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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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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왕은 발해 고왕 대조영의 장남으로, 719년 부친의 뒤를 이어 발해의 2대 왕이 되었다. 즉위 후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당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영토 확장을 위해 주변 국가와 민족을 공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732년에는 산둥반도를 공격하여 당나라와 대립하기도 했으나, 이후 화친을 통해 관계를 개선했다. 737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능은 진릉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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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발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 (한자)武王
이름 (로마자)Mu wang
이름 (한글)무왕
이름 (문화어)무왕
출생명 (한자)大武藝
출생명 (로마자)Da Muye
출생명 (한글)대무예
신상 정보
재위 기간719년 - 737년
대무예
시호무왕
묘호무왕
연호인안 (720년 - 738년)
능묘진릉
부왕고왕
형제자매대문예, 대창발가, 대림, 대호아, 대낭아, 대술예, 대보방
자녀대도리행, 대흠무, 대번, 대의신, 대욱진
기타 정보
작위계루군왕 (713년 - 719년)
국적발해

2. 생애

발해의 시조 고왕 대조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의 영주(營州)로 이주되었던 고구려의 장군이었던 아버지 고왕이 죽자, 당 현종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장자인 대무예를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책봉했다.[1] 719년 이전에는 계루군왕이었으나, 언제 당나라로부터 책봉됐는지는 알 수 없다.

719년 아버지 대조영이 사망한 이후 왕위에 오른 무왕은 당 현종으로부터 "계루주(蓋婁州) 왕" 칭호를 받고, 아버지에게 고왕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연호를 '인안'으로 선포했는데, 이는 당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한편, 아들들과 형제들을 포함하여 빈번하게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2. 1. 즉위와 초기 통치

719년, 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고 개원하여 연호를 인안이라 하였다. 당 현종은 사절을 보내 조문하고 대무예에게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부 도독직을 봉했다.[1]

무왕은 즉위 직후부터 지속적인 영토확장을 꾀했고 726년 두막루와 여러 말갈 부족을 발해로 병합하였다.[2] 727년 발해는 처음으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보낸 국서(國書)에서 “여러 나라를 아우르고 여러 번국(蕃國)을 감독하니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지녔다.”고 일컫었다.[2] 발해는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옛 고구려 영토를 빠르게 회복했다. 신당서에는 발해가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이민족(東北諸夷)들이 겁을 먹고 무왕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2]

대무예는 대조영의 장남으로, 719년 부친의 사망 이후 왕위에 올랐다. 당 현종으로부터 "계루주(蓋婁州) 왕"의 칭호를 받았고, 아버지 대조영에게 고왕이라는 시호를 올렸다.[3] 연호를 '인안'으로 선포했는데, 이는 당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행위였다.[3] 그는 아들들과 형제들을 포함하여 빈번하게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3]

즉위 후에는 당나라의 정삭(正朔) 채용을 중지하고, 독자적으로 건원(建元)하여 연호를 인안으로 정하며, 당나라로부터 자립하는 방침을 내세웠다.[4] 720년 당나라는 장월을 파견하여, 거란해족에 대한 공동 공략을 제안했지만, 이 요구를 거부했다. 그 이유로는 발해와 거란 사이에 적대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점과, 발해가 독자적으로 주변 민족을 병탄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4] 이 시기의 발해는 동쪽으로는 수분하를 넘어 연해주에 달했고, 남쪽으로는 한반도대동강, 서쪽으로는 송화강 중류역에까지 뻗어 있었다고 추측된다.[4] 이로 인해 고구려 멸망 후 북진 정책을 계속하던 신라의 북진을 방해했으며, 북방에서도 불녈부나 월희부 등의 말갈 부족을 지배하에 두었다.[4] 이 사실은 『신당서』의 '척대토우' (土地와 居民을 연다)나,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함부로 여러 오랑캐를 아우른다'는 『속일본기』의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4] 그러나 발해의 북방에는 여전히 흑수말갈로 불리는 말갈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대립이 발해 내부에서의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4]

2. 2. 영토 확장

무왕은 즉위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영토 확장을 꾀했다. 726년 두막루와 여러 말갈 부족을 발해로 병합하였다. 727년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보낸 국서(國書)에서 “여러 나라를 아우르고 여러 번국(蕃國)을 감독하니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지녔다.”고 하였다. 신당서에는 발해가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이민족(東北諸夷)들이 겁을 먹고 무왕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2]

발해의 공격적인 팽창은 당나라, 신라, 거란, 돌궐 그리고 여러 말갈 부족과의 마찰을 일으켰다. 특히 흑수말갈이 727년 당나라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게 되자, 무왕은 흑수말갈을 협공할 것을 우려하여 공격했다.

