에 여러 텃밭 구역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란스크로나 시타델의 텃밭은 현재까지 사용 중인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텃밭 구역이다.[40]

3. 1. 지형

란스크로나는 북쪽으로는 헬싱보리, 남쪽으로는 룬드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서쪽으로는 덴마크와의 국경인 외레순 해협과 접해 있다. 또한 해협에 떠 있는 섬인 벤 섬으로 가는 항로가 있다.

3. 2. 도시 경관

시내 중심부 근처의 구시가지 거리


란스크로나 시의 중심부와 진입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들은 일반적으로 2층에서 7층 사이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요새 도시였던 란스크로나는 나무로 된 집 대신 석조 주택을 선호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덴마크 및 스코네 지방의 목조 가옥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시타델과 소피아 알베르티나 교회 외에도 19세기 또는 그 이전 시대의 주목할 만한 건물로는 시청인 "Rådhuset", 란스크로나 박물관, 구 기차역 건물, 극장이 있다.

프란스 에케룬드가 복원한 란스크로나 항구의 전통적인 목조 건물


시내 중심부와 진입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들은 대부분 1901년부터 1913년까지 란스크로나 시의 건축가였던 프레드리크 순드베리와 1913년부터 1949년까지 건축가였던 프란스 에케룬드의 작품으로 특징지어진다.[18][19][20]

순드베리는 구식 물탱크, 학교 ''Tuppaskolan'', 발전소, 온천(1970년대에 철거됨)과 노동 계급을 위한 두 개의 대형 아파트 블록인 ''Falken''과 ''Gripen'' 등 많은 기념비적인 건물을 설계했다.[18]

전원 도시 운동을 신봉했던 에케룬드는 사람들이 맞춤형 주택을 지을 수 있도록 부지를 할당했으며, 이는 일반적으로 지하실과 2층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주택이었다.[21][22]

랄프 에르스킨은 1970년경 ''Esperanza''(스페인어로 '희망'이라는 뜻)라는 연립 주택 지역을 조성했다. 새로운 물탱크는 같은 해에 가동되었다.[23]

시청 광장 주변 건물들은 기능주의 건축이 유행하기 전에 모두 지어졌다. 일부 오래된 건물들은 20세기 중반에 철거되었다. 특이한 외관을 가진 블록 코너 건물인 ''Falcks hörna''는 1971년 한밤중에 항의에도 불구하고 철거되었다.[24]

란스크로나의 구식 물탱크, 앞쪽은 상트 올로브스 쇠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시내의 물탱크는 당시 시 건축가였던 프레드리크 순드베리가 설계하여 1904년에 건설되었으며, 높이는 65.9m이다.[25][26] 물탱크는 1975년에 사용이 중단되었고, 1992년에는 건물 일부가 임대용 부동산으로 개조되었다.[27]

3. 3. 항구

자연적인 깊은 항구는 도시 역사 이전부터 이곳에 존재했으며, 약 1200년경의 덴마크 역사서 《삭소 그라마티쿠스》에도 언급되어 있다.[28] 이 항구는 근처에 하구가 있는 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래 해저의 자연적인 낙차에 기반을 두고 있다.[29] 18세기부터 이 항구는 인공섬 그로엔에 의해 보호받아 왔다. 1960년대에는 총 부두 길이가 약 3 km였다.[30] 2017년 기준으로 사용 가능한 부두 길이는 크게 줄어들어 약 1250m의 부두가 남아 있으며,[28] 수십 년 동안 활동이 저조했다.

란스크로나 항구, 주요 항만. 오른쪽에 보호 인공섬인 그로엔의 일부가 보이며, 배경에 조선소 외레순드스바르베트가 보인다.


왼쪽의 외레순드스바르베트 조선소, 오른쪽의 전 수프라 AB, 배경의 그로엔(항구를 보호하는 인공섬)


이전의 코펜하겐-투보르로 가는 자동차 페리는 북쪽 끝의 "뉘함" 항구에서 출발했다. 일반적인 지도에서 보면 항구가 두 개의 입구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항구 바로 남쪽의 바다는 매우 얕다.[31][32] 룬드오크라부크텐의 가장 북쪽 부분, 란스크로나와 바르세벡 사이의 만은 얕을 뿐만 아니라 강한 해류가 거의 없다. 추운 겨울 기간 동안에는 이곳에서 다른 외레순드의 대부분의 장소보다 훨씬 빨리 유빙이 형성될 수 있다.

