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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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스본 대성당은 4세기부터 주교좌가 위치한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1147년 재정복 이후 리스본의 주요 모스크 자리에 건설되었으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시작하여 고딕, 바로크, 신고전주의 양식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발굴을 통해 로마 시대, 서고트족 시대, 중세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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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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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다른 이름 | Sé de Lisboa |
위치 | 리스본, 포르투갈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전례 | 로마 전례 |
지위 | 대성당 |
웹사이트 | www.sedelisboa.pt |
건축 | |
건축 양식 | 로마네스크 건축, 고딕 건축, 바로크 건축 |
정면 방향 | 서쪽 |
길이 | 90m |
너비 | 40m |
최대 높이 | 12m |
역사 | |
기공 | 알 수 없음 |
완공 | 알 수 없음 |
지정 | 포르투갈 국가 기념물 (1907년 1월 10일) |
지정 번호 | PT031106520004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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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 |
건축가 | 정보 없음 |
건설 비용 | 정보 없음 |
수용 인원 | 정보 없음 |
주교 | 후이 발레리우 |
2. 역사
리스본은 4세기부터 주교좌가 위치해 있었다.[2] 서고트족 지배 이후, 리스본은 무어인에게 정복당하여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아랍의 지배를 받았지만, 기독교인들은 리스본과 그 주변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1147년, 리스본은 아폰수 1세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와 제2차 십자군에 참여한 북유럽 십자군에 의해 재정복되었다. 길버트 오브 헤이스팅스(Gilbert of Hastings)라는 영국 십자군이 주교로 임명되었고, 새로운 대성당은 리스본의 주요 모스크 자리에 세워졌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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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첫 번째 건물은 후기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으로, 1147년과 13세기 초 사이에 완공되었다.[2] 당시 리스본의 수호 성인인 사라고사의 성 빈센트의 유물이 포르투갈 남부에서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13세기 말, 포르투갈의 디니스 1세는 고딕 건축 양식의 회랑을 건설했고, 그의 후계자 아폰수 4세는 주요 예배당을 자신과 그의 가족을 위한 고딕 양식의 왕실 영묘로 개조했다. 1498년, 비제우의 엘레오노르 여왕은 대성당 회랑의 예배당 중 하나에 ''Irmandade de Invocação a Nossa Senhora da Misericórdia de Lisboapt''(리스본 자비의 성모 마리아 숭배 형제단)을 설립했다.[2] 이 형제단은 나중에 다른 도시로 확산되어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가톨릭 자선 단체인 ''산타 카사 다 미제리코르디아 데 리스보아''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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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3-85년 포르투갈 섭정 시대 동안, 시민들은 도밍스 마르티뇨 안네스 주교가 카스티야 왕국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고, 화가 난 군중은 그를 북쪽 탑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3]
지진은 항상 리스본과 그 대성당에 문제였다. 14세기와 16세기에 여러 차례 발생했지만, 최악의 사건은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고딕 양식의 주요 예배당과 왕실 영묘가 파괴되었다. 회랑과 많은 예배당 또한 지진과 그 뒤에 이어진 화재로 파괴되었다. 대성당은 부분적으로 재건되었고, 20세기 초에 광범위한 개조 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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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회랑의 중앙 안뜰이 발굴되었고, 로마 시대, 서고트족 시대 및 중세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1990년 회랑에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양쪽에 상점이 있는 고대 로마 시대의 도로, 로마 시대의 주방 일부, "하수도"(하수 처리 시스템)뿐만 아니라 나중에 서고트족 건물들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붉은 벽의 일부도 발굴되어 이 부지에 한때 서 있던 모스크의 잔해를 보여주었다.[4] 2020년, 포르투갈 문화부 장관 그라사 폰세카는 이슬람 유물을 보존해야 한다고 결정했다.[5][6]
