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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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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오 1세는 440년부터 461년까지 재위한 교황으로, '사자'라는 뜻의 이름처럼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태어나 부제 시절부터 로마 교회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는 중앙 집권화를 통해 교황권을 강화했다. 레오 1세는 이단에 단호하게 대처하고, 훈족의 아틸라와 반달족의 가이세릭의 침공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하여 로마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 또한, 칼케돈 공의회에서 교황의 권위를 확립하고, 교황 무류성의 사례로 평가받는 교의 서한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정통 교리를 수호했다. 그는 교회 박사이자, 11월 10일에 축일을 기념하는 가톨릭 성인으로, 교황의 수위권을 확고히 하고 교황권을 강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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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레오 1세
존칭 접두사교황 성인
직함로마주교
교회가톨릭 교회
교황 성 레오 1세 대제
바실리오스 2세의 메뉴로기온에 포함된 레오 1세를 묘사한 세밀화 (기원후 1000년경, 바티칸 도서관)
본명레오
재임 시작440년 9월 29일
재임 종료461년 11월 10일
이전 교황식스토 3세
다음 교황힐라리오
출생일기원후 400년경
출생지서로마 제국 토스카나주
사망일461년 11월 10일 (60세 또는 61세)
사망지서로마 제국 로마
기념일11월 10일
4월 11일 (1969년 이전 달력)
2월 18일 (동방 정교회)
공경가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
성공회
아시리아 동방 교회
상징물교황 예복
교황관
지팡이
신학 정보 상자
시대후-니케아
언어라틴어
전통 운동칼케돈주의
주요 관심사기독론
주목할 만한 아이디어칼케돈 신조

2. 생애 초기

레오는 ‘사자’라는 뜻이다. 《교황 연대표》에 의하면, 레오는 이탈리아반도토스카나주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살았다. 431년 교황 첼레스티노 1세에 의해 부제가 된 레오는 곧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주교가 팔레스타인 교회의 치리권과 관련하여 예루살렘의 에우베날 주교가 문제를 저지르자 이를 처벌하도록 교황에게 부탁해 달라고 청원할 정도로 로마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4] 히포의 아우구스티노가 언급했던 아프리카에 간 교황의 사절이거나 사절의 시종이 레오였을 가능성이 높다. 요한 카시아노는 레오의 요청에 따라 네스토리우스의 오류를 논박한 신학 논문을 제출하였다. 레오의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 준 결정적인 사건은 서로마 제국 황제가 직접 갈리아 최고 지도자인 애티우스와 알비누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라는 임무를 맡긴 것이었다.[31]

레오는 390년 피사 근교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의 경력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사서에 따르면 총명하고 웅변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3. 교황 재위 (440년 ~ 461년)

440년 8월 11일 식스토 3세가 서거하자, 갈리아에 머무르던 레오 1세는 9월 29일 만장일치로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31] 교황이 된 직후 레오는 아퀼레이아에서 펠라기우스파가 이단을 공식적으로 부인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고, 이러한 관행을 비난하며 지방 공의회를 소집하여 명확한 파문 철회를 요구했다.[31]

레오는 마니교도들이 반달 아프리카를 탈출하여 로마에 와서 비밀리에 조직되었다고 주장했다. 443년 후반, 레오는 마니교도들을 규탄하고 로마 시민들에게 의심스러운 이단자들을 사제들에게 신고하도록 촉구하는 설교를 했다. 444년 초, 레오는 이탈리아 주교들에게 마니교도들이 로마에서 근절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는 프리스킬리아누스파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했다. 아스토르가의 투리비우스 주교는 스페인에서 그 종파의 확산에 놀라 레오에게 편지를 보냈고, 레오는 447년 7월 21일 장문의 논문을 작성하여 그릇된 가르침을 조사하고 스페인 전국 공의회에서 주교직에 추종자가 있는지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5]

레오는 기근, 난민 유입, 빈곤에 시달리는 로마에서 자선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특히 사순절에 금식을 자선과 구제와 연관시켰다.[4] 레오의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이전에는 모든 주교를 의미했던 "교황"이라는 용어가 로마 주교를 가리키는 전용어가 되었다.[6]

레오 1세와 아틸라의 회담 (라파엘로 산티(Raffaello Santi) 작, 1514년)


390년 피사 근교에서 태어난 레오는 젊은 시절 총명하고 웅변적인 인물로 알려졌다. 440년 교황으로 즉위한 후에는 지방 교회의 개혁과 교황권 강화에 힘썼으며, 교리 논쟁에서 이단설을 탄압하고 정통론을 확립했다.

