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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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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훈은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 번역가, 교육자이다. 1920년 경상북도 영양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39년 《문장》지에 시 〈고풍의상〉과 〈승무〉를 추천받아 등단했다.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 동국대학교 강사,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1961년 국제 시인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했다. 청록파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자연, 무속, 선을 소재로 한 민족적 색채가 짙은 시를 주로 썼으며, 시집 《청록집》, 《조지훈 시선》, 수필집 《창에 기대어》, 논문집 《한국 민족운동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1956년 자유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8년 고혈압과 기관지확장증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조태열은 외교관이자 전 UN 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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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지훈 시비
본명조동탁
필명지훈(芝薰)
출생일1920년 12월 3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영양
사망일1968년 5월 17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언어한국어
직업시인
국문학자
문학평론가
수필가
번역문학가
사회운동가
대학 교수
종교유교(성리학)
배우자김난희(아명: 김위남)
자녀슬하 3남 1녀, 셋째아들 조태열
부모조헌영(부), 전주 이씨 부인(모)
형제조동진(형)
친척조승기(증조할아버지)
활동 기간1939년 ~ 1968년
학력경성 혜화전문학교 전문학사
로마자 표기Jo Jihun
일본어 표기チョ・ジフン
경력
소속고려대학교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작품 활동
장르시문학, 수필, 평론, 번역
기타 정보
관련 인물한양 조씨
공식 웹사이트지훈문학관

2. 생애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다.[2] 1920년 12월 3일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태어났다.[2]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치고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1941년 졸업했다.[10][1]

1939년 문학잡지 《문장》에 시 〈고풍의상〉과 〈승무〉가 정지용에 의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11] 그는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했으며, 1946년 3인 공동 시집 《청록집》을 발간했다. 조지훈의 시는 자연, 무속, 선 등을 소재로 하여 민족적 색채가 짙다는 평가를 받으며, 불교 세계에 대한 관심이 작품에 반영되었다. 다른 청록파 시인들과 달리 초기 시 세계의 특징을 비교적 오래 유지하였다.

광복 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19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1] 1961년에는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했으며,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여 민족 문화 연구와 정리에 힘썼다. 1956년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활발한 문학 및 학술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68년 5월 고혈압으로 쓰러져 입원했으나, 5월 17일 고혈압기관지확장증합병증으로 4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1]

주요 저서로는 시집 《청록집》(공저), 《조지훈 시선》, 수필집 《창에 기대어》, 논문집 《한국 민족운동사》 등이 있다. 아버지는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이며,[6]조동진 역시 시인이다. 삼남은 외교관인 조태열이다.[7]

2. 1. 유년 시절 및 교육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다. 1920년 12월 3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 202번지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훗날 제헌국회 의원과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趙憲泳)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였다.[6]조동진(趙東振) 또한 시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17세까지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영양보통학교는 3년만 다니고 중퇴했다. 당시 신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에 유학하거나 근대 교육 기관에 다니던 다른 문사들과 달리, 조지훈은 전통적인 한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는 그의 시 세계에 조선적인 정서를 풍부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신문학 잡지 등을 읽으며 당시 유행하던 프로레타리아 문학에 관심을 보여, 8세(1928년)에는 프로레타리아 사상을 담은 동요를 짓기도 했다.

보통학교 중퇴 후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쳤다. 1936년, 서울로 올라와 오일도(吳一島)가 운영하던 시원사(詩苑社)에 드나들며 시문학파(詩文學派)의 영향을 받아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Baudelaire, Достоевский, Flaubert, Wilde 등의 서양 문학에 깊이 빠져들었고, 민족 문화에 대한 학술서를 읽기 시작했다.

