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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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택상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광복 후에는 초대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893년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1910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을 계기로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서울시경 경찰청장을 역임하며 좌익 색출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외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제2대 국회의원, 국회 부의장,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5·16 군사 정변 이후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며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반공주의자이자 건국의 원훈으로 평가받지만, 친일 경찰 재고용, 부산 정치 파동, 지역 이기주의 등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1969년 폐암으로 사망했으며, 저서로 '장택상 회고록: 대한민국 건국과 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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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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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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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 그의 각하 |
이름 | 장택상 |
원어 이름 | 장택상 |
출생일 | 1893년 10월 22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칠곡군 |
사망일 | 1969년 8월 1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학력 | 와세다 대학 에든버러 대학교 (중퇴) |
배우자 | 진주 정씨, 풍산 류씨, 김연식 |
정당 | 자유당 |
한국어 이름 | 장택상 |
한자 이름 | 張澤相 |
로마자 표기 | Jang Taeksang |
매큔-라이샤워 표기 | Chang T'aeksang |
호 | 창랑 |
한자 호 | 滄浪 |
로마자 호 표기 | Changnang |
자 | 치우 |
한자 자 | 致雨 |
로마자 자 표기 | Chiu |
관직 | |
임기 시작 | 1952년 5월 6일 |
임기 종료 | 1952년 10월 5일 |
대통령 | 이승만 |
전임자 | 이윤영 (대행) |
후임자 | 백두진 |
임기 시작 | 1948년 8월 15일 |
임기 종료 | 1948년 12월 24일 |
전임자 | 직책 신설 |
후임자 | 임병직 |
기타 | |
부모 | 장승원(부), 조남철(모), 주서운(서모) |
친인척 | 형 장길상, 장직상 할아버지 장석용 외손자 권대규, 족형 장건상 |
자녀 | 아들 장병은, 장병청 딸 장병민, 장병채, 장병엽, 장병혜, 장병초 |
본관 | 인동 |
별칭 | 창랑 |
자 | 치우 |
일본어 이름 | チャン・テクサン |
일본어 표기 | 張沢相 |
배우자 | 진주 정씨, 진주 류씨, 김연식, 이유앵 |
국적 | 대한민국 |
종교 | 유교(성리학)→개신교 |
경력 | 무소속 국회의원 대한민국 국무총리 수도경찰청 청장 자유당 총재 |
2. 생애
장택상은 일제 강점기에 유학과 독립운동을 경험했다. 1909년 와세다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91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조병옥 등과 교류했다.[11]
1938년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조선총독부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10] 석방 후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일본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었던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고향에 칩거하였다. 1942년 송진우, 김성수, 여운형 등과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청취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영국 유학 경험과 뛰어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미군정으로부터 서울시경 경찰청장으로 추천되어, 1945년 10월부터 1948년까지 재직하였다. 재임 중에는 좌익 세력 색출 및 탄압에 힘썼으며, '''얼굴은 네로, 행동은 괴링'''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1]
1948년 미군정의 존 하지로부터 미국 국무부가 김규식을 지지하고 있으니, 대립 후보인 이승만과 손을 끊으라는 압력을 받은 이후로는 군정청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 13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외무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초기에 이승만으로부터 중국 대사가 될 것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주영 대사 제안을 받자 이에 항의하며 사표를 제출, 12월 24일에 공식적으로 사임하였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총선에서 경상북도 칠곡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3선을 더 하였다. 1952년 5월 6일 제3대 국무총리에 선출되었고, 7월 4일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안(발췌개헌안) 가결에 일조하였다. 그러나 헌법 개정 당시 경찰을 심하게 개입시켰다는 (부산정치파동) 이유로 이범석에게 고발당하자, 9월 30일 사표를 제출하고 10월 15일 공식적으로 사임하였다.[11]
1964년 초 박정희가 한일협정을 강행하려 하자,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한일회담 반대, 규탄 범국민 운동을 지도하였다.[12] 그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 회담 강행을 한일합방에 비유하며, 한일 회담은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고 비판하였다.[103]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의 부음 소식을 듣고, 7월 22일 이승만 시신이 귀국하자, 장택상, 윤치영, 이범석, 허정 등은 국장을 요구하며 박정희의 국민장 추진에 반대하였다.