란스크로나는 북쪽으로는 헬싱보리, 남쪽으로는 룬드가 있으며, 그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서쪽으로는 덴마크와의 국경인 외레순 해협과 접해 있다. 또한 해협에 떠 있는 섬인 벤 섬(Ven, 란스크로나 시)으로 가는 항로가 있다.

3. 4. 외레순 해협 교통

오랫동안 란스크로나는 코펜하겐을 오가는 자동차 페리 및 기타 선박 서비스를 제공받았다. 1951년부터 1980년까지 SL 페리는 코펜하겐 북부 투보르 항구와 란스크로나 사이를 운항했다. 같은 기간 상당 부분 동안 ''바이킹 보데네''[33][34][35][36]는 코펜하겐 항구의 내항과 란스크로나 사이를 오가는 소형 여객선을 운항했다. 이 여객선들은 덴마크 소유였지만, 1970년경 스웨덴 ''센트룸린젠''에 인수된 후에도 이름을 유지했다. 1973년 에너지 위기로 인해 이 해운 노선은 결국 종료되었다.[37]

1980년과 1984년 사이에는 다양한 종류의 선박과 해운 회사가 적어도 하절기에 코펜하겐으로 가는 교통편을 제공했다. 1985년부터 스칼렛 라인이 설립되어 다시 투보르 항구로 항해했다. 1991년 봄, 덴마크의 ''Vognmandsruten A/S''는 스칼렛 라인과 합병하여 기존 이름을 유지하고 매시간 운항을 시작했다.

새로운 해운 회사는 주로 트럭 운송을 통해 운영될 예정이었다. 1993년 가을, ''Vognmandsruten A/S''가 파산하면서 란스크로나에서 자동차 및 트럭 페리 운송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말뫼코펜하겐 사이 외레순 해협 남부에서만 여객 운송을 담당했던 수중익선 ''플리그보타르나 AB''는 란스크로나뿐만 아니라 헬싱보리에서도 운항을 시작했다. 외레순 대교 개통 2년 후인 2002년 3월이 되어서야 ''플리그보타르나 AB''는 사업을 접었다.[38][39]

3. 5. 텃밭

란스크로나는 시내 안팎에 여러 텃밭 구역이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스웨덴 최초의 텃밭 구역은 말뫼에 있었지만 오래전에 사라졌다. 란스크로나 시타델의 내곽과 외곽 해자 사이에 위치한 텃밭은 현재까지 사용 중인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텃밭 구역으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 현재 란스크로나와 그 주변 지역에는 총 6개의 텃밭 구역에 걸쳐 약 1,400개의 텃밭이 있다.[40]

3. 6. 코펜하겐 공항 영향

코펜하겐 공항에 접근하여 활주로 22L에 착륙하는 항공기는 도시 북부를 통과하며, 바르세벡 주변의 로컬라이저를 가로지르기 위해 남쪽으로 급격하게 우회전한다.[41] 코펜하겐에서의 대부분의 착륙은 활주로 22L에서 이루어진다.[42] 가장 붐비는 시간대에는 1분도 채 안 되는 간격으로 항공기들이 란스크로나 상공을 연속적으로 통과할 수 있다.[43]

4. 인구 통계

란스크로나는 전통적으로 중공업 중심의 노동자 계급 도시로 여겨져 왔다. 21세기에는 서비스와 일반적인 3차 산업 직업을 갖춘 현대 산업 생산 노동 시장으로 변화하면서 더 많은 주민들이 유입되고 있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이 도시의 인구는 약 20,000명에서 30,000명 사이를 유지했다. 1974년 스웨덴 지방 자치제 개혁 이후에는 약 38,000명으로 집계되었다.

1880년과 1920년 사이에 란스크로나는 군사 도시에서 여러 분야의 중공업 도시로 변모했다. 1917년 문을 연 외레순드스바르베트 조선소는 최대 고용주였으며(1970년대 초 직원 수 약 4,000명), 조선 외에도 제당 공장, 여러 섬유 산업, 비료 및 기타 화학 공장, 다양한 제조업 분야가 발달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란스크로나는 다른 스웨덴 도시만큼 빠르게 성장하지 못했고, 1924년 마지막 군사 연대가 헤슬홀름으로 이동했다.

