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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리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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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타리우스 2세는 9세기 서유럽의 프랑크 왕국의 왕족으로, 아버지 로타르 1세가 죽은 후 로타링기아를 상속받아 로렌의 왕이 되었다. 그는 정략 결혼한 테우트베르가와의 불화로 이혼을 시도했으나 교황의 반대로 실패했고, 정부 발트라다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의 이혼 시도는 당시 왕과 교회의 권력 관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결국 이혼에 실패하고 열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영토는 분할되었고, 그의 직계 남계는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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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리우스 2세
기본 정보
로타르 2세의 인장
통치 기간855년 – 869년
왕위 계승로타링기아 국왕
선임자로타르 1세
후임자샤를 2세
출생835년
사망869년 8월 8일
사망 장소피아첸차
매장 장소산탄토니노 대성당
배우자테우트베르가
발드라다
자녀위그
베르타
왕가카롤링거 왕조
아버지로타르 1세
어머니에르망가르드 드 투르

2. 생애

855년 아버지 로타르 1세가 프륌 수도원으로 은퇴하면서, 로타르 2세는 라인강 서안에서 북해에 이르는 베네룩스 지역을 상속받았다. 이 지역은 ''로타르의 왕국''(''Regnum Lotharii'')으로 불렸으며, 10세기 초반부터는 로타링기아로 불리게 되었다. 아헨벨기에 지역도 그의 영토였다.[9] 형인 루트비히 2세는 황제 지위와 북 이탈리아를, 동생 샤를은 부르고뉴프로방스를 물려받았다. 아날레스 연대기에 따르면, 로타르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샤를이 어리고 간질병을 앓는다는 이유로 영토 포기를 종용했지만, 샤를은 이를 거부했다.

863년 동생 샤를이 간질 등의 지병으로 죽자, 로타르 2세는 형 이탈리아인 루트비히와 함께 동생 영토의 일부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했지만, 바이킹 해적의 침략으로 제대로 관리하지는 못했다. 이때 로타르 2세는 프로방스-부르군트 왕국의 동북부 지방과 쥐라산맥의 남쪽 부분을 차지하였다.

로타르 2세는 알사스 출신의 첩 발드라다와 결혼하기 위해 왕비 토이트베르가와 이혼하려 했다. 대머리 샤를은 이혼을 반대했고, 게르만인의 루이는 지지했다. 로타르에게는 영토를 상속할 아들이 없었기에, 세 왕 사이에 다툼과 화해가 반복되었다. 로타르는 발드라다에 대한 애정으로 이혼을 원했고, 위베르가 테우트베르가를 위해 무기를 들었으며, 물의 시련을 거친 후, 로타르는 858년에 테우트베르가를 복귀시켜야 했다.

로타르 2세는 형인 이탈리아의 루이 2세의 지지를 얻고, 지역 성직자들의 동의를 얻어 862년에 무효화와 발드라다와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863년 메츠에서 열린 시노드는 이 결정을 확정했지만,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시노드의 결정을 무효화했다. 865년 로타르는 파문 위협을 받고, 루이 2세와 샤를이 그의 왕국 분할에 대해 논의했다고 확신하여 다시 아내를 데려왔다. 그러나 테우트베르가는 무효화를 원했고, 로타르는 하드리아노 2세의 동의를 얻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가, 869년 8월 8일 피아첸차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발드라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휴는 사생아로 선언되었고, 로타르 2세의 왕국은 메르센 조약으로 대머리 카를과 독일왕 루트비히에 의해 분할되었다.

2. 1. 초기 활동

로타르 1세와 투르의 이르멘가르트의 아들로 830년경 또는 835년경에 알사스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루트비히 이탈리아인과 프로방스의 샤를이 있었다. 851년 5월 20일에 어머니 투르의 이르멘가르트가 사망하였다. 소년 시절, 아버지 로타르 1세의 명령으로 아를 백작이자 토리노 백작인 대 보소의 딸 토이트베르가와 정략 결혼하였다. 그러나 로타르 2세에게는 알사스 백작 프룰라도(Fulrado)의 딸 발트라다라는 내연녀가 있었다.

