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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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정주는 대한민국의 시인으로, 1915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나 2000년 사망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시집 《화사집》, 《귀촉도》, 《신라초》 등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말 친일 행위와 군부 독재를 지지한 행적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의 작품은 탐미적 경향과 전라도 사투리 활용으로 민족어의 가능성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표작으로는 "자화상", "국화 옆에서" 등이 있다. 고향인 고창에는 미당문학관이 있으며, 매년 미당문학상이 수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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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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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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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서정주 |
한자 | 徐廷柱 |
로마자 표기 | Seo Jeong-ju |
아호 | 미당(未堂), 궁발(窮髮) |
일본식 이름 |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 |
출생일 | 1915년 5월 18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전라북도 고창군 (현재 대한민국) |
사망일 | 2000년 12월 24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달성 |
종교 | 불교 |
직업 | 시인 |
학력 및 경력 | |
학력 | 중앙불교전문학교 중퇴 |
경력 | 경기대학교 대학원 교수 신민당 당무위원 |
가족 | |
배우자 | 방옥숙 |
자녀 | 2남 5녀 |
형제 | 서정태(아우) |
친척 | 김관식(아랫동서) 방옥례(처제) |
작품 활동 | |
데뷔 작품 | 「벽」 |
주요 작품 | 「겨울날」 「국화 옆에서」 |
활동 기간 | 1936년~1998년 9월 |
기타 | |
웹사이트 | 한국문학번역원 |
2. 생애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나 전라북도 부안에서 성장했다. 호는 미당(未堂)이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으며, 같은 해 김광균, 김동리, 오장환 등과 함께 문예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행위에 가담하여 태평양 전쟁 등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해방 후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여러 친일 관련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22][16]
광복 후에는 좌익 문학에 반대하며 순수 문학을 주장했고, 우익 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대립하였다. 이후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학교 등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하며(1959년~1979년)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 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일제강점기의 친일 행적과 해방 이후 군부 독재 정권 하에서의 처신 등으로 인해 문학적 성취와는 별개로 역사적 평가에서는 논란이 많다.
2000년 12월 24일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현재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군에는 미당문학관이 있으며, 그가 오랫동안 거주했던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자택(봉산산방)도 보존되어 있다. 고창군과 관악구는 서정주 시인의 인연을 계기로 자매결연을 맺었다.[23][24]
2. 1. 유년 시절 및 교육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으며,[3][4] 전라북도 부안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호남 지역의 대지주였던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는데, 서정주 본인은 훗날 시 <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이 사실에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1924년까지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초등 교육을 마쳤고,[3][4]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여러 전래 이야기는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3][4] 14세 무렵 서울로 올라와 중앙보통학교에 다녔다.
1933년 겨울에는 서울 개운사 대원암으로 들어가 승려이자 학자였던 박한영 스님 밑에서 잠시 수학했다. 이후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학생 시위에 연루되어 중퇴하였다.[5]
2. 2. 문단 데뷔 및 활동
