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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긴즈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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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스 긴즈버그는 런던 대학교 사회학 교수로, 홉하우스를 계승하여 종합사회학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사회생활 전체를 해석하려 했으며, 윤리에서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객관주의적 윤리 이론을 제시했다. 긴즈버그는 사회학자의 사회적 책임, 이성과 비이성의 문제, 정의와 법의 관계, 자유주의적 사고방식 옹호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연구했다. 주요 저서로는 『사회의 심리학』, 『사회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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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긴즈버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모리스 긴즈버그
출생일1889년 5월 14일
출생지켈메, 코브노, 리투아니아
사망일1970년 8월 31일
사망지하이게이트, 런던, 잉글랜드
국적영국
1930년대의 모리스 긴즈버그
1930년대의 모리스 긴즈버그
학문 분야
분야사회학
근무지런던 정치경제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출신 대학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기타
훈장영국 학술원 회원

2. 생애

모리스 긴즈버그는 런던 대학교 사회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레너드 트렐라우니 홉하우스를 계승하여 사회생활 전체를 해석하려는 종합사회학의 입장을 취하였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정치학을 주로 연구하면서도 철학 연구를 계속하여 존 스튜어트 밀 학생증을 3번 연속 획득했다. 프랑스어독일어에 능통했으며, 생물학, 화학, 물리학 강좌도 수강했다. 1914년에는 니콜라 말브랑슈의 철학에 대한 논문과 ''형이상학 논고''(1923) 번역으로 MA 시험을 통과했다.[1]

이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현대 철학, 논리학, 사회 철학 역사를 강의했고,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는 사회학, 윤리학, 정치 사상 역사를 강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는 R.H. 토니, 클레멘트 앳틀리, 찰스 모스틴 로이드가 맡았던 강좌를 대신한 그의 군 복무 연기를 요청했다.[1]

1921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조교, 1923년 정식 강사가 되었고, 1년 후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C.G. 셀리그먼, Dawes Hicks의 추천으로 사회학 강사가 되었다. 1921년 ''사회의 심리학''을 출판하여 1964년까지 9판을 거듭하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1930년 레너드 트렐라우니 홉하우스를 이어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마틴 화이트 사회학 교수가 되었다.[1]

1934년 저술한 ''사회학''은 ''가디언''지에서 "아마도 지금까지 쓰여진 이 주제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라고 평가받았다.[1]

1931년 에텔 스트리트와 결혼했으나(1962년 사망),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1] 1954년부터 1957년까지 윤리 연합(현재의 휴머니스트 UK) 회장을 역임했다.[2]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모리스 긴즈버그, 1918년 군복 차림


그는 러시아 제국 카우나스 지역(당시 리투아니아 켈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고 고립된, 매우 종교적인 유대교 공동체가 채택한 기준에 따라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교육을 받았다. 그의 히브리어 지식과 종교적 원리는 충분했지만 세속적인 학습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다.[1]

13세에 그는 집을 떠나 텔샤이로 갔고, 그 다음에는 빌리얌폴레로 갔다. 그곳에는 탈무드 연구를 위한 두 개의 유명한 예시바(아카데미)가 있었다. 그는 15세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열정적으로 랍비의 지식을 공부했다.[1]

이 무렵 히브리어 문학이 부활했고, 많은 유대인 작가들이 러시아 유대인들에게 서구 사람들의 지식을 소개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유럽의 사상과 접하게 되었고 세속적인 지식에 대한 큰 열망을 갖게 되었다.[1]

그의 아버지는 이전에 영국 리버풀로 이민을 가서 담배 공장을 세웠고, 15세에 그는 어머니, 누이와 함께 아버지에게 합류했다. 그는 공부하기로 결심했지만, 당시 그는 이디시어를 제외하고는 유럽 언어를 전혀 몰랐고, 종교 문제와 히브리어 지식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세속 교육의 기초조차 전혀 몰랐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에서 일했고 틈틈이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1907년 1월에 통과한 런던 대학교의 입학 시험을 준비하는 데 성공했다. 불행히도 어려운 상황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몇 년 동안 그는 의류 공장의 서기로, 나중에는 엔지니어링 공장의 직원으로 고용되었다.[1]

