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타니아 호의 침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은 1915년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한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 사건을 다룬 윈저 맥케이의 1918년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이 영화는 사건의 참상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시도로 평가받는다. 맥케이는 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22개월 동안 약 25,000장의 그림을 그렸으며, 셀 애니메이션 기법을 일부 사용했다. 당시에는 혁신적인 기법과 사실적인 묘사로 호평을 받았지만,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은 북대서양에서 잠수함(U보트)을 이용한 작전을 활발히 전개했다. 1915년 4월, 독일 정부는 영국의 민간 선박을 공격 목표로 삼을 수 있음을 공식적으로 경고했다.
윈저 맥케이는 루시타니아 호 침몰 사건에 대한 애국심과 당시 고용주였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반전(反戰) 논조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 애니메이션 제작을 결심했다. 침몰 당시의 사진 기록이 없어 생존자 증언과 언론 보도를 토대로 작품을 구상했으며,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초로 진지하고 극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2. 역사적 배경
영국의 대형 여객선 RMS ''루시타니아''는 1906년 건조 당시 세계 최대 크기를 자랑했던 선박이다.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윈저 맥케이는 이 배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만화 ''레어비트 피드의 꿈''(1907년)과 ''미스터 버니언의 순례자의 여정''(1908년)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1915년 5월, ''루시타니아'' 호는 아일랜드 근해에서 독일 U보트 SM U-20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으며, 이 사건은 많은 인명 피해와 함께 미국 내 여론을 자극하여 이후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맥케이가 소속된 신문사를 소유한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미국의 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에, ''루시타니아'' 호 침몰 사건의 보도를 축소하려 했다. 그러나 맥케이는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고, 점증하는 미국 내 참전 여론과 궤를 같이했다. 편집장 아서 브리스번의 반전, 반영국적 논조 요구에 반발하여, 맥케이는 1916년부터 자신의 시간을 투자해 이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 애니메이션 ''루시타니아호의 침몰'' 제작에 착수했다.
침몰 순간을 담은 실제 사진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맥케이는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서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허스트 소속 베를린 특파원 어거스트 F. 비치로부터 정보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 역사상 처음으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진지하고 극적인 내용을 다루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2. 1. 루시타니아 호 사건
1915년 5월 7일, 영국 국적의 호화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가 아일랜드 남부 해안에서 독일의 U보트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공격으로 승객과 승무원을 합쳐 총 1,198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사망자 중에는 미국인 128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뉴욕에서 만화가이자 애니메이터로 활동하며 성공을 거두고 있던 윈저 맥케이(Windsor McCay)는 이 비극적인 사건에 큰 충격을 받고, 이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맥케이는 1915년부터 3년에 걸쳐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약 2만 5천 장으로 추정되는 그림을 직접 그려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 대작을 완성했다.
루시타니아 호 침몰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맥케이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사건의 참상을 널리 알리고 미국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자 했으나, 페이퍼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의 특성상 시간이 오래 걸려 작품이 완성될 무렵에는 이미 전쟁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니메이션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다룬 최초의 본격적인 기록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인물 중심의 서사나 극적인 이야기를 배제하고 사건 자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기술적으로는 배경까지 포함하여 모든 장면을 일일이 종이에 그리는 페이퍼 애니메이션 기법을 주로 사용했으며, 부분적으로 셀 애니메이션과 오려내기 기법도 도입되었다. 이 작품 이후 맥케이는 셀 애니메이션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2. 2. 윈저 맥케이의 이전 작품
윈저 맥케이(1869년경–1934년)는 어릴 적부터 정교하고 정확한 그림 실력을 보였다. 젊은 시절에는 다임 박물관에서 초상화와 포스터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고, 사람들 앞에서 빠르게 그림을 그리는 능력으로 많은 관객을 모았다. 1898년부터는 신문 삽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903년부터는 만화를 그렸다. 그의 가장 큰 성공작은 1905년에 연재를 시작한 어린이 판타지 만화 ''슬럼버랜드의 리틀 니모''였다. 1906년부터는 분필 토크(chalk talk)라는 형식으로 보드빌 무대에 서기 시작했는데, 이는 관객 앞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는 공연이었다.
