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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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대화재는 서기 64년 7월에 발생한 대형 화재로, 로마 시내의 14개 구역 중 3개 구역을 완전히 파괴하고 7개 구역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화재는 가연성 물품을 보관하던 상점에서 시작되어 강풍을 타고 빠르게 번졌으며, 좁은 골목길과 밀집된 건물 구조로 인해 피해가 더욱 커졌다. 당시 황제 네로는 안티움에 머물렀으나, 화재 소식을 듣고 돌아와 복구 작업을 지휘했다. 대화재 이후 네로는 도시 재건을 위해 새로운 건축 규칙을 제정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을 돌려 박해를 가했다. 네로가 화재를 냈다는 소문과 그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며, 타키투스, 스웨토니우스, 카시우스 디오 등의 역사 기록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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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대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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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명 | 로마 대화재 |
로마자 표기 | Incendium magnum Romae |
발생 시기 | 64년 7월 18일 |
종료 시기 | 64년 7월 27일 |
위치 | 로마 |
원인 | |
추정 원인 | 우발적인 화재 또는 네로 황제의 방화 |
피해 규모 | |
소실 지역 | 로마 시의 14개 구역 중 3개 구역 완전 소실, 7개 구역 심각한 피해 |
결과 및 영향 | |
영향 | 기독교 박해의 시작, 로마 재건축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네로 |
2. 역사적 배경
로마 제국 제정 시대에 수도 로마는 10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가진 대도시였지만, 건축물 대부분이 목조였고 도로 폭이 좁았으며, 인구 증가로 인한 고층 공동주택(인슐라) 밀집 등으로 화재에 매우 취약했다.[32] 이러한 구조적 문제로 인해 로마에서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대화재가 발생했다. 64년의 화재는 그중 최대 규모의 참사로, 완전히 진화하는 데 6일 7일 밤낮이 걸렸다.[32]
로마 대화재 이전 주요 화재는 다음과 같다.
연도 | 화재 발생 위치 및 피해 |
---|---|
서기 6년 | 이 화재로 비길레스가 설치되었다.[4] |
서기 12년 | 율리아 바실리카가 파괴되었다.[3] |
서기 14년 | 아이밀리아 바실리카에서 발생했다.[3] |
서기 22년 | 마르스 광장에서 발생했다.[3] |
서기 26년 | 카엘리우스 언덕에서 발생했다.[3] |
서기 36년 | 막시무스 서커스에서 발생했다.[3] |
네로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2] 초기에는 폭정으로 비판받았으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호의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귀족층은 네로에게 반감을 가졌던 반면, 대다수 평민들은 네로를 지지했다.
2. 1. 로마의 화재 취약성
로마에서는 화재가 흔했으며, 특히 주택에서 자주 발생했다.[3] 이전에 발생한 화재로 주요 건물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다.연도 | 화재 발생 위치 및 피해 |
---|---|
서기 6년 | 이 화재로 비길레스가 설치되었다.[4] |
서기 12년 | 율리아 바실리카가 파괴되었다.[3] |
서기 14년 | 아이밀리아 바실리카에서 발생했다.[3] |
서기 22년 | 마르스 광장에서 발생했다.[3] |
서기 26년 | 카엘리우스 언덕에서 발생했다.[3] |
서기 36년 | 막시무스 서커스에서 발생했다.[3] |
기원전 22년, 아우구스투스는 소방대에 자금을 지원했다.[9] 서기 6년에는 '비길레스'(밤을 지키는 부대)를 창설했다. 해방노예들이 지휘하는 '코호르테스 비길룸'은 밤에, '코호르테스 우르바네'는 낮에 로마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4] 로마 대화재 당시 도시에는 수천 명의 비길레스가 있었고, 이들은 물통으로 건물에 물을 붓고, 불길의 진로에서 가연성 물질을 치우고, 심지어 건물을 철거하여 방화선을 만드는 등 화재 진압을 위해 노력했다.[10]
