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인류학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리 지는 중국과 대만의 고고학 및 인류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학자이다. 1896년 중국 후베이성에서 태어나 칭화 대학, 미국 클라크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하버드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으로 돌아와 난카이 대학과 칭화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1928년에는 중앙연구원 고고학과의 초대 관장이 되었다. 안양 인근 인쉬에서 중국 최초의 현대 고고학적 발굴을 이끌며 갑골문 등 중요한 유물을 발견하여 상 왕조의 역사적 진정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1949년 대만으로 이주하여 국립 타이완 대학교 고고학과 및 인류학과 학장을 역임했으며, 1979년 사망했다. 그는 중국 현대 고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은허 문화의 기원 연구와 고고학적 관점을 통해 학문적 영향을 미쳤다. 주요 저서로는 《중국 민족의 형성: 인류학적 탐구》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국의 고고학자 - 뤄전위
뤄전위는 청나라 말기부터 만주국 시대까지 활동하며 갑골문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으나,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행적으로 인해 현대 중국에서 평가가 엇갈리는 학자이자 관료이다. - 중국의 고고학자 - 둥쭤빈
둥쭤빈은 중국의 고고학자이자 갑골문 연구의 권위자로, 안양 은허 발굴을 주도하고 갑골 문자를 5기로 구분하며 갑골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 중국의 인류학자 - 심괄
심괄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과학자, 정치가, 외교관, 예술가, 문인으로, 천문학, 지리학, 약학, 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저서 《몽계필담》을 통해 과학적 사고를 보여준다. - 중국의 인류학자 - 페이샤오퉁
페이샤오퉁은 중국 사회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로, 중국 농촌 사회의 특징을 분석하고 사회 관계가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작동한다는 개념을 제시했으며, 중국 사회학 및 인류학 재건과 중국 민족 정책에도 기여했다. - 양사오 문화 - 봉황
봉황은 닭, 제비, 뱀, 학, 물고기, 원앙, 거북, 매의 모습을 닮고 오색 빛깔과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지닌 상서로운 새로, 평화와 번영, 행복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한국에서는 하늘과 땅을 잇는 매개체로 신성시된다. - 양사오 문화 - 삼족오
삼족오는 동아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세 발 달린 까마귀로, 태양을 상징하며, 중국, 한국, 일본 등 각 문화권에서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 리지 (인류학자) | |
|---|---|
| 기본 정보 | |
![]() | |
| 본명 | 리지 |
| 원어 이름 | 李濟 |
| 로마자 표기 | Lǐ Jì |
| 국적 | 중국 |
| 출생 | 청나라 후베이성 중샹 |
| 출생일 | 1896년 7월 12일 |
| 사망 | 타이베이, 타이완 |
| 사망일 | 1979년 8월 1일 (83세) |
| 직업 | 고고학자, 교수 |
| 학력 | |
| 대학 | 칭화 대학 |
| 학사 | 클라크 대학교 |
| 박사 | 하버드 대학교 |
| 박사 학위 논문 제목 | 중국인 형성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 |
| 박사 학위 논문 URL | 박사 학위 논문 |
| 박사 학위 취득 년도 | 1928년 |
| 경력 | |
| 근무지 | 난카이 대학 칭화 대학 프리어 미술관 중앙연구원 국립 타이완 대학 |
| 영향 | 앨프레드 토저 롤랜드 버라지 딕슨 어니스트 후턴 |
| 주목할 만한 제자 | 샤나이 장광즈 |
| 학문 분야 | |
| 분야 | 고고학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
| 세부 분야 | 중국 선사 시대 고대 중국사 상나라 고고학 |
2. 생애
리 지는 1896년 후베이성 중샹 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6][7] 1911년부터 1918년까지 베이징의 칭화 대학에 재학한 후, 191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6][7] 클라크 대학교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을 공부하고,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인류학을 전공하여 1923년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6][7]
1925년 중국으로 돌아와 난카이 대학과 칭화 대학에서 인류학과 사회학을 가르쳤다.[6][7] 1928년에는 중앙연구원 고고학과의 초대 관장으로 임명되어 1937년까지 허난성 안양시 인근의 은허 유적 발굴을 주도했다.[6][7] 이 발굴은 현대적 고고학 방법론을 적용한 중국 최초의 발굴로 평가받으며, 갑골문과 청동기 유물 등을 통해 상 왕조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4][5]