1939년, 아버지가 서울 명륜동으로 이사하자 함께 살게 되었고, 같은 해 혜화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2. 2. 문단 등단 및 청록파 활동

1939년 혜화전문학교 문과 재학 중 문학잡지 《문장》 4월호에 시 〈고풍의상〉이 추천 게재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같은 해 《문장》지에 〈승무〉 등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의 초기 시 〈승무〉는 한국 전통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3]

춤의 시작, 스님이 제단에 절을 한다




얇은 사(紗)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4]



승무의 기원은 불교 전래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천지 조화라는 한국 전통 철학을 표현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속세의 번뇌를 가진 여승의 내면 갈등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슬픔을 표현하는 춤으로 해석되며, 조지훈 시인 역시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무용가 한영숙은 조지훈이 자신의 승무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한 후 이 시의 영감을 얻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5]

1940년에는 동인지 『백지』를 발간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동인들이 검거되면서 3호까지만 발간되고 폐간되는 아픔을 겪었다. 같은 해 선성 김씨 김란희와 결혼했다. 1941년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의 외전 강사로 활동하며 선(禪)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건강이 나빠져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942년 3월에는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원으로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학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1943년 가을, 고향인 경상북도 영양군으로 돌아가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머물렀다. 이 시기 동안 청년회를 조직하여 한글을 가르치는 등 민족 교육에 힘썼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조선문화건설협회 회원, 명륜전문학교 강사, 한글학회 교본 편찬원,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원 등으로 활동했다. 1946년에는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 청년문학협회 고전문학부장을 맡았다. 같은 해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3인 시집 『청록집』을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하면서 세 사람은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시집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자연을 바탕으로 인간의 순수성과 이상 세계를 노래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2. 3. 교육 및 학술 활동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쳤다. 경성 혜화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였다.[10] 졸업 후 1941년에는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잠시 강사로 활동했으며, 1942년 3월에는 조선어학회에서 「대사전」 편찬원으로 일했다.

1945년 9월, 해방을 맞아 서울로 돌아온 후 조선문화건설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명륜전문학교 강사, 한글학회 교본 편찬원, 진단학회 국사 교본 편찬원으로 참여하며 교육 및 학술 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에는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으며, 1947년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같은 해 10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이후 약 20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교수 재직 중에도 활발한 학술 활동을 이어갔다. 1961년 9월에는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하여 국제적으로 한국 문학을 알렸다. 1963년에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여 민족 문화 연구와 정리에 주력했다. 특히 『한국문화사대계』 간행을 기획하고 편찬 작업을 주도했으며, 그 첫 결과물로 『한국 민족운동사』를 직접 집필하여 간행했다. 또한 1964년에는 동국대학교 동국역경원 위원으로, 1966년에는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학 연구와 발전에 기여했다.

2. 4. 사회 참여 및 정치 활동

1946년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과 청년문학협회 고전문학부장을 맡으며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1947년 2월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결성에 중앙상임위원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전국문화단체창립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49년에는 한국문학가협회 창립에 참여하고 중앙상임위원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1950년 7월 문총구국대 기획위원 위원장을 맡았고, 1951년에는 종군문인단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1959년에는 이승만 정부 말기,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중앙위원과 공명선거추진전국위원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노력에 동참했다. 1960년에는 4.19 혁명 이후 결성된 한국교수협회의 중앙위원을 지냈다.

1961년 9월에는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시인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국제적인 문화 교류에도 힘썼다. 이후 1964년 동국대학교 동국역경원 위원, 1966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며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1967년에는 한국시인협회 회장과 한국신시60년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한국 문학계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2. 5. 타계 및 추모

1968년 5월,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하였다.[1] 같은 해 5월 17일 오전 5시 40분, 고혈압기관지확장증합병증으로 메디컬센터에서 4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1]

사후 서울특별시 남산에 추모비가 세워졌으며,[1]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에 있는 그의 생가는 보존되고 있다.[1] 1982년에는 금관문화훈장(1등급)이 추서되었다.

3. 작품 세계

조지훈의 시는 한국 고유의 정서와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민족의 역사와 현실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초기에는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 활동을 하며 청록집을 통해 자연과 고전적인 세계를 노래했으며, 한국 전통과 민족의식에 대한 서정적 탐구를 담았다. 대표작 「봉황수」는 이러한 초기 시 세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역사적 비애와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고뇌를 함께 담고 있다.[1]

해방 이후에는 현실 참여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여, 시가 개인의 자유와 인간 본성 해방에 기여해야 한다는 신념을 작품에 반영했다. 시집 『역사 앞에서』 등을 통해 분단과 전쟁의 비극, 당시의 정치·사회적 혼란상을 비판적인 역사의식으로 그려냈다. 특히 전쟁의 참상을 다룬 「다부원에서」는 이러한 시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1]