아들이 가져온 플립북에서 영감을 받은 맥케이는 자신의 만화를 이용해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 가능성"을 보았다. 그의 첫 번째 애니메이션 영화는 1911년에 제작된 ''리틀 니모''로, 쌀 종이에 그린 4천 장의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다음 작품인 ''모기가 작동하는 방식''(1912)은 거대한 모기가 잠든 남자의 피를 빨아먹다가 결국 터져버리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후 맥케이는 자신의 보드빌 쇼와 상호작용하는 애니메이션 영화 ''거티 더 다이노소어''(1914)를 만들었다. 이 공연에서 맥케이는 무대 위에서 채찍을 사용하여 애니메이션 속 공룡 거티에게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선보였다.
3. 제작 과정
제작에는 총 22개월이 소요되었으며, 맥케이는 자신의 사비를 들여 제작 비용을 충당했다. 이 작품에서 맥케이는 처음으로 셀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하여 작업 효율성을 높였고, 이웃 예술가 존 피츠시몬스와 만화가 앱 아담스의 도움을 받았다. 총 25,000장의 그림을 사용하여 약 274.32m 길이의 필름으로 완성되었다.
3. 1. 제작 배경
윈저 맥케이(1869년경–1934)는 어린 시절부터 정교하고 정확한 그림 실력을 보였다. 젊은 시절에는 다임 박물관에서 초상화와 포스터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고,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리는 능력으로 많은 관객을 모았다. 1898년부터 신문 삽화가로 활동했으며, 1903년부터는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1905년에 연재를 시작한 어린이 판타지 만화 ''슬럼버랜드의 리틀 니모''이다. 1906년부터는 분필 토크 공연을 통해 보드빌 무대에 서기도 했다.
아들이 가져온 플립북에 영감을 받은 맥케이는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 가능성"을 보고 애니메이션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의 첫 애니메이션 영화는 쌀 종이에 그린 4천 장의 그림으로 만든 ''리틀 니모''(1911)였고, 이후 거대한 모기가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모기가 작동하는 방식''(1912)을 제작했다. 또한, 무대에서 애니메이션 공룡에게 명령을 내리는 인터랙티브 영화 ''거티 더 다이노소어''(1914)를 만들어 자신의 보드빌 쇼에 활용했다.
맥케이는 영국 여객선 RMS ''루시타니아''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배는 1906년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여객선 기록을 세웠으며, 맥케이는 자신의 만화 ''레어비트 피드의 꿈''(1907년 9월 28일자)과 ''미스터 버니언의 순례자의 여정''(1908년 11월 10일자)에 이 배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은 북대서양에서 잠수함(U보트)을 이용한 작전을 펼쳤고, 1915년 4월에는 영국 민간 선박에 대한 공격을 예고했다. 결국 1915년 5월 7일, 뉴욕을 떠나 항해 중이던 ''루시타니아'' 호는 독일 U-20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인 128명을 포함한 총 1,198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이후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맥케이의 고용주였던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미국의 전쟁 참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한 신문들을 통해 이 비극적인 사건을 축소 보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허스트의 신문 독자들 사이에서는 ''루시타니아'' 호 사건 이후 점차 전쟁 참여를 지지하는 여론이 강해졌다. 맥케이 역시 이러한 독자들과 같은 입장이었지만, 편집장 아서 브리스번은 그에게 반전 및 반영국적인 내용의 사설 삽화를 그리도록 요구했다. 1916년, 맥케이는 이러한 고용주의 입장과 편집장의 요구에 반발하여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들여 전쟁 참여를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애니메이션 ''루시타니아호의 침몰'' 제작에 착수했다.