1949년 국공 내전 이후 중국 대륙을 떠나 타이완으로 이주했다.[6] 타이베이의 국립 타이완 대학교에서 고고학 및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과장을 역임했다.[6] 그는 샤나이, 장광즈, 궈바오쥔 등 여러 중국 고고학자들을 지도했으며, 1979년 8월 1일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6]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리 지는 1896년 후베이성 중샹 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6][7] 1911년부터 1918년까지 베이징의 칭화 대학에 재학했으며, 졸업 후 191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6][7] 그는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 위치한 클라크 대학교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을 공부하여 각각 문학사와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6][7]이후 1920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인류학을 전공했다.[6][7] 하버드에서는 알프레드 토저(고고학), 롤랜드 버리지 딕슨(인류학), 어니스트 호턴(인류학) 등 저명한 학자들의 지도를 받았다.[6][7] 1923년에는 The Formation of the Chinese People|중국 민족의 형성eng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인류학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6][7] 이 논문은 나중에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The Formation of the Chinese People: An Anthropological Inquiry|중국 민족의 형성: 인류학적 연구eng''(1928)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6][7]
2. 2. 중국에서의 학술 활동
192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난카이 대학과 칭화 대학에서 인류학과 사회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25년부터 1926년까지 산시성 남부에서 양사오 문화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을 진행했다. 이 활동을 계기로 미국 워싱턴 D.C.의 프리어 미술관 현장 연구원으로도 참여하게 되었다. 1928년에는 중앙연구원 고고학과의 초대 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프리어 미술관 연구원 활동도 병행했다.[6][7]1928년부터 1937년까지 허난성 안양시 인근의 은허(殷墟, 인쉬) 유적 발굴을 주도했다. 이 발굴은 중국에서 현대적인 고고학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최초의 발굴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발굴 과정에서 왕궁 터와 4개의 왕릉을 포함한 300기 이상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며, 초기 청동기 유물과 함께 고대 중국 문자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자료로 꼽히는 다수의 갑골문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발견은 역사 기록으로만 존재하여 논란이 있었던 상 왕조의 실재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4][5] 중일 전쟁의 발발로 인해 은허 발굴은 1937년에 중단되었다.
2. 3. 은허 발굴과 업적
아카데미아 시니카 고고학과의 초대 관장이 된 리 지는 1928년부터 1937년까지 안양 인근 은허 殷墟|인쉬zho 유적 발굴을 이끌었다.[6][7] 이 발굴은 중일 전쟁 발발로 인해 더 이상 작업을 진행하기 어려워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은허 발굴은 중국에서 현대 고고학 원칙을 적용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는다.[4][5]발굴 과정에서 왕궁 터와 4개의 왕릉을 포함하여 300기가 넘는 무덤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초기 형태의 청동 주물과 함께, 고대 중국 문자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 다수의 갑골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발견들은 이전까지 역사적 실재성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상나라(은나라)의 존재를 명확히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4][5]
리지는 발굴 방법론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1929년 발굴부터는 단순히 갑골문 수집에만 집중하지 않고, 토기, 짐승 뼈, 청동기 등 다양한 유물을 동등하게 중요한 표본으로 다루었다. 또한 현장 작업 시 지층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층위(層位) 발굴 방식을 도입했는데, 이는 산시성 남부 서음촌에서 양사오 문화 발굴 시 사용했던 수평 층위 발굴 방식을 따른 것이었다. 리지는 장웨이란에게 은허의 상세한 지형도를 측정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출토 유물의 공간적 위치 정보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은허 발굴이 기존의 금석학적 연구 범주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야외 고고학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을 의미했다.[1]

층위 발굴 방식의 도입은 이후 발굴 작업에 큰 진전을 가져왔다. 특히 1931년 은허 후강(後岡) 지구 발굴에서는 소둔(小屯) 문화, 룽산 문화, 양사오 문화에 해당하는 세 개의 문화층이 차례로 쌓여 있는 중첩 관계가 밝혀졌다. 이를 통해 고대 중국 문화가 어떤 순서로 발전해왔는지 그 계통을 확인할 수 있었다.[1]
리지는 은허 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인류학적 문제와 고대사를 재구성하는 역사학적 문제를 서로 연관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은허 문화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 고대사 재구성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했으며, 발굴 초기부터 이 문제에 주목했다. 1929년 은허 3차 발굴 당시, 리지는 지층에서 출토된 채색 토기를 근거로 '소둔 문화'의 선행 문화 존재 가능성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1]
2. 4. 타이완에서의 활동과 사망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마오쩌둥의 지휘 아래 중국 대륙에서 권력을 잡자, 리 지는 전쟁 후 타이완으로 피신했다.[6] 타이베이로 이주한 그는 국립 타이완 대학교 고고학과 및 인류학과 교수로 활동했으며, 학장을 역임했다.[6] 리 지는 1979년 8월 1일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6]3. 학문적 영향과 관점