이는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과 독일의 루트비히 2세가 그의 영토를 탐내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전쟁이 벌어질 경우 남쪽을 지켜줄 동맹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8] 그러나 그는 지방 귀족인 발트라다에게 커다란 애정을 품고 있었다.[8]

로타르 2세는 왕자 시절에 알사스 출신 첩 엔겔베르그(Engelberge)에게 트룬가르트(Trungard)라는 딸을 얻었고 역시 알사스 출신 첩 발트라다는 그에게 딸 베르타, 기셀라, 이르멘가르트와 아들 위그를 안겨주었다.

발트라다는 이미 아들 위그를 안겨주었지만 로타르 2세와 토이트베르가에게서는 끝내 자녀가 없었고, 로타르 2세는 내심 토이트베르가와 이혼을 계획하였다. 855년 아버지 로타르 1세가 군사를 이끌고 프리슬란트에 침공한 바이킹을 격퇴할 때, 함께 출정하였다.

855년, 아버지 로타르 1세는 죽음에 임하여 자신의 영토와 황제위를 세 아들에게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차남이었던 로타르는 아헨을 포함한 프리슬란트에서 북부 부르군트(쥐라 산맥 이북)에 이르는 로타링기아의 땅을 받게 되었다. 863년에 동생 샤를이 상속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로타르 2세와 형이자 황제인 로도비코 2세 (루트비히 2세)는 샤를의 영지를 분할하기로 했고, 로타르 2세는 리옹, 비엔, 그르노블 주교 관구를 얻었다.

855년에 보소 가문의 아를 백작 보소 3세의 딸 테우트베르가와 결혼했다. 그러나 정실 부인 테우트베르가와의 사이에 아이를 얻지 못했기에, 그녀에게 근친과의 불륜을 고백하게 하여, 이와 이혼하고, 애첩 발트라다와 결혼하려 했으나, 교황니콜라오 1세 등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2. 2. 왕위 계승

855년 아버지 로타르 1세가 프륌 수도원으로 은퇴하면서, 로타르 2세는 라인강 서안에서 북해에 이르는 베네룩스 지역을 상속받았다. 이 지역은 ''로타르의 왕국''(''Regnum Lotharii'')으로 불렸으며, 10세기 초반부터는 로타링기아로 불리게 되었다. 아헨벨기에 지역도 그의 영토였다.[9] 형인 루트비히 2세는 황제 지위와 북 이탈리아를, 동생 샤를은 부르고뉴프로방스를 물려받았다. 아날레스 연대기에 따르면, 로타르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샤를이 어리고 간질병을 앓는다는 이유로 영토 포기를 종용했지만, 샤를은 이를 거부했다.

아버지 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가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 했으나,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카를 2세는 로트링겐을 포기하지 않고, 나중에 로타르 2세 사후 다시 로트링겐을 넘보게 된다.[9]

855년 11월 로트링겐의 왕으로 즉위하고, 856년 독일인 루트비히의 집전 하에 기름부음 의식(세례)을 받았다.

863년 동생 샤를이 간질 등의 지병으로 죽자, 로타르 2세는 형 이탈리아인 루트비히와 함께 동생 영토의 일부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했지만, 바이킹 해적의 침략으로 제대로 관리하지는 못했다. 이때 로타르 2세는 프로방스-부르군트 왕국의 동북부 지방과 쥐라산맥의 남쪽 부분을 차지하였다.

855년 프륌 조약을 통해 중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었는데, 로타르 2세는 라인강 서쪽의 중 프랑크 영토를 물려받아 북해에서 쥐라 산맥까지 뻗어 있었다. 이 영토는 '레그눔 로타리'로 알려졌고, 10세기 초에는 로타링기아 또는 로렌으로 알려졌다.

