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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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요섬은 토레스 해협에 위치한 섬으로, 수천 년 동안 토레스 해협 도서민이 거주해 왔다. 1875년 항구로 지정된 이후 진주 채취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호주와 동남아시아를 오가는 선박의 기항지였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사 기지로 활용되었으며, 현재는 토레스 해협 제도 지역의 행정 및 상업 중심지 역할을 수행한다. 섬의 경제는 행정, 진주 양식, 어업, 관광 산업에 기반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 유산과 교육 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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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섬 | |
---|---|
지도 | |
개요 | |
유형 | 섬 |
위치 | 퀸즐랜드 주토러스 해협 |
면적 | 3.5km2 |
역사 | |
원래 이름 | Waiben (와이벤) |
명칭 유래 | 목요일 (Thursday) |
설명 | HMS 인데버 호의 이름을 딴 것임 |
인구 통계 | |
2021년 인구 | 4,228명 |
행정 | |
지방 정부 구역 | 토러스 해협 아일랜드 지역 |
2. 역사
목요섬은 수천 년 동안 토레스 해협 도서민들이 거주해 온 곳이다. 19세기 중반 영국 해군에 의해 이름이 붙여지고, 1870년대에는 퀸즐랜드 주 정부에 의해 토레스 해협 섬들의 행정 중심지로 지정되면서 유럽인의 정착이 본격화되었다.[7][8][9]
19세기 후반부터 섬 주변 해역의 풍부한 진주조개 자원을 바탕으로 진주 채취 산업이 번성하였다. 이 산업은 주로 단추 재료로 사용되는 조개껍데기를 채취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12],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각지와 남태평양 등지에서 온 많은 노동자들이 이 섬으로 모여들었다. 특히 메이지 시대 이후 많은 일본인들이 건너와 진주 채취 산업에 종사하며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으나, 위험한 작업 환경으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55] 당시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노동력에 대한 의존성 때문에 이들의 이주가 암묵적으로 용인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목요섬은 연합국의 중요한 군사 기지로 활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섬 주민들은 본토로 대피해야 했다.[15] 특히 일본계 주민들은 적성국 국민으로 간주되어 수용소에 억류되었다가 종전 후 상당수가 강제 송환되었다. 흥미롭게도 일본군은 인근 지역을 폭격하면서도 목요섬 자체는 공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다.
전후 플라스틱 단추의 보급과 유조선 좌초 사고로 인한 해양 오염 등으로 진주조개 산업은 급격히 쇠퇴하였다.[56] 이후 진주 양식 시도도 있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현재는 바다가재 어업이 섬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56] 또한 1970년대 파푸아뉴기니 독립 과정에서 영유권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으나, 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호주 영토로 남게 되었다.[20]
2. 1. 원주민 역사
이 섬에는 수천 년 동안 토레스 해협 도서민들이 거주해 왔다. 토레스 해협 북쪽에 위치한 바두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는 이 지역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기 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시사한다. 또한 바두, 풀루, 사이바이, 머 등지에서 발견된 고고학 자료는 멜라네시아인들의 거주가 약 2,600년 전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칼라우 라가우 야 참조).2. 2. 유럽인의 발견과 정착

이 섬에는 수천 년 동안 토레스 해협 도서민들이 거주해 왔으며, 바두, 풀루, 사이바이, 머 등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는 멜라네시아인들의 거주가 약 2,600년 전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자세한 내용은 칼라우 라가우 야 참조).