레오는 로마의 세속적 행정에도 공헌했다. 452년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레오 1세는 아틸라와 회담하여 평화적인 해결을 도모했다. 중세 헝가리 연대기에 따르면, 교황은 아틸라에게 평화적으로 로마에서 떠나면 그의 후계자 중 한 명이 "성스러운 왕관"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43] 그 결과 아틸라는 로마에서 철수했다 (실제로는 훈족 진영에 전염병과 기근이 발생했다고 여겨진다[44][45][46]). 유럽에서는 로마 교황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아틸라에게 신의 천벌이 내려 사망하고, 남은 부하들은 천벌을 두려워하여 동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승이 남아 있다.

455년 반달족의 왕 가이세릭이 로마를 침공했을 때도, 레오 1세는 가이세릭과 회담하여 학살과 로마 파괴를 막도록 요청하고,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461년 72세로 사망한 레오 1세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는 분쟁 시대에 평화적인 해결을 추구했기 때문에 "대교황(Great Pope)"이라고 불린다.

3. 1. 교황권 강화

성 베드로에 대해 깊은 공경심을 가졌던 레오 1세는 성경 구절과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의 무덤을 근거로 교황의 수위권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는 “교황은 그리스도가 전체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명하였던 베드로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교황에게 교회의 최고 지배권이 있다”라고 주장했다.[48] 또한, 레오 1세는 로마법을 통해서도 성 베드로와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였는데, 스스로 ‘베드로의 (보잘 것 없는) 후계자이자 대리인’이라고 칭함으로써 베드로가 지녔던 사도적 권위를 계승하였음을 밝혔다.

교황과 다른 주교들은 주교직과 인간으로서의 약점을 지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인정되나, 주교들은 성 베드로의 후계자에 의해 지도되며 성 베드로의 후계자는 모든 주교들의 으뜸이라고 역설하였다. 모든 은총과 권위의 근원은 언제나 그리스도이지만,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자신을 대리하는 권한을 성 베드로에게 주었으며 그를 전체 교회의 최고 사목자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베드로를 필두로 모든 교황은 그리스도로부터 맡겨진 책무를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성 베드로는 후임 교황들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일종의 모범적인 선임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직 그 자체가 그리스도와 성 베드로 사이의 특별한 친교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전복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에 따라 레오 1세는 교황으로서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으며, 성 베드로의 권위에 의지하여 로마는 물론 로마 밖의 지역에서도 교황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레오 1세는 교회 안에서 교황의 권위를 재확인함으로써 영적 권위의 중앙집권화에 중요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서방 교회 내에서 교황은 언제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권위의 상당한 부분은 지역 교구장들에게 위임되었다. 약간의 반대가 있기는 했지만, 레오 1세는 갈리아에서 교황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다지는데 성공하였다. 아를의 힐라리오 주교가 교황 조시모가 자신의 전임자인 아를의 파트로클로에게 갈리아 교회에 대한 사목권 일체를 부여했다고 강력히 주장하자, 브장송의 챌리도니오는 이에 반발하며 로마에 항소하였다. 이 사건은 레오 1세가 힐라리오에게 교황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 힐라리오는 로마의 법정에 출두하여 자신을 완강하게 변호하는 한편 레오 1세의 재판 권한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교황으로서의 권리가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 레오 1세는 정치권에 호소하여, 445년 6월 6일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로부터 칙령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칙령에는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존엄한 도시인 로마의 주교로서 수위권이라는 특권을 가지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제정된 법령의 인가와 로마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주교는 그 누구라도 해당 지역 관리에 의해 강제적으로 로마로 송환시킨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49] 황제의 칙령이 반포되면서 수세에 몰린 힐라리오는 결국 레오 1세에게 순명하였다. 450년 힐라리오의 뒤를 이어 라벤니오 주교가 아를 교구장에 착좌하자 레오 1세는 아를 교구에서 빈 교구를 분할하였다.