결국 그는 마게이트의 작은 대학에서 교사 자리를 얻었고, 1910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그해 7월에 통과한 중간 학사 시험을 준비했다. 그 결과, 그는 사회학 분야의 마틴 화이트 장학금을 받았고, 이를 통해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2년 동안 공부할 수 있었다. 이 2년 동안 그는 현대 철학과 고대 철학에서 제공되는 모든 1등 상을 받았다. 1912년 그는 철학 및 사회학에서 1등급으로 BA 우등 시험을 통과했다. 그가 함께 공부한 교수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Dawes Hicks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레너드 트렐라우니 홉하우스였다. 홉하우스는 그에게 사회학 연구를 제안했고, 1913년 그는 홉하우스의 조수가 되었으며, 그들의 공동 연구 결과는 1915년에 출판되었다.[1]

2. 2. 영국 이민과 학업



그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지역의 작은 마을인 켈메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고 고립된, 매우 종교적인 유대교 공동체의 기준에 따라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의 히브리어 지식과 종교적 원리는 충분했지만 세속적인 학습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다.

13세에 그는 집을 떠나 텔샤이로 갔고, 그 다음에는 빌리얌폴레로 갔다. 그곳에는 탈무드 연구를 위한 두 개의 유명한 예시바가 있었다. 그는 15세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랍비의 지식을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이 무렵 히브리어 문학이 부활했고, 많은 유대인 작가들이 러시아 유대인들에게 서구 사람들의 지식을 소개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유럽의 사상과 접하게 되었고 세속적인 지식에 대한 큰 열망을 갖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전에 영국 리버풀로 이민을 가서 담배 공장을 세웠고, 15세에 그는 어머니, 누이와 함께 아버지에게 합류했다. 그는 공부하기로 결심했지만, 당시 그는 이디시어를 제외하고는 유럽 언어를 전혀 몰랐고, 종교 문제와 히브리어 지식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세속 교육의 기초조차 전혀 몰랐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에서 일했고 틈틈이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1907년 1월에 통과한 런던 대학교의 입학 시험을 준비하는 데 성공했다. 불행히도 어려운 상황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몇 년 동안 그는 의류 공장의 서기로, 나중에는 엔지니어링 공장의 직원으로 고용되었다.

결국 그는 마게이트의 작은 대학에서 교사 자리를 얻었고, 1910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그해 7월에 통과한 중간 학사 시험을 준비했다. 그 결과, 그는 사회학 분야의 마틴 화이트 장학금을 받았고, 이를 통해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2년 동안 공부할 수 있었다. 이 2년 동안 그는 현대 철학과 고대 철학에서 제공되는 모든 1등 상을 받았다. 1912년 그는 철학 및 사회학에서 1등급으로 BA 우등 시험을 통과했다. 그가 함께 공부한 교수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Dawes Hicks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레너드 트렐라우니 홉하우스였다. 홉하우스는 그에게 사회학 연구를 제안했고, 1913년 그는 홉하우스의 조수가 되었으며, 그들의 공동 연구 결과는 1915년에 출판되었다.[1]

2. 3. 학문적 경력

레너드 트렐라우니 홉하우스를 계승한 모리스 긴즈버그는 인간관계의 한정된 국면을 다루는 특수과학적 사회학(형식사회학)을 부정하고, 사회생활 전체를 해석하려는 종합사회학의 입장을 취했다.[1]

그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2년 동안 공부하며 현대 철학과 고대 철학에서 모든 1등 상을 받았다. 1912년에는 철학 및 사회학에서 1등급으로 BA 우등 시험을 통과했다. Dawes Hicks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레너드 트렐라우니 홉하우스 교수에게 배웠으며, 홉하우스의 제안으로 1913년 그의 조수가 되었다.[1]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정치학을 주로 연구하면서도 철학 연구를 계속하여 존 스튜어트 밀 학생증을 3번 연속 획득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능통했으며, 생물학, 화학, 물리학 강좌도 수강했다. 1914년에는 니콜라 말브랑슈의 철학에 대한 논문과 ''형이상학 논고''(1923) 번역으로 MA 시험을 통과했다.[1]