1936년 경성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36년에 김광균, 김동리, 오장환 등과 함께 잡지 《시인부락》을 창간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그러나 일제강점기 전시 체제 아래에서는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로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 말기에는 태평양 전쟁과 가미카제 특공대 등을 찬양하며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을 다수 발표하는 등 노골적인 친일 행위를 하였다. 훗날 이러한 행적이 비판받자, 서정주 본인은 이를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라 자칭하며 일본에 협력했지만 대가를 받지는 않았다는 식으로 변명하거나[20], 자서전에서는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 줄 몰랐다”는 변명을 하기도 했다.[21]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22][16]
광복 후에는 당시 문단을 주도하던 좌익 계열의 문학 흐름에 반대하며 순수 문학을 내세워 우익 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대립하였다. 이후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학교 등에서 오랫동안(1959년~1979년)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여러 문학 단체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한국 문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친일 행적뿐만 아니라, 군부 독재와 유신 독재 치하에서의 처신 등으로 인해 그의 문학적 성과와는 별개로 역사적 평가에서는 매우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2. 3. 친일 행적 및 논란
일제강점기 말 전시 체제 하에서 서정주는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다쓰시로 시즈오일본어)로 창씨개명하였다. 이 시기 그는 태평양 전쟁과 카미카제 등을 찬양하고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노골적인 친일 행위를 담은 시와 글을 다수 발표했다.[15]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그는 해방 이후 지속적인 비판에 직면했다.훗날 친일 행위가 비판받자, 서정주는 처음에는 자신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였다며 일본에 협력했지만 대가는 받지 않았다는 식으로 해명하다가[20], 나중에는 자서전에서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 줄 몰랐다”라고 변명하여 더 큰 논란을 일으켰다.[21]
이러한 과거 행적으로 인해 서정주는 여러 친일 관련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이름이 올랐다. 또한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포함되었으며, 당시 총 11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다.[2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16] 이러한 평가에 따라 2019년 춘천시에 설치되었던 그의 시비가 철거되어 땅에 묻히기도 했다.[17]
서정주는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독재 정권을 옹호하는 행보를 보여 비판을 받았다. 특히 1980년대 초,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으며, 전두환의 56회 생일을 맞아 다음과 같은 노골적인 찬양시를 헌정하기도 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이러한 친일 행적과 독재 정권에 대한 찬양은 서정주의 문학적 성과와는 별개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크게 엇갈리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2. 4. 사망
2000년 10월 부인이 사망한 이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으며, 2000년 12월 24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부인 | 방옥숙(方玉淑) | 1919년 ~ 2000년 10월 10일 | |
동생 | 서정태(徐廷泰) | 1923년 ~ 2020년 3월 11일 | 아호: 우하(又下) |
처제 | 방옥례(方玉禮) | 김관식의 부인 | |
처제의 남편 | 김관식(金冠植) | 1934년 5월 10일 ~ 1970년 8월 30일 | 시인, 번역문학가 |
4. 작품 세계
서정주의 초기 시는 보들레르 등 외국 문학의 영향을 받아 모더니즘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7] 1941년 발간된 첫 시집 《화사집》은 토착적인 배경 속에서 인간의 원죄 의식과 원초적인 생명력, 민속 신앙 등을 강렬하게 탐구했다.[6][7] 시 「자화상」은 일제강점기 젊은 지식인의 고뇌를 담고 있으며, 김동리, 함형수와 함께 문예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6]
그러나 1942년부터 1944년까지는 達城靜雄|다쓰시로 시즈오일본어라는 일본식 필명을 사용하며 매일신보 등에 친일적인 작품을 발표하는 행적을 보였다.[6]
광복 이후 그의 시 세계는 변화를 맞이한다. 초기 시의 특징이었던 서구적인 원죄 의식 등은 점차 동양 철학, 특히 불교 사상에 기반한 영원한 삶에 대한 탐구로 나아갔다.[7] 시집 《귀촉도》(1948)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불교적 사유와 고전적 정서로의 회귀를 나타낸다.[7] 이후 발간된 『서정주 시집』(1956) 등에서는 자연과의 화해, 예술적 성숙 등을 보여주었다.[7]