4. 1. 인구 변화

중세 시대 후반부터 산업 혁명까지 란스크로나의 인구는 약 2,000명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1860년과 1918년 사이에 20,000명에 약간 못 미치게 증가했다. 그러나 1919년경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란스크로나의 인구는 30,000명으로 증가했다. 외레순드스바르베트 조선소의 폐쇄(4,000명에 가까운 직원 중 극히 일부만이 같은 이름의 "새로운" 개조 조선소에서 근무)와 다른 중공업의 쇠퇴로 인해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했다. 1985년에서 1995년경 란스크로나의 인구는 약 25,000명이었다. 서부 스코네와 외레순 해안으로의 일반적인 이민(스웨덴 북부와 다른 국가에서 모두)과 2001년에 개통된 새로운 기차역 덕분에 란스크로나의 인구는 다시 증가하여 1970년대 초와 같은 30,000명을 다시 초과했다. 2015년 란스크로나의 인구는 32,229명이었다.

란스크로나는 또한 오늘날에 비해 한 세기 전에는 비교적 더 큰 도시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란스크로나는 스웨덴에서 15번째로 큰 도시였지만, 더 이상 그 위치를 유지하지 못한다.

란스크로나 시 인구, 1960-2015
연도인구
196028,287
196529,067
197030,110
197529,486
198027,145
199026,595
199527,924
200027,393
200528,670
201030,503
201532,229
202033,372


4. 2. 산업 구조 변화

중세 시대 후반부터 산업 혁명까지 란스크로나의 인구는 약 2,000명으로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1860년과 1918년 사이에는 20,000명에 약간 못 미치게 증가했고, 1919년경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30,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외레순드스바르베트 조선소 폐쇄와 다른 중공업의 쇠퇴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여, 1985년에서 1995년경에는 약 25,000명이었다. 이후 서부 스코네와 외레순 해안으로의 이민, 그리고 2001년 개통된 새로운 기차역 덕분에 인구는 다시 증가하여 1970년대 초 수준인 30,000명을 넘어섰다. 2015년에는 32,229명이었다.[1]

1880년과 1920년 사이 란스크로나는 군사 도시에서 여러 분야의 중공업 도시로 변모했다. 1917년에 문을 연 외레순드스바르베트 조선소는 최대 고용주가 되었으며(1970년대 초 직원 수 약 4,000명),[1] 조선 외에도 제당 공장, 여러 섬유 산업, 비료 및 기타 화학 공장, 다양한 제조업 분야가 성장했다.[1]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란스크로나는 다른 스웨덴 도시만큼 빠르게 성장하지 못했고, 1924년 마지막 군사 연대가 헤슬홀름으로 이동했다.[1]

란스크로나는 전통적으로 중공업 중심의 노동자 계급 도시로 여겨져 왔다. 21세기에는 서비스와 일반적인 3차 산업 직업을 갖춘 현대 산업 생산 노동 시장으로 변화하는 경향이 있어 더 많은 주민들이 유입되었다.[1]

란스크로나 시 인구, 1960-2015[1]
연도인구
196028,287
196529,067
197030,110
197529,486
198027,145
199026,595
199527,924
200027,393
200528,670
201030,503
201532,229
202033,372


5. 문화

란스크로나 미술관은 1963년 시타델 부속 공원에 문을 열었으며, 주변 공원에는 20명의 예술가들의 조각 작품이 있다.[50][51] 칼 프레드릭 로이터스바르드와 이안 베리는 란스크로나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예술가이다.

5. 1. 미술관

란스크로나 미술관은 1963년 란스크로나 시타델 부속 공원에 문을 열었다.[50] 주변 공원에는 20명의 예술가들의 조각 작품이 있다.[51]

칼 프레드릭 로이터스바르드는 스웨덴의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스톡홀름의 스웨덴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회화 교수를 역임했고, 1974년에는 미국 미네아폴리스 미네아폴리스 예술학교의 객원 교수를 지냈다. 1986년에는 회화 부문에서 프린스 유진 메달을 수상했다. 그는 생애 말년에 란스크로나에서 살았으며, 2016년 5월 3일 란스크로나 병원에서 폐렴으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로이터스바르드는 매듭으로 묶인 권총을 묘사한 조각 작품인 ''무폭력''으로 유명하며, 이 작품은 뉴욕의 유엔 본부 외부에 전시되어 있다.[52][53][54]