레오 1세가 갈리아에 머무르는 동안, 시크스트 3세가 440년 8월 11일에 서거하였고, 9월 29일 레오는 만장일치로 그의 후계자로 선출되었다.[31] 교황이 된 직후 레오는 아퀼레이아에서 펠라기우스파가 그들의 이단을 공식적으로 부인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는 이러한 관행을 비난하고 그러한 옛 펠라기우스파 사람들에게 명확한 파문 철회를 요구하는 지방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지시했다.[31]

레오는 마니교도들이 로마에 와서 비밀리에 조직되었다고 주장했다. 443년 후반, 레오는 마니교도들을 규탄하고 로마 시민들에게 의심스러운 이단자들을 사제들에게 신고하도록 촉구하는 일련의 설교를 했다. 결국 의심스러운 이단자들이 법정에 끌려왔고, 고문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들은 여러 범죄를 자백했다. 444년 초 레오는 이탈리아 주교들에게 마니교도들이 로마에서 근절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는 프리스킬리아누스파에도 똑같이 단호했다. 아스토르가의 투리비우스 주교는 스페인에서 그 종파의 확산에 놀라 다른 스페인 주교들에게 그 문제에 대해 연설하고, 그의 편지를 레오에게 보냈으며, 레오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 종파에 대한 장문의 논문(447년 7월 21일)을 작성하여 그릇된 가르침을 자세히 조사하고 스페인 전국 공의회에서 주교직에 추종자가 있는지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5]

목회적 관점에서 그는 기근, 난민 유입, 빈곤에 시달리는 로마에서 자선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특히 사순절에 금식을 자선과 구제와 연관시켰다.[4] 레오의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이전에는 모든 주교를 의미했던 "교황"이라는 용어가 로마 주교를 가리키는 전용어가 되었다.[6] 레오 1세는 많은 학자들을 주변에 모았고, 프로스페르 아키텐(Prosper of Aquitaine)을 비서 또는 공증인 역할로 임명했다.[4] 레오 1세는 교회 내 영적 권위의 중앙 집권화와 교황 권위 재확인에 크게 기여했다. 450년, 비잔티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는 레오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마 주교를 최초로 서방 총대주교(Patriarch of the West)라고 불렀는데, 이 칭호는 2006년부터 2024년 사이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교황들이 계속 사용하고 있다.[7]

447년까지 그는 이단자들이 가장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교황은 이단 추종자들이 살아남도록 허용한다면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이 모두 끝장날 것이라고 선언하며 사형을 정당화했다.[8]

3. 2. 지역 교회와의 관계

레오 1세는 교회 내에서 교황의 권위를 재확인하여 영적 권위의 중앙집권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방 교회에서 교황은 항상 중요한 위치였지만, 그 권위의 상당 부분은 지역 교구장들에게 위임되었다. 레오 1세는 갈리아에서 교황의 권위를 확고히 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를의 힐라리오 주교가 교황 조시모가 자신의 전임자인 아를의 파트로클로에게 갈리아 교회에 대한 사목권 일체를 부여했다고 주장하자, 브장송의 챌리도니오는 로마에 항소하였다. 힐라리오는 로마의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했지만, 레오 1세의 재판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레오 1세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로부터 칙령을 받아내어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받고, 로마로 출두 명령을 거부하는 주교는 강제 송환된다는 내용을 담았다.[49] 힐라리오는 결국 레오 1세에게 순명하였다. 450년 라벤니오 주교가 아를 교구장에 착좌하자 레오 1세는 아를 교구에서 빈 교구를 분할하였다.