만년에는 같은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의 신현확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고,[67] 기타 영남 출신 정치인들을 지원하여 'TK의 대부'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69년 8월 1일 서울 고려병원에서 폐암과 노환으로 서거하였고, 당시 그의 나이 만 76세였다. 사후 8월 7일 서울에서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었으며[10] 노제를 거쳐,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10]
2. 1. 생애 초기 (1893년 ~ 1919년)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면 오태동(현 구미시 오태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 장씨이다.[5] 15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1909년에 와세다대학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10월에 발생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인 1910년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이후 러시아 등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19년에는 독일을 거쳐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25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조병옥 등과 교류하였다.
2. 1. 1. 출생과 가계

창랑 장택상은 1893년 10월 22일 경상북도 칠곡 북삼읍 오태동에서 판서를 지낸 장석룡(張錫龍)의 손자이며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운정(雲庭) 장승원(張承遠)과 정부인 조남철(趙南徹, 풍양 조씨(豊壤 趙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다.[5] 조선 중기의 학자 여헌 장현광의 후손이었다.
할아버지 장석룡은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낸 고관이었고, 고모는 현풍군수와 의금부도사를 지낸 김화식에게 시집갔다.
아버지 장승원은 경기도관찰사와 경상북도관찰사, 비서원경과 중추원 찬의 등을 지내고 정2품 자헌대부에 이르렀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위를 하여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지시로 처단되었다.
맏형 장길상(張吉相)은 대한제국 고종 때 사마시에 합격한 뒤 관직에 나가 규장각직각을 지냈으며, 일제강점기 초반 영남지역의 거부로 성장하기도 했다.
처음 이름은 '삼욱(三旭)'이었고 자(字)는 치우(致雨)라 했으며, 훗날 호는 '창랑'이라 지었다. 뒤에 택상으로 개명하였다. 경북 칠곡은 그의 일가의 집성촌이었는데,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며, 나중에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장건상(張建相) 역시 칠곡 출신으로, 촌수로 족형제가 되는 장건상과 호형호제하며 가까이 지냈다.
15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1909년에 와세다대학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10월에 발생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인 1910년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2. 1. 2. 유년기와 교육

경상북도 칠곡군(현 구미시) 오태동에서 양반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 장씨이다.[5] 7세에 한학을 수학하고 10세에 사서삼경, 한사, 당송팔대가, 외교사 등을 통독하였다.[10] 그러나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경성에서 신학문을 배울 결심을 한다.
이듬해 경성으로 상경하여 우남학회가 운영하는 한성소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10] 여기서 서구의 과학, 수학, 천문학 등을 처음 접하였다. 12세에 집안의 주선으로 4년 연상의 진주 정씨와 결혼하였고,[11] 1906년 연상의 일가 조카인 장태화에게서 강남해와 양계초의 저작들을 얻어 읽고 경성으로 상경하였다. 15세에 본처 진주 정씨가 사망하자, 이웃에 사는 풍산 류씨(서애 류성룡의 후손)와 재혼하였다.[11]
성격은 괄괄하고 활동적이었으나 양반가의 자손이라는 품위 때문에 체육활동은 다소 자제하였다. 15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1909년에 와세다대학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을 계기로 191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이후 러시아 등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19년에는 독일을 거쳐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25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조병옥 등과 교류하였다. 29세에 다시 영국으로 건너갔으며, 귀국 후에는 청구클럽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의 패전까지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2. 2. 일제 강점기 활동 (1910년 ~ 1945년)
장택상은 일제 강점기에 유학과 독립운동을 경험했다. 1909년 와세다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91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조병옥 등과 교류했다.[11]1938년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조선총독부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10] 석방 후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일본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었던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고향에 칩거하였다. 1942년 송진우, 김성수, 여운형 등과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청취했다.