화재 이전에 로마의 물은 9개의 수도교를 통해 공급되었는데, 이 수도교들에는 화재 진압 장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수도교 수리 작업은 로마 ''수도 관리관''의 지속적인 업무였다. 수도 관리관은 또한 국가에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물을 끌어다 쓰는 자에 대한 조사를 담당했다.[11] 소방대원들은 담요, 물통, 식초, 그리고 건물 철거를 이용하여 화재를 진압했다.[12]
2. 2. 네로 황제와 당시 상황
네로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2] 초기에는 폭정으로 비판받았으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호의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귀족층이 네로에게 반감을 가졌던 반면, 대다수 평민들은 네로를 지지했다. 네로는 초기 통치 기간 동안 많은 조언을 받았지만, 점차 독립적인 성향을 보였다. 서기 59년에는 그의 애첩인 포파에아의 부추김으로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살해했고, 주요 조언자였던 세네카는 해임된 후 자살을 강요받았다.[5]로마 대화재 당시 네로는 안티움의 별장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6] 화재 소식을 듣고 즉시 로마로 돌아와 복구 작업을 지휘했다.[7] 그는 이재민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등 참사 수습에 힘썼다.[36]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재앙에 시민들의 민심은 진정되지 않았고, 심지어 네로 황제의 방화설까지 나돌았다.[37]
3. 대화재 발생과 경과
64년 7월 18일 야간, 로마 도심 근처 키르쿠스 막시무스 주변 상점가에서 불길이 시작되어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대화재로 번졌다. 로마 시 14개 구역 중 10개 구역이 피해를 입었으며, 이 중 3개 구역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고, 7개 구역은 건물 잔해만 남을 정도로 심각하게 파괴되었다.[31]
제정 시대 로마는 인구 10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였지만, 대부분 목조 건물이었고 도로 폭이 좁았으며, 고층 공동주택(인슐라)이 밀집해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화재에 취약하여 대화재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만들었고, 진화 작업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64년의 대화재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참사였으며, 완전히 진화되기까지 6일 밤낮이 걸렸다.[32]
화재 당시 안티움의 별장에 있던 황제 네로는 화재 보고를 받고 즉시 로마로 돌아와 진화와 이재민을 위한 임시 거주지 및 식량 마련에 힘썼다. 그러나 “황궁에서 대화재를 바라보며 고사에 비유하여 ‘트로이 멸망’을 읊조렸다”는 소문이 퍼졌다.[31] 진화 후 빈민가에서 두 번째 불길이 일었는데, 그곳이 네로의 간신 티게리누스의 소유지였기 때문에 “네로가 새롭게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방화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31]
이러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교도들을 대화재의 범인으로 몰아 반로마 및 방화 혐의로 처형했다.[33] 그러나 이후에도 소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주민들은 불이 닿지 않은 지역과 도시 밖의 들판, 시골길로 피했다. 약탈자들과 방화범들이 횃불을 던지거나, 집단으로 행동하여 불길을 막거나 늦추려는 조치를 방해함으로써 불길을 확산시켰다는 보고가 있었다. 횃불을 던지고 소방 활동을 막은 일부 집단은 명령을 받고 그렇게 했다고 주장했다.[13] 불은 6일간 지속적으로 타다가 멈췄지만, 곧 재발하여 3일 동안 더 타올랐다.[13]
3. 1. 화재 원인과 확산
타키투스에 따르면, 불은 로마 서커스 근처, 카엘리우스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의 가연성 물품이 보관된 상점에서 시작되었다. 밤에 강한 바람이 불면서 불길은 서커스 전체로 빠르게 번졌다. 불은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밀집된 아파트 건물들을 통해 확산되었다. 고대 로마의 이 저지대에는 사원과 같은 큰 건물이나 불길을 막을 수 있는 넓은 공터가 없었다. 그 후 팔라티노 언덕과 카엘리우스 언덕 경사면으로 번져나갔다.[13]화재 확산에 대한 실험 결과, 큰 화재는 자체 바람을 생성할 수 있으며, 이것과 함께 불티가 새로운 건물로 날아가면서 화재 확산의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이는 불길에서 멀리 떨어진 집에서 무작위로 화재가 시작되었다는 목격자들의 주장을 설명할 수 있다.[14]
