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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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구자는 대전 출신의 무용가로, 일본 덴카스 단원으로 활동하며 해외 공연을 다녔다. 1920년대 평양에서 덴카스를 탈퇴한 후 홍순언과 결혼하여 서울에 배구자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조선 무용을 발전시켰다. 배구자는 배구자무용가극단을 통해 공연 활동을 펼치고 동양극장을 설립하여 신파극 전성시대를 이끌었으나, 남편 사망 후 재혼과 동양극장 경영권 문제로 사회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일본계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에서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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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구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裵亀子 (배구자) |
| 본명 | 배구자 |
| 출생일 | 음력 1905년 3월 29일 |
| 출생지 | 충청남도 대전 |
| 사망일 | 2003년 4월 11일 |
| 사망지 |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 |
| 활동 분야 | 무용 |
| 기타 정보 | |
| 저자 | 김은신 |
| 제목 | 이것이 한국 최초 |
| 날짜 | 1995년 11월 01일 |
| 출판사 | 삼문 |
| ISBN | 978-89-85407-35-9 |
| 쪽 | 15~17쪽 |
2. 생애
배구자는 충청남도 대전 출신으로, 출생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배정자의 조카이나, 배정자와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태어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유년 시절은 불분명하며, 1926년 덴카스 극단 탈퇴 후 홍순언과 결혼했다.
1928년 공연계에 복귀, 1929년부터 홍순언의 도움으로 활동을 재개하여 서울 중구 신당동에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조선 무용을 연구했다. 배구자무용가극단을 통해 레뷰 중심의 공연을 했고, 동양극장을 설립하여 신파극 전성시대를 열었다.
1937년 남편 홍순언의 사망 이후 재혼과 함께 사회 활동을 중단하고 극단을 해체했다. 1950년대 일본계 미군과 결혼하여 일본으로 이주, 말년은 미국에서 보냈다.
2. 1. 출생과 초기 활동
충청남도 대전 출신으로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배정자의 조카이나, 배정자와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소문이 꾸준히 돌았다. 만년에 본인은 메이지 천황과 명성황후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말한 듯하다.[1]유년 시절의 행적은 불투명하다. 이는 배구자가 몸담고 있던 일본 덴카스 일행[2]이 경성부에서 공연을 시작한 1918년 경부터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한 이력을 본인이 후에 부인했기 때문이다. 공통되는 점을 묶으면, 시기는 불확실하나 어린 나이에 덴카스의 단원이 되어 해외 공연을 다니면서 무용을 배웠다는 것이다.[1]
1926년에 덴카스가 평양에서 공연 중일 때 몰래 빠져나와 칩거를 시작했다. 덴카스에서 탈퇴한 이유는 단장이자 양어머니인 효교쿠사이 덴카스의 의붓아들과 사랑에 빠지면서 처지가 곤란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탈출을 도와준 홍순언과 후에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배구자는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했다.[1]
2. 2. 조선에서의 활동과 동양극장 설립
1926년 덴카스가 평양에서 공연 중일 때 몰래 빠져나와 칩거했다. 덴카스에서 탈퇴한 이유는 단장이자 양어머니인 효교쿠사이 덴카스의 의붓아들과 사랑에 빠지면서 처지가 곤란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탈출을 도와준 홍순언과 후에 결혼했다. 이때까지 배구자는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했다.[1]1928년 '배구자고별무도회'라는 행사를 가지면서 공연계에 복귀했고, 1929년부터 홍순언의 도움을 받아 활동을 재개했다. 현재의 서울 중구 신당동 지역에 배구자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생을 모집하여 교육했다. 배구자는 오랜 외국 생활 중 오히려 조선 무용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전통에 입각한 조선 무용 수립에 들어갔다.[1]
배구자무용연구소 연구생들로 배구자무용가극단을 꾸려 조선과 일본을 오가는 순회 공연을 가졌다. 공연 형태는 무용과 음악을 엮은 쇼인 레뷰를 중심으로 가극, 촌극, 비극이 포함된 종합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조선의 전통 민요를 무용화하는 등 새로운 시도도 많이 이루어졌다. 왕성한 공연 활동을 벌이는 와중에 홍순언과 함께 동양극장을 설립해 신파극 전성시대를 열기도 했다.[1]
2. 3. 남편 사후와 말년
1937년 남편 홍순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배구자의 인생은 큰 변화를 맞았다. 남편의 소상을 치르기도 전에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재혼하였고, 동양극장 경영권 문제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재혼 이후 모든 사회적 활동을 중단하고 배구자악극단도 해체하였다. 1950년대에는 일본계 미군과 세 번째 결혼을 하고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말년은 미국에서 보냈으며, 90대까지 장수하였다.3. 배구자가 등장한 작품
참조
[1]
서적
이것이 한국 최초(これが韓国初)
삼문
[2]
서적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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