리지는 중국 현대 고고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주도한 은허 발굴은 기존의 금석학 중심 연구에서 벗어나 토기, 청동기 등 다양한 유물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층위 발굴과 같은 과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는 중국 고고학이 현대적인 학문 분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1]
학문적으로 리지는 은허 문화와 중국 문명의 기원을 탐구하는 데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서구 학계의 문화 중심주의적 시각, 특히 중국 문화 서래설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중국 문명의 독자적인 발전을 강조했다. 동시에 중국 내부의 연구가 주변 문화와의 교류에만 치중하거나 민족주의적 신화 구성으로 흐르는 경향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균형 잡힌 태도를 견지했다.[2] 이러한 그의 학문적 영향력과 관점은 중국 고대사 연구의 방향 설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1. 중국 현대 고고학에 끼친 영향
1929년, 리지가 직접 주관한 은허 발굴은 기존의 갑골문 발견에만 집중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토기, 짐승 뼈, 청동기 등 다양한 유물을 표본으로서 동등하게 주목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을 이루었다. 현장 작업에서는 파내기 방식을 사용했으며, 특히 1929년 후반 발굴 과정에서는 장웨이란에게 은허의 더욱 상세한 지형도를 측정하도록 요청하여 출토된 유물의 공간적 위치 정보를 중요하게 다루었음을 보여준다.또한, 리지는 하현 서음촌에서 사용했던 수평 층위 발굴 방식을 은허 발굴에도 적용했다. 이는 은허 발굴이 금석학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현대적인 야외 고고학의 방법론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발전이었다.[1]
층위 발굴 방식은 은허 연구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31년 은허 후강 발굴에서는 소둔 문화, 룽산 문화, 양사오 문화의 세 문화층이 순차적으로 쌓여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고대 중국 문화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왔는지 그 순서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3. 2. 은허와 중국 문화의 기원
인류학적 문제인 은허(Yinxu) 문화의 기원 탐구와 역사적 문제인 고대사 재구성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은허 문화의 기원 탐구는 고대사 재구성의 기초가 된다. 은허 발굴 초기, 발굴자들은 은허 문화의 기원에 주목했다. 1929년 은허 3차 발굴 당시, 리지(Li Ji)는 지층에서 출토된 채색 토기를 바탕으로 "소둔 문화(Xiaotun Culture)"의 선구자에 대해 논했다.
3. 3. 고고학에 대한 관점
리지는 중국 문명의 기원을 찾기 위해 은허 발굴을 주도했으며, 앙데르손과 같은 서구 학자들이 제기한 중국 문화 서래설 등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는 서구 학계에 만연한 "문화 중심주의"적 편견을 지적하며, 동양 문명이 가진 고유한 독창성과 가치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중국 내부 학자들이 동아시아 및 주변 지역과의 문화 교류 연구에만 과도하게 집중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리지는 중국 문명의 기원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자칫 빠지기 쉬운 민족주의적 신화 구성에 대해 항상 경계하는 태도를 유지했다.[2]4. 저서
5. 평가 및 유산
리 지는 중국 현대 고고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6][7] 그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1928년부터 중일 전쟁 발발로 중단된 1937년까지 안양 인근 인쉬 유적 발굴을 이끈 것이다. 이 발굴은 중국에서 현대적인 고고학 원칙을 따른 최초의 사례로 여겨진다. 발굴 과정에서 왕궁 터와 4개의 왕릉을 포함한 300기 이상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며, 초기 형태의 청동기와 함께 고대 중국 문자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 다수의 갑골문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발견은 당시까지 역사적 실재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상 왕조의 존재를 명확히 증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4][5]
또한 리 지는 샤나이, 장광즈, 궈바오쥔 등 후대의 주요 중국 고고학자들을 지도하며 학문적 계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연구 활동과 제자 양성은 중국 고고학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참조
[1]
학술지
殷墟考古九十年回眸:从"大邑商"到世界文化遗产
https://d.wanfangdat[...]
2018
[2]
학술지
Decentralizing the Origin of Civilization: Early Archaeological Efforts in China
https://www.journals[...]
2021-10-01
[3]
서적
"Li Chi"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4]
서적
Milestones in Archaeology. A chronological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ABC-CLIO, Santa Barbara California
2007
[5]
서적
Encyclopedic Dictionary of Archaeology
https://books.google[...]
Kluwer Acad./Plenum Publ., New York NY
2000
[6]
간행물
Li Chi: 1896-1979
https://www.jstor.or[...]
1980
[7]
웹사이트
Li Chi
http://www.britannic[...]
2017-05-1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