3. 2. 피해 규모
로마는 14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중 3개 구역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7개 구역은 심하게 손상되어 일부 그을린 잔해만 남았으며, 나머지 4개 구역만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17] 기원전 2세기에 건설된 유피테르 스타토르 신전, 베스타 신전, 그리고 네로 황제의 궁전인 도무스 트란시토리아가 파손되거나 완전히 파괴되었다.[17] 로마 상원 의원들이 주로 활동하던 로마 포럼의 일부 지역도 화재로 인해 파괴되었지만, 포럼 중심부의 넓은 공간은 상업과 만남의 장소로 계속 사용되었다.[17]64년 7월 18일 밤, 로마 도심 근처의 대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 주변 상점가에서 발생한 불길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져, 로마 시 전체 14개 구역 중 10개 구역을 휩쓰는 대화재로 이어졌다. 이 중 3개 구역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고, 7개 구역은 건물 잔해만 남을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31]
당시 로마는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는 거대 도시였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목재로 지어졌고 도로 폭이 좁았으며, 인구 증가로 인해 고층 공동주택(인슐라)이 밀집해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화재에 취약하여 대화재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만들었고, 진화 작업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64년의 대화재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참사였으며, 완전히 진화되기까지 6일 밤낮이 걸렸다.[32]
4. 대화재 이후
로마 제국 황제 네로는 화재 소식을 듣고 휴가를 중단, 로마로 돌아와 이재민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등 참사 수습에 힘썼다.[36] 그러나 대재앙에 시민들의 민심은 진정되지 않았고, 심지어 네로 황제의 방화설까지 나돌았다.
당시 불타는 로마 시내를 보면서 네로가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소설이자 영화적 과장이지만, 당시 기독교도들은 사회 혼란 해결의 희생양이 되었다.
로마 대화재와 민심 수습을 위한 기독교 탄압을 소재로 한 역사 소설로는 셴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가 있다.
4. 1. 네로의 복구 노력
타키투스에 따르면 네로는 화재가 발생했을 때 안티움에 머물며 로마에 없었다. 네로는 도시로 돌아와 식량 공급을 확보하고 정원과 공공 건물을 난민 수용소로 개방하는 조치를 취했다.[16] 도시 재건을 위해 새롭고 멀리 내다보는 건축 규칙을 제정했다.[18] 이는 투기의 과잉을 억제하고 새로운 도시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계획은 오늘날까지도 도시 배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19] 그는 파괴된 지역의 상당 부분을 재건했고, 자신의 개인적인 거주지로서 도무스 아우레아(황금궁전)로 알려진 화려한 건물 단지를 건설했다(도무스 트란시토리아를 대체하고 약 2.5km2의 확장을 포함).[20] 재건을 위한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네로 정부는 세금을 인상했다. 특히 제국의 속주에는 무거운 조공이 부과되었다.[21] 비용의 적어도 일부를 충당하기 위해 네로는 로마 화폐를 평가절하하여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증가시켰다.[21] 화재 잔해는 근처의 말라리아가 만연한 습지의 매립재로 사용되었다.[22]대화재 후, 네로는 화재에 강한 도시 건설을 주도했다. 도로 폭을 넓히고 건물 높이를 제한하며, 각 가옥은 독립된 벽으로 둘러싸도록 했다. 공동주택에는 중정과 소화용 장비를 설치하며, 주택의 일정 부분은 내화성이 있는 돌로 짓도록 하는 등이 의무화되었다. 네로의 사비로 방화용 주랑이 설치되고, 화재에 대응할 수 있도록 수도가 정비되었다. 구획 정리에 의해 로마의 거리 풍경은 일변했다.[35] 네로는 자신의 궁전 등 건축물에 로마 콘크리트를 사용한 새로운 건축 양식을 도입했다고 여겨진다.