3. 1. 주요 특징

조지훈의 시는 한국적인 고전적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독자에게 평화와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그의 초기 시들은 한국 전통과 민족의식의 서정적 표현을 담고 있으며,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를 결성하여 공동 시집 청록집을 발간하기도 했다.[1] 특히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승무〉에는 한국 전통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3]

〈승무〉는 얇은 비단(紗) 고깔을 쓴 여승의 춤사위를 섬세한 언어로 묘사하며, 속세의 번뇌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려는 내면의 갈등과 고뇌를 불교적 세계관 속에서 그리고 있다. 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얇은 사(紗)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4]



승무의 기원은 불교 전래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천지 조화라는 한국 전통 철학을 표현한다는 해석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번뇌에 찬 여승의 내면 갈등이나 속세를 떠난 여인의 슬픔을 표현하는 춤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인 자신도 이러한 해석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무용가 한영숙은 조지훈이 자신의 승무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한 후 이 시의 영감을 얻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5]

해방 직후 조지훈은 시가 개인의 자유 수호와 인간 본성 해방을 추구해야 하며, 이러한 문학적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생각은 민족주의적 열정과 결합되어 시집 『역사 앞에서』와 같은 작품에서 애국적인 목소리로 나타났다. 이 시집에서 그는 한국 전쟁 전후의 국가 분단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나타난 정치 부패와 사회적 불합리를 명료한 역사의식으로 비판했다. 특히 「다부원에서」는 다부동 전투를 배경으로 시인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전쟁의 비극적 상황을 날카롭게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1]

또한 「봉황수」에서는 과거 조선 왕조 궁궐 건축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몰락한 왕조의 모습과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의 무력감을 대비시키며 역사의 비극과 피지배 계층의 고통을 드러내기도 했다.[1] 이처럼 조지훈은 초기 순수 서정시에서 출발하여 점차 현실 문제와 역사 의식을 시에 담아내며 한국 현대 시문학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3. 2. 청록파 시인으로서의 위상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공동 시집 청록집을 발간했다.[1] 한국문학번역원은 조지훈의 시가 "한국적인 고전적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독자에게 평화와 평온함을 불러일으킨다"고 평가하며, 그의 초기 시들이 한국 전통과 민족의식의 서정적 표현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1] 대표적인 예로 「봉황수」는 궁궐 건축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동시에 조선 시대의 권력자들과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을 대비시켜 피지배 계층의 고통과 비극적인 감정을 드러낸 작품이다.[1]

조지훈의 초기 시 중 하나인 〈승무〉에는 한국 전통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이 잘 나타나 있다.[3]

승무의 기원은 불교가 한국에 전래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천지의 조화라는 한국 전통적인 철학을 표현한다.[5]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종교적 믿음을 저버린 여승의 내면적 갈등이나, 과거의 열정적인 삶을 뒤로한 아름다운 여인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시인 또한 이를 언급하고 있다.[5] 무용가 한영숙은 조지훈이 자신의 승무 공연을 여러 번 본 후 영감을 받아 이 시를 썼다고 주장하기도 했다.[5]

해방 직후 조지훈은 순수한 시적 미학을 지켜야만 시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개인의 자유 수호와 인간 본성 해방에 대한 추구가 시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1] 이러한 문학적 순수성과 민족주의적 열정은 그의 시집 『역사 앞에서』에서 애국적인 목소리로 선포된다.[1] 이 작품집에서 그는 당시의 국가 분단과 내분으로 인한 정치 부패와 사회적 불합리를 명료한 역사의식으로 비판했다.[1] 특히 한국 전쟁 중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다부원에서」는 내전의 비극적인 상황을 날카롭게 묘사한 최고의 전쟁 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

3. 3. 시론 및 평론

조지훈의 작품 세계와 문학관에 대해 한국문학번역원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 한국적인 고전적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독자에게 평화와 평온함을 불러일으킨다. 「봉황수」는 궁궐 건축의 아름다움을 날카롭게 묘사하는 동시에 조선시대의 권력자들과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을 대비시켜 피지배 계층의 고통과 비극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조지훈의 초기 시들은 한국 전통과 민족의식의 서정적 표현을 담고 있으며,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공동으로 발표한 『청록집』에 수록되어 있다.[1]

