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약탈 (4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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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약탈 (455년)은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시기, 반달족이 로마를 약탈한 사건이다. 455년,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암살된 후,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는 황제의 미망인 에우도키아가 보낸 도움 요청과, 혼약 파기를 구실로 로마를 침공했다. 교황 레오 1세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반달족은 2주 동안 로마를 약탈하며, 많은 보물을 빼앗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주요 시설들을 파괴했다. 이 사건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속화시켰으며, 반달족의 파괴적인 행위는 '반달리즘'이라는 용어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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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약탈 (455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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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명 | 로마 약탈 |
시기 | 455년 6월 2일 – 455년 6월 16일 |
장소 | 로마, 이탈리아, 서로마 제국 (현재의 이탈리아, 로마) |
원인 |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암살 가이세리크의 복수심 |
결과 | 반달족의 승리 아비투스의 서로마 황제 임명 456년 로마 내전 발생 |
교전 세력 | |
교전 1 | 반달 왕국 |
교전 2 | 서로마 제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반달 왕국 | 가이세리크 |
서로마 제국 |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
관련 전투 | |
관련 전쟁 | 로마 제국의 몰락 로마-게르만 전쟁 |
시각 자료 | |
![]() | |
추가 정보 | |
관련 사건 | 410년 로마 약탈 |
2. 배경
서로마 제국은 395년 건국 이후 장기간 쇠퇴의 길을 걸었다.[1] 주요 문제 중 하나는 게르만족을 비롯한 비로마계 민족의 대규모 이동, 즉 민족 대이동이었다. 이로 인해 410년에는 알라리크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약탈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1] 이는 기원전 387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442년, 로마인들과 반달족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반달족은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 비자케나, 동 누미디아, 서 트리폴리타니아를 획득했고, 로마인들은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마우레타니아 시티펜시스, 서 누미디아를 유지했다. 또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에우도키아와 후네리크 사이의 혼인 동맹도 맺어졌다.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454년 9월 21일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살해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막시무스는 455년 3월 16일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살해하는 음모를 꾸몄고, 3월 17일에 황제가 되었다.[9] 막시무스는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미망인 리키니아 에우도키아와 결혼하고 에우도키아를 자신의 아들 팔라디우스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리키니아 에우도키아는 남편의 살해와 강제 결혼에 대한 복수로 반달족과 막시무스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다. 가이세리크는 후네릭과 에우도키아 사이의 파혼이 평화 조약을 무효화한다고 선언하고, 이 상황을 로마 침공의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
로마는 4세기 초에 이미 제국의 수도가 아니었으며, 여러 도시가 서로마 제국의 수도 역할을 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363년부터 395년 사이에 로마를 방문한 것으로 확실히 알려진 유일한 황제이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450년에 로마로 궁정을 옮겨 생애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도시의 인구는 4세기 말 70만~100만 명에서 455년에는 30만~50만 명으로 감소했다.
2. 1. 반달족의 이동과 북아프리카 정착
훈족의 침공으로 이동을 시작한 반달족은 5세기 초반에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정착하려 했으나 주변의 다른 야만족들과 관계가 원만치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마 제국의 북아프리카 총독 보니파키우스로부터 군사 지원을 요청받았다. 반달족의 왕 게이세리크는 429년에 8만 명의 부족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로 이주한다.보니파키우스가 군사 지원을 요청한 이유는 반달족의 힘을 빌려 서로마 제국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보니파키우스는 서로마 황실과 오해가 빚어졌고 황실에서 보낸 토벌군과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전투 직전에 황실과의 오해가 극적으로 풀리면서 반달족의 군사 지원 요청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이미 북아프리카로 이주한 반달족은 지브롤터 해협에서 북아프리카를 동쪽으로 가로질러 이동하면서 파괴와 약탈을 일삼았다.