4. 2. 기독교 박해
네로는 대화재의 책임을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덮어씌우고 예수의 12사도를 비롯한 기독교도들을 대학살하였다.[37] 당시 기독교는 "사악한 미신", "로마 제국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네로는 이러한 기독교도들을 사회 혼란 해결의 희생양으로 삼아 화형 등으로 처형했다.[38]이는 로마 제국에 의한 최초의 기독교도 탄압으로 여겨지며, 네로는 많은 일반 기독교 신자들을 처형한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33] 이로 인해 기독교 세계에서 네로는 폭군, 적그리스도의 대명사가 되었다.
타키투스는 저서 『연대기』에서 네로가 방화했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미움받는 기독교도들을 대역죄인으로 만들어 처형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기록했다. 기독교도들이 방화범으로 지목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의 신흥 분파로 여겨졌고, 다신교를 부정하고 전통적인 축제나 의례, 황제에 대한 충성심마저 종교를 이유로 거부하는 일신교도들에게 로마인들이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작용했을 수 있다.
기독교 측 자료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로마 시내에서 성 베드로가 신앙을 전파하여 수도에 적지 않은 신자가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따르면, 네로의 아내 포파이아 황후와 유대인 사회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대화재의 피해를 보지 않은 로마 시내의 유대인 거주 구역의 유대인들이 방화범으로 의심받고 박해를 받았는데, 포파이아의 중재로 기독교도만이 범인으로 지목되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성인 바울이 로마 대화재 당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속설이다.[33] 사도행전에는 네로 황제가 바울의 참수를 결정했다고 적혀 있지만, 바울은 로마 시민권 소지자였기 때문에 십자가형이 아닌 참수형으로 처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사망 시기는 자료에 따라 60년에서 68년까지 다양하며 확정되지 않았다.[34]
4. 3. 도무스 아우레아 건설
네로는 화재로 파괴된 지역에 자신의 개인 거주지인 도무스 아우레아(황금궁전)를 건설했다. 도무스 아우레아는 팔라티노 언덕, 에스퀼리노 언덕(오피움)의 경사면, 그리고 첼리오 언덕의 일부를 포함하는 약 2.5km2 규모의 화려한 건물 단지였다.[20]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공사는 민심의 반발을 샀으며, 네로가 화재를 일으켰다는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5. 역사적 기록과 논란
로마 대화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주로 2차 사료에 의존하며, 1차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주요 사료로는 타키투스의 《연대기》, 스웨토니우스의 《로마 황제전》, 카시우스 디오의 《로마사》 등이 있다.[8] 타키투스는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기록한 반면,[38] 스웨토니우스는 네로가 로마의 도시 경관을 개조하기 위해 스스로 방화하고 화재를 바라봤다고 주장하는 등[24] 기록 간에 차이가 존재한다.
네로 방화설은 역사적으로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증거는 불확실하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네로 방화설을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다.[31][33] 로마 제국 황제였던 네로는 화재 소식을 듣고 휴가를 중단하고 로마로 돌아와 이재민 구호 활동을 펼쳤다.[36] 그러나 시민들의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심지어 네로 황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5. 1. 주요 사료
로마 대화재에 대한 주요 사료로는 타키투스의 《연대기》, 스웨토니우스의 《로마 황제전》, 카시우스 디오의 《로마사》 등이 있다.[8] 이 중 타키투스의 《연대기》는 대화재 당시 여덟 살이었던 저자가 공공 기록과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으로, 가장 자세하고 시기적으로 가까운 자료로 평가받는다.[8]타키투스는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대역죄인으로 몰아 처형했다고 기록한 반면,[38] 스웨토니우스는 네로가 로마의 도시 경관을 개조하기 위해 스스로 방화하고 화재를 바라봤다고 주장하는 등[24] 기록 간에 차이가 존재한다.