데님 청바지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영국 예술가 이안 베리는 2010년부터 2015년까지 란스크로나에 거주하며 란스크로나와 외레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작품을 제작했다.[55][56]

5. 2. 주요 인물

칼 프레드릭 로이터스바르드는 스웨덴의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스웨덴 왕립 미술 아카데미와 미네아폴리스 예술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으며, 프린스 유진 메달을 수상했다. 그의 대표작 무폭력은 뉴욕유엔 본부 외부에 전시되어 있다. 로이터스바르드는 생애 말년에 란스크로나에서 거주하다 2016년 5월 3일 란스크로나 병원에서 폐렴으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2][53][54]

이안 베리는 데님 청바지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영국 예술가이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란스크로나에 거주하며 란스크로나와 외레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작품을 제작했다.[55][56]

6. 스포츠

란스크로나 IP, 란스크로나 보이츠 축구 클럽의 홈구장


란스크로나 보이츠(Landskrona BoIS)는 란스크로나를 대표하는 축구 클럽이다. 1930년부터 1939년까지는 란스크로나에서 연례 삭스토르프 TT 레이스 오토바이 경주가 열려 많은 관중이 모였다.[1]

6. 1. 란스크로나 BoIS



란스크로나 보이츠(Landskrona BoIS) 축구 클럽은 1915년 두 개의 오래된 클럽이 합병되어 결성되었다. "BoIS"는 스웨덴 최고 축구 리그인 알스벤스칸의 12개 원년 축구 클럽 중 하나였다. 2022년 기준, 란스크로나 보이츠는 스웨덴 2부 리그인 수페레탄에서 활동하고 있다. 홈구장은 란스크로나 IP 경기장이다.

6. 2. 삭스토르프 TT 레이스

1930년부터 1939년까지 란스크로나에서는 매년 삭스토르프 TT 레이스 오토바이 경주가 열렸으며, 최대 16만 명의 관중이 모였다. 삭스토르프는 란스크로나 시내 중심에서 남동쪽으로 10km~15km 떨어진 곳에 있다.

7. 교통

베네 섬은 정기 페리 운항으로 갈 수 있으며, 이 배는 보통 하루 9번 출발한다. 7월과 8월에는 연장 운행도 제공된다.[57] 란스크로나는 트롤리버스, 철도, 페리 등을 통해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교통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외레순 다리 건설 이후 외레순 열차를 통해 덴마크 코펜하겐과의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코펜하겐 공항까지는 50분, 코펜하겐 시내까지는 65분 만에 갈 수 있다.[61]

해변 옆. 란스크로나에서 바라본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7. 1. 철도

이 도시의 첫 번째 철도역은 1863년에 문을 열었으며, 시청 광장인 ''Rådhustorget''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58] 1920년대에 란스크로나역은 에슬뢰브, 케블링에 (일부 열차가 룬드말뫼까지 운행), 빌레스홀름까지 연결되는 3개 철도 노선의 서쪽 종착역이었다. 1860년부터 1940년까지 스웨덴 철도 네트워크 건설 기간 동안 인근 도시인 헬싱보리까지 철도가 건설되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빌레스홀름행 노선은 단명하여 1960년대 이전에 폐쇄되었다. 1970년대 중반 스웨덴 국영 철도는 남부 지역 열차 운행을 모두 중단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말뫼후스 렌의 다른 도시들과 함께 란스크로나는 새로운 지역 철도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참여했으며, 이는 스카니아식 이름인 포고토그를 얻었다. 1983년에 소규모로 개통된 이 새로운 철도 시스템은 스톡홀름 지역 외 스웨덴 최초의 시스템이었다.[59]

외레순 다리 건설과 관련하여 외레순 열차라고 불리는 또 다른 열차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이들은 광역 열차이자 국제 열차이며, 철도를 통해 덴마크스웨덴을 연결한다. 란스크로나의 경우, 종착역 유형을 피하고 북쪽으로 향하는 교통 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역의 새로운 위치가 필요하게 되었다.