후기로 갈수록 신라는 그의 시 세계에서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자 이상향으로 자리 잡았다. 시집 《신라초》(1961)와 《동천》(1969) 등에서는 신라를 배경으로 불교의 업(karma) 사상과 선불교 철학 등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8] 그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하고 한국문인협회 창립 멤버가 되었으며,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고 동국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시 창작을 강의하는 등[6] 한국 문단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큰 영향을 미쳤다.[7]
4. 1. 초기 작품 경향
서정주의 초기 작품은 보들레르 등 외국 문학의 영향을 받아 모더니즘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7] 그의 첫 시집인 《화사집》(1941)은 토착적인 배경 속에서 인간의 원죄 의식과 원초적인 생명력, 민속 신앙 등을 탐구했다.[7] 이 시집에는 보들레르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때로는 원시적이고 악마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7] 수록된 시 「자화상」은 일제강점기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젊은 시인의 고뇌를 담고 있다. 김동리, 함형수와 함께 문예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6]그러나 《화사집》 발간 이후인 1942년부터 1944년까지는 達城靜雄|다쓰시로 시즈오일본어라는 일본식 필명을 사용하며 매일신보 등에 친일적인 성격의 작품을 발표했다.[6]
광복 이후, 초기 시에서 나타났던 원죄나 예정설과 같은 서구적 관념은 점차 동양 철학, 특히 불교 사상에 기반한 영원한 삶에 대한 추구로 변화했다.[7] 1948년에 발표된 시집 《귀촉도》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며, 불교적 사유와 고전적인 정서로의 회귀를 나타낸다.[7] 1956년 발간된 《서정주 시집》에는 자연과 한국 고유의 정서인 한(恨) 사이의 화해를 모색하는 작품들과 함께, 시인의 예술적 성숙과 자기 인식을 보여주는 「학」이나 「기도」와 같은 시들이 포함되어 있다.[7] 이 시기의 작품들은 『1941-1960 초기 시편』(The Early Lyrics 1941-1960)으로 묶여 있으며, 한국 시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7]
4. 2. 신라와 불교의 영향
광복 이후 서정주의 시 세계는 초기 시를 특징짓던 원죄 의식과 예정설 개념에서 벗어나 동양 철학, 특히 불교 사상에 기반한 영원한 삶에 대한 추구로 변화하였다.[7] 1948년에 발표된 시집 『귀촉도』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불교 사상과 고전적인 정서로의 회귀를 나타낸다.[7]이후 서정주는 1961년 시집 『신라초』를 통해 새로운 예술적 경지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8] 그는 고대 국가 신라를 오랫동안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는데, 이때 신라는 역사적 실체라기보다는 자연과 인간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이상향이자 상상 속의 고향으로 그려졌다. 불교 사상에 깊이 뿌리내린 이 시집은 업(karma)의 개념과 선불교 철학을 탐구한다.[8] 1968년에 출판된 시집 『동천』 역시 불교적 상징과 세계관에 대한 깊은 관심을 이어가는 작품이다.[8] 이러한 경향은 그가 동국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시 창작 강의를 한 경험과도 연관 지어 이해할 수 있다.[6]
4. 3. 언어적 특징
미당의 시 언어는 그의 고향인 전라도의 사투리를 시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민족어의 가능성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6]5. 주요 작품
서정주의 초기 작품은 보들레르 등 외국 문학의 영향을 받아 모더니즘적이면서도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7] 그의 첫 시집인 《화사집》(1941)은 인간의 원죄 의식과 토착적인 생명력, 민속 신앙 등을 탐구했으며, 원시적이고 강렬한 분위기를 풍긴다.[7] 이 시집에 실린 「자화상」은 일제강점기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젊은 시인의 고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서정주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다쓰시로 시즈오일본어)라는 일본식 필명으로 《매일신보》 등에 여러 편의 친일적인 문학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서정주의 시 세계는 변화를 보인다. 초기 시의 특징이었던 원죄 의식 등은 점차 동양 철학, 특히 불교 사상에 기반한 영원한 삶에 대한 탐구로 나아갔다.[7] 두 번째 시집 《귀촉도》(1948)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며, 불교적 사유와 고전적인 정서로의 회귀를 나타낸다.[7] 1956년에 나온 《서정주 시집》(《시선》의 다른 제목으로 추정됨)에는 자연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작품들과 함께 「학」, 「기도」처럼 시인의 예술적 성숙과 자기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이 포함되어 있다.[7]
《신라초》(1961)는 서정주 시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신라를 단순한 역사적 공간이 아닌,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향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이 시집은 불교의 업(Karma) 사상과 선불교(Zen Buddhism) 철학을 깊이 있게 반영한다.[8] 이후 발표된 《동천》(1968) 역시 불교적 상징과 세계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준다.[8] 《질마재 신화》(1975)는 토속적인 설화와 전설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정서를 탐구한 시집이다. 같은 해 《국화 옆에서》라는 제목의 시집도 출간되었다.
