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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 (서프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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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테르 (서프랑크)는 954년 부왕 루이 4세의 사망으로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초기에는 파리 백작 위그와 쾰른 대주교 브루노의 후견을 받았으며, 노르망디 공작을 비롯한 가신들과의 전쟁, 로렌 지역을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되찾으려는 시도 등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정치적, 군사적 도전을 겪었다. 특히 오토 2세와의 갈등으로 인해 아헨 기습 공격과 프랑스 침공을 경험했으며, 980년에는 로렌을 포기하는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위그 카페와의 권력 다툼 속에서 986년 사망했으며, 왕위는 아들 루이 5세가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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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 (서프랑크)
기본 정보
로타르의 흉상, 1140년경, 랭스 생 레미 박물관 소장
이름로타르
프랑스어 이름Lothaire
라틴어 이름Lothārius
통치
통치 시작954년 9월 10일
통치 종료986년 3월 2일
대관식954년 11월 12일
대관식 장소프랑스
계승서프랑크 왕
이전 통치자루이 4세
다음 통치자루이 5세
가문
왕가카롤링거 왕조
아버지루이 4세
어머니게르베르가 폰 작센
개인 정보
출생941년
출생지라온
사망986년 3월 2일 (44세)
사망지라온
매장지생 레미 대성당, 랭스
배우자 및 자녀
배우자엠마 디탈리아 (965년 결혼)
자녀루이 5세
랭스 대주교 아르눌프 (사생아)

2. 생애

954년 아버지 루이 4세가 사망하면서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했다. 초기에는 파리 백작 위그 (956년 사망)와 쾰른 대주교 브루노 1세 (로테르의 숙부, 965년 사망)의 후견을 받았다.[47]

로테르의 통치 초기에는 노르망디 공작 등 가신들과의 전쟁이 잦았다. 또한 오토 2세에게 빼앗긴 로렌을 되찾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977년, 오토 2세는 로테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생 샤를에게 하로렌 공작위를 주었지만,[48] 로테르는 978년 봄, 아헨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오토 2세를 사로잡기 직전까지 갔다. 이에 오토 2세는 같은 해 가을, 프랑스에 보복전을 펼쳤다. 오토 2세의 군대는 파리 근교까지 침공했지만 영토를 빼앗지는 못하고, 손실을 입고 철수했다.[49] 결국 980년 5월 마르귀 쉬르 시에르(Margut-sur-Chiers)에서 양자 간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로테르는 로렌을 포기했다.[50]

980년경부터 로테르는 위그 카페와 대립하게 되었다. 한편, 오토 2세의 급사로 아달베론의 중재로 후계자 오토 3세와 화해했다.

986년 3월 2일, 로테르는 라온에서 사망했다. 왕위는 로타르 2세의 딸 엠마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루이 5세가 계승했다.

로테르는 이복 동생 샤를의 궁정 재상 로베르 백작의 여동생으로 알려진 애인과의 사이에서 아르누르, 리샤르라는 두 명의 서자를 두었다. 서자 아르누르(아르눌프)는 988년위그 카페의 추천으로 아달베론의 후임으로 랭스 대주교가 되었다.[51]

2. 1. 출생과 초기 활동

서프랑크의 왕 루이 4세와 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의 딸인 게르베르가의 아들로 태어났다.[4] 어머니 게르베르가는 독일의 군주 새사냥꾼왕 하인리히 1세의 딸로, 로테르의 증조부 샤를르 르 쇼브의 외손녀이자 로렌 공작 기셀베르트[52]의 부인이었으나, 기셀베르트 사후 정략결혼으로 하인리히 1세는 그를 루이 4세에게 시집보냈다. 하인리히 1세로렌을 정복하면서 로렌의 통치자인 기셀베르트를 회유할 목적이었다. 로테르의 동생은 로렌의 샤를이다.