침몰 당시의 실제 사진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맥케이는 생존자들의 증언과 당시 언론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작품을 구상했다. 특히, 사건 현장에 있었던 허스트 소속 베를린 특파원 어거스트 F. 비치로부터 ''루시타니아'' 호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었다고 밝혔다. 맥케이는 이 작품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전쟁의 참상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자 했으며, 이는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초로 진지하고 극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15년부터 3년에 걸쳐 약 2만 5천 장에 달하는 그림을 그려 10분 분량의 이 대작 애니메이션을 완성했다.
3. 2. 제작 기법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은 제작에 22개월이 걸렸다. 윈저 맥케이는 이웃이자 예술가인 존 피츠시몬스와 신시내티 출신 만화가 윌리엄 앱토프 "앱" 아담스의 도움을 받았다. 아담스는 촬영을 위해 셀을 순서대로 배치하는 작업을 담당했고, 피츠시몬스는 맥케이가 그린 그림 위에 겹쳐질 파도 움직임을 16프레임 주기로 반복되는 시퀀스로 제작했다. 맥케이는 낮 동안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소유의 신문사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했고, 퇴근 후 집에서 영화에 사용할 셀을 그린 뒤 비타그래프 스튜디오로 가져가 촬영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맥케이의 이전 작업 방식은 매우 힘들었다. 예를 들어 ''거티 더 다이노소어''에서는 조수 한 명이 배경 그림 수천 장을 일일이 따라 그려야 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경쟁자들은 작업량을 줄이고 제작 속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개발했다. 맥케이의 ''리틀 니모''가 나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는 캐나다인 라울 바레가 고안한 레지스터 페그(종이를 고정하는 장치)와 미국인 얼 허드가 개발한 셀 기법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얼 허드는 1914년에 셀 기법으로 특허를 받았다. 이 기술은 움직이는 그림을 투명한 셀룰로이드 판(셀)에 그리고, 이를 미리 그려둔 정적인 배경 위에 겹쳐 촬영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애니메이터들은 매번 배경까지 새로 그리는 반복적인 수고를 덜 수 있었고 작업량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맥케이는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을 제작하면서부터 이 셀 기법을 도입했다.
맥케이는 이전의 모든 영화처럼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 제작 비용도 직접 마련했다. 셀을 사용하는 것은 추가 비용이 드는 일이었지만, 이전 방식에 비해 그려야 할 그림의 총량을 크게 줄여주었다. 당시 사용된 셀은 나중에 업계 표준이 된 것보다 두꺼웠고, 표면이 거칠어 연필, 수채화, 크레용, 먹선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림을 많이 그리다 보니 셀이 휘어져 촬영 시 정렬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는데, 동료인 피츠시몬스가 개조된 루즈 리프 바인더(종이를 끼웠다 뺄 수 있는 형태의 철)를 사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맥케이는 영화 8초 분량을 만드는 데 약 8주가 걸렸다고 밝혔다. 총 25,000장의 그림을 사용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약 274.32m 길이의 필름에 해당한다. 기술적으로 이 작품은 배경까지 한 장씩 그리는 전통적인 페이퍼 애니메이션 기법을 기본으로 하면서, 셀 애니메이션과 오려내기 기법을 부분적으로 도입한 과도기적 형태를 보여준다. 이 작품 이후 맥케이는 본격적으로 셀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전환하게 된다.
3. 3. 제작 기간 및 자금 조달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은 제작에 22개월이 걸렸다. 맥케이는 자신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 제작 자금을 직접 조달했다. 그는 낮에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소유 신문사에서 삽화가로 일하고, 퇴근 후에는 집에서 영화의 셀을 그리는 작업을 했다. 완성된 셀은 비타그래프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제작에는 이웃 예술가 존 피츠시몬스와 신시내티 출신 만화가 윌리엄 앱토프 "앱" 아담스가 참여했다. 아담스는 셀을 촬영 순서대로 정리하는 일을 맡았고, 피츠시몬스는 맥케이가 그린 그림 위에 겹쳐질, 16프레임으로 순환되는 파도 움직임을 만들었다.