이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현대 철학, 논리학, 사회 철학 역사를 강의했고,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는 사회학, 윤리학, 정치 사상 역사를 강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는 R.H. 토니, 클레멘트 앳틀리, 찰스 모스틴 로이드가 맡았던 강좌를 대신한 그의 군 복무 연기를 요청했다.[1]

1921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조교, 1923년 정식 강사가 되었고, 1년 후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C.G. 셀리그먼, Dawes Hicks의 추천으로 사회학 강사가 되었다. 1921년 ''사회의 심리학''을 출판하여 1964년까지 9판을 거듭하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1930년 홉하우스를 이어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마틴 화이트 사회학 교수가 되었다.[1]

1934년 저술한 ''사회학''은 ''가디언''지에서 "아마도 지금까지 쓰여진 이 주제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라고 평가받았다.[1]

2. 4. 결혼과 사회 활동

긴즈버그는 1931년에 에텔 스트리트와 결혼했으나(1962년 사망),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1]

1954년부터 1957년까지 윤리 연합(현재의 휴머니스트 UK) 회장을 역임했다.[2]

3. 주요 사상

긴즈버그는 말브랑슈에 대한 논문에서 마리오 노바로의 말브랑슈 우발론 이론 비판에 반박하며, 노바로가 "과 말브랑슈가 인과관계와 관련하여 가진 주요 차이점을 완전히 무시했다. 말브랑슈는 사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성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3]

그의 주요 저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주제들을 다루었다.


  • 사회학자의 사회적 책임: 그는 이것을 지식 윤리의 더 일반적인 문제의 일부로 보았다. 그는 사실과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더 완전한 조사가 시급하다고 믿었으며, 특히 사회적 갈등이 도덕적 관점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는 상대주의적 견해에 직면하여 더욱 그러했다.
  • 종합사회학: 홉하우스를 계승한 모리스 긴즈버그는 인간관계의 한정된 국면을 다루는 특수과학적 사회학(형식사회학)을 부정하고, 사회생활 전체를 해석하려는 종합사회학의 입장을 취했다.[3]

3. 1. 이성과 비이성의 조화

긴즈버그는 이성과 감정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행동을 동기 부여하고 감정과 의지를 지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요약했다. "우리는 흄의 이성에 대한 견해(열정의 노예)와 칸트의 이성에 대한 견해(독립적이고 압도적인 존재)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인 생각보다 더 깊은 통합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의 개성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생각하고, 기본적인 충동과 관심사 안에서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작동하고, 그것들로부터 에너지를 얻을수록 더욱 효과적이다."[4]

그는 사회, 집단 및 개인 간의 다양한 도덕성을 분석했지만, 그러한 인식이 윤리가 완전히 상대적이어야 한다는 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했다. 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 시지윅 및 홉하우스의 전통에서 '객관주의적' 윤리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도덕적 발전 수준에 대한 개념을 긍정적으로 다루고, 이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했다.

긴즈버그는 또한 정의의 본질과 평등과의 관계, 그리고 사회 변화와 개혁의 행위자로서의 법과 관련된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사회 정의에 관하여"(1965)에서 처벌의 윤리와 개인의 도덕적 자유, 법적 강제와의 연관성을 조사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a) 무력의 사용이 필요한가, 아니면 그 목표가 설득이나 자발적 합의로 확보될 수 있는가? (b) 문제의 목표가 강제로 달성될 수 있는가, 아니면 그 가치가 자유롭거나 자발적으로 추구되는지에 달려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법적 강화가 필요하고 허용되는 권리와 의무와 도덕적 수단, 즉 내적 확신과 자유로운 수용에 의해 가장 잘 보장되는 권리와 의무를 구별하려는 모든 노력에서 직면해야 한다.'

그는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바람직한 것으로 옹호하며, 광신주의, 충동성, '전체주의'에 반대했다. 그는 판단에 있어서 건전함, 냉정함, 성찰 및 자제를 지지했다. 그는 "진보의 개념"(1953, 72–73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유주의적 정신은 광신주의에 대한 혐오, 인간의 행복과 인간의 생명에 대한 대가를 따져보는 더 큰 준비성, 폭력의 영향에 대한 더 깊은 인식,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것을 겪는 사람 모두에게 특징지어진다.'