로테르


로테르 2세 (왼쪽), 성 미하일 주교(가운데),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 2세(오른쪽)


로테르 시대의 데나리온 동전 1종의 스케치본


954년 9월 10일 아버지 루이 4세에 의해 공동 통치자이자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그해 11월 아버지 루이 4세가 랭스에서 낙마 사고로 갑자기 죽은 뒤, 13세의 나이로 랭스의 생 레미 바실리카에서 왕위에 올랐으나,[5] 960년까지 파리 백작 위그의 섭정으로 보호를 받았다. 귀족들은 대 위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어머니 게르베르가의 민첩한 움직임으로 왕위를 승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테르는 아버지의 정적인 대 위그의 영향력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독일프랑스를 오가던 외삼촌 브루노 등과 비밀리에 연락했다. 루이 4세가 죽자 로테르는 어머니 게르베르가가 독일의 친정에 급히 연락하였고, 서프랑크의 귀족들이 국왕을 선출하기 전에 외삼촌인 오토 1세, 쾰른의 대주교 브루노, 이모이자 대 위그의 부인인 작센의 헤드비가의 개입하에 그해 11월 12일 랭스 대성당에서 왕으로 즉위했다.[5]

대 위그를 지지하던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그의 정적이나 다름없었고, 베르망두아의 백작 아달베르트 1세 역시 로테르를 위협하는 적이었다. 로테르는 즉위 직후 독일의 외삼촌 쾰른 대주교 브루노 3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브루노 3세는 962년까지 로테르의 후견인을 맡았다.[47]

게르베르가 왕비는 로테르의 아버지와 적대 관계였던 프랑크 공작이자 파리 백작위그 르 그랑과 협약을 맺었다.[7][8] 로테르의 통치를 지지하는 대가로 위그는 아키텐 공작과 부르군디 왕국의 상당 부분을 섭정으로서 다스리게 되었다.[9][8] 로테르는 분열된 왕국을 물려받았는데, 이곳에서 유력자들은 왕의 권위에 거의 개의치 않고 토지, 권리 및 관직을 차지했다.[10] 위그 르 그랑과 베르망두아의 에르베르 2세와 같은 유력자들은 항상 은밀한 위협이었다.[10]

955년 로테르와 위그 르 그랑은 함께 푸아티에를 포위했다. 956년 위그 르 그랑이 사망하자 15세에 불과했던 로테르는 외삼촌인 쾰른의 브루노의 보호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동프랑크의 국왕 오토 1세의 형제였다. 브루노의 조언에 따라 로테르는 위그의 아들들인 위그 카페와 부르고뉴 공작 오토 사이에서 중재했다. 국왕은 파리와 ''dux francorum''(프랑크 공작) 칭호를 위그 카페에게 주었고, 956년에는 오토에게 부르고뉴 공작을 봉했다.

2. 2. 즉위 초반

954년 9월 10일 13세의 나이로 아버지 루이 4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954년 11월 12일 랭스 대성당에서 랭스의 아르탈드 랭스 대교구 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거행했다.[5] 메로빙거 왕조에 의해 프랑크 왕국이 세워진 이후 왕위 계승 관습에 따라, 로타르는 951년 부친의 질병 이후부터 이미 왕위에 연관되어 있었다.[6]

로타르의 어머니 게르베르가 왕비는 로타르의 아버지와 적대 관계였던 매형 프랑크 공작이자 파리 백작위그 르 그랑과 협약을 맺었다.[7][8] 위그는 로타르의 통치를 지지하는 대가로 아키텐 공작과 부르군디 왕국의 상당 부분을 섭정으로서 다스리게 되었다.[9][8] 로타르는 분열된 왕국을 물려받았는데, 이곳에서 유력자들은 왕의 권위에 거의 개의치 않고 토지, 권리 및 관직을 차지했다.[10] 위그 르 그랑과 베르망두아의 에르베르 2세와 같은 유력자들은 항상 은밀한 위협이었다.[10]

아버지의 정적인 대 위그는 그의 이모부가 되기도 했다. 그는 대 위그의 가신이었던 부르고뉴 공작 오토 하인리히와 아키텐 공작 윌리엄 3세의 공작직위와 공작령 박탈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955년 아키텐 공작 윌리엄 3세의 아키텐 공작직 박탈을 놓고 대 위그와 갈등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한편 로타르는 자신의 동생 로렌의 샤를에게 아무런 직위도 부여하지 않은 채 농장에서 살게 했다.