863년 샤를이 사망하자, 로타르는 쥐라 남쪽의 일부 영토를 추가했지만, 노르만 해적에 대한 몇 차례의 미약한 원정을 제외하고는 통치나 방어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로타르 2세의 36개의 왕실 헌장이 현존한다.[1]

로타르 2세는 테우트베르가와 결혼했으나,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의 발드라다와의 결혼을 위해 테우트베르가와 이혼하려 노력했다. 대머리 샤를은 이혼을 반대했고, 게르만인의 루이는 지지했다. 로타르에게는 영토를 상속할 아들이 없었기에, 세 왕 사이에 다툼과 화해가 반복되었다. 로타르는 발드라다에 대한 애정으로 이혼을 원했고, 위베르가 테우트베르가를 위해 무기를 들었으며, 물의 시련을 거친 후, 로타르는 858년에 테우트베르가를 복귀시켜야 했다.

로타르 2세는 형인 이탈리아의 루이 2세의 지지를 얻고, 지역 성직자들의 동의를 얻어 862년에 무효화와 발드라다와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863년 메츠에서 열린 시노드는 이 결정을 확정했지만,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시노드의 결정을 무효화했다. 865년 로타르는 파문 위협을 받고, 루이와 샤를이 그의 왕국 분할에 대해 논의했다고 확신하여 다시 아내를 데려왔다. 그러나 테우트베르가는 무효화를 원했고, 로타르는 아드리아노 2세의 동의를 얻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가, 869년 8월 8일 피아첸차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발드라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휴는 사생아로 선언되었고, 로타르 2세의 왕국은 메르센 조약으로 대머리 카를과 독일왕 루트비히에 의해 분할되었다.

855년 로타르 1세는 세 아들에게 영토와 황제위를 분할했다. 로타르 2세는 아헨을 포함한 로타링기아의 땅을 받았다. 863년 샤를이 상속자 없이 사망하자, 로타르 2세와 로도비코 2세는 샤를의 영지를 분할했고, 로타르 2세는 리옹, 비엔, 그르노블 주교 관구를 얻었다.

855년 테우트베르가와 결혼했으나, 아이를 얻지 못해 이혼하고 발트라다와 결혼하려 했으나, 교황니콜라오 1세 등의 반대로 실패했다. 867년 하드리아노 2세와의 회견을 가졌고, 이혼 문제가 재심의될 예정이었으나, 869년 8월 피아첸차에서 사망했다. 로타르의 죽음은 메르센 조약의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어로렌(Lorraine), 독일어로 로트링겐(Lothringen)이라는 지명은 라틴어 "Lotharii Regnum"(로타르의 왕국)에서 유래되었다.

2. 3. 이혼 시도와 실패

855년 아버지 로타르 1세는 프뤼m 조약을 통해 중 프랑크 왕국을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로타르 2세는 라인강 서쪽의 북해에서 쥐라 산맥까지 뻗어 있는 영토를 물려받았다. 이 영토는 '레그눔 로타리'로 알려졌고, 10세기 초에는 로타링기아 또는 로렌으로 불렸다.[1] 863년 동생 샤를이 사망하자, 로타르는 쥐라 남쪽의 일부 영토를 추가로 얻었다.[1]

로타르 2세는 알사스 백작 프룰라도(Fulrado)의 딸 발트라다라는 내연녀가 있었고, 그녀에게서 아들 위그를 얻었다. 그러나 855년 아버지의 강요로 대 보소의 딸 토이트베르가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과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가 로타르 2세의 영토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로타르 1세는 혹시 모를 전쟁에 대비하여 왕국 남부의 강력한 귀족 가문과의 결혼을 추진한 것이다.[8]

토이트베르가에게서는 자녀가 없었고, 로타르 2세는 발트라다와 결혼하기 위해 857년부터 이혼을 시도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프로방스와 부르고뉴의 유력 가문인 보소 가문의 눈치를 보았고, 잘못 없는 이혼은 교회법상 부도덕한 일이라며 왕을 돕기를 주저했다.