2. 2. 1. 유학과 독립운동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면 오태동(현 구미시 오태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인동 장씨이다.[5] 1908년 15세에 일본으로 유학, 8개월간 일본어를 공부하다가 야마구치현에 있는 소학교로 입학했다. 소학교 졸업 후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도쿄 조선 공사관에서 파견한 시학관이 훈시 중 안중근의 의거를 모독하는 발언을 하자, 소년 장택상은 그것은 의병행위이지 어떻게 폭도행위인가 하며 규탄했고, 한인 학생들은 연단에 올라가 시학관을 끌어내리는 소동이 발생했다.[11]
1909년에 와세다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10월에 발생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인 1910년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10년 10월 한일합방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게 속박당하는 것을 불쾌히 여긴 그는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일본인들의 통제와 발굽 밑에 살아갈 수 있는 내 기질이 아니라'는 이유로 망명을 결심하였다.
이후 러시아 등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다 1919년에는 독일을 거쳐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25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조병옥 등과 교류하게 된다. 29세에 다시 영국으로 건너갔으며, 귀국 후에는 청구클럽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의 패전까지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2. 2. 2. 국내 활동과 탄압
1938년 청구구락부 사건(靑丘俱樂部事件)으로 총독부 일경에 의해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다.[10] 석방 후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고, 일본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1938년 3월 10일, 안창호가 경성대학병원에서 사망하자 일본 경찰의 감시와 위험을 감수하고 아내 김연식을 동반하고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11]석방 후 수표동의 사저에 은거하였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하숙을 하던 조병옥이 궁색한 차림으로 찾아왔으나 돕지 않았다. 그는 아내로부터 '당신은 몇천 석을 하면서도 친구 외투 한벌 못해 입히느냐.'고 타박을 받기도 했다.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었던 그는 1940년 이후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고향에 칩거하였다. 1942년에는 송진우, 김성수, 여운형 등과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청취하기도 했다. 이후 송진우, 안재홍, 여운형 등과 함께 공공연히 일본의 패망을 주장하기도 했다.

2. 3. 광복 직후 정치활동 (1945년 ~ 1948년)
1945년 7월, 장택상은 경상북도 칠곡군 오태동에서 은거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여 서울로 상경하였다. 해방 직후 주소지를 경상북도 칠곡에서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 91번지로 옮겼다.1945년 8월 16일,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의 '급히 상경' 전보를 받고 서울로 올라와 계동의 김성수 집으로 향하던 중, 안국동 로터리에서 친구 이만규를 만났다.[23] 이만규는 여운형의 집으로 함께 갈 것을 제안했으나, 장택상은 선약을 이유로 거절했다.[23] 이는 장택상과 이만규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갈림길이었다.[23]
장택상은 송진우로부터 국민대회준비회 참여를, 이만규, 여운형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권유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이후 9월 16일, 송진우 등과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창설하고 외교부장에 선출되었으며, 군정청 물가조정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장택상은 쓰촨성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받들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며 좌파에 맞섰다. 9월 2일 미군 진주 및 미군정 선포 후, 미군정 서울특별시청 상임고문에 선출되었다.
9월 16일, 장택상은 조병옥, 윤보선, 김도연, 김준연 등과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여 외교부장에 선출되었다.[12]
2. 3. 1. 정치 입문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영국 유학 경험과 뛰어난 영어 실력을 인정받은 장택상은 군정청으로부터 서울시경 경찰청장으로 추천되어, 같은 해 10월부터 1948년까지 그 직을 역임하였다. 재임 중에는 좌익의 색출 및 탄압에 힘썼으며, '''얼굴은 네로, 행동은 괴링'''이라는 말까지 들었다.[1]1948년 미군정의 존 리드 홋지로부터 미국 국무부가 대통령으로 김규식을 지지하고 있으니, 대립 후보인 이승만과 손을 끊으라는 압력을 받은 이후로는 군정청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 13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외무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초기에 이승만으로부터 중국 대사가 될 것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주영 대사가 될 것을 제안받자 이에 항의하며 사표를 제출, 12월 24일에 공식적으로 사임하였다. 한편 그의 형 장직상은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 회부되었다.[1]
1950년 5월 30일에 치러진 제2대 총선에서 경상북도 칠곡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3선을 더 하였다. 6월 19일 개회한 국회에서 장택상은 조봉암과 김동성 등과 함께 공동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에는 탄핵재판소장에도 계속 선출되었고,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1]
2. 3. 2. 경찰 활동과 논란
광복 직후, 장택상은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영국 유학 경험과 뛰어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미군정으로부터 서울시경찰청장으로 추천되어, 1945년 10월부터 1948년까지 재직하였다. 재임 중 좌익 세력 색출 및 탄압에 주력하여, '''얼굴은 네로, 행동은 괴링'''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50]장택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옹호하며 좌파에 맞섰다. 1945년 9월 미군정 선포 후, 서울특별시청 상임고문에 선출되었다. 한국민주당 외교부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수도경찰청장, 경기도경찰부장 등으로 재직하며 당 활동에 소홀했다.