955년 위그와 로테르는 푸아티에를 손에 넣었으나 위그는 곧 죽었고, 그는 카를 마르텔을 기념하여 푸아티에를 성역화하였다. 그 뒤 로테르는 위그의 아들 위그 카페와 동생 오토-앙리의 사이를 중재했다. 위그 형제의 갈등으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그는 자신의 후견인으로 독일에 있던 외삼촌 브루노를 서프랑크로 초빙했다. 956년부터 로테르는 외삼촌이자 오토 1세의 형제인 쾰른 대주교 브루노의 보호 아래 있었다. 한편 또다른 외삼촌 오토 1세는 로테르와 대 위그를 적당히 균형, 조절하여 서프랑크 왕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대 위그 및 그의 지지자들, 그리고 오랫동안 자신의 가문에 앙심을 품어온 헤르베르티언 왕가를 견제할 목적으로 외삼촌 브루노 대주교를 프랑스에 머무르게 하고 싶어하였다. 당시 파리백작이던 대 위그는 프랑크 공작이라는 직책으로 국정에 개입했고, 로테르는 대주교이자 가톨릭 사제였던 외삼촌 브루노 대주교에게도 특별히 프랑크 공작(duc des Francs)이라는 작위를 부여하였다.

965년 10월 11일 후견인이자 보호자인 외삼촌 쾰른 대주교 브루노가 랭스 대성당에서 죽고, 969년 5월 5일 어머니 게르베르가가 사망하자 그는 독일을 침공할 계획을 수립한다.

2. 3. 독일과의 관계

962년부터 로테르는 플랑드르 지방을 복속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동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간 로타링기아를 다시 복속하려고 몇 차례 시도하였다. 965년 플랑드르의 백작 아르눌프 1세는 아들 보두앵이 일찍 죽었으므로, 손자를 보호해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영지를 로테르에게 양도하였다. 그러나 아르눌프 1세의 손자 아르눌프 2세는 로테르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반항하였다. 로테르의 보호자 브루노가 죽자 로테르는 독일과 대항하였고, 978년 위그 카페와 함께 독일을 침공했다. 뫼즈강에서 오토를 패퇴시키고 아헨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오토 2세를 거의 붙잡을 뻔하였다. 오토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를 공격하여 거의 파리까지 진격하였고 도중에 수아송, 랭스 등을 유린했다. 그러나 위그 카페 등 강력한 귀족들이 로테르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결국 퇴각하고 980년 7월 오토와 로테르는 평화조약을 맺었다.[13] 이 합의로 로테르는 로렌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여 오토 2세가 비잔틴 이탈리아에 군사적 관심을 돌릴 수 있게 했다.

977년 로테르는 자신의 아내 이탈리아의 엠마와 라온의 대주교 아달베론(Adalberon)이 간통했다고 주장, 생 메르크(Sainte-Macre)의 법정에 회부했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978년 그는 아헨을 회복할 것을 선언하고 바로 군사를 이끌고 아헨으로 진격했다. 오토 2세는 임신 중이던 아내 테오파노와 함께 황급히 쾰른으로 도주했다. 로테르는 오토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아헨 점령을 확인했으나 통치를 위해 다시 자기 영토인 서프랑크로 돌아와야 했다. 퇴각하기 전 로테르는 아헨의 제국 궁전을 약탈, 파괴하였다. 후에 외사촌 오토 2세는 그의 동생 로트링겐 공작 샤를과 로테르의 갈등을 유도하여 혼란을 부추겼으나 실패했다. 오토 2세는 서프랑크의 영토를 쪼개어 로테르의 동생 샤를 또는 로테르의 서자 아르눌프를 분리된 부분의 왕으로 임명하려는 시도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로테르는 979년 6월 8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자신의 아들인 루이 5세를 축성하고 공동 통치자로 선언하였다. 오토는 978년 10월 파리를 침공했고, 로테르는 도피했다. 바로 오토는 그의 동생 샤를을 프랑크의 왕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30일 위그 카페의 군사력에 의지해 복위할 수 있었다.

