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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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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하무는 오이라트부의 지도자로, 1399년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을 살해하고 그의 딸 사무르 군즈와 결혼하여 오이라트 4부의 추장으로 봉해졌다. 1409년 명나라에 조공하고 순녕왕에 책봉되었으며, 1411년 델베그를 칸으로 옹립하고 스스로 태사가 되었다. 1412년 부냐시리 울제이테무르 칸을 살해하고 원나라의 국새를 명나라에 바쳤다. 이후 명나라와 갈등을 겪다 1416년 아수드부의 아룩타이에게 살해당했다. 몽골 연대기에서는 바트라 승상으로 등장하며, 아들 토곤이 오이라다이를 새로운 칸으로 옹립했다.

2. 생애

마흐무드의 이름이 정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03년으로, 당시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영락제가 보낸 사신을 맞이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오이라트는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명나라는 마흐무드의 세력을 가장 강력하게 평가했다.[1] 1409년 명나라로부터 순녕왕(順寧王)에 책봉되었다.

이후 북원의 올제이 테무르, 알크타이 등과 경쟁하였다. 1410년 올제이 테무르와 알크타이가 영락제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약화되자, 마흐무드는 명나라에 북원 잔존 세력 토벌을 요청하기도 했다. 1412년에는 올제이 테무르를 직접 살해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옥새를 명나라에 넘기는 대가로 알크타이 토벌 지원과 명나라의 보호 아래 있던 쿠빌라이 가문의 왕자 토크토아 부하의 인도 등을 요구했으나, 명나라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마흐무드는 명나라 사신을 구금하고 국경을 침범하는 등 적대적인 행동을 보였고, 이는 영락제의 분노를 사 양측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1414년 마흐무드는 후란 후슌(忽蘭忽失溫, 프란 후시운)에서 명나라 군대와 직접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배하여 많은 아들과 부하를 잃었다. 툴라 강까지 추격을 받았으나 도주에 성공했고, 1415년에는 영락제에게 사죄하며 구금했던 사신을 돌려보냈다.

1416년 알크타이의 공격을 받고 패배했으며, 이 패전 직후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

오이라트의 고하이 타이유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다른 오이라트부의 지도자 우게치 카스하 등과의 혈연관계는 알려진 것이 없다. 형제로는 동생 파도파라가 있었다. 몽골 황금사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바툴라(巴圖拉)이며, 찰랄 천호(札哈千戶)를 맡던 초로스부(綽羅斯) 출신이라고 한다.

문헌에는 마하무(Махамуmon) 또는 마하무드(Махмудmon)로 나타나며, 일부 문헌에서는 바툴라(Батулаmon)로도 기록되어 있다. '칭상'은 그의 이름이 아니라 승상이라는 직책의 몽골어 발음이었다. 그의 이름 마하무 또는 마하무드는 이슬람계 아랍인의 이름 마흐무드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일설에는 현의왕에 봉해진 오이라트부의 다른 지도자 태평이 그의 동생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다른 설에 따르면 태평은 우게치 카스하의 아들이라고도 하여 정확한 관계는 불분명하다.

1398년 혹은 1399년경 아버지 고하이 태위가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엘베그 칸은 마하무에게 자신의 딸 사무르 군즈를 아내로 주고, 오이라트 4부의 추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1399년, 마하무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토르구트부 혹은 케르구드부의 추장 우게치 카스카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을 공격하여 살해했다. 이 사건 이후 굴리치 울루그테무르 칸은 마하무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훗날 오이라트를 공격하게 된다. 우게치 카스하의 통치 이후 그는 칭상(승상)의 칭호를 받고, 1416년까지 오이라트 4부를 다스렸다.

