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리치 울루그테무르 칸
1. 개요
굴리치 울루그테무르 칸은 1370년대 또는 135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북원 출신의 칸으로, 정확한 출생 연도와 가계는 불분명하다. 그는 1402년 군 테무르 칸을 살해하고 스스로 대칸에 즉위했으나, 몽골 전역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굴리치는 명나라와 친선 정책을 추진했지만 몽골 부족들의 반발을 샀고, 1408년 아룩타이에게 암살당했다.
| 칭호 | 카간 |
|---|---|
| 몽골어 | (욜로 테무르 칸) |
| 한국어 음역 | 월로첩목아한 |
| 몽골어 | (욜트모르 하안) |
| 중국어 | (월로첩목아한) |
| 칭호 | 북원의 카간 |
|---|---|
| 재위 기간 | 1402년 – 1408년 |
| 즉위 | 1402년 |
| 이전 통치자 | 귄 테무르 칸 |
| 다음 통치자 | 욀제이 테무르 칸 |
| 왕가 | 보르지긴 가문 |
|---|---|
| 왕조 | 북원 |
| 아버지 | 정보 없음 |
| 어머니 | 정보 없음 |
| 배우자 | 정보 없음 |
| 출생일 | 정보 없음 |
|---|---|
| 사망일 | 1408년 |
| 사망 장소 | 정보 없음 |
| 매장 장소 | 정보 없음 |
| 종교 | 정보 없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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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출신 -
이상철 (1924년)
시베리아 출생의 고려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성장한 이상철은 목사이자 캐나다 연합 교회 총회장, 토론토 대학교 빅토리아 칼리지 총장을 역임하며 이민자 사역과 진보적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한 인물이다. -
1408년 사망 -
태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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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년 사망 -
민제 (조선)
민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로, 세 딸이 조박, 이천우에게 출가하고 특히 막내딸 원경왕후가 태종의 비가 되었으며, 아들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등은 태종의 외척으로 활동했다. -
오이라트 -
오이라트어
오이라트어는 러시아, 몽골, 중국의 오이라트족이 사용하는 언어로, 칼미크 공화국에서는 공용어이며 키릴 문자를 사용하고, 몽골과 중국에서는 몽골어 방언으로 취급되지만 독자적인 문어(토도 문자)를 유지하며 소멸 위기에 처해 지역별로 차이가 나타난다. -
오이라트 -
토목의 변
토목의 변은 1449년 환관 왕진의 전횡과 잘못된 판단으로 명나라 정통제가 오이라트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힌 사건으로, 명나라의 정치적 혼란과 북방 민족에 대한 영향력 약화를 초래했다.
2. 생애
굴리치 울루그테무르 칸은 1377년생 또는 1379년생, 혹은 그 이전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생일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가계는 불분명하며, 돌궐계 기록에는 우구데이 카안의 후예라 한다. 그러나 티무르 제국에서 편찬된 기록에 따르면 우구데이 칸의 증손자뻘이 되어 시대가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일본의 와다 키요시(和田 清)는 굴리치의 근거지를 하서(河西) 지방(구 서하 영역)의 아라산으로 보기도 했다. 키르기스스탄의 일부 학자들은 우게치 카스하와 굴리치를 동일 인물로 보거나, 토르구트부의 지도자 마하치 멩케(Махачи-Менкэ)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제기한다.
몽골원류를 비롯한 몽골 사료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명나라 측 기록인 《명사》와 《명실록》에는 '귀력치'(鬼力赤) 또는 '귀력치'(貴力赤)로 나타난다. 그의 몽골어식 칸호인 '울루그 테무르'는 몽골어로 '수확'을 뜻하는 '울루그'와 '철'을 뜻하는 '테무르'의 조합어였다.