오토 2세는 로렌을 둘로 나누어 북쪽의 하 로렌 공작으로 그의 동생 샤를을 임명했다. 983년 12월 7일 오토 2세가 죽고 어린 오토 3세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에게 납치되었다가 독일 왕으로 즉위하자, 로테르는 이를 기회삼아 독일을 침공, 984년 베르덩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베르덩 공작 고드프리와 상 로렌 공작 디트리히 1세는 오토 3세를 지지했고, 그는 베르덩을 다시 반환해야 했다. 그러나 985년 3월 다시 베르덩을 침공하고 고드프리와 디트리히를 사로잡는다. 그는 동부 로렌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는 군사작전을 펼치던 중 병을 얻게 된다.

쾰른의 브루노 대주교의 섭정은 965년까지 이어졌으며, 로테르를 동프랑크에 복종하는 정책으로 이끌었다. 동프랑크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로테르는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통치하기를 원했고, 그의 봉신들에 대한 권위를 강화했다. 이러한 정치적 독립에 대한 열망은 국왕과 그의 모계 친척들 간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신성 로마 제국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테르는 966년 초, 엠마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오토 1세 황제와의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11]

976년, 몽의 레니에 4세와 루뱅의 람베르 1세 형제는 오토 2세 황제에게서 부계 유산을 빼앗긴 후, 로렌 공작 샤를 (로테르 국왕의 동생)과 베르망두아의 오토와 동맹을 맺고 군대를 이끌고 황제군에 맞섰다. 몽스에서 승패를 알 수 없는 큰 전투가 벌어졌다.[14][15] 로테르는 은밀히 이 전쟁을 장려했지만, 직접 형제를 돕기 위해 개입하지는 않았다.

978년 8월 로테르는 위그 카페를 동반하여 로렌으로 원정을 떠났고, 뫼즈강을 건너 아헨을 점령했지만 오토 2세나 샤를은 붙잡지 못했다. 로테르는 3일 동안 제국 아헨 궁전을 약탈했고, 샤를마뉴의 청동 독수리의 방향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려놓았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오토 2세는 샤를과 함께 978년 10월 서프랑크를 침공하여 랭스, 수아송(수아송 생 메다르 수도원에서 경건하게 기도했다.) 그리고 라옹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로테르는 제국군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지만, 샤를은 오토 1세 황제의 친척인 메츠의 디트리히 1세 주교에 의해 라옹에서 프랑크 왕으로 선포되었다. 제국군은 파리까지 진격했고, 그곳에서 위그 카페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978년 11월 30일, 오토 2세와 샤를은 파리를 점령할 수 없었고, 도시 포위를 풀고 물러섰다. 로테르가 이끄는 프랑크 왕실군은 그들을 추격하여 엔강을 건너는 동안 격파했고, 라옹을 탈환할 수 있었으며, 오토 2세를 도망가게 하여 서프랑크에 강요하려던 꼭두각시 왕인 샤를과 함께 아헨으로 피신하게 했다.

서 프랑크 왕국이 오토 2세에 대항하여 단결한 결과, 위그 카페의 시대로 로베르티안 왕조가 두각을 나타냈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가 왕 로테르를 충실히 섬겼다고 증언했다.[23] 황제와의 싸움은 위그 카페의 권력을 강화했는데, 이는 980년 그가 아르눌프 2세로부터 몽트뢰이 쉬르 메르를 점령했을 때 드러났다.