정치적 논의 끝에 코펜하겐예테보리를 잇는 계획된 ''서부 해안 철도''의 일부로 헬싱보리룬드 사이에 새로운 복선 고속 철도를 건설하기로 결정되었다. 란스크로나는 헬싱보리와 룬드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철도 계획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철도가 도시 동쪽 끝에 "접하기만"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 새로운 역이 필요했다. 2001년 1월에 개통된 새로운 란스크로나역은 남쪽으로 향하는 열차만 수용하는 이전 종착역에 비해 더 넓은 범위의 열차 운행을 가능하게 했다.
란스크로나 신 철도역, 2001년 1월 6일 개통
오늘날, 모든 지역 포고토겐 열차와 광역 외레순 열차가 새로운 역에 정차하며, 이는 새로운 역이 평일 시간당 4~6대의 열차를 양방향으로 운행하는 빈도를 제공한다.

트롤리버스 셔틀 서비스인 "역 셔틀"은 2003년 9월에 도입되었으며,[60] 새로운 역과 시내 중심가, 항구의 페리 터미널을 연결한다.

새로운 서비스는 2017년 기준으로 코펜하겐 공항까지 50분, 코펜하겐 시내까지 65분 만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헬싱보리행 북쪽 열차를 타고 HH 페리 노선을 이용하여 헬싱외르까지 20분 동안 바다를 건너간 다음 다시 열차를 타고 코펜하겐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초기에) 코펜하겐 시내로 가는 북쪽 노선은 두 번의 환승을 포함하지만, 덴마크 수도까지는 일반적으로 90분 이내에 도착한다.[61]

7. 2. 트롤리버스

란스크로나 트롤리버스는 2003년 9월 란스크로나역과 시내 중심가, 항구의 페리 터미널을 연결하는 "역 셔틀" 트롤리버스 노선으로 도입되었다.[60] 이 노선은 현재 세계에서 운행되는 가장 짧은 트롤리버스 노선 중 하나이다.

7. 3. 베네 섬 페리

베네 섬은 정기 페리 운항으로 갈 수 있다. 이 수송에 사용되는 배는 보통 하루 9번 출발한다. 7월과 8월에는 연장 운행도 제공된다.[57]

8. 출신 인물


  • 포메라니아의 에릭 7세da
  • 자넷 오그렌 (배우)
  • 올레 안데르베르 (레슬러)
  • 안드레아스 아우구스손 (스웨덴 축구 선수)
  • 에바 아울린 (배우)
  • 이안 베리영어 (영국 예술가, 2010-2015년 란스크로나 거주)
  • 더 브리스틀스
  • 티코 브라헤da (덴마크 천문학자이자 연금술사)
  • 루돌프 세데르스트룀 (해군 사령관)
  • 리차드 달 (높이뛰기 선수)
  • 프란스 에켈룬 (1913년부터 49년까지 시 건축가)
  • 가브리엘라 파군데즈 (스웨덴 수영 선수)
  • 에드빈 펠트스트룀 (레슬러)
  • 에밀 피크 (펜싱 선수)
  • 에밀루쉬 (래퍼 및 레게 아티스트)
  • 알바르 굴스트란드 (안과학)
  •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브sv (1654년 6월 6일 – 1660년 2월 13일 스웨덴 국왕)
  • 마르쿠스 요한손 (1990년생 아이스하키 선수)
  • 마르틴 요한손 (1987년생 아이스하키 선수)
  • 소니 요한손 (전설적인 축구 선수, 1968-1984년 란스크로나 보이즈를 대표하여 클럽에서 310골을 기록)
  • 아르망 크라잉크 (WBO 미들급 챔피언)
  • 셀마 라겔뢰프 (스웨덴 작가이자 노벨상 아동문학)
  • 오스카 융 (배우)
  • 막스 룬드그렌 (스웨덴 아동 작가)
  • 시우 말름크비스트 (스웨덴 가수)
  • 헬메르 뫼르네르 (기수)
  • 구스타프 닐손 (레슬러)
  • 롤프 K. 닐손 (릭스태그 의원)
  • 요나스 올손 (축구 선수, 스웨덴 및 웨스트 브롬)
  • 카를 프레드리크 로이터스바르드 (예술가)
  • 아만다 뢰겐-마이어 (바이올리니스트 및 작곡가)
  • 토르스텐 슈미트 (장교)
  • 마티아스 셰그렌 (스웨덴 아이스하키 선수)
  • 예스페르 스벤브로 (스웨덴 시인)
  • 스벤스카 아카데미엔 (음악 그룹) (레게 밴드)
  • 에노크 툴린 (스웨덴 항공 개척자)
  • 토르킬드 스트란베르 (스웨덴 정치인)
  • 피터 위르도어 (음악가, 시내의 그룸슬레브 출신)
  • 에바 올린 (배우)
  • 요나스 올손 (축구 선수,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 알바르 굴스트란드 (안과의사, 1911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
  • 라스무스 린드그렌 (축구 선수,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9. 자매 도시

