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데이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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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데이란치는 포르투갈어 'bandeira'(깃발)에서 유래된 용어로, 브라질 내륙을 탐험하고 지도 제작, 원주민 노예 사냥, 광물 자원 탐사 등을 수행한 탐험대를 지칭한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분할된 브라질 내륙을 탐험하며 포르투갈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으나, 원주민을 노예로 삼고 예수회 선교지를 공격하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 브라질 독립 운동의 상징이 되었으나, 21세기에는 원주민 노예화 미화 논란으로 기념 중단 요구와 조각상 훼손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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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데이란치 | |
---|---|
개요 | |
명칭 | 반데이란치스 |
다른 이름 | 기치 운반자 |
활동 시기 | 15세기–18세기 |
상세 정보 | |
참가자 | 상파울루 주민 반데이란치스 |
위치 | 브라질 식민지 |
결과 | 반데이란치스는 브라질 식민지의 지도화되지 않은 지역을 탐험하고, 인디오들을 포획하여 노예화함. 토르데시야스 조약선을 넘어 브라질 영토를 확장함. |
2. 명칭
"반데이란치"라는 용어는 포르투갈어 ''bandeira'' (깃발)에서 유래되었으며, 군인 집단, 파견된 군 부대 또는 습격대를 의미한다. 중세 포르투갈에서 ''bandeira''는 36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군부대였다.[4] 반데이란치 자신들은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출입"(entrada), 여정, 항해, 회사, 발견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했고, "함대" 또는 "전쟁"은 드물게 사용했다. 한 작가는 ''bandeira''는 1635년부터, ''bandeirante''는 1740년부터 사용되었다고 본다.[4]
반데이란치스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내륙 탐험과 개척을 주도한 탐험대였다. 이들은 사탕수수 농장 개척, 광물 자원 확보, 노예 무역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동했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현재 반데이란치라는 이름은 대도시 상파울루에서 내륙 탐험대와 같은 루트인 북서부 내륙(캄피나스 방면)으로 통하는 고속도로 "반데란치스 고속도로"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도 "Rua" 등 각지의 도로 명칭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3. 역사적 배경
3. 1. 초기 브라질 식민지와 파울리스타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1494년 남아메리카 대륙은 포르투갈 제국과 스페인 제국 사이에서 경선을 따라 포르투갈령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370 리그 떨어진 지점을 기준으로 분할되었다.[5] 많은 반데이란치들은 물라토였으며, 상파울루의 포르투갈 정착지 출신으로 브라질 내륙을 지도 제작하고 탐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6] 포르투갈은 브라질 내륙을 탐험하면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그어진 선을 넘어 현재의 브라질 영토를 포함하는 땅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데이란치는 대개 50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렀으며, 부유한 엘리트층의 후원을 받았다. 브라질 내륙으로의 많은 원정대는 교역소를 설치하고 정착지를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했다.
반데이란치가 있기 전에는 파울리스타스가 있었다. 브라질은 원래 산과 바다 사이의 해안 지역으로 노예 노동 설탕 농장이 지배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이 산을 넘어 상파울루 고원으로 진입했을 때, 그들은 바다와 단절되었고, 북쪽과 서쪽의 광대한 황무지에서 행운을 찾거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해안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사용했고, 파울리스타스는 인디언 노예나 노동자를 사용했으며, 많은 파울리스타스들은 혼혈 인디언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상파울루를 본거지로 삼아 내륙 개발과 개척을 목적으로 탐험대가 편성되었다. 남아메리카와 남반구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된 "상파울루"는, 남대서양에 면한 "산토스 항"(현 도시: 산토스)에서 내륙 (북쪽)으로 약 60km 지점에 위치하며, 당시 내륙 개척의 거점 (경유지)으로서 발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3. 2. 반데이란치스의 등장과 활동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남아메리카 대륙은 포르투갈 제국과 스페인 제국이 경선을 기준으로 포르투갈령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370 리그 떨어진 지점을 분할하였다.[5] 반데이란치스는 대부분 물라토였으며, 상파울루의 포르투갈 정착지 출신으로 브라질 내륙을 지도 제작 및 탐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6] 포르투갈은 이들의 브라질 내륙 탐험을 통해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정해진 선을 넘어 현재의 브라질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반데이란치는 대개 50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렀으며, 부유한 엘리트층의 후원을 받아 교역소를 설치하고 정착지를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했다.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상파울루는 내륙 개발과 개척을 위한 탐험대의 본거지였다. 남아메리카와 남반구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된 "상파울루"는, 남대서양에 면한 "산토스 항" (현 도시: 산토스)에서 내륙 (북쪽)으로 약 60km 지점에 위치하며, 당시 내륙 개척의 거점 (경유지)으로서 발전했다.
