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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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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기출은 일제강점기 도쿄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하다가, 광복 후 미군정청 후생국장을 거쳐 정치에 입문했다. 진보당 부위원장으로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야당 연합을 위해 사퇴했다. 이후 진보당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제2공화국에서 사회대중당을 조직하여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5.16 군사 정변 이후 신민당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제7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유신정권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의사로 활동하며 《한국정치사》를 저술했고, 말년에 귀국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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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박기출
출생1958년
사망2022년 6월 12일 (향년 64세)
직업대한민국의 교육인, 정치인
본관반남 박씨
학력
학력광주숭일고등학교 졸업
전남대학교 법학과 졸업
경력
경력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제17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원회 부의장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상훈
수상대한민국 국회 헌정대상

2. 생애

박기출은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도쿄의학전문학교를 거쳐 1942년 규슈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방 전까지 부산 초량역 앞에서 미쓰모토 외과의원을 개업하고 평범한 의사로 생활했다.

해방 전, 독감으로 위독했던 일본인 초량역장을 치료해준 적이 있는데, 훗날 박기출이 일본에 망명 중 위암으로 도쿄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 역장의 미망인이 찾아와 장기간 간병을 해주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박기출 가족의 출국을 허가하지 않아, 그는 가족 없이 일본인 할머니의 도움만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임종 직전에야 미국에서 의사로 있던 둘째 아들이 와서 함께 귀국했고 며칠 후 사망했다.

8.15 광복 이후의 활동, 진보당 활동, 진보당 사건과 투옥, 5·16 군사 정변 이후 활동과 일본 망명, 사망 관련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조.

2. 1. 해방 정국 활동

8.15 광복 후 평범한 의사로 지내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미군정청 부산지방 초대 후생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 행정업무를 보면서 여러 이해당사자들을 찾아다니며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정치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민족자주연맹과 민주독립당 경남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정치에 참여했다.

1956년 조봉암진보당을 결성하여 중앙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당시 진보당은 한민당 출신의 거물 정치인 서상일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조건으로 영입하여 그의 조직력과 자금을 후원받았다. 그러나 조봉암은 대통령 후보를 자신이 맡겠다며 서상일에게 부통령 후보를 제의했고, 이에 서상일진보당을 탈당했다.

서상일의 탈당으로 공석이 된 부통령 후보 자리에 조봉암은 박기출을 추천했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진보당민주당과 후보 단일화 협상을 가졌는데, 조봉암신익희에게 자신이 양보할 테니 부통령 후보는 민주당 후보 장면진보당 후보 박기출에게 양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결국 후보 단일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박기출은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여 '평화적인 남북통일', '피압박 대중의 승리' 등을 구호로 내세웠으나 야당의 연합전선 형성을 위해 사퇴했다.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20년을 구형받았으나 무죄 선고를 받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1960년 제2공화국 출범을 앞두고 허정 과도내각 하에서 치른 7.29 총선 때 사회대중당을 조직하고 국회의원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이때 반혁명세력이 다시 대두하는 것을 규탄하다가 '입후보자 난동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았다.

2. 2. 진보당 활동과 부통령 후보 사퇴

1956년 조봉암진보당을 결성하여 중앙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원래 진보당은 서상일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할 계획이었으나, 조봉암이 직접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서상일은 부통령 후보 제의를 거절하고 탈당했다. 서상일의 탈당으로 공석이 된 부통령 후보 자리에 조봉암은 박기출을 추천했다.

제3대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 후보 단일화 협상이 진행되었는데, 진보당 대통령 후보 조봉암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에게 자신이 양보하는 대신 부통령 후보는 민주당 장면진보당 박기출에게 양보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장면과 박기출의 경력 차이, 당내 신파의 반발 등을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결국 후보 단일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박기출은 조봉암과 함께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여 '평화적인 남북통일', '피압박 대중의 승리' 등을 구호로 내세우며 근로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고 혁신과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제창했으나, 야당의 연합전선 형성을 위해 사퇴했다.

2. 3. 진보당 사건과 투옥

1956년 조봉암진보당을 결성하여 중앙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원래 진보당 창당 시 조봉암은 한민당 출신의 서상일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조건으로 영입하여 그의 조직력과 자금을 후원받았다. 그러나 진보당 창당 직전, 조봉암은 대통령 후보로 직접 출마하겠다고 선언하며 서상일에게 부통령 후보 출마를 권유했다. 본선 경쟁력에서 서상일보다 조봉암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대 대선과 3대 대선에서 조봉암은 이승만에 이어 차점을 차지했었다.