굴리치 울루그테무르 칸의 가계는 칭기즈 칸의 동생 주치 카사르 또는 테무게의 후손이라는 설, 도분 메르겐의 형 두아 소코르의 후손이라는 설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오이라트족 출신이라는 설도 있으며,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명나라측 기록에는 그가 원나라 황실의 적손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1399년 굴리치는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군 테무르 칸, 우게치 카스카 등과 함께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 암살에 가담했다.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은 올제이투 비자를 차지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을 죽였고, 올제이투 카툰은 고하이 태위가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무고하여 엘베그 칸이 고하이 태위를 살해하게 만들었다. 뒤늦게 진실을 안 고하이 태위의 아들 바툴라(마흐무드)는 군사를 일으켰고, 굴리치도 이에 가담하여 엘베그 칸을 시해했다.
1402년 굴리치는 군 테무르 칸을 살해하고 스스로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아수드부의 아룩타이가 옹립했다는 설도 있다. 그는 원나라라는 국호를 폐지하고 타타르(달단)로 국호를 고쳤다고 한다. 또한 니굴세그치 칸 엘베그의 처인 울제이투 카툰을 자신의 처로 삼았다. 굴리치는 동맹인 아룩타이(Аругтай몽골어)에게 승상(칭상) 직위를 주고, 동몽골을 맡겼다.
그는 몽골 전역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고, 그의 재위기간 중 키르기스족은 몽골의 정치 권력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는 그의 즉위를 계기로 망명중이던 부냐시리를 몽골의 칸으로 세우려 했으나, 1405년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1403년 명나라 영락제는 굴리치에게 우호 관계를 제안했으나, 굴리치는 응답하지 않았다. 굴리치는 지지 기반이 취약하여 명나라와 수교하고 친명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몽골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1403년 울제이 테무르 칸 부냐시리가 몽골로 오려는 것을 제지하였고, 부냐시리는 자신이 몽골의 대칸이라고 선언했다.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굴리치는 대원 국호를 폐지하고 타타르의 칸이라 선언했다. 이는 명나라에 대한 반발이자, 몽골인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1405년 굴리치는 우량카이 3위와 카라델 칸국이 명나라에 복속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카라델 칸국의 엥케 테무르를 독살했다. 모굴리스탄 칸국의 사무이 자한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원을 침공했다. 굴리치는 무역로의 중심지인 하미 지방을 점령하려 했다.
1406년 굴리치는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명나라 화북 지방을 공격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1408년 굴리치는 아룩타이(ᠠᠷᠦᠭᠲᠠᠢ몽골어)에게 암살당했다. 굴리치가 보르지긴 씨족이 아니라는 소문과 명나라와의 화친 정책은 몽골 부족장들과 노얀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굴리치가 살해당하자 소호아(埽胡兒)와 찰한달로화(察罕達魯花)는 명나라로 투항했다. 아룩타이는 올제이 테무르 칸을 정식 대칸으로 옹립했다.
2.1. 출생과 가계
1377년생 또는 1379년생 혹은 그 이전, 혹은 1350년경에 태어났으며, 정확한 생일은 전하지 않는다. 굴리치 울루그테무르 칸의 가계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돌궐계 기록에 의하면 그는 우구데이 카안의 후예라 한다. 페르시아계 일부 사서와 당시 티무르 제국에서 편찬된 기록에는 울루그 테무르 칸이 우구데이 칸의 손자이자 카단 오굴의 아들인 누비야(Нубия)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 설을 선택한다면 울루그 테무르 칸은 우구데이 칸의 증손자뻘이 되어 150년~190년의 연대 차이가 나 시대가 맞지 않게 된다. 자손을 아들로, 선조를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로 표현하는 문헌이 있어서 직계 자손인 것은 분명하나 정확한 계대를 알 수 없다고 보는 주장도 있고, 울루그 테무르 칸이 러시아 남부 출신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와다 키요시(和田 清)는 굴리치의 고향은 하서(河西) 지방(구, 서하 영역)의 아라산이 굴리치의 근거지라는 설을 제기한다. 굴리치의 근거지인 하서(河西) 지방이 카단 오굴에게 주어진 땅이라, 그가 카단의 먼 후손일 수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키르기스스탄의 일부 학자들은 우게치 카스하와 굴리치 울루그테무르 칸을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토르구트부의 지도자 마하치 멩케(Махачи-Менкэ)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몽골원류를 비롯한 몽골 사료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명나라측 기록인 《명사》와 《명실록》에는 '귀력치'(鬼力赤) 또는 '귀력치'(貴力赤)로 나타나며, 《명사》에는 곽륵제(郭勒齊)로도 나타난다. 그의 몽골어식 칸호인 '울루그 테무르'는 몽골어로 '수확'을 뜻하는 '울루그'와 '철'을 뜻하는 '테무르'의 조합어였다.