반데이란치스는 사탕수수 농장 개척, 노동자 (노예 포함) 이주, 금, 은, 구리, 철 등의 광맥 광산 발견 및 자원 획득 등 남아메리카 개척에 크게 공헌했다. 또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정해진 포르투갈의 영역을 넘어 개척을 진행하여 현재 브라질 영토 형성에 기여했다.
하지만 반데이란치스의 진출 과정에서 과라니족 등 원주민 마을이 파괴되고 주민들이 노예가 되는 피해가 발생했으며, 그 중에는 가톨릭 선교사가 만든 선교촌도 포함되었다.
4. 원주민과의 관계
반데이란치는 원주민을 포획하여 노예로 삼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마을을 기습하거나 예수회 보호구역의 예수회 신부로 위장하여 원주민을 유인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당시 예수회는 원주민을 비교적 공정하게 대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반데이란치는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원주민을 속이기도 했다. 원주민을 유인한 후에는 정착지를 포위하고 불을 질러 밖으로 나오게 했다.
반데이란치는 지역 부족과 협력하여 다른 부족을 공격하게 한 후, 양측 모두를 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당시 수입된 아프리카 노예는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반데이란치는 원주민 노예를 팔아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4. 1. 노예 사냥과 예수회와의 갈등
반데이란치의 주요 목표는 원주민을 포획하여 노예로 삼는 것이었다. 이들은 기습 공격으로 마을을 습격하거나, 예수회 신부로 위장하여 원주민을 유인하는 등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다.[7] 당시 예수회는 예수회 보호구역에서 원주민을 비교적 공정하게 대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반데이란치는 원주민을 유인한 후, 정착지를 포위하고 불을 질러 밖으로 나오게 했다. 당시 수입된 아프리카 노예는 비쌌기 때문에, 반데이란치는 원주민 노예를 팔아 큰 이익을 얻었다. 또한, 지역 부족과 협력하여 다른 부족을 공격하게 한 후, 양측 모두를 노예로 팔기도 했다.
17세기에 예수회 선교지는 반데이란치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되었다. 1628년 안토니오 라포소 타바레스는 파라나강 상류의 21개 예수회 마을을 습격하여 약 2,500명의 원주민을 포획했다. 1636년, 타바레스는 2,000명의 동맹 인디언, 900명의 마멜루코, 69명의 백인으로 구성된 반데이라를 이끌고 구아이라의 예수회 선교지를 파괴하고 6만 명 이상의 원주민을 노예로 만들었다. 1648년부터 1652년까지 타바레스는 상파울루에서 아마존강 하구까지 10,000km 이상을 탐험하기도 했다.

반데이란치와 예수회는 원주민 처우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예수회는 원주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지만, 반데이란치는 원주민을 노예로 팔아넘기려 했다. 예수회 지도자 안토니오 루이스 데 몬토야 신부는 12,000명의 원주민을 아르헨티나로 안전하게 이끌려고 했다.[7] 반데이란치와 예수회의 갈등은 디에고 알파로의 죽음으로 절정에 달했고, 제로니모 페드로소 데 바로스와 마누엘 피레스가 예수회 캠프를 공격했다. 페드로 로메로 신부가 이끄는 예수회는 공격을 격퇴하고 승리했다. 마드리드 조약 (1750년)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미시오네스 오리엔탈레스 예수회 선교지를 해체하기로 합의했고, 예수회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과라니 전쟁에서 패배했다.[8] 호세 호아킨 데 비아나는 과라니족 지도자 세페 티아라주를 격파하고 예수회 선교 캠프를 파괴했다. 1759년 포르투갈이 예수회를 추방하면서 예수회와 반데이란치의 관계는 종식되었다.
4. 2. 페르나웅 디아스 파이스 레미

페르나웅 디아스는 1608년 상파울루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핀헤이루스에서 농부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26년 소득 조사관이 되었으며,[9] 1638년 안토니우 라포수 타바레스와 함께 현재 파라나, 산타 카타리나, 히우그란지두술 지역으로의 탐험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탐험을 경험했다. "에메랄드 사냥꾼"으로 불리게 된 그는 1644년에 직접 탐험을 떠났고, 1661년 탐험에서는 더 많은 원주민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아누마라나 산맥 남쪽의 과이아나스 왕국까지 탐험했다. 1665년 3개의 다른 부족에서 온 4천 명의 노예와 함께 돌아왔다. 1671년 탐험 중에 사바라부수에서 에메랄드를 발견하면서 "에메랄드 사냥꾼"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1681년 전기석을 발견하는 탐험 중에 질병으로 사망했다.
