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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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두진은 경기도 안성 출신의 시인으로, 자연을 소재로 하여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작품을 주로 썼다. 그는 1939년 문단에 등단하여, 박목월, 조지훈 등과 함께 청록파 동인으로 활동하며 일제강점기 말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저항 정신을 자연을 통해 표현했다. 광복 후에는 기독교적 이상을 시에 도입하여 시대의 시련과 사회 현실을 비판했으며, 말년에는 수석을 수집하며 자연과의 교감을 시로 나타냈다. 1972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며, 아시아자유문학상, 서울시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청록집》, 《오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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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록파 - 조지훈
조지훈은 1939년 등단한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국문학자로,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며 자연을 소재로 민족 정서를 노래했고, 해방 후에는 교육자, 학자, 문화운동가로 활동하며 민족 문화 발전에 헌신했다. - 청록파 - 박목월
박목월은 1940년 등단하여 조지훈, 박두진과 청록파로 활동하며 한국 서정시를 이룬 시인으로, 자연과 향토적인 정서를 노래하다 후기에는 일상과 종교적 구원을 주제로 시를 썼다. - 우석대학교 (서울) 동문 - 송재익
송재익은 동아방송과 MBC 아나운서를 거쳐 스포츠 캐스터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방송인으로, 아나운서 퇴임 후 강사 활동과 선진통일당 대표최고전임위원을 역임했으며 영화에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 우석대학교 (서울) 동문 - 김응용
김응용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으로, 국가대표 야구 선수와 아마추어 야구팀 감독을 거쳐 KBO 리그 해태, 삼성, 한화 감독을 역임하며 해태 감독 시절 9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명장이자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이다. - 경성사범학교 동문 - 이병린
이병린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변호사로 활동하며 서울변호사회 부회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6.3 사태 당시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구속되었으며,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대표와 유신헌법 철폐 운동을 주도하며 인권 운동에도 힘썼고, 법치주의 확립과 사법권 독립을 강조하며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인물이다. - 경성사범학교 동문 - 김원태 (정치인)
김원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리, 대한민국 농림부 및 내무부 차관을 역임했으며, 제4·8·9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박두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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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박두진 |
한자 | 朴斗鎭 |
로마자 표기 | Bak Dujin |
출생일 | 1916년 3월 10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안성군 |
사망일 | 1998년 9월 16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호 | 혜산(兮山) |
국적 | 대한민국 |
언어 | 한국어 |
활동 기간 | 1939년 ~ 1998년 |
직업 | |
직업 | 시인, 대학 교수 |
경력 | 추계예술대학교 전임대우교수 |
학력 | |
학력 | 서울 우석대 국문학과 학사 |
가족 | |
배우자 | 이희성 |
자녀 | 슬하 4남 (장남 박영혁, 차남 박영조, 3남 박영하, 4남 박영욱) |
종교 |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회) |
작품 | |
장르 | 시문학 |
주요 작품 | 「오도」 「묘지송」 |
데뷔 작품 | 「향현」 |
기타 | |
웹사이트 | 한국문학번역원 |
2. 생애
박두진은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시인의 꿈을 키웠다. 1939년 ''문장''지에 시 〈향현〉, 〈묘지송〉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10] 해방 후 김동니, 조연현, 서정주와 함께 한국청년작가협회를 공동 설립했다.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낸 첫 시집 청록집(1946)은 자연을 소재로 하여 일제 말기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저항 의식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후 '해'(1949), '오도'(1953) 등 여러 개인 시집을 발표하며 자연에 대한 깊은 묘사를 보여주었다.