로타르 2세는 이혼에 유리한 판결을 얻고자 지역 가톨릭 주교들에게도 꾸준히 설득과 투자를 했다. 그는 토이트베르가를 근친상간 혐의로 비난하고 재판을 열었지만, 그녀가 시련 재판을 이겨내자 주교단은 무죄를 선언했다. 로타르 2세는 이 판결을 무시하고 아내를 감금하여 자백을 받아냈지만, 힝크마르 대주교가 로타르의 재혼을 반대하는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재혼 반대 여론이 강해졌다.[10]

로타르 2세는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의 왕들에게 이혼을 도와달라고 청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했고, 결국 858년 토이트베르가를 다시 아내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862년 지역 성직자들의 동의를 얻어 863년 메츠 공의회에서 이혼과 발트라다와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이 결정을 무효화했고, 865년 로타르 2세는 파문 위협과 루이 2세와 샤를이 자신의 왕국 분할을 논의했다는 소식에 다시 아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테우트베르가는 이제 스스로 무효화를 원했고, 로타르는 새로운 교황 아드리아노 2세의 동의를 얻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지만, 귀국길에 열병으로 869년 8월 8일 피아첸차에서 사망했다.

2. 4. 2차 이혼 시도와 최후

로타르 2세는 자신의 동맹들에게 호의적인 쾰른트리어의 대주교들에게 도움을 호소하였다. 쾰른의 대주교는 로타르가 이혼한 뒤 자신의 조카가 그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12]

860년 2월 로타르 2세는 아헨의 공의회(또는 엑스 라 샤펠)에서 아내 테우트베르가가 순결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발드라다와 결혼하기 위해 테우트베르가와 별거하였다. 곧 아헨의 한 수도원에 감금되었던 테우트베르가는 같은 해에 탈출하여 친정 오빠 힉베르트가 있는 곳으로 갔다. 로타르 2세는 집요하게 테우트베르가와의 이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형 루트비히 황제의 지원을 얻었는데, 그는 형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고 지역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다. 또한 삼촌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지원을 일부 얻어냈다. 로타르 2세는 쾰른 대주교 군타하르와 트리어 대주교 토이트가우트를 사주하여 아헨에서 2차례 종교회의를 열어 이 결혼을 취소시키고 862년 정부 발트라다와 결혼했다.

862년 로타르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회 회의가 엑스 라 샤펠에서 열렸다. 로타르는 왕비가 엄청난 짓을 저질러 자신을 배신했다고 감정적으로 설명했으며, 재혼이 허락되지 않으면 성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죄를 저지르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고백했다.[12] 연대기에 따르면, 이 자리에 모인 고위 성직자들은 그의 고통에 눈물을 흘리며 로타르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재혼을 허락해주었다 한다.[12] 이듬해 그는 메츠 종교회의에서 이 결정에 대한 교황 대리의 추인을 받았다.

프랑크 주교들의 시노드는 863년 메츠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 결정을 확정했지만, 테우트베르가는 대머리 샤를의 궁정으로 도망쳤고,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시노드의 결정을 무효화했다. 황제의 로마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865년 로타르는 파문의 위협을 받고, 루이와 샤를이 최근 회의에서 그의 왕국 분할에 대해 논의했다고 확신하여 다시 아내를 데려왔다. 그러나 테우트베르가는 자의든 타의든 이제 무효화를 원했고, 로타르는 새로운 교황 하드리아노 2세의 동의를 얻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 교황의 말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귀국길에 올랐지만, 열병에 걸려 피아첸차에서 사망했다.