맥케이는 ''거티 더 다이노소어'' 제작 때와는 달리,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부터 셀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했다. 이는 미국인 얼 허드가 1914년에 특허를 받은 기술로, 움직이는 그림을 투명한 셀에 그린 뒤 이를 정적인 배경 위에 놓고 촬영하는 방식이다. 이 기법은 배경을 매번 다시 그릴 필요가 없어 애니메이터의 작업량을 줄여주었다. 셀을 사용하는 것은 비용이 더 들었지만, 이전 방식보다 필요한 그림의 수를 크게 줄여주었다.
이때 사용된 셀은 이후 업계 표준이 된 것보다 두꺼웠으며, 연필, 수채화, 크레용, 먹선 등을 사용하기 좋게 표면이 거칠었다("이빨"이 있었다). 그림을 많이 그리면서 셀이 휘어져 촬영 시 정렬하기 어려워졌는데, 피츠시몬스는 개조한 루스 리프 바인더를 이용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맥케이에 따르면 영화 8초 분량을 만드는 데 약 8주가 걸렸다. 총 25,000장의 그림이 사용되어 약 274.32m 길이의 필름을 채웠다고 전해진다.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은 1918년 7월 19일에 저작권 등록되었으며, 주얼 프로덕션(Jewel Productions)이 배급을 맡았다. 주얼 프로덕션은 당시까지 단편 영화에 지불된 최고가로 이 영화의 판권을 확보했다고 보도되었다. 이 영화는 유니버설 픽처스의 주간 뉴스 영화에 포함되어 상영되었고, 유니버설의 사내 간행물인 ''The Moving Picture Weeklyeng''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1919년 5월에는 영국에서 초연되었다. 광고에서는 이 영화를 "인류를 충격에 빠뜨린 범죄의 세계 유일의 기록"이라고 불렀다.
4. 영화 내용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The Sinking of the Lusitaniaeng)은 1918년 미국에서 제작된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윈저 맥케이가 감독 및 제작을 맡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발생한 실제 사건인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영화는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실사 프롤로그로 시작하여, 이후 애니메이션으로 루시타니아 호가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25,000장의 그림을 사용하여 제작되었으며, 애니메이션을 통해 참혹한 사건 현장을 재현하고 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사건 기록을 넘어, 독일 제국의 비인도적인 공격 행위를 고발하고 미국 내 반독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한 선전 영화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특히 영화 마지막 부분의 자막은 독일 카이저가 어뢰 발사 책임자에게 훈장을 수여한 사실을 언급하며 노골적으로 독일을 비판한다.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은 애니메이션 역사뿐만 아니라 선전 영화 역사에서도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4. 1. 시놉시스
영화는 윈저 맥케이가 제작 중인 영화의 모델로 루시타니아 호 사진을 연구하는 실사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자막은 맥케이를 "애니메이션 만화의 창시자이자 발명가"라고 칭찬하며, 영화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25,000장의 그림에 대해 언급한다. 맥케이는 익명의 조수들과 함께 "''루시타니아''호 침몰의 첫 번째 기록" 작업을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객선은 자유의 여신상을 지나 뉴욕 항구를 떠난다. 시간이 흐른 뒤, SM U-20 잠수함이 물을 가르며 ''루시타니아''호에 어뢰를 발사하고, 어뢰는 연기를 내뿜으며 화면을 뒤덮을 때까지 솟아오른다. 승객들은 구명정을 내리려고 애쓰지만, 혼란 속에서 일부는 전복된다. 여객선은 좌우로 기울어지고 승객들은 바다로 던져진다.