장덕수 암살 사건 수사 과정에서 장택상은 암살 배후에 김구가 연관된 혐의를 포착하고 경교장 수색 영장을 신청하려 했다.[50] 그러나 하지 중장은 미소 공존을 꾀하던 미국무성의 정책에 따라 이를 막았고, 동시에 박헌영 체포 시도 역시 무산되었다.[50]
2. 3. 3.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2. 4.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활동 (1948년 ~ 1969년)

1948년 미군정청의 존 하지는 장택상에게 이승만에게서 손을 떼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장택상은 사퇴하겠다고 응수하며 조병옥과 함께 하지를 설득했다.[11] 이후 장택상은 이승만의 단정 수립을 적극 지지했다.
수도경찰청장 재직 시절, 장택상은 9번의 테러를 당했다.[11] 1948년 1월 24일 자택 근처에서 박성근을 포함한 청년 2명에게 수류탄 저격을 받았으나, 재빨리 피신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경호원 2명과 마을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다.[11] 1946년 11월 13일에는 출근 중 괴한 두 명이 던진 수류탄과 권총 공격을 받았으나, 차량 운전수가 수류탄을 발로 밀어내고 장택상도 자동차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경호원 1명이 사망하고, 함께 있던 자녀들이 부상을 당했다.[11]

1948년 1월 24일 장택상 저격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된 박성근은 노덕술의 지휘 하에 고문을 받다가 1월 29일 사망했다. 노덕술은 박성근의 머리를 곤봉으로 난타하고 물고문을 지시하는 등 가혹행위를 했으며,[52]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박성근이 도주한 것처럼 꾸미고 사체를 한강에 유기했다.[52] 장택상은 이 사건을 보고받고 오히려 노덕술 등 14명에게 특별상여금을 지급했다.[52]
1948년 5월 10일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장택상은 선거 유세 중 박일원이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을 겪었고, 제헌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하였다. 그해 6월 1일 서울특별시 종로을구 보궐선거에도 출마하였으나 역시 낙선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제1대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14] 1949년 경북 안동군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임영신과 맞붙었으나 패배하였다.[54]
2. 4. 1. 초대 외무부 장관
1948년 8월 13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외무부 장관에 취임하였다.[11] 1948년 8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초대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대한민국의 외교, 대외 무역 및 해외 교포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이승만으로부터 중국 대사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주영 대사 제안을 받자 이에 항의하며 사표를 제출, 12월 24일에 공식적으로 사임하였다.2. 4. 2. 국회의원과 국무총리
1950년 5월 30일에 치러진 제2대 총선에서 경상북도 칠곡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3선을 더 하였다. 6월 19일 개회한 국회에서 장택상은 조봉암, 김동성 등과 함께 공동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에는 탄핵재판소장에도 계속 선출되었고,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1952년 5월 6일에는 제3대 국무총리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7월 4일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안(통칭 발췌개헌안)의 가결에도 일조하였다. 그러나 헌법 개정 당시 경찰을 심하게 개입시켰다(부산정치파동)는 이유로 이범석으로부터 고발당하자, 9월 30일 사표를 제출하고 10월 15일 공식적으로 사임하였다.[11]
2. 4. 3. 야당 정치인과 반독재 투쟁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장택상은 제1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14] 그러나 1949년 경북 안동군 을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 임영신에게 패배했다.[54] 이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대통령 후보직에 출마하지 않았다. 1963년 제6대 민의원 선거에 고향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장택상은 이를 정부와 관권, 금권에 의한 민주주의의 패배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군소 정당화된 자유당을 지도하였다.1964년 초 박정희가 한일협정을 강행하려 하자, 박정희의 한일협정을 매국 외교로 규정하고 한일회담 반대, 규탄 범국민 운동인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가 발족되자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참여하여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지도하였다.[12] 그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 회담 강행을 한일합방에 비유하며, 한일 회담은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고 비판하였다.[103]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의 부음 소식을 듣고, 7월 22일 이승만 시신이 귀국하자, 장택상, 윤치영, 이범석, 허정 등은 국장을 요구하며 박정희의 국민장 추진에 반대하였다.