사료 | 저자 | 주요 내용 |
---|---|---|
《연대기》 | 타키투스 | 화재 당시 8세였지만, 공공 기록과 보고서를 이용하여 상세히 기록.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기록.[38] |
《로마 황제전》 | 스웨토니우스 | 네로가 로마를 개조하기 위해 스스로 방화했다고 주장.[24] 기독교도에 대한 언급은 "전대미문의 해로운 미신에 사로잡힌 기독교도들이 처벌받았다"는 한 문장뿐.[38] |
《로마사》 | 카시우스 디오 |
이 외에도 파비우스 루스티쿠스, 마르쿠스 클루비우스 루푸스, 플리니우스 장로 등이 쓴 1차 자료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5. 2. 네로 방화설 논란
네로가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방화했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증거는 불확실하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네로 방화설을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다.[31][33]로마 제국 황제였던 네로는 화재 소식을 듣고 휴가를 중단하고 로마로 돌아와 이재민 구호 활동을 펼쳤다.[36] 그러나 시민들의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심지어 네로 황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이에 네로와 집권 세력은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우고 기독교도들을 대학살했다.[37]
대화재 당시 불타는 로마 시내를 보면서 네로가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는 허구에 가깝지만, 기독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화형시킨 것은 네로가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원인이 되었다.[38]
로마 대화재와 기독교 탄압을 소재로 한 역사 소설로는 셴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가 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네로는 화재 당시 안티움에 있었고, 로마로 돌아와 식량 공급과 임시 거처 마련에 힘썼다.[16] 로마의 14개 구역 중 3개 구역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7개 구역은 크게 훼손되었으며, 4개 구역만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 유피테르 스타토르 신전, 베스타 신전, 네로의 궁전 도무스 트란시토리아 등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17] 네로가 그리스식으로 도시를 재건하고 새 궁전을 건설하면서 방화 의혹은 더욱 커졌다.
도시 재건을 위해 네로는 새로운 건축 규칙을 제정했다.[18] 이는 투기를 막고 새로운 도시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19] 그는 파괴된 지역에 도무스 아우레아(황금궁전)를 건설했는데, 이는 팔라티노 언덕, 에스퀼리노 언덕, 첼리오 언덕 일부를 포함하는 거대한 규모였다.[20] 그러나 필요한 토지는 대부분 이미 그의 소유였기 때문에, 이것이 방화의 동기였을 가능성은 낮다.[19]
재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네로는 세금을 인상하고, 제국의 속주에 무거운 조공을 부과했다.[21] 또한 로마 화폐를 평가절하하여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21] 화재 잔해는 습지 매립에 사용되었다.[22]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처형했다. 일부는 맹견에 물려 죽었고, 일부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예로니무스에 따르면, 네로에 의해 순교한 기독교인은 979명이었다.[23]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카시우스 디오, 스웨토니우스, 타키투스의 2차 자료에 의존한다. 1차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네로와 화재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 네로가 도시를 파괴하려는 욕망에 몰래 사람을 보내 불을 지르게 하고, 자신은 궁전에서 노래를 불렀다.[24]
- 네로가 공개적으로 사람을 보내 불을 지르게 하고, 에스퀼리노 언덕의 탑에서 노래를 불렀다.[29]
- 네로가 사람을 보내 불을 지르게 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네로가 개인 무대에서 노래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있었다.[25]
- 네로가 도시를 파괴하여 로마 원로원을 우회하고 자신의 이미지대로 로마를 재건하려 했다.[2]
- 네로가 화재를 일으켰다는 소문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희생양이 되었다.[26]
- 네로가 안티움에 있는 동안 화재가 발생한 것은 사고였다.[27]
64년 7월 18일 밤, 키르쿠스 막시무스 주변 상점에서 시작된 불길은 로마 시의 3분의 2를 태웠다. 3개 구역은 잿더미가 되었고, 7개 구역은 크게 훼손되었다.[31]