1848년, 영국 해군의 오언 스탠리 대위가 HMS ''래틀스네이크'' 함을 이끌고 이 지역의 수로를 측량했다. 그는 이 섬을 프라이데이 섬(Friday Island)으로, 다른 섬을 서스데이 섬(Thursday Island)으로 명명했는데, 이는 아마도 그가 섬들을 발견하거나 명명한 요일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55년 6월, 영국 해군의 수로학자였던 프란시스 보퍼트 제독은 오늘날의 프라이데이 섬 및 인근의 수요일 섬과의 동서 명명 순서를 유지하기 위해 이름을 현재와 같이 바꾸었다.[3]
토레스 해협에 유럽인이 영구적으로 정착한 첫 번째 장소는 1864년 케이프요크 반도 끝자락 남동쪽에 세워진 서머셋이었다. 하지만 올버니 섬과 서머셋 사이의 해협은 항구로 이용하기에 위험하다는 것이 밝혀지자, 1875년 퀸즐랜드 주 정부와 영국 정부는 목요섬 남쪽에 있는 깊은 정박지로 항구를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항구는 케이프요크 반도의 탐험가 에드먼드 케네디의 이름을 따 포트 케네디(Port Kennedy)라고 명명되었으며, 1867년에 설립되었다.[7][8] 섬에 개발된 마을 역시 포트 케네디라고 불렸으나, 1962년 6월 1일 목요섬(Thursday Island)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4]
1877년, 퀸즐랜드 주 정부는 토레스 해협 섬들의 행정 중심지를 목요섬에 설치했으며, 1883년까지 200척 이상의 진주 채취선이 이 섬을 기지로 삼았다.[9] 1884년에는 쿡타운 로마 가톨릭 사도 대목구 (현재 케언스 로마 가톨릭 교구)의 목요섬 교구가 설립되었다.[38]
1887년 8월 25일, 케이프요크 서해안의 패터슨(케이프요크) 전신국이 개통되어 해저 케이블을 통해 케이프요크 전신선과 목요섬을 연결했다.[14]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목요섬은 호주 동해안과 동남아시아를 오가는 선박들의 중요한 정기 기항지가 되었다. 1890년, 이 노선을 운항하던 RMS Quetta호가 해협의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암초에 부딪혀 5분 만에 침몰하면서 130명 이상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기리기 위해 직후 목요섬에 세워진 성공회 교회는 퀘타 만령 추모 성당으로 명명되었다.[15] 오늘날 이 교회는 만령과 성 바르톨로뮤 교회로 불린다.
1899년에는 목요섬 남동쪽의 배서스트 만을 강타한 마히나 사이클론으로 인해 그곳에 정박해 있던 진주 채취 선단이 파괴되어 막대한 선박과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13]
2. 3. 진주조개 채취 산업과 일본인 사회
1884년, 목요섬에서는 수익성이 좋은 진주 채취 산업이 시작되었다.[10] 이 산업은 주로 셔츠 단추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진주 조개 껍데기를 얻기 위한 것이었으며, 진주 자체는 부수적인 수확물로 여겨졌다.[12] 주된 채취 대상은 황금입 진주조개인 ''Pinctada maxima''였고, 토르쿠스 조개 껍질도 특수 제작된 보트를 이용해 채취했다. 대부분의 조개껍데기는 가공되지 않은 원자재 형태로 런던의 시장으로 수출되었다.[12]
진주 채취 산업이 번성하면서 일본, 말라야, 인도 등 아시아 각지에서 온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목요섬으로 몰려들었다.[10] 또한 많은 남부 태평양 섬 주민들이 이 산업에 종사했는데, 일부는 블랙버딩이라는 강제적인 방식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한 문화의 유입은 오늘날 목요섬의 다문화적 특성으로 남아있다.