2. 2. 오이라트부의 지도자

1403년 정사에 처음 이름이 등장하는데, 당시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명나라 영락제가 보낸 사신을 맞이했다. 15세기 초 오이라트는 마하무, 타이핑(太平), 바트 볼라트(Bat Bolad)가 이끄는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명나라는 마하무의 세력이 가장 크다고 판단했다.[1]

1408년부터 명나라북원의 대칸 부냐시리 울제이테무르 칸에게 조공과 종주권을 요구했으나, 부냐시리와 그의 주요 지지자인 아룩타이는 이를 거절했다. 1409년 4월, 명나라 사신 곽기(郭驥)가 다시 조공과 종주권을 요구하자 부냐시리는 그를 살해했다. 반면 마하무와 다른 오이라트 지도자 타이핑, 파도파라(把禿孛羅)는 명나라 조정에 조공을 보내며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에 영락제는 마하무를 순녕왕(順寧王)에 책봉하고, 그가 오이라트 4부 중 가장 강력하다고 여겨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직책을 추가로 수여했다. 타이핑에게는 현의왕(賢義王), 파도파라에게는 안락왕(安樂王)의 직책과 선물을 주었다.

북원부냐시리 울제이테무르 칸아룩타이와 경쟁하던 마하무는 1410년 그들이 영락제의 친정으로 군사적 타격을 입고 몰락하자, 명나라에 북원 잔존 세력 토벌을 요청했다. 1411년, 영락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몽골을 공격하자 부냐시리와 아룩타이는 명나라 군대에 패배하여 서쪽으로 도주했다. 같은 해 마하무는 델베그를 새로운 칸으로 옹립했다. 일설에는 마하무가 부냐시리를 살해한 뒤 델베그를 옹립했다거나, 1412년 다른 오이라트 지도자들과 함께 델베그를 옹립했다는 설도 있다. 마하무는 명나라에 신하를 자처하며 스스로 몽골의 태사(太師)로 임명했다.

1412년 5월 2일 혹은 6월 15일, 마하무는 차가타이 한국으로 지원군을 요청하러 가던 부냐시리 울제이테무르 칸의 군대를 케룰렌강 근처에서 습격하여 살해했다. 이때 부냐시리가 가지고 있던 원나라의 국새를 빼앗아 명나라 영락제에게 바쳤다. 그는 명나라에 아룩타이를 정벌할 군대 파병과 명나라의 보호 아래 있던 쿠빌라이 가문의 왕자 톡토아부카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명나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마하무는 명나라 사신을 구금하고 국경 지대를 침입하는 등 적대 행위를 벌여 영락제의 분노를 샀다.

1413년 마하무는 케룰렌강으로 진격하여 아룩타이 군대를 격파했다. 같은 해 겨울, 공작강(음마하)를 넘어 명나라를 침입하려 했으나 아룩타이의 습격을 받았다. 이 보고를 받은 영락제는 다시 친정을 결정했다. 1414년, 마하무는 후란 후슌(忽蘭忽失溫, 프란 후시운)에서 명나라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명나라 철기병에게 크게 패배하여 10명 이상의 아들과 수천 명의 부하를 잃었다. 명나라 군대의 추격은 툴라 강까지 이어졌지만, 마하무는 도주에 성공했다. 1415년 그는 영락제에게 사죄의 뜻을 전하며 구금했던 명나라 사신을 돌려보냈다.

1416년 아룩타이의 공격을 받고 패배했으며, 이 패전 직후 사망했다.

2. 3. 명나라와의 갈등

1409년, 명나라 영락제는 오이라트의 여러 지도자에게 왕위를 수여했는데, 마하무는 순녕왕(順寧王)에 봉해졌다.[1] 마하무는 1410년 영락제의 북원 정벌(제1차 몽골 원정)을 도왔으나, 영락제는 오이라트가 올제이 테무르(부냐시리)와 알크타이(아루타이) 정벌에 기여한 공로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명나라의 이러한 대우에 오이라트 지도자들은 불만을 품었다.

1412년, 마하무는 올제이 테무르를 살해한 뒤, 그가 가지고 있던 옥새를 넘기는 대가로 알크타이 토벌 지원, 명나라에 있던 쿠빌라이 가문의 왕자 토크토아 부하 인도, 그리고 막대한 포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마하무는 명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가두고 국경 지대를 침범하는 등 적대 행위를 벌였고, 이는 영락제의 분노를 샀다.

고조되는 긴장 속에서 마하무는 다른 오이라트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3만 명의 군사를 케룰렌강으로 이동시켰다. 1413년 겨울, 마하무가 음마하를 넘어 명나라를 침입하려다 알크타이의 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은 영락제는 직접 오이라트 정벌에 나서기로 결정했다(제2차 몽골 원정).