로테르는 추방된 형제 샤를의 야망을 좌절시키고, 아들을 위해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아버지의 방식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979년 6월 8일, 루이 5세는 공동 통치자 또는 어린 왕(''iunior rex'')으로 즉위했다.[24][25] 비록 그가 986년 로테르가 사망할 때까지 실제로 권력을 잡지는 못했지만[26][27] 이는 서 프랑크 왕국에서 이 새로운 관행이 두 번째로 시행된 것이며, 이후 카페 왕조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후 로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랭스 주교와 라옹 주교는 아르덴 가문과 함께 이러한 화해를 지지했다.

983년 12월 7일, 오토 2세 황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세 살 된 아들 오토 3세가 상속자가 되었다.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는 가장 가까운 오토 왕조 친척으로서, 별다른 반대 없이 왕국의 섭정을 얻었고, 자신이 왕으로 선포되기를 바라며 오토 3세를 납치했다.[31] 랭스의 아달베론은 오토 3세와 그의 어머니인 테오파누 황후를 지지하고자 하였고, 로테르에게 바이에른 공작에 대항하여 황후를 지지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아달베론은 테오파누의 이름으로 로테르에게 로타링기아 회복을 제안했다. 로테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어린 조카 오토 3세에 대한 후견인 지위와 로타링기아에 대한 관할권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아달베론 덕분에 로테르는 베르됭 백작 고드프루아 1세를 포함한 여러 주요 로타링기아 귀족들로부터 충성을 받았다. 고드프루아 1세는 아르덴 가문의 일원이었다. 또한, 그는 상 로렌을 얻고자 했던 동생 샤를과 화해했다(당시 상 로렌은 섭정인 프리드리히 1세의 미망인이자 위그 카페의 여동생인 베아트릭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로테르는 이후 로타링기아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얻기를 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 2세의 계획이 빠르게 실패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984년 중반, 테오파누 황후와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는 오토 3세를 구출하고 제국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31] 그 후 보름스에서 하인리히 2세와 테오파누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은 로타링기아에 대한 카롤링거 왕조의 주장을 종식시키고, 아르덴 가문의 승리를 재확인했으며, 아르덴 가문은 그곳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로테르는 자신이 정당하게 속한 땅이라고 생각하는 로타링기아를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하인리히 2세와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고, 985년 2월 1일, 그들의 연합군은 브리사흐의 라인강 유역에 도착했다. 이 동맹은 랭스의 아달베론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는 위그 카페와 연락을 취했다. 하인리히 2세는 로테르와의 동맹을 지키지 않았고, 이에 로테르는 혼자 로타링기아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위그 카페의 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그는 자신의 여동생과 조카를 전복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양쪽 중 어느 쪽도 명확하게 지지하지 않고 오토 왕조의 패권을 선호했다. 결국 로테르는 왕국의 가장 강력한 백작들인 블루아 백작 오도 1세와 모 백작 에르베르 3세의 지원을 얻었다. 그 직후, 그들은 상 로타링기아를 침공하여 베르됭을 포위했고, 985년 3월까지 여러 중요한 포로들을 붙잡았다. 이들에는 베르됭의 고드프루아 1세(아달베론의 형제)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아르덴 백작 지크프리드 (고드프루아 1세의 삼촌) 및 상 로렌 공작 테오도리크 1세 (위그 카페의 조카)가 있었다.[32]