1965년 9월 서울 효창공원에서 열린 한일협상 반대 회담에 연사로 참석하였다. 이후 그는 윤보선, 장준하 등과 함께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을 주관하였다. 1966년 2월 신한당에 입당하여 신한당 고문이 되었다.[12] 1966년 9월 효창공원에서 열린 신한당 대연설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박정희의 좌파 전력을 비판하며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자 박정희는 그의 집에 남로당원들이 은신한 것을 문제 삼았다. 박정희가 그를 직접 공격한 것은 영남의 야당 정치인들이 박정희에 대한 악감정을 품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1966년 6월 5일 장면의 빈소를 방문한 뒤 장면의 국민장에도 참석하였다. 1966년 12월 24일 야당 통합과 대통령 후보 단일화 추진을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자 추진 위원으로 위촉되었다.[107] 이후 장준하 등과 함께 야당 대권 주자인 윤보선, 백낙준, 이범석의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였다.
2. 4. 4. 한일회담 반대 운동과 6.3 시위
1964년 초,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의 비밀 교섭을 추진하며 조속한 타결을 시도하자, 장택상은 이에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한일회담을 한·일 합방에 비유하며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103]1964년 3월 6일, 민정, 민주, 자민, 국민의 당 등 야당과 사회, 종교, 문화단체 대표 200여 명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104]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 열린 구국선언 채택식에 참석한 장택상은 한일회담 반대, 규탄 운동에 동참하며,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을 통해 반대 여론을 확산시켰다.[104]
1964년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한일회담과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며 단식 농성에 돌입하면서 6.3사태가 시작되었다. 학생회장 김덕룡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했다.[105] 장택상은 학생들을 찾아 격려하며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지원했다.
1965년 장택상은 윤보선, 장준하, 박순천 등과 함께 한일협상 반대 운동을 계속했다. 3월 30일 김준연 의원이 국회에서 정부의 일본 자금 수수 의혹을 제기하자,[106] 장택상은 증인으로 출석해 '1억 몇천만 달러를 받았다는 설이 있는데 진부를 알아보라.'고 발언했다.[106] 그는 가두시위와 순회강연을 통해 반대 운동을 이어갔으며, 박정희 정권은 윤보선, 장택상, 장준하, 유진오, 함석헌 등을 시위 배후로 지목하고 감시를 강화했다.
2. 4. 5. 만년과 사망
만년에는 같은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의 신현확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고,[67] 기타 영남 출신 정치인들을 지원하여 'TK의 대부'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만년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에 칼럼과 회고록을 기사로 내기도 했다. 1967년 신한당(新韓黨) 고문에 추대되었다. 박정희의 등장으로 영남 지역에서는 민주공화당에 대한 지지가 강했으나, 그는 김영삼, 신현확을 비롯한 영남 야당 정치인들을 후원하며 유세 활동에 참여하였다.박정희 대통령은 창랑선생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특별공로자로 애국적 업적을 인정하여 폐암 투병 시 친필서신을 비서실장에게 주어 대신 병문안 다녀오게 하며 국민장과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도록 지시하였다.