두 번째 폭발이 ''루시타니아''호를 강타하고, 더 많은 승객들이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배는 천천히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익사하는 시체들의 장면 속으로 배가 잠기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영화는 파도 위에서 아기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자막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 어뢰를 발사한 남자는 카이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에게 훈족을 미워하지 말라고 한다.'"
4. 2. 주요 장면
여객선은 자유의 여신상을 지나 뉴욕 항구를 떠난다. 시간이 흐른 뒤, 독일 잠수함 U-20이 물살을 가르며 ''루시타니아''호에 어뢰를 발사한다. 발사된 어뢰는 거대한 연기 기둥을 일으키며 화면을 가득 채운다.
승객들은 구명정을 내리려 하지만 혼란 속에서 일부 구명정은 전복된다. 배는 좌우로 심하게 기울어지고 많은 승객이 바다로 내던져진다.
곧이어 두 번째 폭발이 ''루시타니아''호를 강타한다. 더 많은 승객이 배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나가고, 배는 서서히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화면에는 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치며 배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영화는 파도 위에서 아기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자막이 나타난다. "그 어뢰를 발사한 남자는 카이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에게 훈족을 미워하지 말라고 한다.'"
5. 스타일 및 기법
이 애니메이션은 윈저 맥케이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사실주의에 중점을 둔 스타일을 보여준다. 당시의 사설 만화 기법과 실사 장면을 결합하여 사건을 "역사적 기록"으로 제시하고자 했으며, 이는 강한 선전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애니메이션 기법 측면에서는 섬세하고 유동적인 움직임과 교차 편집 등을 활용하여 현실감을 높였다. 또한, 잠수함 시점이나 추상적인 배경 표현 등을 통해 심리적인 긴장감과 비극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5. 1. 사실주의적 묘사

이 애니메이션은 사설 만화 기법과 실사 장면을 결합했으며, 맥케이의 가장 현실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영화의 중간 자막은 이 작품이 사건의 "역사적 기록"임을 강조했다. 맥케이는 애니메이션 역사학자 도널드 크래프톤이 "현실적인 그래픽 스타일"이라고 묘사한 방식으로 액션을 연출했다. 영화는 어두운 분위기와 강한 선전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는 어린이의 익사 장면과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뛰어내리는 승객들의 인간 사슬과 같은 끔찍한 운명을 묘사한다. 작품은 매우 섬세하고, 애니메이션은 유동적이며 자연스럽다. 맥케이는 교차 편집을 사용하여 뉴스 영화의 느낌을 시뮬레이션했으며, 이는 영화의 현실적인 느낌을 강화했다.
맥케이는 수면 아래에 숨어 있는 잠수함의 불안감을 유발하는 장면과 익사하는 시체들을 집어삼키는 광대한 공허함, 즉 하늘과 바다의 흰 시트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등 "역사적 기록"에 감정을 더하기 위해 스타일리시한 선택을 했다. 애니메이션 역사학자 폴 웰스는 프레임 속의 부정적 공간이 심리 투사 또는 내사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불안감을 채워주었다고 제안했는데, 이는 영화 개봉 전 몇 년 동안 널리 퍼지기 시작한 정신분석학적 프로이트의 생각이었다. 학자 울리히 메르클은 신문 기자였던 맥케이가 프로이트의 널리 알려진 작품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제안했지만, 맥케이는 그러한 영향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5. 2. 애니메이션 기법
이 애니메이션은 사설 만화 기법과 실사 장면을 결합했으며, 맥케이의 가장 현실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영화의 중간 자막은 이 작품이 사건의 "역사적 기록"임을 강조했다. 맥케이는 애니메이션 역사학자 도널드 크래프톤이 "현실적인 그래픽 스타일"이라고 묘사한 방식으로 액션을 연출했다. 영화는 어두운 분위기와 강한 선전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는 어린이의 익사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뛰어내리는 승객들의 인간 사슬과 같은 승객들의 끔찍한 운명을 묘사한다. 작품은 매우 섬세하고, 애니메이션은 유동적이며 자연스럽다. 맥케이는 교차 편집을 사용하여 뉴스 영화의 느낌을 시뮬레이션했으며, 이는 영화의 현실적인 느낌을 강화했다.