특히 일본인 공동체는 진주 채취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계약 노동자 신분의 잠수부나 보트 선원으로 일하며 일정 기간 근무 후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부는 섬에 장기적으로 거주하며 보트 건조나 러거(lugger, 진주 채취선) 소유 및 임대 사업에 관여했다. 당시 외국인의 선박 소유는 불법이었으나, 호주인을 내세워 명의를 등록하고 실제로는 일본인들끼리 임대하는 '더미화(dummying)'라는 편법을 통해 사업을 운영했다.[11] 메이지 시대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많은 일본인들이 목요섬에 거주했으며, 전성기에는 섬 인구의 70%에 달하기도 했다. 바다 환경에 익숙한 와카야마현 쿠시모토정 출신자들이 많았으며, 위험한 잠수 작업으로 인해 잠수병 등으로 목숨을 잃은 일본인은 약 8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시오노미사키에 있는 "해풍의 휴게소"에는 당시 사용된 잠수 헬멧, 대어기, 나침반 등 관련 자료 1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55] 섬에는 1875년(메이지 8년)에 사망한 일본인의 묘지가 있어, 그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거주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이들을 소재로 한 중편 《목요도의 야회》를 쓰기도 했다.
진주 채취 작업에는 주로 2개의 돛을 단 러거가 사용되었다.[12] 얕은 물에서는 자유 잠수를 했고, 더 깊은 곳에서는 표준 잠수복을 착용하고 수면에서 공기를 공급받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공기 공급은 수동 공기 압축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러거 한 척에는 선미, 중간, 뱃머리에 각각 한 명씩 총 세 명의 잠수부가 탑승했다. 먼바다에서 조업하는 선단은 스쿠너와 같은 더 큰 배를 모선으로 사용했으며[13], 채취한 조개껍데기는 주로 모선에서 열어 진주 유무를 확인했다. 토레스 해협의 물은 탁하고 시야가 좋지 않았으며, 다니엘리 섬 근처와 같이 수심이 40패덤(약 73.15m)에 달하는 깊은 곳에서의 작업은 잠수병 발병률이 높고 사망 사고도 잦았다.

1900년 호주 연방이 수립된 후, 호주 정부는 백호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의 이민을 제한했다. 하지만 영국인 사업주들은 숙련된 일본인 잠수부 없이는 사업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을 경유하는 밀입국을 암묵적으로 용인했다. 한편, 이러한 이민 배척 움직임은 사토 토라지로와 같이 크게 성장한 일본인 사업가를 견제하고 몰아내려는 영국인 사업주들의 로비 활동에 의해 더욱 강화되기도 했다. 이는 백호주의 정책이 특정 이익 집단에 의해 이용된 사례로 볼 수 있다.
1900년대 초반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목요섬의 진주 채취 산업은 점차 쇠퇴했다. 이는 현지 자원이나 인력을 활용하지 않는 일본 본토 선단과의 경쟁 심화 등이 원인이었다.[15] 1950년대에는 플라스틱 단추가 대량 생산되면서 진주 조개껍데기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감소하여 산업은 더욱 위축되었다.[15] 산업이 쇠퇴하기 전, 일부 선단은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아루 제도까지 조업 구역을 옮기기도 했다.[17]
제2차 세계 대전 중 목요섬은 토레스 해협의 군사 본부 역할을 했으며, 호주군과 미군 기지가 들어섰다. 1942년 1월, 섬의 민간인들은 본토로 대피했으며[15], 일본계 주민들은 적성국 국민으로 간주되어 호주 본토의 수용소에 억류되었다. 일본군은 인근 혼섬의 연합군 공군 기지 등을 격렬하게 폭격했지만(일본의 호주 공습 참조), 목요섬 자체는 폭격을 피했다. 이는 목요섬에 많은 일본인 잠수부들의 묘지가 있었기 때문이거나, 일본군이 섬에 여전히 일본인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오인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수용소에서 풀려난 일본인 중 일부는 목요섬으로 돌아왔으나, 상당수는 강제로 일본에 송환되었다. 돌아온 이들은 사모아계, 중국계, 말레이계 주민들과 결혼하며 작은 규모의 일본계 사회를 다시 형성했다.[56] 전쟁 직후 잠시 오키나와 출신 잠수부들이 러거선에 고용되기도 했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전후에는 플라스틱 단추의 보급으로 진주조개 껍데기 수요가 급감했다. 1950년대에는 CSIRO(호주 연방 과학 산업 연구 기구) 주도로 양식 진주 농장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1970년대에 질병이 퍼지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일각에서는 1970년 유조선 ''오셔닉 그랜드''호의 좌초 사고 당시 사용된 기름 분산제가 질병의 원인이었을 수 있다고 본다.[19] 현재도 섬 주변에서는 소규모로 진주 양식 산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1970년대에는 푸른 바다거북을 사육하려는 시도도 있었다.[9] 진주조개 산업이 쇠퇴한 이후, 현재 목요섬의 주요 산업은 바다가재 어업이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목요섬은 토레스 해협의 군사 본부가 되었으며 호주군과 미국군의 기지로 활용되었다.[15] 1942년 1월, 섬의 민간인들은 안전을 위해 다른 곳으로 대피했다.[15] 당시 섬에 거주하던 일본 출신 또는 일본계 주민들은 억류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강제로 송환되었다.