2. 1. 이슬람 지배와 레콩키스타
리스본은 4세기부터 주교좌가 위치해 있었다. 서고트족 지배 이후, 리스본은 무어인에게 정복당하여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아랍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리스본과 그 주변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1147년, 아폰수 1세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와 제2차 십자군에 참여한 북유럽 십자군에 의해 리스본은 재정복되었다. 길버트 오브 헤이스팅스라는 영국 십자군이 주교로 임명되었고, 새로운 대성당은 리스본의 주요 모스크 자리에 세워졌다.최근 몇 년 동안, 회랑의 중앙 안뜰이 발굴되었고, 로마 시대, 서고트족 시대 및 중세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1990년 회랑에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양쪽에 상점이 있는 고대 로마 시대의 도로, 로마 시대의 주방 일부, "하수도"(하수 처리 시스템)뿐만 아니라 나중에 서고트족 건물들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붉은 벽의 일부도 발굴되어 이 부지에 한때 서 있던 모스크의 잔해를 보여주었다. 2020년, 포르투갈 문화부 장관 그라사 폰세카는 이슬람 유물을 보존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2. 2.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설
리스본은 4세기부터 주교좌가 위치해 있었다. 서고트족 지배 이후, 리스본은 무어인에게 정복당하여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아랍의 지배를 받았으나, 기독교인들은 리스본과 그 주변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1147년, 아폰수 1세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와 제2차 십자군에 참여한 북유럽 십자군에 의해 리스본은 재정복되었다. 길버트 오브 헤이스팅스(Gilbert of Hastings)라는 영국 십자군이 주교로 임명되었고, 새로운 대성당은 리스본의 주요 모스크 자리에 세워졌다.이 첫 번째 건물은 후기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으로, 1147년과 13세기 초 사이에 완공되었다. 당시 리스본의 수호 성인인 사라고사의 성 빈센트의 유물이 포르투갈 남부에서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13세기 말, 포르투갈의 디니스 1세는 고딕 건축 양식의 회랑을 건설했고, 그의 후계자 아폰수 4세는 주요 예배당을 고딕 양식의 왕실 영묘로 개조했다. 1498년, 비제우의 엘레오노르 여왕은 대성당 회랑의 예배당 중 하나에 ''Irmandade de Invocação a Nossa Senhora da Misericórdia de Lisboapt''(리스본 자비의 성모 마리아 숭배 형제단)을 설립했다.[2] 이 형제단은 산타 카사 다 미제리코르디아 데 리스보아로 발전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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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회랑의 중앙 안뜰이 발굴되었고, 로마 시대, 서고트족 시대 및 중세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1990년 회랑에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양쪽에 상점이 있는 고대 로마 시대의 도로, 로마 시대의 주방 일부, "하수도"뿐만 아니라 나중에 서고트족 건물들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붉은 벽의 일부도 발굴되어 이 부지에 한때 서 있던 모스크의 잔해를 보여주었다.[4] 2020년, 포르투갈 문화부 장관 그라사 폰세카는 이슬람 유물을 보존해야 한다고 결정했다.[5][6]
2. 3. 고딕 양식의 확장
리스본은 4세기부터 주교좌가 위치해 있었으며, 서고트족 지배 이후 무어인에게 정복당하여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아랍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리스본과 그 주변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1147년, 아폰수 1세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와 제2차 십자군에 참여한 북유럽 십자군에 의해 리스본이 재정복되면서, 길버트 오브 헤이스팅스라는 영국 십자군이 주교로 임명되었고, 리스본의 주요 모스크 자리에 새로운 대성당이 세워졌다.이 첫 번째 건물은 후기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으로, 1147년과 13세기 초 사이에 완공되었다. 13세기 말, 포르투갈의 디니스 1세는 고딕 건축 양식의 회랑을 건설했고, 그의 후계자 아폰수 4세는 주요 예배당을 자신과 그의 가족을 위한 고딕 양식의 왕실 영묘로 개조했다.