울루그 테무르 칸의 가계는 불분명해서, 칭기즈 칸의 첫째 동생인 주치 카사르의 후손이라는 설, 또는 막내 동생인 테무게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그밖에 칭기즈 칸의 11대조 도분 메르겐의 형 두아 소코르의 후손, 두아 소코르의 아들로 오이라트의 도르벤부의 선조이자 케르구트부의 창시자 에르케그(Эркэг)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출신에 대한 다른 설로는 우구데이 카안의 다른 아들 카단 오굴의 후손 설, 오이라트의 혈통, 오이라트족 토르구트부 출신 설, 서몽골의 견곤 예니세이 키르기스인의 지도자라는 설, 키르키스 출신 설 등이 있다. 일설에는 굴리치가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명나라측 일부 기록에는 그는 비원예야(非元裔也)라 하여 원나라 황실의 적손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울루그 테무르 칸의 별칭인 '카스카'(카스하)는 퉁구스어로 '왕자'를 뜻하는 단어였다. 그래서 선대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을 섬기다가 암살한 오이라트부의 수장 우게치 카스카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오이라트의 우게치 카스카는 니굴세그치 칸 자신이 살해한 고하이 태위의 아들 바툴라(마흐무드)를 오이라트 4부의 지도자로 임명한 것에 반감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니굴세그치 칸을 암살했다. 한편 울루그 테무르 칸을 케레이트부 출신으로 보는 설까지 있다. 그의 어머니가 누군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가계가 불확실한 만큼 어린 시절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2.2. 정치 활동
1399년 굴리치는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이 보낸 사자를 죽이고 엘베그 칸의 종주권을 부인했다. 같은 해 군 테무르, 오이라트부 승상 바툴라(마흐무드), 우게치 카스카 등과 함께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 암살에 가담했다.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은 고하이 태위가 추천한 미인 올제이투 비자를 차지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 하루구추크 두렌 테무르 홍타이지를 죽였다. 올제이투 카툰은 고하이 태위가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무고하여 엘베그 칸이 고하이 태위를 살해하게 만들었다. 뒤늦게 진실을 안 고하이 태위의 아들 바툴라(마흐무드)는 군사를 일으켰고, 굴리치도 이에 가담하여 엘베그 칸을 시해하고 그의 재산과 하렘을 몰수했다.
군 테무르 칸은 바툴라(마흐무드)를 오이라트 4부의 지도자로 임명했는데, 굴리치는 이에 반발했다. 당시 쿠빌라이 직계인 토구스 테무르 우스칼 칸이 이수데르 조리그투 칸에게 암살된 뒤에도 친쿠빌라이 파인 초로스 씨족(고하이 태위, 바툴라 승상)과 친아리크 부케파인 케레누트 씨족(우게치 카스카, 에세쿠)은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계속했다.
1402년 2월 경, 굴리치는 오이라트부 군대와 함께 명나라 변경을 공략했다.