445년 레오 1세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된 디오스코루스와 갈등을 빚었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는 당시 교회 조직에서 로마 다음가는 위치였다. 성 마르코 복음사가는 성 베드로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리아에 기독교를 전파해 교회를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는 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속주로, 반달족의 침공에도 니케아 신조를 지켜낸 정통 기독교 신앙의 보루였다. 이곳은 고립된 상태로 외부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고, 레오 1세는 이곳에서 교황권을 강력하게 행사할 기회를 얻었다.

이탈리아의 경우, 443년 캄파냐와 핀체눔, 토스카나의 주교들에게 서신을 보내 훈계를 따를 것을 권고하였다. 447년에는 세례 시기와 관련하여 로마 관습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시칠리아의 주교들을 꾸짖고, 로마 시노드에 대리인들을 보내 재교육을 받을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스의 경우, 로마 제국의 동서 분리 이후 일리리아는 교회법상 오랫동안 로마의 재치권을 따랐다. 교황 인노첸시오 1세는 테살로니카에 교황 총대리를 보내 관구로 제정하였는데,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446년경 레오 1세는 테살로니카의 새 주교 아나스타시우스에게 서신을 보내, 그가 레오 1세를 여러 관구장 주교 가운데 하나로 취급한 것에 대해 질책하였다. 레오 1세는 아나스타시우스에게 주교로서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면서, 일부 권리는 교황이 보유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보편 교회의 통치는 베드로좌 아래 통합되어야 하며, 어느 누구도 이 최고 권위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50]고 훈계하였다.

3. 3. 이단과의 투쟁

레오 1세는 아퀼레이아 교구에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이미 지적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조치 없이 교구 단체로 받아들여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고 질책하는 글을 썼으며, 시노드 소집에 앞서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고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다.[31]

마니교도들은 439년 반달족이 로마로 오기 전에 들어와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443년경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레오 1세는 마니교 대표자들과 만나 공적 논쟁을 벌이는 한편, 그들의 서적을 압수하여 불태우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니교를 경계할 것을 경고하는 등 마니교에 대해 계속 대항하였다.

프리스킬리안주의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아스토르가의 투루비노 주교는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프리스킬리안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것에 놀라 다른 히스파니아 주교들과 교황 레오 1세에게 서신을 보내 알렸다. 이에 레오 1세는 프리스킬리안주의에 대한 장문의 답신을 작성하여 그들의 신학적 오류를 자세히 반박하였다. 더불어 히스파니아 주교단에게 시노드를 소집해 프리스킬리안주의 추종자를 색출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당시 히스파니아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5]

3. 4. 칼케돈 공의회와 교의 서한

레오 1세는 칼케돈 공의회에 교황 특사들을 파견하여 자신의 교의를 전달하고, 이단 사상을 논박하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명확히 하였다. 그의 저술과 서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할에 대한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칼케돈 공의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51]

레오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원장 에우티케스가 주도한 단성설 논쟁을 통해 동방 교회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을 강화하려 했다. 에우티케스는 레오 1세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플라비아노에게 규탄받자 그에게 의탁했다. 레오 1세는 처음에는 플라비아노를 책망했지만, 이후 그를 옹호했다.[51]

451년 소집된 칼케돈 공의회에서 교황 특사가 레오 1세의 교의 서한(레오의 토메)을 낭독하자, 주교들은 "베드로께서 레오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51]라고 외치며 그의 가르침을 인정했다. 이 서한은 교황 무류성의 사례로 평가받기도 한다.[52]

제2차 에페소 공의회는 레오 1세의 서한을 무시하고 플라비아노 대주교를 해임했지만, 칼케돈 공의회는 이 결정을 번복하고 레오 1세의 교의 서한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서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음을 선포했다.[53][54]

레오 1세는 마니교와 도케티즘 이단자인 에우티케스의 면직을 요구하며,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게 새로운 공의회 소집을 요청했다. 황제 사후 아나톨리오스 총대주교는 레오 1세의 교의 서한을 공인했다.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며 참 사람이다. 신성과 인성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혼합되지도 변화하지도 구분되지도 분리되지도 않는다"는 신앙 고백문을 채택했다. 그러나 레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에 로마 교황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하는 조항에는 반대했다.