박두진은 1945년까지 관리직에 종사했고, 이후 출판업계에서 일하다가 연세대학교, 우석대학교(후에 고려대학교와 합병),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2] 1972년에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11] 그의 시는 아시아자유문학상(1956), 서울시문화상(1962), 삼일문화상(1970), 한국예술원상(1976), 인천상(1988)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2]
2. 1. 초기 생애 및 등단
박두진은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1939년 문예지 《문장》에 〈향현〉, 〈묘지송〉 등을 발표하여 등단했다.[10]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이들의 공동 시집인 《청록집》은 일제 말기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저항적인 태도를 주로 자연을 소재로 시화한 작품이다.박두진 초기 작품의 특징은 전통적이고 여성적인 정서에서 벗어나 남성적인 기개를 시화한 점이다. 또한 작품에 나타나는 자연은 근본적으로 순응과 화합의 지혜를 구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의 시는 일제에 의해 짓밟힌 민족 주체성에 대한 인식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저항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묘지송〉에서도 죽음의 의식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삶을 바라보는 햇살을 노래하면서 조국의 미래를 되살리는 종교적인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8·15 광복 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좌익계의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 김동리, 조연현, 서정주 등과 함께 우익 진영에 서서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결성에 참여했고, 이어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에도 가담하여 시분과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13]
2. 2. 청록파 활동과 광복 이후
박두진은 1939년 문예지 《문장》에 《향현》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했다.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의 한 사람이다. 8·15 광복 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좌익계의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 김동리, 조연현, 서정주 등과 함께 우익 진영에 서서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결성에 참여했고, 이어 1949년 한국문학회협회에도 가담하여 시분과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13]처음에는 자연을 주제로 한 시를 썼으나 이후에는 광복의 감격과 생명감 있는 시를 썼다. 말년에는 남한강 등지에서 직접 수석(水石)을 수집하면서 쓴 『수석열전』과 『수석연가(水石戀歌)』 등의 시편들을 통해 "그의 시의 핵(核)이기도 한 시원적(始原的) 생명을 노래"했다. 이는 자연의 결정체인 수석을 통해 "수석이 고요히 일러주는 내밀(內密)한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동시에 시인 자신도 돌을 향해 "끝없이 메시지를 보내[13]"는 일종의 자연과의 교감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지은 『청록집』은 일제 말기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저항적인 태도를 주로 자연을 소재로 시화한 작품이다. 박두진의 시는 일제에 의해 짓밟힌 민족 주체성에 대한 인식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저항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해방 후에 쓰여진 「일」은 새로운 한국의 창조적인 의지를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2. 3. 교육 활동 및 후기 생애
1960년 4·19 혁명 당시 학원 분규로 연세대학교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우석대학교(후에 고려대학교와 합병)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거쳐 1972년 다시 연세대학교 교수로 돌아와 근무하다가 1981년 정년 퇴임했다.[10]이후 단국대학교 초빙교수(1981∼1985)와 추계예술대학 전임대우교수(1986∼1996)를 역임한 후, 1998년 9월 16일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0]
아세아 자유문학상(1956), 서울특별시 문화상(1962), 삼일문화상(1970), 한국예술원상(1976), 인천상(1988) 등을 받았다.[2]
2. 4. 말년의 수석(水石) 사랑
박두진은 말년에 남한강 등지에서 직접 수석(水石)을 수집하면서 『수석열전』과 『수석연가(水石戀歌)』 등의 시편들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그의 시의 핵(核)이기도 한 시원적(始原的) 생명을 노래"했다.[13] 이는 자연의 결정체인 수석을 통해 "수석이 고요히 일러주는 내밀(內密)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동시에 시인 자신도 돌을 향해 "끝없이 메시지를 보내[13]"는 일종의 자연과의 교감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3. 작품 세계
박두진은 현대 한국 문학에서 많은 작품을 남기고 명성이 높은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시는 푸른 초원, 지저귀는 새, 뛰노는 사슴, 지는 해와 같은 자연을 소재로 하면서도,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기작 향현은 이러한 자연 이미지를 통해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예언한다는 해석이 있을 정도다.[3]
박두진의 시에서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촉매제 역할을 한다. 문학 비평가 조연현은 박두진이 자아와 자연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작품 활동을 한다고 평가했다.[4]
박두진은 시집을 발표하면서 기독교적 이상을 시에 도입했고, 한국 전쟁 이후에는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1960년대에는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림(1963)'' 등을 통해 시대적 시련에 대한 창조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이 시기 박두진 시의 특징으로는 의성어, 비유적 표현, 산문 형태의 시적 진술 등이 있다.