호주 북부는 일본군의 맹공에 시달렸고(일본의 호주 공습 참조), 토레스 해협 제도는 연합국의 중요한 방어 및 반격 거점이 되었다. 호주군과 미국군이 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1942년 1월에는 모든 섬 주민이 퇴거 조치되었고, 일본계 주민들은 호주 본토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목요섬 자체는 전쟁 중 폭격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군이 이곳을 많은 일본인 진주조개 잠수부들의 매장지로 여겨 존중했기 때문이거나, 혹은 섬에 여전히 일본인 주민이 남아 있다고 오인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인근의 혼섬은 광범위한 폭격을 받았다. 혼섬에는 연합국이 뉴기니의 일부를 공격하는 데 사용한 공군 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주민들은 섬으로 돌아왔다. 일부 일본계 주민들도 돌아와 사모아계, 중국계, 말레이계 주민과 결혼하며 작은 일본계 사회를 형성했다.[56] 섬에는 고대 영혼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신발을 신지 않는 전통이 다시 생겨났다. 전후 앤셋 항공이 케언스에서 목요섬까지 더글러스 DC-3 등을 이용해 주 2회 항공편 운항을 시작했다. 승객들은 혼섬에서 내려 페리를 타고 목요섬으로 이동했다. 전쟁 직후 잠시 오키나와 출신 잠수부를 고용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전쟁 전부터 시작된 진주조개 채취 산업의 쇠퇴는 전후 더욱 가속화되었다. 플라스틱 단추가 보급되면서 조개껍데기에 대한 수요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에는 유조선 좌초 사고로 인한 기름 유출로 바다가 오염되어 진주 양식장이 큰 피해를 입었고, 진주조개가 거의 전멸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현재는 바다가재 어업이 섬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2. 5. 전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군사 본부로 사용되며 민간인이 대피했던 목요섬은 전쟁이 끝난 후 변화를 맞이했다. 주민들이 돌아왔지만, 일본 출신이거나 일본계였던 주민 상당수는 강제로 송환되었다.[15] 이후 일부 일본계 주민들이 돌아와 사모아계, 중국계, 말레이계 등 다른 민족과 가정을 이루며 작은 일본계 사회를 형성하기도 했다.[56] 섬에서는 고대 영혼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신발을 신지 않는 전통이 부활하기도 했다. 전쟁 직후 잠시 오키나와 출신 잠수부를 동원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전후 항공 및 해상 교통도 재개되었다. 앤셋 항공은 케언스에서 목요섬까지 드 하빌랜드 드래곤 래피드와 더글러스 DC-3 항공기를 이용해 주 2회 운항을 시작했으며, 승객들은 혼섬에서 페리로 환승해야 했다. 또한 Elsana|엘사나eng라는 선박이 한 달에 한 번 섬을 오갔다.