2. 4. 위그 카페와의 갈등

위그 카페의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로테르는 아내 엠마와 앙주 백작 조프루아 1세의 조언에 따라, 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루이를 앙주의 아델라이드-블랑슈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아델라이드-블랑슈는 조프루아 1세의 누이이자, 남부의 강력한 영주인 제보당 백작 스테판과 고티아 공 레이몽 3세 백작의 미망인이었다. 로테르의 계획은 야심찬 것이었다. 서프랑크 남부의 반독립적인 지역에 왕실 카롤링거 왕가의 존재를 회복하고, 리케루스에 따르면, 로베르티안 가문에 대항하기 위해 남부 귀족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아델라이드-블랑슈와 루이 공의 결혼식은 982년 비에유-브리우드(오트-루아르)에서 열렸으며, 그들은 아델라이드의 오빠인 르 퓌의 주교 기에 의해 즉시 아키텐의 왕과 여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곧 루이는 15세, 아델라이드는 40세라는 눈에 띄는 나이 차이와 루이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984년 결혼 생활이 끝나게 되었고, 로테르는 아들을 지지하는 한편 아델라이드는 프로방스 백작 기욤 1세에게 피신했는데, 기욤 1세는 곧 그녀의 네 번째 남편이 되었다.

그러나 이 결혼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동시대의 기록과 후대의 자료(리케루스, 라울 글라베르, ''안제빈 연대기'' 및 생 막상스 연대기 등)에 기록되어 있지만, 최근 역사학자 칼리히아르트 뷜에 의해 이의가 제기되었다.[30]

앙주 가문과의 동맹 실패는 로베르티안 가문의 권력을 강화시켰고, 마침내 그들은 987년 로렌 공작 샤를에 대항하여 위그 카페를 지지했다.

아키텐 위기에서 벗어난 로테르는 왕국의 10명의 강력한 북부 주교와 그들의 봉신들의 충성을 믿었고, 그의 이복 누이인 로렌의 게르베르가의 아들인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3세를 통해 강력한 베르망두아 가문과의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에르베르 3세는 비교적 나이가 많았고, 그의 아버지인 루이 4세를 섬겼던 주교들은 왕실의 이익을 수호하는 것보다 영적인 임무에 더 기울어져 있었다. 로테르는 이전 프랑크 전통에 부합하는 어떠한 대규모 정복 계획을 실행하고 그를 중심으로 귀족들을 동원할 능력이 부족했다.

코르도바 칼리프 알 만수르가 985년 바르셀로나를 약탈했을 때, 로테르는 병을 앓고 있었고, 보렐 2세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었다. 보렐 2세는 베르됭으로 사절을 보냈었다.[33] 이는 그의 후계자 시대에 히스파니 마르크와 프랑크 왕가의 최종 분열에 기여했다.

이 시점에서 로테르의 권력은 위그 카페의 권력보다 현저히 약해 보였다.[31] 오리야크의 게르베르는 아달베론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테르는 이름뿐인 프랑스 왕입니다. 그러나 위그는 이름뿐 아니라 실제 행동에서도 그러합니다."라고 썼다.[34]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달베론 대주교는 공개적으로 친 오토파 견해를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위그 카페가 오토 3세와 관계를 맺도록 영향을 미치려 했다.[31] 왕이 베르됭의 생 폴 수도원 주변의 요새 파괴를 명령했을 때, 아달베론은 그의 배고픈 군인들이 더 이상 도시를 지킬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격분한 로테르는 아달베론을 재판에 넘기려 했다. 986년 5월 11일, 아달베론은 거짓 구실(그 중 하나는 그의 조카이자 동명이인인 아달베론을 왕의 동의 없이 베르됭 주교직에 앉힌 것이었다.[35])로 콩피에뉴에서 열린 회의에 소환되었고, 놀란 대주교에게 반역죄를 적용했다.[36] 위그 카페는 경고를 받고 6,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콩피에뉴로 진군하여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회의를 해산시켰다.[36] 일부 역사가들은 위그 카페의 개입이 아달베론의 방어보다는 그의 조카인 어린 상로렌 공작 테오도리크 1세의 석방을 얻기 위한 동기가 더 컸다고 믿는다.[37] 로테르는 아달베론이 고드프루아 1세 백작의 아들인 그의 조카 베르됭의 아달베론을 추궁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베르됭과 그 지역에 대한 그의 압력을 강화하려 했을 수도 있다.[37]

로테르는 위그 카페에 맞서 공개적인 전쟁을 벌일 여유가 없었고, 그렇게 되면 두 전선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는 이후 로렌 포로들을 석방했지만, 고드프루아 1세는 에노 백국의 몬스를 포기하고 그의 아들이 백국과 베르됭 주교직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대신 감옥에 남기로 했다. 한편, 왕과 프랑크 공작의 회동 이후, 상로렌의 테오도리크 1세가 석방되었다.