5. 광물 자원 탐사
1660년대 포르투갈 정부는 브라질 내륙에서 금과 은 매장지를 발견한 사람에게 보상을 제공했다. 이윤에 눈이 먼 반데이란치들은 원주민을 노예로 삼을 뿐만 아니라 광산을 찾고 정부의 보상을 받기 위해 브라질 깊숙한 곳으로 모험을 떠났다.[10] 원주민의 수가 줄어들면서 반데이란치들은 광물 탐사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반데이란치들의 이러한 탐험은 1690년대 브라질 골드 러시를 촉발했다.[10] 골드 러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 중 하나였으며,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금광을 생산했다. 반데이란치들이 미나스 제라이스 산맥에서 금을 발견하면서[11] 많은 브라질 북부 사람들이 금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반데이란치들은 사탕수수 농장 개척, 노동자(노예 포함) 이주, 금, 은, 구리, 철 등의 광맥 발견 및 자원 획득을 통해 당시 남아메리카 개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6. 브라질 역사에 끼친 영향
반데이란치는 광물 자원 발견과 브라질 중남부 영토 확장에 기여하여 18세기 포르투갈을 부유하게 만들었다.[12] 이들의 활동으로 상 비센테 캡틴시는 브라질 부왕령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는 현재 산타 카타리나 주, 파라나 주, 상파울루 주, 미나스 제라이스 주, 고이아스 주, 토칸칭스 주의 일부, 그리고 북부 및 남부 마투 그로수 주를 포함하는 광대한 영역이다.
반데이란치는 스페인 제국과 포르투갈 제국 간의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들은 스페인 또는 예수회와 동맹을 맺은 원주민들을 상대로 사실상 선전포고 없는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소수의 외딴 스페인 정착지만 남고 대부분의 예수회 선교지가 파괴되었다. 현재 브라질의 남동부, 남부, 중서부 지역 대부분에 대한 포르투갈의 실질적인 통제는 1750년 마드리드 조약과 1777년 산 일데폰소 조약을 통해 인정받았다. 1759년 포르투갈은 예수회를 공식적으로 추방하여 예수회의 반격 능력을 약화시켰다.[12]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상파울루는 내륙 개발과 개척을 위한 탐험대의 본거지였다. 남아메리카와 남반구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된 상파울루는 남대서양에 면한 산토스 항에서 내륙으로 약 60km 지점에 위치하며, 내륙 개척의 거점으로서 발전했다.
반데이란치는 사탕수수 농장 개척, 노동자(노예 포함) 이주, 금, 은, 구리, 철 등의 광맥 발견 및 자원 획득 등 남아메리카 개척에 크게 공헌했다. 또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정해진 포르투갈의 영역을 넘어 개척을 진행하여 현재 브라질 영토 형성에 기여했다.[13]
페드로 타케스 데 알메이다 파에스 레메p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12]
> 지리학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옛 상파울루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과학이었지만, 태양의 도움만을 받아 아메리카 대륙의 내부로 침투하여 부족들을 정복했다. 어떤 이들은 고이아스 주의 내륙으로, 아마존 강까지 갔고, 다른 이들은 파투스 강에서 라 플라타 강까지, 그리고 우루과이 강과 치바기 강까지 해안으로 갔으며, 파라과이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파라나 강까지 [...] 어떤 이들은 파라과이 강 너머 페루 왕국의 높은 산까지 광대한 내륙을 건너갔다. 상파울루인들은 적들과 자연과 싸워야 했다. 후자의 경우 날씨와 싸워야 했고, 전자의 경우 분노와 증오와 싸워야 했다. 식량 부족은 그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지만, 내륙의 열매를 먹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 야생 꿀, 야생 견과류, 달콤하고 쓴 야자수 싹, 그리고 식용 식물의 뿌리였다.
로버트 사우디영어는 1819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13]
> 그러나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거칠고, 그렇다, 통제할 수 없었지만, 토착 아메리카 혈통의 주입으로 인해 곧 행동과 성취가 끊임없이 증가할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파라과이의 스페인인들은 이랄라가 그들을 배치한 곳에 머물면서, 대부분 첫 번째 정복자들이 발견한 것을 무관심하게 대했지만, 브라질인들은 2세기 동안 이 나라를 계속 탐험했다. 이러한 결단력 있는 모험가들은 노예 사냥과 금과 은을 찾기 위해 야생에서 몇 달, 몇 달을 보냈고, 원주민 아메리카인에게서 배운 것을 지침으로 삼았다. 결국 그들은 자신과 브라간사 왕가를 위해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광산과 가장 큰 영토를 확보했다. 이 획득은 모든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었다.