1414년 4월, 영락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베이징을 출발했다. 명나라 군대는 툴라강 상류로 진군하여 툴라강과 케룰렌강 사이 후라후슌(忽蘭忽失温, 홀란홀실원)에서 오이라트군과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오이라트 기병은 명나라의 중보병과 대포에 밀려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마하무와 델베그 칸은 크게 패배했고, 마하무는 10명 이상의 아들과 수천 명의 부하를 잃고 툴라강 끝까지 밀려났다. 영락제는 1414년 8월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패배 이후 1415년, 마하무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죄의 뜻을 표하고 구금했던 명나라 사신들을 돌려보냈다. 또한 말을 조공으로 바치며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2. 4. 죽음

1416년 아수드부의 아룩타이오이라트부를 습격하여 대칸 델베그 칸과 태사 마하무를 공격했다. 결국 마하무는 1416년 4월 9일 동몽골 아수드부의 아룩타이 태사에게 살해당했다. 명나라 영락제오이라트몽골을 모두 의심하여 첩자를 보내 오이라트 4부와 중부 몽골, 동부 몽골의 정세를 수시로 정탐했다.

일설에는 마하무가 아룩타이의 공격을 피해 도주했으나, 병으로 사망했다고도 한다. 마하무 사후 그의 아들 토곤오이라트부의 지도자 자리를 계승했다.

3. 몽골 연대기에서의 마흐무드

『몽골 비사』, 『알탄 톱치』 등의 몽골 연대기에서는 오이라트의 자하 밍간[2]의 고하이 태위의 아들인 '''바트라 승상'''(ᠪᠠᠲᠤᠯᠠ ᠴᠢᠩᠰᠠᠩmon)으로 등장한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고하이 태위가 어느 날 주군인 엘베그 칸에게 동생의 아내인 올제이트 비자의 존재를 알린 것을 계기로, 엘베그 칸이 동생을 죽이고 올제이트 비자를 빼앗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후에 올제이트 비자는 고하이 태위가 자신과 밀통했다고 거짓으로 말했고, 이에 분노한 엘베그 칸에 의해 고하이 태위는 살해당했다. 그러나, 후에 올제이트 비자의 진의를 알게 된 엘베그 칸은 이를 후회하여 고하이 태위의 아들인 바트라(마흐무드)에게 자신의 딸 삼루 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고, 승상(칭상)으로 삼아 사 오이라트를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오이라트의 오게치 하시는 "(칸의 멋대로) 주인인 자신을 제쳐두고 가신인 바트라가 오이라트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분노하여 엘베그 칸과 바트라 승상을 살해했다.

한편, 『알탄 톱치』에도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바트라 승상과 오게치 하시가 형제이며, 양자의 손에 의해 엘베그 칸이 살해되었다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두 기록을 비교하면 『알탄 톱치』 쪽이 더 오래된 형식이며, 『몽골 비사』는 여기에 다른 전승을 결합하여 더 복잡한 이야기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된다[3].

또한, 『몽골 비사』에서는 아들인 토곤의 별명으로 '''바쿰'''이라는 이름을 전하고 있는데, 이는 "마흐무드"의 와전이므로, 『몽골 비사』의 오류라고 생각된다[4].

4. 가족 관계

아버지는 오이라트의 고하이 타이유이다.[1][2] 형제로는 동생 파도파라가 있었다.[3] 일설에는 현의왕에 봉해진 오이라트부의 다른 지도자 태평이 그의 동생이라는 설이 있으나,[4] 다른 설에 의하면 현의왕 태평은 그의 동생이 아니라 우게치 카스하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1398년 혹은 1399년경 아버지 고하이 타이유가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에게 살해된 후, 엘베그 칸은 자신의 딸 사무르 군즈를 마하무와 결혼시켰다. 마하무와 사무르 군즈 사이에서 아들 토곤이 태어났다. 그의 사후 아들 토곤은 오이라트부의 실권을 쥐게 된다.

참조

[1] 역사서 明史 列伝第216 外国9 瓦剌
[2] 서적
[3] 서적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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