레오 1세의 설교 약 100편과 서한 약 150편이 전해져 오며,[12] 그의 ''토메''는 서방 그리스도론의 공식으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았다.[13]

칼케돈 공의회 회의록에는 레오 1세의 교의 서한 낭독 후 교부들이 "이것이 사도들의 신앙이다. ... 베드로는 레오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14][15][16]라고 외친 기록이 남아있다.

레오 1세는 마리아론그리스도론과 연결하여, 그리스도가 신성만 지녔다면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일 뿐이며, 인간은 부활의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17]

3. 5. 아틸라와의 만남 (452년)



451년 샬롱 전투에서 패배(실제로는 서로마 측 피해가 더 많았지만)한 후, 아틸라는 452년 이탈리아반도를 침략하여 아퀼레이아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약탈하고 로마로 진격하였다. 아틸라는 당시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지참금을 요구하였고, 이에 황제는 세 명의 사절을 보내 협상하였다. 사절단은 집정관 겐나디우스 아비에누스, 전 로마 시장 멤미우스 아에밀리우스 트리게티우스, 그리고 교황 레오 1세로 구성되었다.

협상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틸라는 군대를 이끌고 철수하였다. 아틸라가 물러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시되었는데, 교황이 많은 양의 금을 제공했거나, 이탈리아 북부의 역병 및 식량 부족,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와의 전투 등 병참 및 전략상의 문제 때문일 수 있다.

아키텐의 프로스페르에 따르면, 아틸라는 레오 1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물러났다고 한다.[55] 요르다네스는 아틸라가 410년 로마를 약탈한 직후 급사한 서고트 왕의 운명을 두려워했다고 전한다.[56] 8세기 후반의 파울루스 부제는 아틸라가 레오 1세와 회담 중 사제복 차림에 칼을 든 덩치 큰 사람의 위협을 받고 물러났다고 주장했다.[57] 이 이야기는 《황금전설》에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레오 1세와 함께 나타나 아틸라를 쫓아냈다는 이야기로 발전하였다.

3. 6. 가이세리크와의 만남 (455년)

455년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가 로마를 공격해 왔을 때, 레오 1세는 직접 가이세리크와 담판을 벌였다. 반달족의 로마 약탈은 막을 수 없었지만, 그의 영향력으로 살인과 방화는 억제되었다. 레오 1세와 그의 성직자들은 침략자들을 만나 그만두도록 간청했다. 그 결과 반달족이 도시를 약탈하는 동안 로마가 불타는 것을 막았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피난처를 찾은 성 베드로 대성전, 성 바오로 대성전, 성 요한 대성전이 보존되도록 했다.[57] 레오 1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과 같은 주요 장소들을 복원하면서 로마 도시 재건에 기여했다.

3. 7. 죽음과 유산

레오 1세는 461년 11월 10일에 사망했으며, 성 베드로의 무덤에 가능한 한 가깝게 매장되기를 원했기에 그의 시신은 구 성 베드로 대성당의 현관 안에 안치되었다.[29]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매장된 최초의 교황이었다.[29] 688년, 세르지우스 1세는 레오의 유해를 대성당 내 남쪽 횡랑으로 옮겼다. 이러한 이전은 후대 교황들의 매장으로 인해 세르지우스가 생각하는 레오의 무덤이 가져야 할 중요성이 가려졌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9]

사후 레오 1세의 시신은 그의 기념비 안에 매장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 그의 유해는 레오라는 이름을 가진 최초의 교황 네 명의 유해를 안치한 무덤에 합장되었다. 18세기에 레오 1세의 유해는 다른 레오 교황들의 유해로부터 분리되어 고유 경당에 안치되었다.[58]