섬의 주요 산업이었던 진주조개 채취는 전후 급격히 쇠퇴했다. 플라스틱 단추가 대량 생산되면서 천연 조개껍데기에 대한 수요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15][56] 1950년대에는 CSIRO 주도로 양식 진주 농장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1970년대에 이르러 많은 농장이 질병으로 황폐화되었다. 일부에서는 1970년 유조선 Oceanic Grandeur|오셔닉 그랜저eng 호의 좌초로 인한 기름 유출 사고 당시 사용된 분산제가 원인이라고 보기도 한다.[19][56] 이 사고로 바다가 오염되어 진주조개가 거의 전멸하는 피해를 입었다.[56] 진주 양식 산업은 오늘날에도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지만[19], 과거의 번성했던 모습은 찾기 어렵다. 1970년대에는 푸른 거북이를 사육하려는 시도도 있었다.[9] 현재는 바다가재 어업이 섬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56]
1970년대에는 파푸아뉴기니의 독립과 함께 목요섬을 포함한 일부 토레스 해협 섬들의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다. 파푸아뉴기니는 이 섬들을 자국 영토에 포함시키려 했으나, 토레스 해협 도서민들은 자신들이 호주인이라고 주장하며 호주 잔류 의사를 분명히 했다. 퀸즐랜드 주 정부와 호주 연방 정부 간의 논의 끝에 목요섬을 포함한 모든 토레스 해협 섬은 호주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20]
종교적으로는, 1900년부터 1996년까지 섬에 있는 퀘타 기념 교회가 카펜타리아 교구의 주교좌 성당 역할을 수행했다. 이 교구는 노스 퀸즐랜드, 토레스 해협 제도, 그리고 1968년까지는 노던 준주까지 관할하는 넓은 지역을 포함했다.
3. 지리
목요섬의 면적은 약 3.5km2이다. 섬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104m에 위치한 밀만 힐이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방어 시설이 남아 있다.
목요섬은 토레스 자치구에 속하며 이 자치구의 행정 중심지이다. 또한, 토레스 해협 제도 지역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해당 지역의 행정 및 상업 중심지 역할을 수행한다.
4. 기후
목요섬은 열대 사바나 기후 (쾨펜: Aw)에 속하며, 12월부터 4월까지는 우기, 5월부터 11월까지는 건기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연중 기온이 높게 유지되며, 평균 최고 기온은 7월 29°C에서 11월 32.1°C 사이에서 변동한다. 연평균 강수량은 1781.2mm이며, 주로 우기인 늦여름에 집중된다. 기록된 최고 기온은 37.9°C(2002년 12월 8일)이고, 최저 기온은 15.1°C(2019년 9월 8일)이다.[32]
아래 기후 정보는 목요섬에서 북동쪽으로 8.7km 떨어진 혼 섬의 관측 자료(1995-2024년 평년값 및 극값, 습도는 2010년까지)를 기반으로 한다.[33]
5. 인구
6. 문화
(내용 없음)
6. 1. 언어
토레스 해협 크리올어는 목요섬에서 섬 주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이며, 그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Mabuiag(모비약으로 발음)라고 부르는 칼라우 라가우 야가 사용된다. 영어 또한 사용된다.[34][35] 토착 언어는 카이왈리가우 야(Kaiwaligau Ya)이며, 이는 칼라우 라가우 야의 또 다른 방언으로, 코우라레그(Kowrareg)라고도 알려져 있다. 더 정확하게는 1800년대 중후반에 사용된 이름인 카우라라이가우 야(Kauraraigau Ya)라고 한다.6. 2. 문화유산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과 영국 제국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러시아 제국의 침공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이에 따라 1892년, 섬을 방어하기 위해 배터리 포인트에 요새(그린 힐 요새)가 건설되었다.[9][15] 이 요새는 1927년부터 운영되지 않았지만, 오늘날 목요섬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16]7. 경제
목요섬은 토레스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 조종사들의 주요 기지 중 하나이다. 이들은 자격을 갖춘 선장들로 구성된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며, 토레스 해협에서 케언스까지 선박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 해역은 복잡한 암초 지대로 인해 항해가 어려워 선박 조종 서비스가 필수적이다.[30]
행정 중심지로서 목요섬에는 지역 병원과 법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고등 교육 기관과 일부 연구 시설, 그리고 지방, 주, 연방 정부의 행정 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은행 업무와 전화 통신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다.