2. 2. 반달 왕국 건설과 해상 세력 확장
보니파키우스는 침략군으로 변한 반달족을 막으려 했으나 연패했고, 430년에 서로마로 퇴각했다. 서로마에 불만이 많던 북아프리카 토착민족들은 반달족에게 협조적이었기에 전투는 가이세리크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439년 10월 19일, 반달족은 카르타고를 점령하여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서로마 세력을 몰아내고 반달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곡창지대였던 북아프리카를 빼앗긴 서로마는 심한 타격을 입었다.반달족은 442년 로마와 협정을 맺어 아프리카, 비자케나, 누미디아 일부 지방의 지배자로 인정받았다. 이들은 대륙의 야만족 출신 답지 않게 카르타고를 거점으로 해양 강국이 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반달족 함대는 지중해 서쪽의 많은 부분을 정복하고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를 합병하며 지중해 내 세력을 넓혀갔다.
2. 3. 서로마 제국의 혼란: 아이티우스 암살
454년,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이자 군사령관이었던 아이티우스가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서로마의 방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13] 이는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 이전에 스틸리코가 암살당했던 상황과 유사했다. 아이티우스는 라벤나 궁정에서 재무 보고를 하던 중 갑옷도 입지 않은 비무장 상태에서 기습을 당했다.[13]아이티우스 암살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 황제 권위에 대한 도전: 아이티우스는 황제와 거의 대등한 동맹자처럼 행동하며 자신의 아들과 황제의 딸의 혼인을 요구하는 등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 훈족 세력 약화 후 토사구팽: 453년 아틸라 사후 훈족의 세력이 약화되자, 황제는 더 이상 아이티우스의 군사력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 과거 황제 즉위에 대한 반대: 아이티우스는 과거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제 즉위를 반대하고, 훈족 병사 6만 명을 동원해 위협했던 전력이 있었다.
- 아틸라 침공 당시 소극적 대처: 452년 아틸라의 침공 당시, 아이티우스는 갈리아에 주둔하며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로마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었다.
3. 약탈의 전개
455년, 반달족은 로마에서 남서쪽으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티베르 강 어귀의 오스티아에 상륙했다. 막시무스 황제는 로마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격분한 군중에게 발각되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후 티베르 강에 던져졌다.[2] 반달족은 도시에 접근하기 전에 수도교들을 파괴했다.[2] 교황 레오 1세는 가이세리크에게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을 살려주고, 건물들을 불태우지 말고, 포로들을 고문하지 않도록 설득했다.[3] 가이세리크는 약속을 일부 지켰지만,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갔고, 에우독시아와 그녀의 딸 에우도키아와 Placidia|플라키디아영어를 사로잡았다.[3]
가이세리크가 로마로 출항했다는 소식에 로마는 혼란에 빠졌고, 많은 주민들이 도망쳤다. 막시무스 황제는 5월 31일 폭도가 된 군중에 의해 아들 팔라디우스와 함께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10]
반달족은 2주 동안 도시를 약탈하면서, 공유지든 사유지든 모든 보물을 몰수하고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를 가져갔다. 카피톨리노 언덕의 주피터 신전 지붕의 동판 장식이 벗겨지고 신전 자체가 불타는 등 문화 시설에도 피해가 발생했다. 황후 에우도키아와 딸들, 많은 선박 기술자와 수도·목욕탕 설계자 등이 카르타고로 끌려갔다. 많은 귀족들이 인질로 잡혀 몸값을 요구당했고, 주민들은 노예로 팔렸다.[3] 황녀 에우도키아는 456년에 반달족 왕자 후네리크와 결혼했다.
3. 1. 서로마의 무력화와 황제의 피살
454년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살해된 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는 원로원 의원 페트로니우스의 아내를 강간하는[14] 등 파렴치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에 분노한 페트로니우스는 복수를 결심하고 아이티우스의 부하였던 훈족 옵틸라와 트라우스틸라에게 황제 암살을 사주하였다. 455년 3월 16일, 두 사람은 마르스 벌판에서 군사 경기를 관람하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하였다.[14] 황제 주변의 병사들은 아이티우스의 옛 부하들이었기 때문에 황제를 돕지 않았다.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암살에 가담한 후, 455년 3월 17일에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미망인 리키니아 에우도키아와 강제로 결혼하고, 에우도키아를 자신의 아들 팔라디우스와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리키니아 에우도키아는 남편을 살해하고 강제로 결혼한 것에 대한 복수로 반달족과 함께 막시무스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다.