서상일은 조봉암의 제의를 거절하고 탈당하여 민주혁신당을 창당했다. 조봉암은 공석이 된 부통령 후보 자리에 박기출을 추천했는데, 정계에서는 대부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3대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제일야당 민주당과 진보당은 후보 단일화 협상을 가졌는데, 진보당 대통령 후보 조봉암은 신익희에게 자신이 양보할 테니 부통령 후보는 장면이 박기출에게 양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당내 신파의 반발 등을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결국 후보 단일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박기출은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여 '평화적인 남북통일', '피압박 대중의 승리' 등을 구호로 내세우며 혁신과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제창했으나, 야당의 연합전선 형성을 위해 사퇴했다. 1958년 1월,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20년을 구형받았으나 무죄 선고를 받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1960년 4.19 혁명이후 허정 과도내각 하에서 치른 7·29 총선사회대중당을 조직하고 국회의원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이때 반혁명 세력이 다시 대두하는 것을 규탄하다가 '입후보자 난동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았다.

2. 4. 제2공화국과 사회대중당 활동

8.15 광복 후, 평범한 의사였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미군정청 부산지방 초대 후생국장으로 일하게 되었고, 이때 행정업무를 보면서 정치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민족자주연맹과 민주독립당 경남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정치에 참여했다.

1956년 조봉암진보당을 결성하여 중앙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원래 진보당 창당 시 조봉암은 한민당 출신의 서상일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조건으로 영입하였으나, 조봉암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서상일은 탈당했다. 이 빈자리에 박기출이 부통령 후보로 추천되었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제일야당 민주당과 진보당은 후보단일화 협상을 가졌는데, 협상장에서 진보당 대통령후보 조봉암은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에게 자신이 양보할테니 대신 부통령후보는 민주당 후보 장면이 진보당 후보 박기출에게 양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결국 후보단일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박기출은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여 '평화적인 남북통일', '피압박 대중의 승리' 등을 구호로 내세웠으나 야당의 연합전선 형성을 위해 사퇴했다.

1958년 1월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20년을 구형받았으나 무죄선고를 받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1960년 제2공화국의 출범을 앞두고 허정 과도내각하에서 치른 7ᆞ29 총선 때 사회대중당을 조직하고 국회의원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이때 반혁명세력이 다시 대두하는 것을 규탄하다가 '입후보자 난동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았다.

2. 5. 제7대 국회의원 당선과 대통령 선거 출마

5·16 군사 정변 이후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부산시 동구에 신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원내 진출에 성공하였다. 국회의원 임기 말인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이 국민당 대통령 후보 출마를 포기하자, 국민당 관계자들의 제의로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다. 그 후 잠시 정치 활동을 쉬다가 유신 선포 이후인 1973년 9대 총선에서 양일동이 창당한 통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이후 유신 정권의 체포를 피해 일본으로 도피했다.

2. 6. 일본 망명과 저술 활동, 그리고 죽음

5·16 군사 정변 이후, 박기출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부산시 동구에 신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원내 진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국회의원 임기 말인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하였다. 잠시 정치 활동을 쉬다가, 유신 선포 이후인 1973년 제9대 총선에서 양일동이 창당한 군소 야당인 통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그 후 정치 낭인으로 지내다가 유신 정권이 자신을 체포하려 한다는 제보를 받고 급히 일본으로 도피했다.

일본 망명 후, 박기출은 규슈의 한 시골 마을에서 병원 의사로 취직해 생활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암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다가 임종을 앞두고 귀국하여 곧바로 사망했다.

그의 부산 동래고 후배 김성호가 동래고 총동창회보(2003년 12월 3일자)에 기고한 수기 《도쿄에서 만난 박기출 대선배님의 눈물》에 따르면, 박기출은 규슈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는 그의 주변을 미행 감시하고, 빈방에 몰래 들어와 방을 뒤지고 여권을 훔쳐가고, 심지어 그가 근무하는 병원에 그의 해임을 요구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중앙정보부는 그의 가족들의 출국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고, 그에게 한 푼의 돈도 송금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그가 일본에서 정치 활동을 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고자 하였다.

박기출은 비록 정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일본어로 《한국정치사》를 집필하여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 독재 정치를 고발함으로써 문필로라도 끝까지 투쟁하고자 했다. 이 책은 해방 후 1970년대 당시까지의 한국 정치사를 비교적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하여 많은 정치학도들의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2010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김성호의 수기에 따르면, 박기출은 규슈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틈틈이 이 책을 써서 주말을 이용하여 도쿄에 올라와 원고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여러 출판사들을 전전하며 출판을 교섭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경남체육회 회장, 대한의학협회 회장, 반독재 재야 민주 세력 단일화 추진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정치사》와 강연의 요지를 모아서 엮은 《내일을 찾는 마음》이 있다.

3. 평가

(주어진 원본 소스가 비어있으므로, 평가 섹션에 작성할 내용이 없습니다.)

4. 저서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박기출의 저서에 대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섹션에는 다음과 같이 작성할 수 있다.

서중석의 《이승만과 제1공화국》에 따르면, 박기출에 대한 직접적인 저술 활동은 언급되지 않았다.

5.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제3대 대통령 선거부통령4대진보당---사퇴
제5대 국회의원 선거국회의원5대사회대중당12,206표26.182위낙선
제7대 국회의원 선거국회의원7대신민당46,188표55.461위당선초선
제7대 대통령 선거대통령7대국민당43,753표0.364위낙선
제9대 국회의원 선거국회의원9대무소속5,073표1.875위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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