1969년 7월 폐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였고 임종 직전 혼수상태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 한다. 임종 전에도 병원 간호사에게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1969년 8월 1일 오후 서울 고려병원에서 폐암과 노환으로 서거하였고, 당시 그의 나이 만 76세였다. 사후 1969년 8월 7일 서울에서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었으며[10] 노제를 거쳐,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10]
사후 바로 수교훈장 광화장에 추서되었다.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에 기여하였으나 건국훈장 서훈 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 사후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고, 1970년대부터 추모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김영삼 등 야당 정치인들이 그의 추모사업에 참여하였으나, 재차 건국훈장 서훈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71년 4월 10일 그의 부인 김연식은 그가 소장하고 있던 각종 문화재 50점을 전문가 검증 후 영남대학교에 기증했다. 대구 수성관광호텔 311호에 당시 영남대 총장 이선근, 영남대학 박물관장 교수 심재완 등이 와서 감정, 화청자 신라5층석탑, 충무공 이순신의 친필 일지, 흥선대원군의 친필 난초병풍 10폭 등을 기증했다. 부인 김연식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 산58-100번지 저택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0년 셋째 부인 김연식이 사망하자 국립묘지 장택상 묘소에 안장되었다.
1992년 저서인 《대한민국 건국과 나》와 일대기인 《상록의 자유혼》이 재발간되었다.
한편 1970년부터 박정희 정부의 국무회의에서 장택상에 대한 포상 의견이 나왔지만 번번히 무산되었다.
2006년 8월 4일 셋째 딸 장병혜는 이승만의 양자인 이인수와 함께, 한국방송공사(KBS)의 주말드라마 《서울1945》에서 이승만과 장택상의 명예를 훼손하는 등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제작진인 윤창범 등을 고소하였다.
3. 평가와 논란
장택상은 조병옥 등과 함께 테러를 조장했다는 비판과[117] 오만하고 괄괄한 성격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장택상은 드라마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3. 1. 긍정적 평가
반공주의자이며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이라는 평가와 민주주의자라는 평가가 있다.[22] 난세의 정치인이라는 평가와 함께 천재적 능변가, 정치의 곡예사, 권력의 도화사(道化師) 등의 평가가 있고, 기고만장의 기염아(氣焰兒), 술수의 화신 등으로 평가받기도 한다.[22] 한편으로는 감성이 풍부하고, 상당한 재력가였다는 평가도 있으며,[22] 담백한 기질과 명랑하고 강직한 성격, 청빈한 기품, 불굴의 자유혼, 기지와 해학을 겸비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해방 정국 당시 경찰부에서 근무했던 교육자 박병배는 장택상을 '가문, 총명함, 학식, 날카로운 판단력과 무서운 행동력을 갖추어 해방 후 건국사와 대한민국 정치사에 수많은 업적과 화제를 남긴 분[115]'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머리 회전이 빠르고 야심이 있는 정치가여서 한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인물이 아니었다.'[116]라는 평가도 있다.
3. 2. 부정적 평가
반공주의자이며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이라는 평가가 있고, 민주주의자라는 평가도 있다. 비교적 성격은 거만한 편이라는 시각도 있다. 해방 후 조병옥과 함께 일제강점기 친일 경찰들을 대거 재고용하고 1952년엔 이범석과 함께 발췌 개헌을 위한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킨 주범이며 영남의 부패한 지역이기주의를 일으킨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난세의 정치인이라는 평가와 함께 천재적 능변가, 정치의 곡예사, 권력의 도화사(道化師) 등의 평가가 있고 기고만장의 기염아(氣焰兒), 술수의 화신 등의 평가도 있다.[22]
북한의 김일성은 장택상이 '친일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93] 또한 이 때문에 이승만 사퇴 직후 '미국이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망설이고 있었다.[93]'고 전망하였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또 야심이 있는 정치가여서 한 사람한테 절대적으로 복종할 인물이 아니었다.'[116]는 시각도 있다. 조병옥 등과 함께 테러를 조장하였다는 비판도 있다.[117] 오만하고 괄괄한 성격이라는 평가도 있다.