2. 4. 1383-85년 포르투갈 섭정 시대
1383-85년 포르투갈 섭정 시대 동안, 리스본 시민들은 도밍스 마르티뇨 안네스 주교가 카스티야 왕국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다.[3] 화가 난 군중은 그를 대성당 북쪽 탑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3]2. 5. 지진 피해와 재건
리스본은 4세기부터 주교좌가 위치한 곳이다.[2] 서고트족 지배 이후 리스본은 무어인에게 정복당하여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아랍의 지배를 받았지만, 기독교인들은 리스본과 그 주변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2] 1147년, 리스본은 아폰수 1세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와 제2차 십자군에 참여한 북유럽 십자군에 의해 재정복되었고, 길버트 오브 헤이스팅스(Gilbert of Hastings)라는 영국 십자군이 주교로 임명되었다.[2] 이후 리스본의 주요 모스크 자리에 새로운 대성당이 건설되었다.[2]13세기 말, 포르투갈의 디니스 1세는 고딕 건축 양식의 회랑을 건설했고, 그의 후계자 아폰수 4세는 주요 예배당을 자신과 그의 가족을 위한 고딕 양식의 왕실 영묘로 개조했다.[2]
지진은 리스본 대성당에 지속적인 피해를 입혔다. 14세기와 16세기에 여러 차례 지진이 발생했지만, 1755년 리스본 지진이 가장 큰 피해를 입혔다.[2] 이 지진으로 고딕 양식의 주요 예배당과 왕실 영묘가 파괴되었고, 회랑과 많은 예배당 또한 지진과 그 뒤에 이어진 화재로 파괴되었다.[2] 대성당은 부분적으로 재건되었고, 20세기 초에 광범위한 개조 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2]
최근 몇 년 동안, 회랑의 중앙 안뜰이 발굴되었고, 로마 시대, 서고트족 시대 및 중세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4] 1990년 회랑에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양쪽에 상점이 있는 고대 로마 시대의 도로, 로마 시대의 주방 일부, "하수도"(하수 처리 시스템)뿐만 아니라 나중에 서고트족 건물들의 흔적도 발견되었다.[4] 붉은 벽의 일부도 발굴되어 이 부지에 한때 서 있던 모스크의 잔해를 보여주었다.[4] 2020년, 포르투갈 문화부 장관 그라사 폰세카는 이슬람 유물을 보존해야 한다고 결정했다.[5][6]
2. 6. 현대의 발굴
리스본은 4세기부터 주교좌가 위치해 있었으며, 서고트족 지배 이후 무어인에게 정복당하여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아랍의 지배를 받았다.[4] 1147년 아폰수 1세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와 제2차 십자군에 참여한 북유럽 십자군에 의해 재정복되었다.[4]최근 몇 년 동안, 리스본 대성당 회랑의 중앙 안뜰이 발굴되었고, 로마 시대, 서고트족 시대 및 중세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4] 1990년 회랑에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양쪽에 상점이 있는 고대 로마 시대의 도로, 로마 시대의 주방 일부, "하수도"(하수 처리 시스템)뿐만 아니라 나중에 서고트족 건물들의 흔적도 발견되었다.[4] 붉은 벽의 일부도 발굴되어 이 부지에 한때 서 있던 모스크의 잔해를 보여주었다.[4]
2020년, 포르투갈 문화부 장관 그라사 폰세카는 이슬람 유물을 보존해야 한다고 결정했다.[5][6]
3. 건축 양식
대성당은 3개의 통로가 있는 라틴 십자 모양이며, 트란셉트와 환상보행로로 둘러싸인 주 예배당을 갖추고 있다. 교회는 동쪽에 수도원과 연결되어 있다. 대성당의 정면은 요새와 같은 모습으로, 입구 양쪽에 두 개의 탑이 있고 벽 위에는 성가퀴가 있다. 당시 다른 포르투갈 대성당에서도 볼 수 있는 이 위협적인 외관은 레콩키스타 시대의 유물로, 대성당이 포위 공격 중에 적을 공격하는 기지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리스본 대성당은 세 개의 측랑이 있는 십자 형태의 건물로, 횡랑과 주 예배당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교회는 동쪽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성당의 정면은 요새를 닮았으며, 측면을 방어하는 2개의 탑과 총안이 있는 흉벽을 갖추고 있다. 이 위압적인 모습은 동시대의 다른 포르투갈 대성당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으로, 레콩키스타 시대의 유물이며, 포위되었을 경우에는 적을 공격하는 거점이 되었다.