가이세리크는 후네리크와 에우도키아 사이의 파혼을 442년에 맺어진 평화 조약의 무효화 명분으로 삼아, 전쟁 명분으로 이용하여 대규모 군대를 모아 카르타고에서 출항했다. 로마 시내는 가이세리크의 출항 소식에 혼란에 빠졌고, 많은 주민들이 도망쳤다. 막시무스 황제는 무능하게 대처하다가 반달족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도망치려 했으나, 5월 31일 분노한 군중에게 아들 팔라디우스와 함께 살해당했다.[10]
3. 2. 에우독시아 황후의 복수와 게이세리크의 침공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의 암살을 사주하고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황제에 즉위했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무능한 통치자였다. 그는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전임 황제의 미망인 리키니아 에우도키아와 정략결혼을 하였는데, 복수심에 황후를 폭행하는 치졸한 행동을 저질렀다.[15] 이에 증오심에 불탄 황후 에우독시아는 반달족의 왕 게이세리크에게 은밀하게 도움을 요청했다.[15]게이세리크는 서로마와 거래하는 상인들과 자신의 해적들로부터 정보를 얻어 서로마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442년 로마와 반달족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에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에우도키아와 게이세리크의 아들 후네리크 사이의 혼인 동맹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시무스는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미망인 리키니아 에우도키아와 결혼하고 에우도키아를 자신의 아들 팔라디우스와 결혼시켰다.
황후 에우독시아의 복수 요청과 더불어, 게이세리크는 후네리크와 에우도키아 사이의 파혼이 평화 조약을 무효화한다고 선언하고, 이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아 로마 침공을 결정했다. 그는 대규모 군대를 모아 카르타고에서 출항했다.[9]
3. 3. 교황 레오 1세의 중재와 약탈
반달족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고위 관리부터 일반 시민들까지 대부분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교황 레오 1세는 오스티아 항에 도착하여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와 로마 성벽 앞에 도달한 반달족의 왕 게이세리크와 담판을 시도했으나, 약탈을 막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교황의 중재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에 대한 합의[16]가 이루어졌다.# 교회와 그 관련 시설은 약탈 대상에서 제외한다.
# 저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
# 방화하지 않는다.
이 약속들은 완전히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약탈이 진행되는 동안 강간, 살인, 방화 등은 비교적 적게 발생하여 피해를 다소 줄일 수 있었다. 반달족은 일부 시민들의 협조를 받으며 6월 15일부터 보름 동안 로마를 약탈했다.[16] 이들은 테베레 강변에 배를 대어놓고 체계적으로 약탈물을 실어갔다.

반달족은 2주 동안 도시를 약탈하면서 공유지든 사유지든 로마에 있는 모든 보물을 몰수했고,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를 가져갔다. 이 과정에서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던 주피터 신전 지붕의 동판 장식이 벗겨지고 신전 자체가 불타는 등 문화적으로 중요한 시설에도 피해가 발생했다. 황후 에우도키아와 딸 에우도키아, 플라키디아, 그리고 많은 선박 기술자와 수도·목욕탕 설계자 등이 카르타고로 끌려갔다. 또한 많은 귀족들이 인질로 잡혀 몸값을 요구당했고, 많은 주민들이 노예로 끌려가 팔렸다.[3] 황녀 에우도키아는 456년에 반달족 왕자 후네릭과 결혼했다.
