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박계동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박계동은 1952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학생운동과 재야단체 활동을 거쳐 정치에 입문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하여 주목받았다.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제17대 국회의원으로 재선되었으나, 국회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한국택시협동조합 이사장으로 활동하다 해임되었다. 그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여러 차례의 선거 출마와 전과 기록을 가지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국민생각 - 박세일
    박세일은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서울대학교 교수,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을 거쳐 김영삼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 15대, 17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국민생각을 창당했으며,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과 통일준비위원회 민간위원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학자이자 정치인이다.
  • 국민생각 - 이원복 (정치인)
    이원복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서울전농초등학교 동문 - 김성희 (1959년)
    1977년 미스코리아 진 출신인 김성희는 '장미화'라는 예명으로 1980년대 가수 활동과 더불어 드라마 출연, 라디오 DJ, 그리니스 모드 대표, 녹원회 회장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1984년 KBS 가요대상 가수상을 수상했다.
  • 서울전농초등학교 동문 - 윤지민
    윤지민은 1997년 데뷔하여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며, 2006년 SBS 연기대상 뉴스타상을 수상하고 배우 권민과 결혼하여 딸을 두고 있다.
  • 국민의당 (2020년) - 안철수
    안철수는 의사이자 기업가, 정치인으로, V3 백신을 개발하고 안철수연구소를 창업했으며,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을 역임하고 정치에 입문하여 국회의원과 서울시장 후보 등을 지냈다.
  • 국민의당 (2020년) - 권은희 (1974년)
    권은희(1974년)는 대한민국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을 폭로하고 제19, 20, 21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박계동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적대한민국
출생지대한민국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
본관밀양
종교천주교(세례명: 스테파노)
병역보충역 및 소집면제(수형)
경력
정당 정보
정당국민의힘
지역구서울 강서구 갑(14)
서울 송파구 을(17)
의원 선수2
의원 대수14·17
웹사이트나우루 공식 홈페이지
학력
학력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 학사

2. 생애

1952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나 서울전농초등학교, 보성중학교,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였다. 1974년 아시아 청년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고려대 재학 시절 학생운동에 투신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민청련, 전민련 등 재야단체에서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노태우 정부 시절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명이 되어 감시를 당했는데, 1990년 10월 4일 외국어대 재학생이자 민학투련 출신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밝혀졌다.[2]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강서구 갑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93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95년 경실련으로부터 경제정의실천시민상을 받았고, 같은 해 대정부 질문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4000억 비자금설을 제기하여 유명해졌다.[3]

1996년 15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이기택 당 총재의 노선을 비판하며 노무현, 원혜영, 제정구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결성해 야권 통합 및 독자적 대통령 후보 추대를 추진했다.[3]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원혜영김대중국민회의에 입당했으나, 박계동은 국민회의 입당파를 비판하며 통합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합당으로 만들어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1998년 5·18 광주 민주화 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15대 총선 당시 합동연설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하여 선거권을 박탈당하고 16대 총선에 불출마한 뒤 택시 운전사와 라디오 DJ로 활동했다.

17대 총선에서 송파구 을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5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행사에서 대학 선배 이재정 통일부장관에게 폭언을 해 물의를 빚었고, 친이명박 계열임에도 18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후 국회사무총장에 임명되었고, 2010년 6월 임기를 마쳤다.

한국택시협동조합 이사장을 지냈으며,[1] 2020년 4월 20일 총회에서 해임 투표가 가결되어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1]

2. 1. 생애 초기 (1952년 ~ 1991년)

1952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 서울전농초등학교, 보성중학교,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였다. 1974년 아시아 청년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고려대 재학 시절 학생운동에 투신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 민청련, 전민련 등 재야단체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노태우 정부 시절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명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는데, 1990년 10월 4일 오후 6시 40분쯤 외국어대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2] 윤석양은 탈영 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 당시 보안사에서 갖고 나온 동향 파악 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 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 디스킷을 공개했다.[2]

2. 2. 정치 활동 (1992년 ~ 2010년)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강서구 갑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93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경실련으로부터 경제정의실천시민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대정부 질문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4000억 비자금설을 제기하여 유명세를 탔다.[3] 1994년 서석재 총무처 장관이 먼저 제기했으나 민정계의 반발로 서 장관이 경질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박계동이 이를 다시 제기하여 사회와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이기택 당 총재의 노선을 비판하며 노무현, 원혜영, 제정구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결성해 야권 통합 및 독자적 대통령 후보 추대를 추진했다.[3]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원혜영은 김대중국민회의에 입당했으나, 그는 국민회의 입당파를 비판하며 통합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합당으로 만들어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1998년 5·18 광주 민주화 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15대 총선 당시 합동연설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한 것 때문에 선거권을 박탈당하고 16대 총선에 불출마한 뒤 택시 운전사와 라디오 DJ로 활동했다.

17대 총선에서 송파구 을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5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행사에서 대학 선배 이재정 통일부장관에게 폭언을 해 물의를 빚었고, 친이명박 계열임에도 18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후 국회사무총장에 임명되었고, 2010년 6월 임기를 끝마쳤다.