6. 1. 영토 확장과 경제적 기여
반데이란치는 브라질 내륙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여 포르투갈의 권력 확장에 기여했다. 이들은 영토 탐험과 정착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포르투갈이 수익을 낼 수 없었던 광물 자원을 발견했다.[10] 1660년대, 포르투갈 정부는 브라질 내륙에서 금과 은 매장지를 발견한 사람에게 보상을 제공했고, 이윤에 눈이 먼 반데이란치들은 원주민을 노예로 삼는 동시에 광산을 찾아 정부의 보상을 받기 위해 브라질 깊숙한 곳으로 탐험을 떠났다. 원주민 수가 줄면서 반데이란치들은 광물 탐사에 더욱 집중했다.[11]이러한 탐험은 1690년대 브라질 골드 러시를 촉발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 중 하나였으며,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금광을 생산했다. 반데이란치들이 미나스 제라이스 산맥에서 금을 발견하면서, 많은 브라질 북부 사람들이 금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했다.
반데이란치는 광물 자원 발견에 기여했으며, 선교사들과 함께 브라질 중남부 영토 확장에 기여했다. 이러한 광물 자원은 18세기 포르투갈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반데이라의 결과로 상 비센테 캡틴시는 브라질 부왕령의 기초가 되었고, 이는 현재 산타 카타리나 주, 파라나 주, 상파울루 주, 미나스 제라이스 주, 고이아스 주, 토칸칭스 주의 일부, 그리고 북부 및 남부 마투 그로수 주를 포함하게 되었다.
또한 반데이란치는 스페인 제국과 포르투갈 제국 간의 불안정한 관계의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이들은 스페인 또는 예수회와 동맹을 맺은 원주민들을 상대로 사실상 선전포고 없는 전쟁을 수행했다. 소수의 외딴 스페인 정착지만 살아남고 대부분의 예수회 선교지가 무너진 상태에서, 현재 브라질의 남동부, 남부, 중서부 지역 대부분에 대한 포르투갈의 사실상 통제는 1750년 마드리드 조약과 1777년 산 일데폰소 조약을 통해 인정받았다. 또한, 포르투갈은 1759년에 예수회를 공식적으로 추방하여 예수회가 반격할 수 있는 능력을 더욱 감소시켰다.
페드로 타케스 데 알메이다 파에스 레메p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지리학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옛 상파울루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과학이었지만, 태양의 도움만을 받아 아메리카 대륙의 내부로 침투하여 부족들을 정복했다. 어떤 이들은 고이아스 주의 내륙으로, 아마존 강까지 갔고, 다른 이들은 파투스 강에서 라 플라타 강까지, 그리고 우루과이 강과 치바기 강까지 해안으로 갔으며, 파라과이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파라나 강까지 [...] 어떤 이들은 파라과이 강 너머 페루 왕국의 높은 산까지 광대한 내륙을 건너갔다. 상파울루인들은 그들의 적들과 자연과 싸워야 했다. 후자의 경우 날씨와 싸워야 했고, 전자의 경우 분노와 증오와 싸워야 했다. 식량 부족은 그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지만, 내륙의 열매를 먹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 야생 꿀, 야생 견과류, 달콤하고 쓴 야자수 싹, 그리고 식용 식물의 뿌리였다.
로버트 사우디영어는 1819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러나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거칠고, 그렇다, 통제할 수 없었지만, 토착 아메리카 혈통의 주입으로 인해 곧 행동과 성취가 끊임없이 증가할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파라과이의 스페인인들은 이랄라가 그들을 배치한 곳에 머물면서, 대부분 첫 번째 정복자들이 발견한 것을 무관심하게 대했지만, 브라질인들은 2세기 동안 이 나라를 계속 탐험했다. 이러한 결단력 있는 모험가들은 노예 사냥과 금과 은을 찾기 위해 야생에서 몇 달, 몇 달을 보냈고, 원주민 아메리카인에게서 배운 것을 지침으로 삼았다. 결국 그들은 자신과 브라간사 왕가를 위해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광산과 가장 큰 영토를 확보했다. 이 획득은 모든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상파울루를 본거지로 삼아 내륙 개발과 개척을 목적으로 탐험대를 편성했다. 남아메리카, 남반구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된 "상파울루"는, 남대서양에 면한 "산토스 항" (현 도시: 산토스)에서 내륙 (북쪽)으로 약 60km 지점에 위치하며, 당시 내륙 개척의 거점 (경유지)으로서 발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데이란치는 사탕수수 농장 개척, 노동자 (노예 포함) 이주, 금, 은, 구리, 철 등의 광맥 광산 발견 및 자원 획득 등 남아메리카 개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또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정해진 포르투갈의 영역을 넘어 개척을 진행했기 때문에, 반데이란치들의 진출은 현재 브라질 영토 형성에 기여했다.