맥케이는 수면 아래에 숨어 있는 잠수함의 불안감을 유발하는 장면이나, 익사하는 시체들을 집어삼키는 듯한 광대한 공허함(하늘과 바다를 흰색으로 표현)과 같은 추상적인 스타일링을 통해 "역사적 기록"에 감정을 더하는 스타일리시한 선택을 했다. 애니메이션 역사학자 폴 웰스는 프레임 속의 부정적 공간이 심리 투사 또는 내사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불안감을 채워주었다고 보았다. 이는 영화 개봉 전 몇 년 동안 널리 퍼지기 시작한 정신분석학적 프로이트의 생각과 연결될 수 있다. 학자 울리히 메르클은 신문 기자였던 맥케이가 프로이트의 널리 알려진 작품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맥케이가 그러한 영향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
6. 평가 및 영향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특히 중립국이던 미국의 참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독일 U보트에 의한 민간인 여객선 공격은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대한 비판 여론을 고조시켰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애니메이터 윈저 맥케이는 동명의 애니메이션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사건의 비극성을 알리고 미국의 참전을 독려하려는 선전의 목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초기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로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맥케이의 작품은 당시 애니메이션 기술의 혁신을 보여주었으나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 후대에 중요한 역사적, 예술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건과 이를 다룬 애니메이션은 전쟁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과 평화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한다.
6. 1. 당대 평가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은 전쟁 선전물로 평가받으며, 당시 가장 긴 애니메이션 작품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다만, 1917년 아르헨티나 애니메이터 퀴리노 크리스티아니가 제작한 7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 영화 ''엘 아포스톨''이 더 길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 영화는 초기의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중 하나로 여겨진다.
맥케이의 전기 작가이자 애니메이터인 존 카네메이커는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을 "애니메이션 영화 역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동시대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에게도 호평받았지만, 카네메이커는 맥케이의 기술력이 당시 애니메이터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그 시대의 영화 만화에 혁명을 일으키지는 못했다"고 분석했다. 이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은 주로 7분 내외의 코미디 단편 영화 제작에 집중했고, 애니메이션은 장편 영화의 부가적인 요소로 취급받으며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몇 년간 극장에서 상영되었지만, 맥케이에게 돌아온 수익은 약 8만달러에 그쳤다. 맥케이는 이후 최소 7편의 영화를 더 제작했지만, 이 중 상업적으로 개봉된 것은 3편뿐이었다.
1921년, 맥케이가 신문 삽화 작업보다 애니메이션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 것을 알게 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그에게 애니메이션 제작 중단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정글 임프스'' 작가 조지 랜돌프 체스터와의 협업, 뮤지컬 영화 ''더 반야드 밴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의 역할을 다룬 영화 등 맥케이가 구상했던 여러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다. 말년에 맥케이는 애니메이션을 예술로 여겼으나 점차 상업화되는 현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카네메이커는 1930년대 디즈니 스튜디오의 장편 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애니메이션 산업이 맥케이의 기술 수준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애니메이션 역사학자 폴 웰스는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 스타일과 선전적 요소를 결합한 "애니메이션 영화 발달의 획기적인 순간"으로 묘사하며 모더니즘의 한 형태로 보았다. 스티브 보토모어는 이 작품을 "Lusitania|루시타니아eng" 참사를 다룬 가장 중요한 영화 버전"이라고 평가했다. 영화 잡지 ''The Cinema''의 리뷰에서는 특히 첫 번째 어뢰가 폭발하는 장면을 언급하며 "현실 그 이상"이라고 칭찬했다. 이러한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미국 국립 영화 등록부에 보존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맥케이는 이 작품을 통해 루시타니아 호 침몰 사건의 비극을 알리고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촉구하고자 했으나, 페이퍼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의 특성상 시간이 오래 걸려 완성될 무렵에는 전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본격적으로 다룬 세계 최초의 애니메이션 중 하나이자, 인물이나 서사보다는 사실 자체를 묘사하는 데 집중한 중요한 영상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기술적으로는 배경까지 모두 손으로 그리는 페이퍼 애니메이션 기법을 주로 사용했으며, 일부 셀 애니메이션과 오려내기 기법도 도입되었다. 이 작품 이후 맥케이는 셀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전환하게 된다.