=== 로마네스크 양식 ===
리스본 대성당은 첫 번째 건축 시기(1147년 ~ 13세기 초)부터 장미 창을 갖춘 서쪽 정면(20세기에 파편으로 재건됨), 주요 출입구, 북쪽 측면 출입구, 그리고 대성당의 본당을 보존해왔다. 출입구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흥미로운 조각된 주두가 있다. 본당은 통형 천장으로 덮여 있으며, 상부의 아치형 갤러리(트리포리움)가 있다. 빛은 서쪽 정면과 트랜셉트의 장미 창, 본당 측랑의 좁은 창, 그리고 트랜셉트의 랜턴 타워 창을 통해 들어온다. 대성당의 전체적인 평면은 같은 시대에 지어진 코임브라 구 대성당과 매우 유사하다. 회랑의 예배당 중 하나에는 흥미로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철제 문이 있다.
=== 고딕 양식 ===
13세기 말, 포르투갈의 디니스 1세는 고딕 양식의 회랑 건설을 명령했는데, 이 회랑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심하게 훼손되었다.[7] 대성당 입구 근처에는 부유한 상인 바르톨로메우 조안스(Bartolomeu Joanes)가 14세기 초에 자신의 장례 예배당을 지었다. 그의 묘와 묘상(누워있는 조각상)은 여전히 내부에 있다.[7] 아폰수 4세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후진을 방사형 예배당이 있는 주보랑으로 둘러싸인 고딕 양식의 본당으로 대체했다.[7] 왕과 그의 가족은 본당에 묻혔지만, 그들의 묘와 예배당 자체는 1755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다.[7] 주보랑은 살아남았고 포르투갈 고딕 건축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주보랑은 본당과 연결되지 않은 원형 통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련의 방사형 예배당이 있다. 주보랑의 2층은 리브 볼트로 덮여 있으며, 풍부한 빛으로 내부를 채우는 일련의 창문(고창)이 있다.[7]
주보랑에는 14세기 중반의 뛰어난 고딕 양식의 묘 3개가 있다.[7] 한 묘는 페레이라 데 아베스의 7대 영주인 ''로포 페르난데스 파체코''의 것으로, 그는 아폰수 4세 국왕을 섬겼던 귀족이었다.[7] 그의 묘상 인물은 칼을 들고 있으며 개가 지키고 있다.[7] 그의 아내인 ''마리아 데 비랄로보스''는 그녀의 묘 위에서 성무일도서를 읽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7] 세 번째 묘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왕족 공주에게 속한다.[7] 모든 묘는 문장으로 장식되어 있다.[7]
15세기 마지막 분기에는 누누 곤칼베스가 그린 유명한 성 빈센트 패널이 주보랑의 성 빈센트 예배당에 놓였다고 한다.[7] 이 패널은 현재 리스본의 국립 고대 미술관에 있다.[7]
===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 ===
17세기에는 훌륭한 바로크 건축 양식의 성구실이 건설되었고, 1755년 이후에는 주 예배당이 신고전주의 건축과 로코코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여기에는 아폰수 4세와 그의 가족의 무덤이 포함되어 있다. 18세기 말 포르투갈 최고의 조각가인 마샤두 드 카스트루는 바르톨로메우 조아네스 고딕 양식 예배당에 멋진 구유를 만들었다. 20세기 초, 대성당의 외부와 내부의 신고전주의 장식의 상당 부분이 제거되어 대성당이 더 "중세"적인 외관을 갖추게 되었다.