2. 2. 1. 초선 국회의원 시절 (1992년 ~ 1996년)

고려대 재학 시절 학생운동에 투신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 민청련, 전민련 등 재야단체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노태우 정부 시절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는데, 1990년 10월 4일 오후 6시 40분쯤 외국어대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2] 윤석양은 탈영 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 당시 보안사에서 갖고 나온 동향 파악 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 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 디스킷을 공개했다.[2] 1992년 14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영입되어 강서구 갑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93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경실련으로부터 경제정의실천시민상을 수여받았다.

2. 2. 2. 노태우 비자금 폭로 (1995년)

1995년 대정부 질문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4000억 비자금설을 제기하여 유명세를 탔다.[3] 1994년 서석재 총무처 장관이 먼저 제기했으나 민정계의 반발로 서 장관이 경질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박계동이 이를 다시 제기하여 사회와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박계동은 1995년 10월, 평소 알고 지내던 고교 1년 후배로부터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원에 대한 제보를 받고 국회에서 이를 폭로했다.[1]

전두환은 박계동의 폭로에 태연히 등산을 가는 등 무반응으로 대응했고, 노태우는 해외 순방 출국 길에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박계동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 결과 비자금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이 확산되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구속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3] 박계동은 이 공로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경제정의실천 시민상을 수상했다.[3]

2. 2. 3. 국민의 정부, 한나라당 시절 (1996년 ~ 2010년)

1996년 15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이기택 당 총재의 노선을 비판하며 노무현, 원혜영, 제정구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결성해 야권 통합 및 독자적 대통령 후보 추대를 추진했다.[3]

노무현, 김원웅과 함께 음식점 《하로동선》을 1년간 운영했다.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원혜영은 김대중국민회의에 입당했으나, 그는 국민회의 입당파를 2김에게 굴복했다고 주장하며 통합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합당으로 만들어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1998년 5·18 광주 민주화 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15대 총선 당시 합동연설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한 것 때문에 선거권을 박탈당하고 16대 총선에 불출마한 뒤 택시 운전사와 라디오 DJ로 활동하는 고달픈 시기를 보냈다.

17대 총선에서 탄핵 후폭풍과 뒤늦은 공천에도 불구하고 송파구 을에서 당선되면서 재기했다. 하지만 2005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행사에서 대학 선배 이재정 통일부장관에게 폭언을 해 물의를 빚어 윤리적 문제가 드러났고, 친이명박 계열임에도 18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했다. 그 후 야당의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국회사무총장에 임명되었고, 2010년 6월 임기를 끝마쳤다.

2. 3. 퇴임 이후 (2010년 ~ 현재)

한국택시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1] 2020년 4월 20일 총회에서 해임 투표가 가결되어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1]

3. 학력

4. 전과

죄명선고 내용선고일
밀항단속법위반, 계엄법위반징역 1년1982년 11월 2일[4]
소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징역 2년, 집행유예 3년1988년 11월 25일[4]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 방지법위반벌금 600만1998년 6월 30일[4]
명예훼손벌금 300만2008년 8월 12일[4]
협동조합기본법위반벌금 200만2016년 12월 8일[4]
협동조합기본법위반벌금 500만2018년 12월 19일[4]
협동조합기본법위반벌금 500만2019년 11월 20일[4]


5. 평가

박계동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뇌물 수수와 비자금 조성을 폭로하여 12·12 군사 반란5·18 광주 민주화 운동 재수사의 길을 열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의 BBK 의혹에 결백을 주장하고, 미디어법 날치기 상정 당시 대리투표 증거 제출을 거부하는 등 진보 세력에게 변절자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보수 세력은 박계동을 배신자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5. 1. 긍정적 평가

시민사회단체에서는 박계동이 1994년경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뇌물 수수와 비자금 조성을 폭로한 용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두 전직 대통령의 뇌물 수수와 비자금 조성 폭로가 곧 신군부 사건과 12·12 군사 반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의 재수사의 활로를 열고 길을 제공하였다는 것에 높이 평가한다.

5. 2. 부정적 평가

박계동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통령선거 중요 이슈였던 BBK 의혹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의 결백을 주장하였다.[1] 2009년 국회 사무총장 재임 당시,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을 날치기 상정하면서 재투표 합법성 여부와 대리투표 여부를 두고 여야 간 극한 대립이 발생하였다.[1] 민주당은 한나라당 의원들의 대리투표를 입증하고자 국회사무처에 회의장 CCTV 자료를 요구했으나, 국회사무처는 "개인자료"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1]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박계동은 진보 세력으로부터 변절자로 비판받았다.[1] 일각에서는 박계동이 꼬마민주당 시절 동지이자 '하로동선' 동업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변절했다는 평가도 제기되었다.[1]

한편, 일부 보수 세력은 박계동을 배신자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6. 역대 선거 결과

연도선거 종류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92년총선민주당32,190표 (33.93%)1위당선초선
1996년총선민주당26,358표 (29.88%)2위낙선낙선
2004년총선한나라당42,002표 (49.32%)1위당선재선
2012년총선국민생각4,035표 (4.03%)3위낙선낙선


참조

[1] 간행물 정치생명 정보에 달렸다? http://www.donga.com[...] 주간동아
[2] 웹사이트 보안사, 저명인사 1300명 사찰 http://www.cathright[...] 1990-10-05
[3] 웹사이트 박계동:화제의 인물:세계 연감 1996 http://preview.brita[...]
[4] 보고서 예비후보자 정보공개: 전과기록증명에 관한 제출서 http://info.nec.go.k[...]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22-04-18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