2. 5. 생애 후반

984년 로테르는 다시 독일을 공격하여 어린 오토 3세를 사로잡았으나, 테오파노 황후와 마인츠의 성 빌리지스(Willigis) 대주교에 의해 구출되었다.[31] 985년에는 코르도바의 칼리프 알-만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같은 해 베르덩에서 위그 카페의 측근인 몽 백작이자 안트워프 후작 프리드리히의 기습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986년 초 랭스 대주교와 리에 대주교의 도움을 얻어 캉브레를 진격하여 점령했다.

977년 로테르의 동생인 하로렌 공작 샤를은 왕비 엠므가 라온주교 아스셀린(Ascelin)과 간통했다며 고소하였다. 생 마스레의 종교 회의에 회부된 왕비 엠므는 무죄를 주장했고, 재판 결과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은 왕비 엠므의 무죄를 선언했다. 즉시 샤를은 독일로 도주하였다.

978년 6월 로테르는 아들 루이 5세를 왕국의 공동 국왕으로 선포하였다. 이는 자신이 죽었을 때, 루이 5세가 무리없이 단독 국왕으로 통치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한편 로테르는 로트링겐(로렌)을 다시 회복함과 동시에 독일 진출을 계획하던 중 과로로 병을 얻었다. 오토 2세가 죽자 그는 오토 3세의 후견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로테르는 로트링겐 회복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986년 2월경부터 병을 얻어 병석에 누웠다. 986년 3월 2일에 로테르는 라온에서 갑자기 죽었고 왕위는 아들 루이에게 돌아갔다. 그의 왕비인 엠므는 로테르가 라온주교 아스셀린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983년 12월 7일, 오토 2세 황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세 살 된 아들 오토 3세가 상속자가 되었다.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는 가장 가까운 오토 왕조 친척으로서, 별다른 반대 없이 왕국의 섭정을 얻었고, 자신이 왕으로 선포되기를 바라며 오토 3세를 납치했다.[31] 랭스의 아달베론은 오토 3세와 그의 어머니인 테오파누 황후를 지지하고자 하였고, 로테르에게 바이에른 공작에 대항하여 황후를 지지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아달베론은 테오파누의 이름으로 로테르에게 로타링기아 회복을 제안했다. 로테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어린 조카 오토 3세에 대한 후견인 지위와 로타링기아에 대한 관할권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아달베론 덕분에 로테르는 베르됭 백작 고드프루아 1세를 포함한 여러 주요 로타링기아 귀족들로부터 충성을 받았다. 고드프루아 1세는 아르덴 가문의 일원이었다. 또한, 그는 상 로렌을 얻고자 했던 동생 샤를과 화해했다(당시 상 로렌은 섭정인 프리드리히 1세의 미망인이자 위그 카페의 여동생인 베아트릭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로테르는 이후 로타링기아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얻기를 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 2세의 계획이 빠르게 실패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984년 중반, 테오파누 황후와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는 오토 3세를 구출하고 제국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31] 그 후 보름스에서 하인리히 2세와 테오파누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은 로타링기아에 대한 카롤링거 왕조의 주장을 종식시키고, 아르덴 가문의 승리를 재확인했으며, 아르덴 가문은 그곳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로테르는 자신이 정당하게 속한 땅이라고 생각하는 로타링기아를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하인리히 2세와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고, 985년 2월 1일, 그들의 연합군은 브리사흐의 라인강 유역에 도착했다. 이 동맹은 랭스의 아달베론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는 위그 카페와 연락을 취했다. 하인리히 2세는 로테르와의 동맹을 지키지 않았고, 이에 로테르는 혼자 로타링기아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위그 카페의 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그는 자신의 여동생과 조카를 전복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양쪽 중 어느 쪽도 명확하게 지지하지 않고 오토 왕조의 패권을 선호했다. 결국 로테르는 왕국의 가장 강력한 백작들인 블루아 백작 오도 1세와 모 백작 에르베르 3세의 지원을 얻었다. 그 직후, 그들은 상 로타링기아를 침공하여 베르됭을 포위했고, 985년 3월까지 여러 중요한 포로들을 붙잡았다. 이들에는 베르됭의 고드프루아 1세(아달베론의 형제)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아르덴 백작 지크프리드 (고드프루아 1세의 삼촌) 및 상 로렌 공작 테오도리크 1세 (위그 카페의 조카)가 있었다.[32]