섬의 주요 경제 활동은 이러한 행정 기능과 더불어 진주 양식, 어업, 그리고 빠르게 성장하는 관광 산업에 의존하고 있다. 과거에는 소설가 서머셋 몸과 반조 패터슨 같은 유명 인사가 방문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매년 섬에 기항하는 크루즈선의 당일 여행객들이 주요 관광객이다.[31]
섬의 기반 시설로는 물 공급 시스템과 전력 생산 시설이 있다. 물은 섬 자체에서 일부를 조달하고 나머지는 인근 섬에서 파이프라인을 통해 공급받는다. 또한 섬에는 자체 전력 수요의 일부를 충당하는 풍력 터빈 2기가 설치되어 있다.
8. 교육
타가이 주립 칼리지(Tagai State College)는 토레스 해협 전역에 17개의 캠퍼스를 운영하는 남녀공학 공립 초중고등학교(유아-12학년)이다. 목요섬에는 다음 두 곳의 캠퍼스가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전체 학교의 학생 수는 1,554명, 교직원은 168명(정규직 환산 165명), 비교직원은 198명(정규직 환산 142명)이었다.[42] 학교는 서머스 가에서 특수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39]
성심 성모 학교(Our Lady of the Sacred Heart School)는 노먼비 가에 위치한 남녀공학 가톨릭 초등학교(예비학교-6학년)이다.[39][41] 2017년 기준으로, 이 학교의 학생 수는 103명, 교직원은 12명(정규직 환산 9명), 비교직원은 13명(정규직 환산 9명)이었다.[42]
트로피컬 노스 퀸즐랜드 TAFE 연구소의 토레스 해협 캠퍼스는 타가이 주립 칼리지 옆 섬에 위치해 있다.
9. 유명 인물
다음은 목요섬 출신이거나 목요섬에서 거주한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다.
- 헨리 깁슨 "시맨" 댄: 수상 경력이 있는 토레스 해협 제도 출신 음악가.
- 존 더글러스: 퀸즐랜드 주 총리 (1877–1879) 및 목요섬 정부 거주자 (1885–1904).
- 매튜 엘리엇: 호주의 프로 럭비 리그 축구 코치이자 전 선수.
- 티아르나 언스트: 프로 AFLW 선수이자 웨스턴 불독스 우승 선수.[43]
- 토미 후지이: 소년 시절 진주 조개 잠수부였으며 이후 사업가가 된 인물.[44]
- 스콧 하딩: AFL 선수이자 미식 축구 선수.[45]
- 엘마 가다 크리스: 댄서, 안무가, 배우. 2019년 NAIDOC 상 올해의 예술가 수상자.[46]
- 밀스 자매: 1950년대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남태평양과 유럽에서 공연한 세 자매 음악 그룹. 리타와 쌍둥이 세사, 이나로 구성됨.[47]
- 대니 모르소: 프로 농구 선수.[48]
- 버나드 나목: 토레스 해협 제도 기 디자이너.[49]
- 피터 웨어: WAFL 스완 디스트릭츠 선수이자 AFL 퀸즐랜드 명예의 전당 헌액자.[50]
- 제시 윌리엄스: 1990년 목요섬 출생. 앨라배마 크림슨 타이드에서 미식축구 장학금을 받은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51][52]
- 에델 메이 엘리자 자헬: 교사이자 공무원 (1877–1951).[53]
참조
[1]
웹사이트
Torres Strait Islander everyday words
https://www.slq.qld.[...]
2020-03-11
[2]
웹사이트
Gab Titui annual art awards
https://www.nma.gov.[...]
20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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