: 해방 직후 조지훈은 순수한 시적 미학을 지켜야만 시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개인의 자유 수호와 인간 본성 해방에 대한 추구가 시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학적 순수성과 민족주의적 열정은 그의 시집 『역사 앞에서』에서 애국적인 목소리로 선포된다. 이 작품은 당시의 국가 분단과 내분으로 인한 정치 부패와 사회적 불합리를 명료한 역사의식으로 비판한다. 특히 「다부원에서」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내분의 비극적인 상황을 날카롭게 묘사한 최고의 전쟁 시 중 하나이다.[1]

3. 4. 번역 및 연구

조지훈은 한학에도 능통하여 중국 고전 번역에도 힘썼다. 1959년에는 《채근담》을 번역하여 한문 고전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또한 한국학 연구에도 매진하여 여러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신라국호연구논고》(1955), 《한국문화사 서설》(1964), 《한국민족운동사》(1964), 《신라가요연구논고》(1964), 《수투전고》(1966) 등이 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4. 가족 관계


  • 할아버지 : 조인석(趙寅錫)
  • 아버지 : 조헌영(趙憲泳) - 초대, 제2대 국회의원
  • 어머니 : 전주 이씨
  • 형 : 조동진(趙東振) - 시인
  • 아내 : 김위남(金渭男)[12] (김난희(金蘭姬)로 개명)
  • * 장남 : 조광렬(趙光烈)
  • ** 며느리 : 고부숙(高富淑)
  • * 차남 : 조학렬(趙學烈)
  • ** 며느리 : 이명선(李明善)
  • * 장녀 : 조혜경(趙惠璟)
  • ** 사위 : 김승교(金承敎)
  • * 삼남 : 조태열(趙兌烈) - 외교공무원, 스페인 주재 대한민국 대사 역임, 현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
  • ** 며느리 : 김혜경(金惠卿)
  • 이종사촌 사위: 박준규(朴俊圭) - 전 국회의장

5. 수상

6. 저서

조지훈은 시뿐만 아니라 수필, 논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펼쳤다.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낸 《청록집》(1946)과 《조지훈 시선》(1956) 등이 있으며, 그의 시 세계를 잘 보여준다. 수필집으로는 《창에 기대어》(1958)가 있으며,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반영한 논문집 《한국 민족운동사》(1964)도 남겼다.[10][11] 그의 저작 활동은 시, 수필, 학술 연구 등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6. 1. 시집

wikitext

연도시집 제목출판사비고
1946년《청록집》을유문화사박목월, 박두진 공저
1952년《풀잎단장》
1956년《조지훈시선》정음사
1959년《역사 앞에서》신구문화사
1964년《여운》
연도 미상《적과 형제》한국전쟁 시선집


6. 2. 시론

조지훈은 1953년 저서 《시의 원리》를 통해 자신의 시에 대한 이론을 펼쳤다.

6. 3. 수상 및 평론집

조지훈이 발표한 주요 평론집은 다음과 같다.

연도제목
1958《창에 기대어》
1959《시와 인생》
1962《지조론》
1964《돌의 미학》


6. 4. 번역서

6. 5. 논문


  • 《신라국호연구논고》, 1955
  • 《한국문화사 서설》, 1964
  • 《한국민족운동사》, 1964
  • 《신라가요연구논고》, 1964
  • 《수투전고》, 1966

참조

[1] 웹사이트 Author Database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s://web.archive.[...] 2013-09-03
[2] 웹사이트 Naver Search http://people.search[...] Naver 2013-12-08
[3] Youtube https://www.youtube.[...]
[4] 서적 Modern Korean Poetry https://books.google[...] 1994
[5] 서적 Moving History/Dancing Cultures https://books.google[...] Wesleyan University 2001
[6]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rokps.or.kr/[...] 2023-07-28
[7] 웹사이트 탄생 100주년 ‘승무’ ‘낙화’의 시인 조지훈 http://monthly.chosu[...] 2020-06-02
[8] 웹사이트 박준규 국회의장 재치있는 8선…정치감각 탁월 https://www.mk.co.kr[...] 1992-06-29
[9] 웹인용 지훈문학관 http://www.yyg.go.kr[...] 2018-01-17
[10] 기타 당시 혜화전문학교
[11] 간행물 승무 https://terms.naver.[...] 한국학중앙연구원
[12] 웹인용 조지훈 전집 저자소개 https://web.archive.[...] 201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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