3. 3. 종합적 평가
장택상은 반공주의자이자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이라는 평가와 민주주의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비교적 거만한 성격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해방 후 조병옥과 함께 일제강점기 친일 경찰들을 대거 재고용하였고, 1952년에는 이범석과 함께 발췌 개헌을 위한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킨 주범이며, 영남의 부패한 지역이기주의를 일으킨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한다.[22]난세의 정치인이라는 평가와 함께 천재적 능변가, 정치의 곡예사, 권력의 도화사(道化師) 등의 긍정적 평가와 기고만장(氣焰兒)의 기염아, 술수의 화신 등의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한편으로는 감성이 풍부하고 상당한 재력가였다는 평가도 있다.[22] 담백한 기질, 명랑하고 강직한 성격, 청빈한 기품, 불굴의 자유혼, 기지와 해학을 겸비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북한 주석 김일성은 장택상을 '친일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93] 또한 이 때문에 이승만 사퇴 직후 '미국이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망설이고 있었다'고 전망했다.[93]
해방 정국 경찰부 근무 경험이 있던 교육자 박병배는 장택상에 대해 '가문, 총명함, 학식, 날카로운 판단력과 무서운 행동력을 갖추어 해방 후 건국사와 대한민국 정치사에 수많은 업적과 화제를 남긴 분'[115]이라고 평가했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야심이 있는 정치가여서 한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인물이 아니었다'[116]는 시각도 있다. 조병옥 등과 함께 테러를 조장하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17] 오만하고 괄괄한 성격이라는 평가도 있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양증조부 | 장학추(張學樞) | 양할아버지 장석용의 양아버지, 가선대부 중추부동지사 역임 |
생증조부 | 장덕추(張悳樞) | 양할아버지 장석용의 생부, 증 이조판서 추증 |
생조부 | 장석구(張錫龜) | 족숙 장업추(張業樞)의 양자로 출계 |
양조부 | 장석용(張錫用, 1823년~1907년) | 조선에서 이조판서 역임 |
종조부 | 장석봉(張錫鳳) | |
고모 | 인동 장씨(仁同張氏) | |
고모부 | 김화식(金華植, 1847년~?) | 호는 담애(潭涯), 생원시 합격 후 현풍군수 역임 |
아버지 | 장승원(張承遠, 1852년~1917년) | 조선 때 자헌대부 관찰사 역임 |
어머니 | 조남철(趙南徹) | 풍양 조씨(豊壤 趙氏), 1846년~1938년, 정부인(貞夫人) |
맏형 | 장길상(張吉相, 1874년~1936년) | 규장각 직각 역임 |
조카 | 장병천(?~1923년 10월 29일) | |
둘째 형 | 장직상(張稷相, 1883년 ~ 1959년) | 선산군수 역임 |
조카 | 장병찬(張炳贊) | 기업인, 이천전기 대표 역임 |
누이 | 장씨(張氏) | |
외조카 | 손병직 | |
부인 | 진주 정씨(晋州鄭氏, 1889년 ~ 1908년) | 정우묵(鄭佑黙)의 딸, 우복 정경세의 후손 |
부인 | 풍산 류씨(豊山柳氏, ? ~ ?) | 류도상(柳道相)의 딸, 서애 류성룡의 후손 |
부인 | 김연식(金淵植, 1900년~1990년) | 공주김씨, 김관호(金寬鎬)의 딸 |
딸 | 장병민(張炳敏, ? ~ ?) | 남로당에서 활동한 좌익 운동가[127] |
사위 | 채항석(蔡恒錫, ? ~ ?) | 남로당에서 활동한 좌익 운동가, 일설에는 김진국[127] |
외손녀 | 채효선 | |
외손녀 사위 | 이OO | 대한민국 육군 초대 항공사령관 이영무의 아들[129] |
아들 | 장병철(張炳哲, 1927년 ~ ?) | |
아들 | 장병갑(張炳甲, 1930년 ~ ) | |
딸 | 장병우(1931년~) | [130] |
딸 | 장병채(張炳菜, 1931년 ~ ) | 대학교수, 하와이대학교 강사 |
사위 | 한유갑(韓有甲) | |
딸 | 장병혜(張炳惠, 1932년 12월 6일 ~ ) | |
사위 | 양각용(楊覺勇, 1920년 ~ ) | |
외손자 | 권대규(權大奎) | 장병혜의 양아들 |
아들 | 장병은(張炳殷) | |
아들 | 장병문(張炳文) | |
아들 | 장병청(張炳淸) | |
딸 | 장병엽(張炳燁) | |
사위 | 지창환(池昌煥) | |
딸 | 장병초(張炳初) | |
손녀 | ? | |
손녀사위 | 정혜신 | |
첩 | 이유앵(李柳鶯, 1905년~) | 의친왕의 첩이었다가 다시 남작 조명구의 첩이 된 이유색(李柳色)의 사촌동생[131] |
5. 기타
김영삼은 1952년 대한민국 국회부의장 장택상의 비서관을 역임했고,[108] 장택상이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는 국무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을 지냈다. 김대중도 1950년대 중반에 잠시 그의 비서역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9] 장택상은 김영삼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그를 정계에 데뷔시켰으나, 김영삼은 뒤에 민주당 구파로 건너갔다.
