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막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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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막루는 5세기 중엽에 건국된 고대 국가로, 오늘날 중국 헤이룽장성 일대에 위치했다. 부여 유민들이 예맥족의 옛 땅에 정착하여 건국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부여를 계승한 한국 고대 국가로 보거나 몽골계 국가로 보는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두막루는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대외 관계를 맺었으며, 726년경 발해와 흑수말갈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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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막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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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막루 | |
![]() | |
위치 비정 | 흑룡강성 일대 |
존속 기간 | 3세기 ~ 5세기 |
주요 민족 | 말갈족 |
역사 | |
건국 시기 | 3세기 |
멸망 시기 | 5세기 |
주요 사건 | 고구려의 압박 북위에 병합 |
정치 | |
정치 체제 | 부족 연맹 국가 |
지배 계층 | 말갈족 추장 |
문화 | |
언어 | 말갈어 |
종교 | 샤머니즘 |
사회 | |
사회 구조 | 부족 중심 사회 |
주요 활동 | 농업 수렵 약탈 |
2. 건국 주체
기록에 따르면 두막루는 부여 유민이 예맥족의 옛 땅에 세운 나라이다.[11] 북부여가 고구려에 멸망한 후, 생존자들이 나하 또는 타루하를 건너 정착하여 두막루를 건국하였다.
2. 1. 학계의 견해
일반적으로 한국사학계에서는 두막루의 계통에 대해 부여를 계승한 한국의 고대 국가로 인정하는 학설과 실위 또는 몽골계 국가로 보는 다른 견해가 있다.종래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두막루에 대해 큰 관심이 없거나 혹은 몽골계 국가로 파악하였다. 노태돈 교수는 두막루에 대해서, 부여와 별도로 존속하던 두막루인들이 고구려의 세력 확대에 따라 접경하게 되자 고구려의 북방 지역 인식에 영향을 받아 부여의 후계라 자칭하게 되었다는 견해이다.[12] 박경철 교수는 부여가 선비족의 공격으로 몰락한 시기에 실위와 같은 몽골계 종족인 두막루가 부여의 영역으로 잠식하여 잡거하였고, 이후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함에 따라 송화강 이북으로 구축되어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13]
이와는 달리 김정배 교수와 유태용 등은 두막루를 부여를 계승한 나라로 파악하는 학설을 제시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김정배 교수는 《위서》 등의 기록을 근거로, 두막루는 북부여를 계승한 나라로서 지배 집단은 예맥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풍습은 부여와 매우 유사했다는 학설을 제기했다.[14] 유태용은 이 학설을 더욱 발전시켜서 '두막루'는 '다물'이라는 뜻으로서 부여의 유민들이 나라가 망하게 되자, 나하를 건너가 북부여의 옛 영토를 되찾아 건국한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15]
중국 학자들의 견해는 대체로 두막루에 대해 부여를 계승한 국가로 보고 있다. 부여와 북부여를 구분하고 있는 중국 학자의 견해[16]에 따르면, 북부여가 남하하여 부여의 영역을 잠식하였다가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다시 본래의 영역으로 패주하여 두막루를 건국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중국 학자의 견해로는 대무신왕 대에 고구려에게 공파된 동부여의 유민이 북상하여 건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17]
3. 건국 시기
두막루의 건국 시기는 대략 5세기 중엽으로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486년 이전에 건국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의 《위서》 물길전에는 물길의 사신인 후니지(侯尼支)가 486년 북위에 사신으로 입조하였는데, 그때 물길 주변에 있던 대막로국(豆莫婁國|두막루국중국어)에서도 북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10]
두막루의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종래 중국의 동북사 연구자들인 마지아셩(溤家昇, )과 장보취앤(張博泉, )은 부여가 고구려의 문자명왕에게 멸망 당한 494년 이후 부여의 유민들이 두막루를 건국한 것으로 파악하였다.[18][19] 하지만 현대 중국의 학자인 쑨진지(孫進己, )와 간즈겅(干志耿, )은 두막루가 건국된 시기는 그보다 이전인 410년 동부여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점령된 시점 이후로 이해하였다.[20][21] 따라서 두막루의 건국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410년 이후부터 486년 이전의 어느 시점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4. 지리적 위치
두막루는 북위의 북동부 지역으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눈강 동쪽, 쑹화강 북쪽의 평원 지대로 추정된다. 이곳은 현재 하얼빈시 부근이다.[22] 이 지역은 부여의 북쪽 끝 지역이며, 부여 건국 설화에 등장하는 동명왕의 고리국(槀離國)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23]
5. 문화와 언어
두막루의 문화는 대체로 부여와 동일했으나, 의복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고, 언어는 실위와 같았다는 기록이 있어 논란이 있다.
두막루에는 "삼과 베가 있고, 옷을 마름질하는 것은 고려(高句麗|고구려중국어)와 비슷하나 폭이 크다"고 기록되어 있다.[24]
『위서』와 『북사』에는 "옛 북부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부여어족으로 여겨지지만,[5] 실위 조에는 "언어는 거란, 몽골, 두막루국과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어[6] 몽골어족일 가능성도 있다.