3. 2. 객관적 윤리

긴즈버그는 윤리에서 이성의 역할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사회, 집단, 개인 간의 다양한 도덕성을 분석했지만, 이러한 인식이 윤리가 전적으로 상대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윤리의 감정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문화 인류학의 영향을 받아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한 사람들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문화 상대주의는 종종 그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도덕 상대주의를 수반하지 않는다.

긴즈버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 시지윅, 홉하우스의 전통을 따라 '객관주의적' 윤리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가치'와 '의무', '선'과 '악'은 서로에게 또는 그것을 암시하지 않는 용어로 더 이상 환원되거나 분석될 수 없는 용어라고 주장했다. 또한 도덕적 발전 수준에 대한 개념을 긍정적으로 다루고, 이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이러한 기준을 통해 현대 세계의 서로 다른 사회 간의 수준 차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문제에 최종성은 없으며, 조건, 상황,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발전과 퇴행을 모두 포함한다고 보았다.

3. 3. 사회 정의와 법

긴즈버그는 정의의 본질, 정의와 평등의 관계, 그리고 사회 변화와 개혁의 주요 행위자인 법과 관련된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4] 그는 "사회 정의에 관하여"(1965)에서 처벌 윤리, 개인의 도덕적 자유의 복잡한 본질, 법적 강제와의 연관성을 다루며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a) 무력 사용이 필요한가, 아니면 설득이나 자발적 합의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 (b) 문제의 목표가 강제로 달성될 수 있는가, 아니면 그 가치가 자유롭거나 자발적으로 추구되는지에 달려 있는가? 법적 강화가 필요하고 허용되는 권리와 의무, 그리고 내적 확신과 자유로운 수용이라는 도덕적 수단에 의해 가장 잘 보장되는 권리와 의무를 구별하려는 모든 노력에서 이러한 질문들에 직면해야 한다.'[4]

3. 4. 자유주의적 가치 옹호

모리스 긴즈버그는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옹호하며 광신주의, 충동성, '전체주의'에 반대했다. 그는 판단에 있어 건전함, 냉정함, 성찰 및 자제를 지지했다. 문제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은 근본적으로 아폴론적이었고, 디오니소스적 기질을 이해했지만 본질과 잠재력을 오해했다. 긴즈버그는 "자유주의적 정신은 광신주의에 대한 혐오, 인간의 행복과 인간의 생명에 대한 대가를 따져보는 더 큰 준비성, 폭력의 영향에 대한 더 깊은 인식,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것을 겪는 사람 모두에게 특징지어진다"라고 말했다.[4]

3. 5. 종합사회학

홉하우스를 계승한 모리스 긴즈버그는 인간관계의 한정된 국면을 다루는 특수과학적 사회학(형식사회학)을 부정하고, 사회생활 전체를 해석하려는 종합사회학의 입장을 취했다.[3]

4. 저서


  • ''단순 사회의 물질 문화와 사회 제도''(L. T. 호브하우스, 휠러 공저), (1915)
  • ''사회의 심리학'', (1920)
  • L. T. 호브하우스 (J. A. 홉슨 공저), (1931)
  • ''사회학 연구'', (1932)
  • ''사회학'', (1934)
  • ''사회 속의 이성과 비이성'', (1947)
  • 1923년 말브랑슈의 ''형이상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 번역
  • ''사회학 및 사회 철학 에세이'' (3권): ''1. 도덕의 다양성,'' ''2. 사회 속의 이성과 비이성,'' ''3. 진화와 진보'', (1956)

참조

[1] 간행물 Ginsberg, Morris (1889–1970), sociologist and philosopher https://doi.org/10.1[...] 2004-09-23
[2] 웹사이트 Jewish and humanist: secular Jews who helped shape the humanist movement in Britain https://humanists.uk[...] 2022-01-27
[3] 논문 Ginsberg's translation of the ''Dialogues on Metaphysics and on Religion'' by Nicholas Malebranche https://www.jstor.or[...] The Philosophical Review 1924-03
[4] 서적 The Plain View; A Guide to Humanist Books in English (Summer 1955)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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