조봉암, 여운형의 사돈이었던 이만규 등과 개인적으로 친분관계가 있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발하여 1954년, 자유당을 탈당하여 호헌동지회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봉암이 끝내 호헌동지회에서 배제당하자 장택상은 호헌동지회를 탈퇴, 호헌동지회 중심으로 하는 반(反)이승만 신당인 민주당 결성에도 불참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는 이범석과 충성경쟁을 벌였고, 이승만의 다른 측근인 윤치영, 이기붕 등과는 사이가 나빴다. 1956년의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범석을 낙마시키려는 이승만의 의도를 읽고 이범석의 낙선을 지원하다가 뒤에 이범석으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이범석과 화해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아내 김연식에게 선물할 반지에 장택상이라는 이름을 새겨서 선물하기도 했다.
그는 사윗감이 될 새 종손이 태어나기도 전에 한 문중의 종손에게 '우리 인연이 되면 사돈을 하세' 하며 청혼을 하기도 했다.[109] 즐겨찾는 기생집은 정담촌(政談村)이라 한다.[110] 물론 이는 그의 농담이었다.[111] 골동품 수집이 취미이기도 했던 그는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실력도 있었다.
월북인사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성혜림, 성혜랑, 성일기 남매의 아버지 성유경과 먼 친척간이었다.[112] 친척관계인 인연으로 성일기 남매는 서울 수표동에 있던 장택상의 집에 놀러가기도 했다.[112] 또한 장택상의 큰딸 장병민의 남편 채항석이 조선공산당원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국 전쟁 중에 월북했다.
장택상과 조병옥은 동지였으나, 강원룡에 의하면 그는 조병옥과 '경쟁관계였다.[118]' 한다. 강원룡은 수도경찰청장 당시 장택상과 조병옥의 관계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고 회고하였다.[119] 그러나 장택상은 조병옥을 업무적으로는 신뢰하였는데, 미군정 기간 중 최능진이 조병옥의 친일파 옹호를 규탄했을 때는 공식적으로 조병옥을 두둔하며 최능진을 비판했다. 최능진은 경찰직을 사퇴한 이후에도 조병옥을 비판, 이후 그는 조병옥과 함께 최능진을 논박했다.
한편 그는 국방경비대 참령이자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이형근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영갑에 의하면 이형근은 회의에서 가끔 그를 만났는데 어떤 때는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험악한 사태로까지 번지곤 했다[120] 고 회고하였다. 그의 성격은 괄괄하고 직선적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오만하다는 평도 들었고, 적을 많이 만들었다.
금오산 기슭에 한사람의 왕과 3명의 장군이 나올 명당이 있다는 풍수설을 듣고 구미 상모리를 찾아갔지만, 그곳에는 박정희의 생가와 할머니 묘가 있었다.[121] 백자 감식에 있어서는 첫 손가락에 꼽는 전문가[122] 이기도 했다.
1967년 장택상 국무총리가 가지고 있던 파텍 필립 시계는 국내 존재하던 시계 가운데 가장 고가였다. 해당 시계 뿐만 아니라 여러 고가의 시계를 보유했고, 장택상 국무총리의 사저에 고용된 하인들이 시계 금고를 지켰다.[132]
장택상 국무총리의 호화 별장은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 있었다. 시흥계곡 복합환경생태공원 별장터 안내 표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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