3. 유산과 영향

869년 토이트베르가는 메츠의 성 글로신드 수녀원(Abbatiale Sainte-Glossinde)으로 은퇴, 수녀원장이 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13]

성 안토니오 바실리카


로타르 2세는 교황 하드리아노 2세에게 이혼 승낙을 받고 돌아오던 길에 말라리아 열병에 걸려 869년 8월 8일 피아첸차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피아첸차 근처 성 안토니오 성당 바실리카(Basilica of Sant'Antonino)에 안치되었다. 그의 왕비 토이트베르가는 수녀가 되어 메츠의 생 글로신드 수녀원에 들어가 875년 11월 25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영토는 형인 이탈리아인 루트비히에게 돌아갔어야 했지만, 바리의 에미리트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와 교전하는 중이라서 로타르의 영토를 접수하지 못하고,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가 차지해버렸다. 이후 독일인 루트비히도 반발하여 교전한 뒤,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그의 영지인 로트링겐은 동서로 분할되어 동프랑크서프랑크에 각각 편입되었다.

로타르 2세의 정부 발트라다는 그가 이혼 승낙을 받으러 이탈리아로 가던 중이던 869년 4월 9일 병으로 죽어 르미르몽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발트라다보주주 르미르몽에 있는 르미르몽 수녀원(Remiremont Abbey)으로 은퇴했다가 곧 사망한다.

로타르 2세의 아들 위그는 877년 8월 루트비히 2세가 죽은 뒤 그는 로타르 1세의 직계 후손임을 내세워 이탈리아의 왕위를 요구하였지만 실패하였다. 878년교황 요한네스 7세는 위그의 파문을 선언했다. 위그는 879년 서프랑크의 루이 2세가 사망하자 서프랑크의 왕위를 차지하려 하였으나 루트비히 3세가 보낸 군사들이 루이 3세와 샤를로망을 보호하였으므로 실패했다.

883년 위그의 누이인 기셀라가 프리슬란트의 후작 고드프리와 결혼, 이를 이용하여 다시 아버지의 영지를 탈환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885년 뚱보왕 카를과의 전투 중 885년 6월 바벤부르크에서 프랑켄의 하인리히에게 체포, 프리슬란트 후작 고드프리는 바로 살해되고 그는 장님, 벙어리가 된 뒤 세인트 갈 수도원에 감금되었다가 다시 포에른 수도원으로 옮겨진 뒤 죽었다. 이로써 그의 직계 남계는 단절되고 만다.

딸 베르타는 아를의 보소에게 시집갔는데 그들의 아들이 후일 이탈리아의 왕인 위그이다. 위그의 아들이 이탈리아의 로타리오로, 로타르 2세를 이탈리아의 군주로 간주하여 그의 외증손인 로타르는 로타로 3세로 부르기도 한다.

로타르 2세의 이혼 실패 사건은 다른 군주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합법적인 아내가 후계자를 낳지 못했을 때 왕이 재혼하고 싶다 해도 교회의 협조를 얻지 못한다면 결국 파멸을 몰고 올 족쇄에 묶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14] 귀족과 왕들은 필요하다면 계속 교회에 저항했지만, 이혼을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때에도 일단은 이혼 불가 원칙을 받아들이고 대신 좀 더 그럴 듯한 핑계를 제공해줄 수 있는 생활 방식을 선택해 교회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는 경우가 점점 더 증가하였다.[14] 로타르 2세의 패배는 세속의 군주가 교황보다 아래라는 메시지도 되었다. 그러나 군주들과 귀족들은 반발했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후대에 하인리히 4세교황 그레고리오 7세 간의 정치적 대결로 표면화되었다.

그의 아들 휴는 발드라다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사생아로 선언되었고, 그의 상속자는 형제인 이탈리아의 루이 2세였다. 루이가 당시 바리 토후국을 상대로 원정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왕국은 삼촌인 대머리 카를과 독일왕 루트비히에 의해 메르센 조약으로 분할되었다.