란스크로나의 자매 도시는 다음과 같다.[1]

도시국가
글로스트루프덴마크
코트카핀란드
플로힝겐독일
뷔루에스토니아


참조

[1] 웹사이트 Statistiska tätorter 2018; befolkning, landareal, befolkningstäthet https://www.scb.se/h[...] SCB 2020-07-04
[2] 웹사이트 Stadens historia https://www.landskro[...] City of Landskrona 2023-01-24
[3] 문서 Today, there is still a very small settlement just north of the town, known as ''Säby'' (''Sæby'' in Danish). This was probably ''Nørre Sæby'' ("nørre" means "northern") in the beginning of the 15th century, but since ''Sønder Sæby'' (southern Sæby) became the town, the need for distinguishing northern and southern Sæby disappeared.
[4] 문서 Special "newspaper", labeled "Landszcrone", given free to all households in Landskrona municipality in March 2013 as a part of the 600-year anniversary celebration, available at the Swedish National Archive.
[5] 문서 Around 1960 a convent returned to the countryside 8–9 km north of the town centre, near the town of [[Rydebäck]]. The corresponding monastery is located in ''Norraby'', east of the town.
[6] 웹사이트 Landskrona Citadell en minihistoria | Landskrona Slott http://www.citadelle[...] Citadellet.com 2015-04-09
[7] 웹사이트 Kulturhistoria: Koloniområdet vid citadellet https://landskronaku[...] Kultur i Landskrona 2019-08-18
[8] 웹사이트 Landskrona Citadell en minihistoria | Landskrona Slott http://www.citadelle[...] Citadellet.com 2015-04-09
[9] 문서 Swedish encyklopedia "Lilla Uppslagsboken", 1958 Förlagshuset Norden AB, Malmö, volume 6 of 10, article "Landskrona"
[10] 웹사이트 1027-1028 (Nordisk familjebok / Uggleupplagan. 15. Kromat - Ledvätska) https://runeberg.org[...] Runeberg.org 2014-10-31
[11] 웹사이트 1926 miste Landskrona för alltid sin militära roll https://www.hd.se/20[...] 2014-11-25
[12] 뉴스 Sveriges äldsta koloni 100 år - Nyheter http://www.svt.se/ny[...] SVT.se 2013-06-10
[13] 문서 Swedish Protection of Nature Institution, Landskrona branch http://landskrona.na[...]
[14] 웹사이트 Viktiga händelser i Öresundsvarvets historia | Artikel http://www.varvshist[...] Varvshistoriska.com 2015-04-09
[15] 웹사이트 Enoch Thulin - AETA story. English version http://www.bjorns-st[...]
[16] 웹사이트 Saxtorps storhetstid får utställning - Helsingborgs Dagblad http://hd.se/landskr[...] Hd.se 2009-06-17
[17] 웹사이트 Saxtorps Grand Prix http://www.hofterups[...]
[18] 웹사이트 Landskrona 1976 http://www.landskron[...] Landskronadirekt.com 2015-04-09
[19] 웹사이트 Frans Ekelund, arkitekt - via http://www.idstories[...] Idstories.se 2015-03-31
[20] 웹사이트 Landskrona stad - Arkitektur i Landskrona http://www.landskron[...] Landskrona.se 2015-04-09
[21] 서적 Landsbygdens egnahem: egnahemsrörelsen, småbruket och landskapet i sydsvenskt perspektiv University of Lund, Geographical faculty 1993
[22] 서적 Jorden åt folket 2007
[23] 웹사이트 Vattentornet i Landskrona rustas upp https://www.mynewsde[...] NSVA 2015-10-21
[24] 웹사이트 Byggnaden som fick rivas på natten https://www.hd.se/20[...] 2015-02-25
[25] 웹사이트 Landskrona https://www.lansstyr[...] 2022-07-13
[26] 웹사이트 Vattentorn: Skåne – Skånska vattentornssällskapet http://eber.se/vatte[...] 2022-07-13
[27] 웹사이트 Seminariekvarteret - Ett av Landskronahems trevliga område https://landskronahe[...] 2022-07-13