3. 1. 로마네스크 양식
리스본 대성당은 첫 번째 건축 시기(1147년 ~ 13세기 초)부터 장미 창을 갖춘 서쪽 정면(20세기에 파편으로 재건됨), 주요 출입구, 북쪽 측면 출입구, 그리고 대성당의 본당을 보존해왔다. 출입구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흥미로운 조각된 주두가 있다. 본당은 통형 천장으로 덮여 있으며, 상부의 아치형 갤러리(트리포리움)가 있다. 빛은 서쪽 정면과 트랜셉트의 장미 창, 본당 측랑의 좁은 창, 그리고 트랜셉트의 랜턴 타워 창을 통해 들어온다. 대성당의 전체적인 평면은 같은 시대에 지어진 코임브라 구 대성당과 매우 유사하다. 회랑의 예배당 중 하나에는 흥미로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철제 문이 있다.3. 2. 고딕 양식
13세기 말, 포르투갈의 디니스 1세는 고딕 양식의 회랑 건설을 명령했는데, 이 회랑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심하게 훼손되었다.[7] 대성당 입구 근처에는 부유한 상인 바르톨로메우 조안스(Bartolomeu Joanes)가 14세기 초에 자신의 장례 예배당을 지었다. 그의 묘와 묘상(누워있는 조각상)은 여전히 내부에 있다.[7] 아폰수 4세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후진을 방사형 예배당이 있는 주보랑으로 둘러싸인 고딕 양식의 본당으로 대체했다.[7] 왕과 그의 가족은 본당에 묻혔지만, 그들의 묘와 예배당 자체는 1755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다.[7] 주보랑은 살아남았고 포르투갈 고딕 건축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주보랑은 본당과 연결되지 않은 원형 통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련의 방사형 예배당이 있다. 주보랑의 2층은 리브 볼트로 덮여 있으며, 풍부한 빛으로 내부를 채우는 일련의 창문(고창)이 있다.[7]주보랑에는 14세기 중반의 뛰어난 고딕 양식의 묘 3개가 있다.[7] 한 묘는 페레이라 데 아베스의 7대 영주인 ''로포 페르난데스 파체코''의 것으로, 그는 아폰수 4세 국왕을 섬겼던 귀족이었다.[7] 그의 묘상 인물은 칼을 들고 있으며 개가 지키고 있다.[7] 그의 아내인 ''마리아 데 비랄로보스''는 그녀의 묘 위에서 성무일도서를 읽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7] 세 번째 묘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왕족 공주에게 속한다.[7] 모든 묘는 문장으로 장식되어 있다.[7]
15세기 마지막 분기에는 누누 곤칼베스가 그린 유명한 성 빈센트 패널이 주보랑의 성 빈센트 예배당에 놓였다고 한다.[7] 이 패널은 현재 리스본의 국립 고대 미술관에 있다.[7]
3. 3.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
17세기에는 훌륭한 바로크 건축 양식의 성구실이 건설되었고, 1755년 이후에는 주 예배당이 신고전주의 건축과 로코코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여기에는 아폰수 4세와 그의 가족의 무덤이 포함되어 있다. 18세기 말 포르투갈 최고의 조각가인 마샤두 드 카스트루는 바르톨로메우 조아네스 고딕 양식 예배당에 멋진 구유를 만들었다. 20세기 초, 대성당의 외부와 내부의 신고전주의 장식의 상당 부분이 제거되어 대성당이 더 "중세"적인 외관을 갖추게 되었다.4. 예술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SÉ CATEDRAL DE LISBOA
https://lisbonshoppi[...]
2023-11-15
[2]
웹사이트
História
https://web.archive.[...]
2011-01-09
[3]
서적
Lisbon
Bonechi
[4]
웹사이트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Lisbon's Cathedral Cloister, Portugal
https://citygomaps.b[...]
2018-10-02
[5]
웹사이트
Vestígios muçulmanos vão ser integrados na Sé de Lisboa
https://www.dn.pt/cu[...]
Diário de Notícias
2021-12-13
[6]
웹사이트
Vestígios da mesquita do século XII descoberta na Sé de Lisboa vão ser preservados
https://www.tsf.pt/p[...]
TSF
2020-10-14
[7]
간행물
The Burlington Magazine Vol. 98, No. 638
195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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