로타르 2세는 발드라다와의 사이에서 여러 아들과 아마도 세 딸을 두었으며, 모두 사생아로 선언되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855년895년알자스 공작 (867년885년)
기젤라865년908년883년에 고프리와 결혼. 고프리는 프리슬란트를 통치하는 바이킹 지도자였으나 885년에 살해당했다.
베르타863년925년아를의 테오발트 (854년경 – 895년)와 결혼했는데, 그는 테우트베르가의 조카였다. 그들은 두 아들, 이탈리아의 휴와 토스카나의 보소를 두었다. 테오발트가 죽은 후, 895년에서 898년 사이에 그녀는 토스카나의 아달베르트 2세 (875년경 – 915년)와 결혼했다.[2] 그들은 적어도 세 자녀를 두었다. 가이[3]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루카의 백작이자 공작, 토스카나의 변경백이 되었고, 람베르트는 929년에 형의 뒤를 이었지만 931년에 이복 형제인 토스카나의 보소에게 작위를 빼앗겼으며, 에르멩가르드가 있었다.
에르멩가르드?90?년
오도879년경 사망



855년 보소 가문의 아를 백작 보소 3세의 딸 테우트베르가와 결혼했다. 그러나 정실 부인 테우트베르가와의 사이에 아이를 얻지 못했기에, 그녀에게 근친과의 불륜을 고백하게 하여 이혼하고, 애첩 발트라다와 결혼하려 했으나, 교황니콜라오 1세 등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867년 니콜라오 1세가 사망하고, 형 로도비코 2세 부부의 중재로 후임인 하드리아노 2세와의 회견을 가졌고, 이혼 문제가 재심의될 예정이었으나,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인 869년 8월, 서자만을 남기고 피아첸차에서 사망했다. 로타르의 죽음은 메르센 조약의 계기가 되었다.

로타르 2세와 관련된 로타링기아 - 프랑스어로렌(Lorraine), 독일어로 로트링겐(Lothringen) - 이라는 지명은, 라틴어의 "Lotharii Regnum"(로타르의 왕국)에서 유래되었으며,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발트라다와의 사이에서 1남 3녀의 서자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알자스 공작 위고855년895년알자스 공작 (867년 - 885년)
기젤라860년908년프리슬란트 공작 고트프리트와 결혼
베르타863년925년1. 아를 백작 테오발트 (보존가)와 결혼, 2. 토스카나 변경백 아달베르토 2세와 결혼
에르멘가르다?898년성 자스틴 수도원의 수녀


4. 가계

로타르 2세는 이탈리아의 왕 로타르 1세와 투르 백작 위그의 딸 투르의 이르멘가르트의 아들이다. 알사스에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루트비히 이탈리아인과 프로방스의 샤를이 있었다. 그의 외할아버지인 투르 백작 위그는 메로빙거 왕조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로타르 2세는 왕자 시절에 알사스 출신 첩 엔겔베르그에게 트룬가르트라는 딸을 얻었고, 알사스 출신 첩 발트라다에게서는 딸 베르타, 기셀라, 이르멘가르트와 아들 위그를 얻었다. 발트라다가 낳은 세 딸 역시 로타르 2세 사후, 카를 2세와 독일인 루트비히에 의해 사생아로 신분이 격하되었다.