6. 2. 후대 평가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은 전쟁 영화 선전물로 언급되었으며, 종종 당시 가장 긴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영화는 초기의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맥케이의 전기 작가이자 애니메이터인 존 카네메이커는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을 "애니메이션 영화 역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비록 동시대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에게 칭찬을 받았지만, 카네메이커는 맥케이의 기술이 당시 애니메이터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그 시대의 영화 만화에 혁명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카네메이커에 따르면, 1930년대 디즈니의 장편 영화가 나올 때까지 애니메이션 산업은 맥케이의 기술 수준을 따라잡지 못했다.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몇 년간 극장에서 상영된 후 맥케이에게 약 8만달러의 수익을 안겨주는 데 그쳤다.
애니메이션 역사학자 폴 웰스는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을 다큐멘터리 스타일과 선전적 요소를 결합한 "애니메이션 영화 발달의 획기적인 순간"이라고 묘사하며, 애니메이션을 모더니즘의 한 형태로 간주했다. 스티브 보토모어는 이 영화를 "''루시타니아'' 참사의 가장 중요한 영화 버전"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영화 잡지 ''The Cinema''의 리뷰에서는 이 영화, 특히 첫 번째 어뢰가 폭발하는 장면을 두고 "현실 그 이상"이라고 칭찬했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그린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작품으로는 세계 최초이며, 인물이나 서사보다는 사실 그 자체를 충실히 묘사하려 한 다큐멘터리적 접근 방식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017년에는 그 역사적, 문화적, 미학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미국 국립 영화 등록부의 보존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6. 3. 한국의 관점 (중도진보적 관점 반영)
1915년 5월 7일, 영국의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가 독일 U보트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미국인 128명을 포함한 1,198명이 사망한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은 당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며, 민간인 선박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국제법 위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이 비극적인 사건은 중립을 지키던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독일에 대한 반감과 함께 전쟁 개입을 촉구하는 여론을 급격히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은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중요한 명분 중 하나로 작용하며 국제 정세의 흐름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던 만화가이자 애니메이터였던 윈저 맥케이는 이 사건의 참상에 깊은 인상을 받아 애니메이션 제작에 착수했다. 그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약 3년에 걸쳐 2만 5천 장에 달하는 그림을 그려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을 완성했다. 맥케이의 제작 동기에는 사건의 비극성을 알리고 미국의 참전을 지지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페이퍼 애니메이션 제작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작품이 완성될 무렵에는 이미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단순한 사건 기록을 넘어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강력하게 고발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작품 후반부에 등장하는, 아기를 안은 채 물에 빠진 어머니의 모습은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이 여성, 어린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깊은 연민과 슬픔을 자아낸다. 이처럼 맥케이의 작품은 당시 미국 사회의 반독 감정과 전쟁 지지 분위기를 반영하면서도, 전쟁이 초래하는 무고한 희생과 비극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당시 일부 미국 주류 언론에서는 이 사건의 파장을 축소하거나 왜곡하여 보도하며 미국의 전쟁 개입을 막으려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국 사건이 불러일으킨 국민적 분노와 참전 여론의 거센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루시타니아 호 침몰 사건과 이를 다룬 윈저 맥케이의 애니메이션은 전쟁의 비극과 그 속에서 희생되는 개인의 고통, 그리고 국제 사회의 책임과 평화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