그의 시 "복숭아꽃 필 무렵"은 그의 열정적이고 주문과 같은 시가 문화적, 개인적 언급을 결합하여 한국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6]
3. 1. 초기 시 세계: 자연과 민족의식
박두진의 초기 시는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저항 정신을 자연을 소재로 하여 표현하였다. 한국문학번역원은 박두진의 시가 "푸른 초원, 지저귀는 새, 뛰노는 사슴, 지는 해"와 같은 자연적 이미지를 통해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3] 예를 들어, 초기작 "향현"에 나타난 '야생 동물과 식물의 평화로운 공존'은 '민족의 잠재된 힘'을, 산등성이의 불꽃은 '국민의 창조적인 열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3]문학 비평가 조연현은 박두진의 시에서 자연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세계를 이해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는 박두진이 '자아와 자연을 구분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한다고 평가했다.[4]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낸 『청록집』은 일제 말기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저항적 태도를 자연을 통해 드러낸 작품이다. 박두진의 시는 일제에 의해 짓밟힌 민족 주체성에 대한 인식과 제국주의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 "묘지송"에서는 죽음을 넘어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며 조국의 미래를 되살리는 종교적 의미를 함축한다.
박두진 초기 작품은 전통적이고 여성적인 정서에서 벗어나 남성적인 기개를 시로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또한 작품 속 자연은 순응과 화합의 지혜를 구하는 의미를 지닌다. 해방 후 쓰여진 "일"은 새로운 한국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3. 2. 광복 이후: 현실 참여와 기독교적 이상
8·15 광복 후 박두진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좌익계의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 김동리, 조연현, 서정주 등과 함께 우익 진영에 서서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했고, 이어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에도 가담하여 시분과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13]처음에는 자연을 주제로 한 시를 썼으나 이후에는 광복의 감격과 생명감 있는 시를 썼다. 한국 전쟁 이후 국민의 상황에 대한 강력한 의식에 영감을 받은 박두진은 그 자신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다양한 정책과 사회 현실에 대해 분노와 비판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1960년대에도 ''거미와 성좌''(1962)와 ''인간 밀림''(1963)을 통해 시대의 시련에 대한 창조적인 해결책을 계속해서 모색했으며, 역사를 주어진 것으로가 아니라 모든 참여자들에 의해 형성되는 과정으로 묘사했다.
말년에는 남한강 등지에서 직접 수석(水石)을 수집하면서 쓴 『수석열전』과 『수석연가(水石戀歌)』 등의 시편들을 통해 "그의 시의 핵(核)이기도 한 시원적(始原的) 생명을 노래"했다. 이는 자연의 결정체인 수석을 통해 "수석이 고요히 일러주는 내밀(內密)한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동시에 시인 자신도 돌을 향해 "끝없이 메시지를 보내[13]"는 일종의 자연과의 교감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초에 ''수석열전''(1973)과 ''풍무한''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의 성격은 다시 한번 진화했는데, 개인적인 자기 실현에 기반을 둔 이 시들은 종종 박두진이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자기 발견의 절정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5]
3. 3. 후기 시 세계: 자연과의 교감과 자기 성찰
박두진은 말년에 남한강 등지에서 직접 수석(水石)을 수집하면서 『수석열전』, 『수석연가(水石戀歌)』 등의 시를 썼다. 이를 통해 "그의 시의 핵(核)이기도 한 시원적(始原的) 생명을 노래"했다.[13] 이는 자연의 결정체인 수석을 통해 "수석이 고요히 일러주는 내밀(內密)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동시에 시인 자신도 돌을 향해 "끝없이 메시지를 보내[13]"는 일종의 자연과의 교감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1970년대 초에 『수석열전』(1973)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의 성격은 다시 한번 진화했다. 이때의 시들은 개인적인 자기 실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종종 박두진이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자기 발견의 절정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윤리와 종교의 수준으로 시를 끌어올린 예술가로 알려진 박두진은 오늘날 기술적 세련됨보다는 주제 의식의 시인으로 더 평가받고 있다.[5]