하지만 반데이란치들의 진출 과정에서 과라니족 등 원주민 마을이 파괴되고, 주민들이 노예가 되는 등 피해가 발생했다. 그 중에는 가톨릭 선교사에 의해 만들어진 선교촌도 포함되었다.
6. 2. 부정적 유산과 논란
반데이란치는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진출 과정에서 과라니족 등 원주민 마을이 파괴되고, 주민들이 노예가 되는 등 피해가 발생했으며, 그중에는 가톨릭 선교사에 의해 만들어진 선교촌도 포함되었다.[12]21세기에는 반데이란치를 기념하는 것을 중단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브라질에서는 반데이란치 조각상을 훼손 행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경비가 배치되었다.[15] 이 조각상들은 반데이란치들이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행위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2020년 6월 7일 영국이 에드워드 콜스턴의 조각상을 철거하면서 조각상 철거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2021년 7월 24일, 시위대는 브라질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의 민족주의적 수사에 대응하여 상파울루에 있는 보르바 가토의 조각상에 불을 질렀다.[16][17] 조각상 철거 요구는 브라질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에서도 노예 제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조각상의 철거를 요구했다.
6. 3. 현대 브라질에서의 상징
반데이란치들은 1920년대 독립 운동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브라질의 자긍심을 상징하게 되었다.[14] 이 운동의 큰 부분은 반데이란치들을 순수한 브라질인으로 묘사하고 그들이 용기와 성취감을 대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반데이란치에 관한 많은 시, 그림, 영화, 책이 만들어졌다.
21세기에는 반데이란치를 기념하는 것을 중단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브라질에서는 반데이란치 조각상을 훼손 행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경비가 배치되었다.[15] 이 조각상들은 반데이란치들이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행위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새로운 흐름은 브라질의 논쟁적인 과거와 노예 상인을 미화하는 행위에 맞서려는 시도이다. 2020년 6월 7일 영국이 에드워드 콜스턴의 조각상을 철거하면서 조각상 철거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2021년 7월 24일, 시위대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의 민족주의적 수사에 대응하여 상파울루에 있는 보르바 가토의 조각상에 불을 질렀다.[16][17] 조각상 철거 요구는 브라질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에서도 노예 제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조각상의 철거를 요구했다.
현재 반데이란치라는 이름은 대도시 상파울루에서 내륙 탐험대와 같은 루트인 북서부 내륙(캄피나스 시 방면)으로 통하는 고속도로 "반데란치스 고속도로"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도 "Rua" 등 각지의 도로 명칭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7. 주요 반데이란치스
- 도밍고스 조르제 벨료
- 안토니우 호드리게스 데 아르상
- 안토니우 알바렌가
- 안토니우 라포수 타바레스
- 바르톨로메우 부에노 다 시우바 (''안양게라'')
- 마누엘 지 보르바 가토
- 브라스 레메
- 페르나웅 디아스 파이스 ("에메랄드 사냥꾼")
- 가브리엘 지 라라
- 안토니우 디아스 지 올리베이라
- 도밍고스 호드리게스 두 프라도
- 살바도르 푸르타도 페르난데스 지 멘돈사
- 에스떼방 히베이루 바이앙 파렌테
- 브라스 호드리게스 지 아르상
- 마누엘 지 캄푸스 비쿠두
- 프란시스쿠 디아스 지 시케이라 (''아푸사'')
- 파스쿠알 모레이라 카브랄
- 안토니우 피레스 지 캄푸스
- 프란시스쿠 페드로소 자비에르
- 로렌수 카스타뇨 타케스
- 토메 포르테스 델-레이
- 안토니우 가르시아 다 쿠냐
- 마티아스 카르도소 지 알메이다
- 살바도르 파리아 지 알베르나스
- 조제 지 카마르고 피멘텔
- 조앙 레이테 다 실바 오르티스
- 조앙 지 시케이라 아폰소
- 제로니무 페드로소 지 바루스
- 바르톨로메우 부에노 지 시케이라
- 조앙 다 실바 기마랑이스
- 안토니우 피레스 지 캄푸스 - 1681년 브라질의 한 강 주변에서 원주민의 습격을 받았다. 이후 그 강은 죽음의 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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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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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a Itatiaia Limitada - Editora da Universidade de São Pau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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