5. 1. 문화
두막루의 문화는 부여와 동일했다. 주변의 물길과 실위가 유목, 수렵, 어로에 종사했던 것과 달리, 두막루 사람들은 넓은 평원에서 농경 생활을 하면서 오곡(五穀)을 기르고 집과 창고를 지었다.[11] 위서 물길전에는 물길이 "두막루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며 여러 나라들도 이를 두렵게 여긴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두막루는 농경 민족으로서 물길과 실위 등 유목 민족의 침략을 상당히 두려워했던 것을 알 수 있다.두막루의 군장(君長)은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임금 아래에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자, 사자 등 가축의 이름을 딴 관직명을 사용했던 부여의 풍습과 일치한다. 두막루국에서 "대인(大人)은 금과 은으로 장식하고, 형벌은 엄하고 급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사람은 노비로 삼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도 부여의 풍속과 완전히 동일하다.[11]
두막루의 문화는 대개 부여와 동일했으나 의복의 경우 일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두막루에는 "삼과 베가 있고, 옷을 마름질하는 것은 고려와 비슷하나 폭이 크다"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선비족의 모용씨 세력이 쇠퇴하여 부여가 사실상 고구려의 세력권 안으로 귀속되면서, 부여가 고구려의 의복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24]
두막루의 언어는 실위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서 실위전에는 실위의 "언어는 고막해, 거란, 두막루와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두막루를 몽골족 계통의 민족으로 보기도 한다.[13] 또한 두막루의 언어가 초기에는 부여어와 동일했으나 후기에는 거란어가 많이 유입되어 혼합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25][26]
5. 2. 언어
두막루의 언어는 실위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서》 실위전에는 실위의 "언어는 고막해, 거란, 두막루와 같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두막루를 몽골어족 계통의 민족으로 보기도 한다.[13] 또한 두막루의 언어가 초기에는 부여어족과 동일했으나 후기에는 거란어가 많이 유입되어 혼합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25][26]《위서》와 《북사》에는 "옛 북부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부여어족으로 여겨지지만, 실위 조에는 "언어는 거란, 몽골, 두막루국과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어[6] 몽골어족일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정설은 없으며, 앞으로의 연구를 기다려야 한다.
6. 대외 관계
두막루는 주변의 맥족(고구려), 말갈족, 거란족 등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 왕조들에게는 계속해서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며 나라의 존재를 알렸다.[9][10]
- 5세기 후반: 두막루(물길)에 인접한 대막로국, 복종국, 막다회국, 고루국, 소화국, 구불복국, 필려이국, 발대하국, 욱우릉국, 고복진국, 로루국, 우진후국 등이 각기 사신을 보내 북위에 조공하였다. -《위서》(魏書) 물길전
- 567년: 돌궐, 대막루, 실위, 백제, 말갈 등이 각기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책부원귀》(冊府元龜) 외신부 조공조
- 569년: 대막루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책부원귀》(冊府元龜) 외신부 조공조
- 723년: 당나라 현종 개원 11년에 달말루의 구 2군(郡) 수령이 조공했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전 달말루조
- 724년: 당나라 현종 개원 12년에 달말루의 대수령 낙개제(諾皆諸)가 와서 조공했다. -《책부원귀》(冊府元龜) 외신부 조공조
북부여가 고구려에 멸망하자, 생존자들은 나하 또는 타루하를 건너 그곳에 정착하여 두막루가 되었다. 당나라 시대에 두막루는 달말루라고 불렸으며, 723년에는 달말루가 달구[4]와 함께 당나라에 조공했다.
7. 인물
8. 멸망
발해 무왕 대무예(大武藝)는 북진정책을 펼치면서 제1송화강 중류를 경계로 흑수말갈과 대치하고 있었다.[27] 이 지역에 위치했던 두막루는 발해와 흑수말갈의 대립 속에서 독자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결국 영토를 빼앗겨 726년경 멸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7] 이후 두막루 지역은 발해 전성기 때 철리부(鐵利府)와 회원부의 관할에 소속되어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魏書列伝第八十八、『北史』列伝第八十二「語は庫莫奚・契丹・豆莫婁国と同じ」より
[2]
서적
魏書』列伝第八十八、『北史』列伝第八十二の勿吉国の条
[3]
서적
『新唐書』列伝第一百四十五
[4]
문서
室韋の一種
[5]
문서
[6]
서적
『契丹小字研究』「契丹語はモンゴル語族に属するか或はモンゴル語と非常に近しい。」
[7]
문서
勿吉の前身である[[挹婁]](ゆうろう)は俎豆(食器)を用いなかった。
[8]
문서
祭器の名。俎と豆。俎はいけにえの肉をのせるまないた、豆は菜を盛るたかつき。転じて、礼法。
[9]
서적
이야기 한국고대사 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수수께끼의 나라 두막루)
청아출판사
[10]
서적
대륙에 서다 2천 년 중국 역사 속으로 뛰어든 한국인들
미지북스
[11]
서적
《[[위서 (역사서)|위서]]》(魏書) 〈열전〉 '두막루'
[12]
간행물
〈부여국의 강역과 그 변천〉
국사편찬위원회
[13]
간행물
〈부여사 전개에 관한 재인식 시론〉
백산학회
[14]
간행물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
[15]
간행물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16]
간행물
〈夫餘源流辨析〉
[17]
서적
《東北歷代疆域史》
[18]
간행물
〈豆莫婁國考〉
[19]
간행물
〈魏書豆莫婁傳中的幾個問題〉
[20]
서적
《동북민족원류》
[21]
간행물
〈古代槀離硏究〉
[22]
간행물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23]
간행물
〈[[논형]](論衡) 길험편에 보이는 [[고리국]]의 연구〉
[24]
간행물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25]
서적
《東北民族史略》
吉林人民出版社
[26]
간행물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27]
간행물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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