만년에는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을 발표했으며, 한용운의 한시를 번역한 《만해한용운한시선역》(1983)을 출간하기도 했다.
'''주요 시집'''
- 《화사집》 (1941)[19]
- 《귀촉도》 (1948)
- 《시선》 (1955)
- 《신라초》 (1961)
- 《동천》 (1968)
- 《질마재 신화》 (1975)
- 《국화 옆에서》 (1975)
- 《늙은 떠돌이의 시》 (1993)
'''번역 시집'''
- 《만해한용운한시선역》 (1983)
6. 평가 및 유산
서정주는 현대 한국 시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번역가 안토니 형제는 그를 현대 한국 시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보았으며,[9] 그의 작품은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2007년 한국시인협회는 그를 대표적인 현대 한국 시인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10] 그의 문학적 유산을 기리기 위해 고향 고창군에는 미당문학관이 건립되었고,[11] 매년 미당문학상이 수여되고 있다. 2016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발표 시를 포함한 전집 재출간이 계획되기도 했다.
6. 1. 긍정적 평가
번역가 안토니 형제는 서정주를 현대 한국 시의 창시자로 평가했으며, 그의 작품은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해외에도 소개되었다.[9] 2007년 한국시인협회는 그를 현대 한국 시인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10]서정주 시인의 고향이자 마지막 안식처인 곳에는 그의 사후 다음 해에 미당문학관이 개관되었다.[11] 또한 그의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인 국화옆에서한국어를 기리기 위해 매년 국화가 피는 가을철에 미당문학상이 수여되고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데이비드 R. 맥캔(David R. McCann) 번역.[12]
시의 소재인 국화는 늦가을에 피어나 첫서리와 연관되는데, 이는 시의 마지막 구절과 이어진다. 이 시는 1948년에 처음 발표되었으며, 1962년 한국 작곡가 황병기에 의해 가곡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13]
6. 2. 부정적 평가
일제강점기 전시 체제 하에서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로 창씨개명을 하고, 태평양 전쟁과 가미카제 특공대 등을 찬양하며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을 다수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였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서정주 본인은 해방 이후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 줄 몰랐다"고 변명하기도 했다.[21]이러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또한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이름이 올랐으며, 당시 총 11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다.[2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 정권에 부역하고 찬양하는 행보를 보였다. 특히 1980년대 초,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으며, 1987년에는 전두환의 56회 생일을 맞아 다음과 같은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라는 제목의 노골적인 찬양시를 헌정하기도 했다.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의 친일 행위와 군부 독재 정권 찬양 등으로 인해 시인으로서의 문학적 명성과는 별개로 역사적 평가에서는 심각한 비판을 받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인정됨에 따라,[16] 2019년 강원도 춘천시에 설치되어 있던 그의 시비(詩碑)가 시민단체의 요구로 철거되어 땅에 묻히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17]
6. 3. 기념 사업
서정주의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군에는 그의 사후 다음 해에 미당문학관이 개관되어 운영 중이다.[11] 미당문학관에서는 매년 국화철에 그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를 기리는 미당문학상을 수여한다. 또한 서울특별시 관악구에는 그가 살았던 집이 있다. 서정주와의 인연을 계기로 고창군과 관악구는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23][24]7. 기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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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 Je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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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st popular poet passed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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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ang Literary House and Events for the 100th Anniversary of Seo Jeong-ju’s 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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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Finding Seo Jeong-ju in Go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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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徐廷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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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市、親日を理由に徐廷柱と崔南善の詩碑を撤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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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년 12월6일 이완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 명단 확정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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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市、親日を理由に徐廷柱と崔南善の詩碑を撤去
朝鮮日報日本語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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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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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0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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