로테르는 라옹으로 돌아온 후, 아달베론에게 베르됭에 요새를 건설하여 제국군에 의해 도시가 점령되는 것을 막도록 강요했다. 그는 또한 트리어 대주교 에크베르트, 빌리기스 오브 마인츠 및 쾰른 대주교 에베르가르에게 서신을 써서 자신이 카롤링거 제국의 진정한 유일한 상속자라고 밝히도록 강요했다.

986년 초 로테르는 제국 도시인 캉브레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캉브레는 랭스 대주교구와 리에주 주교구에 속해 있었다.[38] 그는 아달베론의 폐위 이후 랭스 대주교로 임명하고, 리에주 주교(주교 노트거)를 오토 제국으로 보낸[39] 대가로 로타르가 주교 로타드를 설득하여 도시를 넘겨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986년 3월 2일, 국왕은 라옹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4][36][40] 그는 성대한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 루이 4세 곁인 랭스 생 레미 성가대에 묻혔다.

왕조 교체 1년 후 로타르의 왕국은 파괴 불가능해 보였다. 로트링겐이 복종하지 않았지만 제국의 관성으로 인해 새로운 정복을 고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41] 리체루스에 따르면 "그는 왕국을 더욱 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이점을 찾고 있었다. 그의 정책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대귀족의 포획으로 유리해진 왕국의 상황은 강력했다."[42] 실제로 로타르는 마지막 몇 년 동안 로트링겐을 정복하기 위해 외교적, 군사적으로 예외적인 활동을 펼쳤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샤를 3세
부왕루이 4세
모후작센의 게르베르가잉글랜드의 에드지푸, 에드워드 대왕의 딸
동생로렌의 샤를
왕후이탈리아의 엠므948년 ~ 988년?
이탈리아의 엠마 소생
아들루이 5세967년~987년 5월 27일
아들외드(Eudes)랭스의 주교, 970년~986년 11월 13일 사망
아들오토(Otto)986년 11월 13일 사망
이름 미상의 후궁 소생
서자랭스의 아르눌프967년 - 1021년 3월 5일, 랭스 대주교
서자리샤르(Richard)991년 사망
외가
외조부하인리히 1세
외조모마틸다 폰 링겔하임 (성녀 마틸다)
외삼촌오토 1세
외삼촌브루노 주교
외삼촌바이에른 공 하인리히 1세



로테르 1세는 부인 이탈리아의 엠마와의 사이에서 루이 5세(966/967년 – 987년 5월 22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와 오토(970년경 – 986년 11월 13일 이전, 랭스 대성당의 사제) 두 아들을 두었다.[4]

로테르는 또한 형제 샤를의 궁재인 로베르 백작의 여동생과의 사이에서 랭스의 아르눌프(967년 이전 – 1021년 3월 5일, 랭스 대주교)와 리차드(991년 이후 사망) 두 명의 사생아 아들을 두었다.[44][4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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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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