[28] 웹사이트 Hem http://www.landskron[...]
[29] 웹사이트 Landskrona | Sweden | Encyclopædia Britannica http://global.britan[...] Global.britannica.com 2015-04-09
[30] 문서 Swedish encyclopedia "Bonniers Lexikon" from the 1960s, article "Landskrona" (vol 8 of 15)
[31] 문서 Swedish "''Sjökort över Öresund, 1969''", English "Chart of Øresund, 1969". (In fact any chart covering this area will reveal it)
[32] 웹사이트 Kartor, vägbeskrivningar, flygfoton, sjökort & mycket mer på eniro.se https://kartor.eniro[...]
[33] 웹사이트 Oresundstid http://www.oresundst[...] Oresundstid.dk 2015-04-09
[34] 웹사이트 Passagerskibe : Dan Viking (1959) http://www.kwmosgaar[...] Kwmosgaard.dk 2015-04-09
[35] 웹사이트 færgemodeller / skibsmodeller: Havnegade i Kbh og færgerne http://bjarneabel.bl[...] Bjarneabel.blogspot.se 2009-01-18
[36] 웹사이트 M/S DAN VIKING (1959) http://www.faktaomfa[...] Faktaomfartyg.se 1957-03-28
[37] 웹사이트 Centrumlinjens historia http://www.faktaomfa[...] Faktaomfartyg.se null
[38] 웹사이트 Flygbåtarna var ett sätt att leva - Sydsvenskan http://www.sydsvensk[...] Sydsvenskan.se 2010-06-23
[39] 웹사이트 Flygbåtarna lämnar Malmö-Köpenhamn | Nytt från Öresund http://nfo.nu/?p=116[...] Nfo.nu 2002-03-25
[40] 웹사이트 Landskrona stad - Kolonier i Landskrona https://www.landskro[...] Landskrona Stad null
[41] PDF EKCH - Copenhagen.pdf http://www.pht-forma[...]
[42] 웹사이트 Area & Runway systems https://www.cph.dk/e[...] null
[43] 웹사이트 'Headline "Banesystem" 83 operations per hour' https://www.cph.dk/l[...] null
[44] 간행물 SCB, support statement but from 1800 (by then the 10th largest town) PDF p.16 and p. 21 (compare position) https://www.scb.se/s[...]
[45] 서적 Historien om en stad
[46] 웹사이트 Näringsliv och arbetsmarknad i Landskrona https://filer.skane.[...] Region Skåne, Enheten för samhällsanalys
[47] 웹사이트 Landskrona stad - Enklare att få jobb med Arbetsmarknad Landskrona https://www.landskro[...] Landskrona Stad
[48] 웹사이트 Localities 1960-2005 http://www.scb.se/st[...] Statistics Sweden null
[49] 웹사이트 Localities and urban areas 2015 http://www.scb.se/St[...] Statistics Sweden null
[50] 웹사이트 Landskrona Konsthall - Art gallery in Landskrona {{!}} GuidebookSweden https://www.guideboo[...] null
[51] 웹사이트 Landskrona stad - Om konsthallen https://www.landskro[...] null
[52] 뉴스 Carl Fredrik Reuterswärd, sculptor of knotted revolver peace symbol, dies https://www.telegrap[...] The Telegraph 2016-05-04
[53] 웹사이트 Carl Fredrik Reuterswärd | MoMA https://www.moma.org[...]
[54] 웹사이트 Knotted gun sculptor Carl Fredrik Reuterswärd dies at 81 http://www.theguardi[...] 2016-05-04
[55] 웹사이트 About http://www.ianberry.[...] null
[56] 뉴스 Denimu gör succé i London https://www.hd.se/20[...] HD null
[57] 웹사이트 Timetable & Prices http://www.ventrafik[...] Ventrafiken.se null
[58] 웹사이트 Igenbommad station med anor https://www.hd.se/20[...] 2013-01-21
[59] 웹사이트 BILDEXTRA: Pågatågen 30 år https://www.sydsvens[...] 2013-03-22
[60] 뉴스 Nu kommer trådbussarna till Landskrona http://nfo.nu/?p=117[...] Nytt från Öresund 2018-09-24
[61] 웹사이트 Tidtabell : 2 September - 31 December 2014 http://www.scandline[...] Scandliners.se null
[62] 문서 http://www.landskron[...]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