레오 1세는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아틸라와 회담하여 평화적인 해결을 도모했다. 중세 헝가리의 연대기에 따르면, 교황은 아틸라에게 만약 평화적으로 로마에서 떠난다면 그의 후계자 중 한 명이 "성스러운 왕관"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43] 그 결과, 452년에 아틸라는 로마에서 철수했다(실제로는 훈족 진영에 전염병과 기근이 발생했다고 여겨진다[44][45][46]). 유럽에서는 로마 교황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아틸라에게 신의 천벌이 내려 사망하고, 남은 부하들은 천벌을 두려워하여 로마 교황의 충고를 따라 석양을 등지고 고향인 동쪽으로 돌아갔다는 매우 유명한 전승이 남아 있다.

또한 455년에 반달족의 왕 가이세릭의 군세가 로마에 침공해 왔을 때도, 책임자와 회담하여 학살과 로마의 파괴를 하지 않도록 요청하고,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레오 1세가 즉위했을 무렵의 유럽에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의한 분쟁 시대였지만, 레오 1세는 항상 평화적인 해결을 도모하고, 무력에 의한 해결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레오 1세는 "대교황(Great Pope)"이라고 불린다.

4. 사후 평가 및 영향

레오 1세는 위대한 행정가이자 신앙의 보존자였으며, 고대 교회의 초석을 놓은 교황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정치·사회적 불안과 교회 내 이단 사상으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 신학, 사목, 정치적 난제들을 훌륭하게 해결해냈다. 대내적으로는 로마 교회의 최고 통치권 기반을 확립했고, 대외적으로는 사실상 로마의 수호자 역할을 수행하여 당시 서방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52]

마태오 복음서 16장 16절~19절[59]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웠고,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서 교회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아 그를 대신하는 존재가 되었다. 베드로를 통해 다른 사도들도 권한을 일부 공유하게 되었으며, 베드로에게 맡겨진 권한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계승된다. 모든 주교는 자신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돌볼 책임이 있으며, 교황은 주교들의 으뜸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돌볼 책임이 있다. 레오 1세는 칼케돈 공의회의 결의도 자신의 승인이 있어야 정당성을 얻는다고 보았다.

레오 1세의 서간들과 강론집은 그의 업적과 성향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이다. 그는 고전 수사학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교부 시대의 마지막 교황이었으며, 그의 문체는 '레오 문체(cursus leonicus)'라 불리며 수 세기 동안 교회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레오 1세 이후 150년 동안 그와 같이 예술적인 서간이나 강론을 쓴 교황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뿐이었다.[60]

베네딕토 16세는 레오 1세의 재임 기간을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30] 1754년 베네딕토 14세는 레오 1세를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30][31] 레오 1세 외에 교회 박사로 인정받는 교황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뿐이다.[32]

가톨릭교회는 11월 10일을 성 레오의 축일로 기념한다. 한때 그의 유해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된 6월 28일에 기념하기도 했으나, 12세기부터 1969년까지는 4월 11일에 기념했다.[33] 동방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는 2월 18일에 성 레오를 기념한다.

영국 성공회미국 성공회의 성인력에서는 11월 10일에 레오 대왕을 기념한다.[34][35] 로마 예식에서는 그의 글 일부가 시간 전례에 사용된다.[36][37]

레오 1세는 훈족아틸라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그와 회담하여 평화적인 해결을 이끌어냈다. 중세 헝가리 연대기에 따르면, 교황은 아틸라에게 평화롭게 로마에서 떠나면 그의 후계자 중 한 명이 "성스러운 왕관"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43] 452년 아틸라는 로마에서 철수했는데, 실제로는 훈족 진영에 전염병과 기근이 발생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44][45][46] 유럽에서는 아틸라가 교황의 충고를 따르지 않아 신의 천벌을 받아 사망했다는 전승이 유명하며, 이는 기독교의 권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455년 반달족의 왕 가이세릭이 로마를 침공했을 때도, 레오 1세는 회담을 통해 학살과 파괴를 막고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레오 1세는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시기에 평화적인 해결을 추구하고 무력 사용을 지양했기에 "대교황(Great Pope)"이라고 불린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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