4. 원인과 영향
455년 로마 약탈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서로마 제국은 395년 건국 이후 장기간의 쇠퇴 과정에 있었으며, 게르만족 등 비로마계 민족의 민족 대이동으로 인해 410년에는 알라리크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에게 로마가 약탈당하기도 했다.[1]
442년 로마와 반달족 사이의 평화 조약으로 반달족은 북아프리카 일부 영토를 획득했고,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에우도키아와 후네리크 간의 혼인 동맹도 맺어졌다. 그러나 455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를 살해하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한 뒤 황제가 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막시무스는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미망인 리키니아 에우도키아와 강제로 결혼하고 에우도키아를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키려 했다.
이에 분노한 리키니아 에우도키아는 반달족에게 복수를 요청했고, 가이세리크는 후네리크와 에우도키아 사이의 파혼을 구실 삼아 로마 침공의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
로마는 4세기 초 이미 제국의 수도가 아니었으며, 여러 도시가 서로마 제국의 수도 역할을 했다. 455년 당시 로마의 인구는 크게 감소한 상태였다.
4. 1. 서로마 제국 쇠퇴의 가속화
이번 약탈은 쇠망해가는 서로마 제국에 쐐기를 박는 사건이었다. 반달족이 퇴각한 후 서로마는 재기 불가능 상태에 빠졌으며 476년에 멸망했다.[1]반달족은 429년부터 10년간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후 해적으로 변신하였다. 이후 534년에 동로마 제국에 의해 반달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중해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으면서 로마 문명을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그래서 인류가 창조한 문명을 무모하게 파괴하는 행동에 대한 규정어로 ‘반달리즘’ 이란 말이 나왔다.
서로마 제국은 395년 건국 이후, 장기간에 걸친 쇠퇴의 과정에 있었다. 주요 문제 중 하나는 게르만 및 기타 비로마계 민족의 대규모 이주였는데, 이는 민족 대이동으로 알려져 있으며, 410년 알라리크 지휘하의 게르만족 서고트족에 의한 로마 약탈로 이어졌다.
4. 2. '반달리즘' 용어의 기원
반달족은 429년부터 10년간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후 해적으로 변신하였다. 이후 534년 동로마 제국에 의해 반달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중해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으면서 로마 문명을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5. 평가
일반적으로 455년 반달족의 로마 약탈은 410년 서고트족의 약탈보다 더 파괴적이었다고 평가된다.[6] 교황 레오 1세가 가이세리크에게 약탈 과정에서 폭력을 자제할 것을 설득하여 살인, 폭력, 방화가 적었다는 주장도 있으나,[7]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교회 방화 사건을 기록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신전, 공공건물, 민가, 심지어 황제의 궁전까지 약탈당했다고 주장한다.[7] 주피터 최고 최대의 신전 지붕의 금박을 입힌 청동 기와가 뜯겨나가기도 했다.[4][5]
비타의 빅토르는 당시 로마에서 아프리카로 노예를 가득 실은 배들이 이동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약탈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된다.[11]
참조
[1]
서적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A New History of Rome and the Barbarians
Ox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A New History of Rome and the Barbarians
[3]
서적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Macmillan
[4]
서적
Encyclopædia Britannica, cited in Online Etymology Dictionary
http://www.etymonlin[...]
Encyclopædia Britannica
[5]
서적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A New History of Rome and the Barbarians
[6]
서적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A New History of Rome and the Barbarians
[7]
웹사이트
Genseric the Vandal King from 427–477 AD
http://www.sacred-te[...]
[8]
서적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A New History of Rome and the Barbarians
Oxford University Press
[9]
서적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The Modern Library
[10]
서적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A New History of Rome and the Barbarians
[11]
웹사이트
Genseric the Vandal King from 427–477 A.D
http://www.sacred-te[...]
[12]
서적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13]
서적
로마제국 쇠망사 6
대광서림
[14]
서적
로마제국 쇠망사 6
대광서림
[15]
서적
로마제국 쇠망사 6
대광서림
[16]
서적
로마제국 쇠망사 6
대광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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