732년, 무왕은 산둥성에 대한 징벌 원정을 명령하여, 장문휴가 지휘하는 발해 해군을 파견했다. 같은 해, 그는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 부근의 마두산(馬都山)으로 진격하여 인근 마을을 점령했다.[2]

이 시기 발해는 동쪽으로는 수분하를 넘어 연해주에 달했고, 남쪽으로는 한반도대동강, 서쪽으로는 송화강 중류역에까지 뻗어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는 고구려 멸망 후 북진 정책을 계속하던 신라의 북진을 방해했으며, 북방에서도 불녈부나 월희부 등의 말갈 부족을 지배하에 둔 결과였다.

2. 3. 흑수말갈과의 갈등

발해의 성장은 흑수말갈당나라를 긴장시켰다. 흑수말갈은 옛 고구려 동북쪽에 위치한 말갈 부족들 가운데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다. 한편, 당나라는 발해가 옛 고구려처럼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며, 동북지역에 걸친 자신들의 이익을 훼손할 수 있는 두려운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다. 결국 발해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흑수말갈과, 발해를 견제할 필요성을 가진 당나라는 서로 접근하기 시작했다.[2]

722년 흑수말갈의 추장 예속리기는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여, 당나라 조정에 입조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그에게 벼슬과 선물을 듬뿍 주는 등 크게 환대했다. 726년, 당나라흑수말갈이 거주하는 지역 일대를 당나라의 흑수주(黑水州)로 삼는다고 공포하여, 흑수말갈당나라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받는 위치임을 드러냈다.[2]

무왕은 흑수말갈당나라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서도, 발해에 통보조차 하지 않은 것은 장차 두 세력이 협력하여 발해를 침공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726년 무왕은 우선 흑수말갈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두막루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발해로 합병하였다. 이로써 부여의 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어 약 300년간 존속했던 두막루는 발해 영토로 편입되었다.[2]

무왕은 아우 대문예(大門藝)와 그의 장인 임아(任雅)를 시켜 흑수말갈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대문예는 705년 숙위(宿衛)로 당나라 궁정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바 있으며 당나라의 심장부에서 당나라의 국력을 수년 간 직접 확인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발해가 흑수말갈을 공격하는 출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2]

하지만 무왕은 동생인 대문예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출진을 강요했다. 대문예는 군단을 이끌고 흑수말갈과의 경계에 도달해서, 다시 무왕에게 상소하여 흑수말갈 공격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무왕은 종형인 대일하(大壹夏)로 사령관을 교체하고, 대문예를 소환하여 처벌하고자 했다. 그러자 대문예는 처벌을 두려워하다 당나라로 망명하고 말았다.[2]

발해의 공격적인 팽창은 당나라, 남쪽의 신라, 거란, , 돌궐 그리고 여러 말갈 부족과의 마찰을 일으켰다. 발해 북부의 흑수말갈이 727년 당나라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게 되자, 무왕은 흑수말갈을 협공할 것을 우려하여 공격했다.[2]

흑수말갈과 당나라의 밀접한 관계에 무왕은 발해를 위협하는 존재로 불안감을 느껴 흑수말갈 침공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발해 통치층을 주전파와 반대파로 분열시켰다. 무왕의 동생인 대문예는 오랫동안 장안에 숙위했기 때문에 당나라의 국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발해도 당나라에 귀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왕은 국토 확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대문예를 주장(主將)으로, 어머니의 형제인 임아를 부장(副將)으로 임명하여 흑수말갈 침공을 명령했다. 그러나 출병에 끝까지 반대했던 대문예는 후에 군직에서 해임되었고, 사촌 형인 대일하에게 목숨을 위협받아 당나라로 망명했다. 이 시기의 흑수말갈 출병은 흑수말갈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결과를 가져왔고, 발해 북방의 정치적 지형은 안정되었다.[3]