3. 4. 시적 기법
박두진은 현대 한국 문학에서 많은 작품을 남기고 명성이 높은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시는 푸른 초원, 지저귀는 새, 뛰노는 사슴, 지는 해와 같은 자연을 소재로 하면서도,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기작 향현은 이러한 자연 이미지를 통해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예언한다는 해석이 있을 정도다.[3]박두진의 시에서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촉매제 역할을 한다. 문학 비평가 조연현은 박두진이 자아와 자연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작품 활동을 한다고 평가했다.[4]
박두진은 시집을 발표하면서 기독교적 이상을 시에 도입했고, 한국 전쟁 이후에는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1960년대에는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림(1963)'' 등을 통해 시대적 시련에 대한 창조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이 시기 박두진 시의 특징으로는 의성어, 비유적 표현, 산문 형태의 시적 진술 등이 있다. 1970년대 초 ''수석열전(1973)'', ''풍무한''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는 개인적 자기 실현을 기반으로 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시들은 박두진이 자기 발견의 절정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5]
박두진은 기술적 세련됨보다는 주제 의식을 중시하는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시 "복숭아꽃 필 무렵"은 그의 열정적이고 주문과 같은 시가 문화적, 개인적 언급을 결합하여 한국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6]
4. 수상 및 서훈
5. 노벨문학상 후보 지명
1972년 노벨 문학상 후보였던 사실이 50년 이상이 지난 후 노벨상 위원회가 공개한 후보자 명단을 통해 확인되었다.[11]
6. 기념 사업
1998년 박두진 사후, 안성시립도서관 입구에는 그의 시 '그리움'이 새겨진 바위가 추모비로 세워졌다.[7] 도서관 3층에는 2008년 박두진홀이 개관하였다. 이곳은 그의 문학 작품과 삶을 기리고 있으며, 서예 작품과 시가 새겨진 도자기 등도 전시하고 있다. 시인의 고향인 안성에 있는 박두진기념사업회는 그의 추모를 위해 전국 규모의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으며, 매년 박두진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8]
7. 주요 작품 목록
'''시'''
- 1946년, 청록집
- 1953년, 오도
- 1962년, 거미와 성좌
- 1963년, 인간밀림
- 1967년, 하얀 날개
- 1973년, 고산식물
- 1973년, 사도행전
- 1981년, 수석열전
- 1981년, 야생대
- 1981년, 포옹무한
'''에세이집'''
- 1981년, 생각하는 갈대
- 1981년, 언덕에 이는 바람
- 1981년, 그래도 해는 뜬다
'''시론서'''
- 1970년, 한국현대시론
- 1976년,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
8. 번역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Pak Tu-jin
http://klti.or.kr/ke[...]
2013-09-21
[2]
웹사이트
Pak Tu-jin
http://klti.or.kr/ke[...]
2013-09-21
[3]
웹사이트
Pak Tu-jin
http://klti.or.kr/ke[...]
2013-09-21
[4]
웹사이트
Pak Tu-jin
http://klti.or.kr/ke[...]
2013-09-21
[5]
웹사이트
Pak Tu-jin
http://klti.or.kr/ke[...]
2013-09-21
[6]
서적
Poems from Korea
Hawaii University
1974
[7]
웹사이트
Monument for Pak Tu-jin
http://en.ggtour.or.[...]
[8]
웹사이트
Monument for Pak Tu-jin
http://en.ggtour.or.[...]
[9]
웹사이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2-09-23
[10]
웹사이트
박두진(朴斗鎭)
http://encykorea.aks[...]
2022-09-25
[11]
PDF
Nobelarkivet-1972
https://sa-admin.lb.[...]
[12]
뉴스
청록파 시인 故 박두진장로
https://www.hsnews.c[...]
한국기독공보
2017-09-13
[13]
웹인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박두진(朴斗鎭)
http://encykorea.aks[...]
202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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