화재 당시 안티움에 있던 네로는 즉시 로마로 돌아와 진화와 이재민 구호에 힘썼다. 그러나 “황궁에서 대화재를 보며 ‘트로이 멸망’을 읊조렸다”는 소문이 퍼졌다. 진화 후 빈민가에서 두 번째 불길이 일었고, 그곳이 네로의 측근 티겔리누스의 소유지였기 때문에 “네로가 새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방화했다”는 소문이 돌았다.[31]
이러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네로는 기독교도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처형했다.[33] 그러나 소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 처형은 로마 제국의 최초의 기독교 탄압으로 여겨지며, 기독교 세계에서 네로의 이미지를 크게 악화시켰다. 네로는 많은 기독교 신자들을 처형했고, 화형으로 육체가 손상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믿었던 기독교도들을 화형에 처했으며, 바울이 네로 시대에 순교했다는 전설 때문에 폭군, 적그리스도의 대명사가 되었다. 바울이 로마 대화재 당시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기독교도들이 방화범으로 지목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의 신흥 분파로 여겨졌다. 스베토니우스의 『로마 황제전』에는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그리스도의 선동으로 소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추방했다는 기록이 있다.[33] 기독교 측 자료에서도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베드로가 로마에서 신앙을 전파했다고 언급한다.
로마 역사가들은 다신교를 부정하고 전통적인 의례와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도들에게 혐오감을 가졌다.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기독교도들은 혐오스러운 행위로 로마인 등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연대기』는 로마 대화재에 대해 가장 자세한 기록이지만, 시간 순서에 모순이 있어 논쟁의 대상이 된다.
스베토니우스의 『로마 황제전』에는 로마의 도시 경관을 싫어한 네로가 로마를 개조하기 위해 방화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당시 도시 구조상 특정 구역만 태우는 것은 불가능했고, 팔라티노 언덕의 저택과 신전, 네로의 저택 도무스 트란시토리아도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이 주장은 부정되는 경향이 있다. 『로마 황제전』은 기독교도에 대한 언급은 "해로운 미신에 사로잡힌 기독교도들이 처벌받았다"는 한 문장뿐이며, 이는 "네로의 선정"으로 언급된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따르면, 네로의 아내 포파이아와 유대인 사회의 관계 때문에 유대인들이 방화범으로 의심받았으나, 포파이아의 중재로 기독교도들만 범인으로 지목되었다는 설도 있다.
런던 대화재와 비교하여, 다민족 대도시의 혼란 속에서 화재 도둑과 유언비어가 횡행했고, 치안 회복과 민심 안정을 위해 범인을 만들었거나, 실제로 기독교도들이 의심받아 처형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대화재 후 네로는 화재에 강한 도시 건설을 주도했다. 도로 폭을 넓히고 건물 높이를 제한하며, 독립된 벽, 중정, 소화 장비 설치, 내화성 돌 사용 등을 의무화했다. 네로의 사비로 방화용 주랑이 설치되고, 수도가 정비되었다. 구획 정리로 로마의 거리 풍경이 바뀌었다.[35] 네로는 로마 콘크리트를 사용한 새로운 건축 양식을 도입했다.
신전과 역사적 기념비가 사라진 후 급격한 변화와 네로의 도무스 아우레아 건설은 황제에 대한 반감을 낳았다. 이 때문에 네로가 궁전을 짓기 위해 방화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는 역사가들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대화재 후 네로가 건설한 새 궁전은 불탄 궁전과 거의 같았고, 방화 당시 만월이었기 때문에 방화범이 만월에 방화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6. 한국사와의 관련성
로마 대화재와 유사한 대규모 화재 사건은 한국사에서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특히 조선시대 한양은 목조 건물이 밀집된 도시 구조로 인해 화재 피해가 컸다.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은 문화재 보존과 화재 예방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6. 1. 숭례문 방화 사건 (2008)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은 대한민국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전소된 사건으로, 문화재 보존과 화재 예방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이 사건은 개인의 불만이 사회적 재앙으로 이어진 사례로 볼 수 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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