  • 조부 : 루트비히 1세 경건왕(776년 ~ 840년)
  • * 숙부 : 페펭(797년 ~ 838년) : 아키텐의 왕, “피핀”이라고도 부른다.
  • * 숙부 : 루트비히 2세(802?,805? – 875?, 876?) : 바이에른의 왕(817~875), 동 프랑크 왕(843~875), 루트비히 독일왕이라고도 부름
  • * 고모 : 아델라이드
  • * 숙부 : 대머리 카를, 카롤루스 2세(823 ~ 877) : 서프랑크 왕(840 ~ 877), 신성로마황제(875 ~ 877)
  • * 고모 : 기셀라
  • 부왕 : 로타르 1세(795년 ~ 855년): 중프랑크 왕(818 ~ 855), 신성로마황제(840 ~ 855)
  • 모친 : 투르의 이르멘가르트(Ermengarde of Tours, ? ~ 851년)
  • * 누이 : 이르멘가르트(Ermengarde)
  • * 매형 : 바이에른의 카를만(Carloman of Bavaria)
  • * 형 :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825~875), 이탈리아의 왕(844~875), 신성로마황제(855~875)
  • * 동생 : 프로방스의 샤를(?~863), 부르고뉴와 프로방스의 왕(856~863)
  • 부인 : 부르고뉴의 토이트베르가, 튜트베르가(Teutberga, 825년 - 875년 11월 25일/11월11일), 성 마우리키우스 수도원의 평신도 수도원장 힉베르트의 여동생
  • 부인 : 보름스가우의 발라다(Walrada)
  • * 아들 : 위그(Hugh, 855년 ~ 895년)
  • * 딸 : 기셀라(Gisela, 860년/865년 - 908년 6월 21일/10월 26일)
  • * 딸 : 베르타(Bertha, 863년 - 925년)
  • * 사위 : 아를의 테오발트, 본처 토이트베르가의 오빠 힉베르트의 아들
  • ** 외손자 : 위그(Hugh), 이탈리아의 왕
  • * 딸 : 이르멘가르트(Ermengarde, ? - 907년 8월 6일)
  • 첩 : 이름 미상
  • * 서자 : 로트링겐의 오도(Odo de Lotharingia, ? - 879년)
  • 첩 : 마틸다(Matilde, ? - 890년)
  • * 서녀 : 마틸다(Matilda de Lotharingia)
  • 첩 : 보름스가우의 이르멘가르트(Ermentrude of Wormsgau)
  • 첩 : 알사스의 엔겔베르그(Engelberge)
  • * 서녀 : 트룬가르트(Trungard Of Lorraine, 850경 ~ 896)


로타르 2세의 자녀
배우자이름출생사망비고
토이트베르가자녀 없음
발트라다위그855년경895년알자스 공작 (867–885)
기셀라865년경908년883년에 고프리와 결혼
베르타863년경925년아를의 테오발트와 결혼, 토스카나의 아달베르트 2세와 재혼
이르멘가르트?907년 8월 6일
이름 미상오도?879년경
마틸다마틸다?890년
엔겔베르그트룬가르트850년경896년



알사스, 토리노, 발루아백작인 보소 가문과는 이중으로 인척 관계였다. 이혼한 본처 토이트베르가의 친정아버지였고, 발라다에게서 얻은 서녀 베르타는 다시 토이트베르가의 오빠인 힉베르트의 아들 아를의 테오발트에게 시집갔다. 이들의 아들은 후에 롬바르디아의 왕 위그이고, 손자는 로타리오 3세였다.

그는 서프랑크의 왕 무위왕 루이 5세에게도 조상이 된다. 서프랑크의 루이 5세는 로타르 2세의 배다른 삼촌 카를 2세에게는 남계 5대손이지만, 로타르 2세의 딸 베르타의 아들이 롬바르디아의 왕 위그이고, 롬바르디아의 왕 위그의 손녀이자 로타리오 3세의 딸 엠므가 서프랑크의 로타르 4세에게 시집가 루이 5세를 얻게 된다. 서프랑크의 무위왕 루이 5세는 모계로 로타르 2세의 외5대손이 된다.

참조

[1] 웹사이트 Die Urkunden Lothars I. und Lothars II. http://turbulentprie[...] Berlin 1966
[2] 서적 Early Medieval Italy: Central Power and Local Society 400-1000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3] 서적 Ecclesiastical and Civil History Philosophically Considered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문서 이는 근대 이후 독일의 로트링겐. 프랑스의 로렌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되었다.
[8] 서적 진화하는 결혼 작가정신
[9] 서적 교회사 콘서트 한국학술정보
[10] 서적 진화하는 결혼 작가정신
[11] 웹사이트 Annales Bertiniani II, anno 858, p. 95 http://gallica.bnf.f[...]
[12] 서적 진화하는 결혼 작가정신
[13] 웹사이트 Foundation for Medieval Genealogy :LOTHARINGIA - LOTHAIRE (835) http://fmg.ac/Projec[...]
[14] 서적 진화하는 결혼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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