2.3. 대칸 즉위
1402년, 굴리치는 군사를 이끌고 다이시(Тайшинин) 근처에서 군 테무르 토고간 칸을 살해하고 스스로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1403년 즉위설도 있다.) 아수드부의 아룩타이가 옹립했다는 설도 있다. 명나라의 역사서 《명사》에 의하면 굴리치는 원나라라는 국호를 폐지하고 타타르(달단)로 국호를 고쳤다고 한다. 토구스테무르 우스칼 칸의 유신들이 굴리치를 지지하였다. 또한 니굴세그치 칸 엘베그의 처인 울제이투 카툰을 자신의 처로 삼았다. 굴리치의 동맹인 아스트(알란, 아스, 아수드) 부족의 족장 아룩타이(Аругтай몽골어)에게는 승상(칭상) 직위를 주고, 동몽골을 맡겼다.
그는 몽골 전역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동몽골은 칭상 아룩타이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통치권을 주었다. 그는 비오이라트 집단에서 옹립된 칸이었지만, 쿠빌라이 지지파 입장에서는 아릭부케 가문보다도 더 먼 오고데이 칸 가문의 출신이었기에 몽골인의 지지를 넓게 얻지 못했다. 그의 재위기간 중 키르기스족은 몽골의 정치 권력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는 그의 즉위를 계기로 망명중이던 부냐시리를 몽골의 칸으로 세우기 위해 명나라와 전쟁을 준비한다. 그러나 1405년 2월 18일에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2.4. 대 명나라 우호 정책과 실패
1403년 명나라 영락제는 사신을 보내 굴리치에게 은폐(銀幣)를 하사하고 우호 관계를 제안했으나, 굴리치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응답하지 않았다. 굴리치는 지지 기반이 취약하여 명나라와 수교하고 친명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몽골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그해 10월 굴리치와 마루하치, 아룩타이는 오이라트부와 싸웠으나 패배하고 퇴각했다. 영락제는 몽골 고원의 정세가 불안해진 것을 감지하고 북변의 장수들에게 굴리치를 감시하도록 명령했다.
2.5. 부냐시리와의 대립
1403년 울제이 테무르 칸 부냐시리가 몽골로 오려는 것을 교전하여 제지하였다. 같은 해 부냐시리는 자신이 몽골의 대칸이라고 선언했고, 일부 몽골 왕공족들은 부냐시리의 편으로 돌아섰다.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굴리치는 대원 국호를 폐지하고 타타르의 칸이라 선언했다. 이는 명나라에 대한 반발이자, 홍건적의 난으로 부당하게 영토를 빼았겼다고 생각하는 몽골인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1404년 오이라트부를 상대로 교전했으나 패배했다.
2.6. 명나라, 하미와의 갈등
1405년 1월 굴리치는 우량카이 3위와 카라델 칸국이 명나라에 복속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그들의 동향을 비밀리에 염탐했다. 이는 명나라 영락제의 첩보원에게 발각되어 보고되었다. 1405년 4월 15일(혹은 3월) 굴리치는 자객을 보내 카라델 칸국의 엥케 테무르를 독살했다. 모굴리스탄 칸국의 사무이 자한은 굴리치가 엥케 테무르를 독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북원을 침공했다. 굴리치는 무역로의 중심지인 하미 지방을 점령하려 했다.
1406년 2월과 9월, 굴리치는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명나라 화북 지방을 공격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었고, 이는 영락제에게 보고되었다.
2.7. 암살과 최후
1407년 굴리치는 하미 지방을 공략해 소공국을 점령했다. 그러나 굴리치가 보르지긴 씨족이 아니라는 소문과 명나라와의 화친 정책은 몽골 부족장들과 노얀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1408년 12월 20일 굴리치는 아룩타이(ᠠᠷᠦᠭᠲᠠᠢ몽골어)에게 암살당했다. 굴리치가 살해당하자 소호아(埽胡兒)와 찰한달로화(察罕達魯花)는 명나라로 투항했다. 아룩타이는 올제이 테무르 칸을 정식 대칸으로 옹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