2. 4. 당나라와의 전쟁

당나라대문예를 죽이라는 무왕의 요구를 거절하고 거짓으로 영남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하였다. 무왕은 대문예가 영남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당나라에 항의했다.[4]

730년 당나라의 간섭을 받던 거란돌궐 편에 서서 당나라와 대립하자, 무왕은 거란을 지원했다. 그러나 732년 거란당나라에 패하고 해족마저 항복하면서 상황이 불리해졌다. 당나라732년 발해에 사신을 보내 대문예에 대한 요구를 중단하라고 압박했다. 흑수말갈728년 당나라와 협력 관계를 강화했다.[4]

이에 무왕은 732년 장문휴 장군에게 등주를 공격하도록 명했다. 발해군은 등주성을 함락시키고 등주 자사 위준을 죽였다. 당나라대문예를 시켜 발해군을 막게 했으나, 무왕은 자객을 보내 대문예를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4]

733년 무왕은 거란을 지원하여 당나라와 싸웠고, 당나라신라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신라군은 추위로 퇴각했다. 무왕은 마도산을 공격하기도 했다.[2] 733년, 중국 현종은 대문예에게 신라군과 함께 발해를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공격은 실패하고 격퇴되었다.[3]

2. 5. 화해와 말년

734년에 접어들면서 당나라거란을 크게 격파하면서 발해와 당 사이의 완충지대가 사라졌다. 또한 돌궐마저 카파간 카간이 암살당하면서 대외원정에 힘을 기울일 여력이 없어졌다. 이렇게 국제 정세가 급변하자, 무왕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736년 무왕은 전쟁에서 사로잡은 당나라 포로들을 돌려보내면서, 당나라에 화친을 요청했다. 이에 당나라도 그간 붙잡아 두었던 발해 사신을 풀어주었다. 이듬해인 737년 병으로 죽었고, 태자 대흠무(大欽茂)가 보위를 계승하여 당나라와 친선 기조를 유지하였다.[2]

그의 능 위치는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손녀 정혜공주의 묘비인 정혜공주묘지가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정혜공주묘지에 의하면 보력 7년(780년) 11월 24일에 진릉(珍陵, 발해 무왕의 능)의 서원(西原, 서쪽 언덕)에 장사했다 한다. 그의 능 진릉은 정혜공주 묘 동쪽에 위치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3. 가계

관계이름
부왕고왕 (? ~719, 재위:698~719)
왕자대도리행[5]
왕자문왕 (? ~793, 재위:737~793)
왕자대번[6]
왕자대의신[7]
왕자대욱진[8]
왕제대문예
왕제대술예
왕제대창발가
왕제대림[9]
왕제대호아[10]
왕제대낭아[11]


4. 대중문화 속의 무왕


  • 1992년 ~ 1993년 KBS 1TV 드라마 《삼국기》에서 배우 김일우가 무왕 역을 연기했다.
  • 2006년 ~ 2007년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 배우 김석이 무왕 역을 연기했다.

참조

[1] 웹사이트 「渤海と古代の日本」 http://www.nihonkaig[...] 酒寄 雅志
[2] 문서 New History of Tang Dynasty Wuchengci zhuan Comprehensive Mirror to Add in Government
[3] 서적 王维集校注 Zhonghua Book Company
[4] 서적 王维集校注 Zhonghua Book Company
[5] 문서 720년과 726년에 당에 사신으로 갔다.
[6] 문서 735년과 743년에 당에 사신으로 갔다.
[7] 문서 726년에 당에 사신으로 갔다.
[8] 문서 739년에 당에 사신으로 갔다.
[9] 문서 729년에 당에 사신으로 갔다.
[10] 문서 729년과 730년에 당에 사신으로 갔다.
[11] 문서 732년에 당에 사신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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