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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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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경자는 대한민국의 화가, 수필가이다. 1924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나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53년 개인전 '생태'를 통해 화단에 주목받았다.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12차례의 해외 스케치 기행을 통해 '천경자 풍물화'라는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1979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절필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201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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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천경자 화백
본명천옥자(千玉子)
출생일1924년 11월 11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 (現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사망일2015년 8월 6일
사망지미국 뉴욕주 뉴욕
국적대한민국
분야동양화
미술
학력여자 미술대학 미술학과 (중퇴)
직업화가
수필가
대학 교수
소속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사조동양화
종교천주교 (세례명: 데레사)
배우자이철식 (사별)
김남중 (재혼)
자녀2남 2녀
장녀이혜선 (1945년~)
장남이남훈
차녀김정희
차남김종우
부모아버지 천성욱
어머니 박운아
친척남동생 1명, 여동생 천옥희, 1남 2녀 중 장녀
웹사이트천경자 공식 사이트
수상
수상 내역1955년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1979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83년 은관문화훈장

2. 생애

천경자는 1924년 11월 11일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대한제국 초기 시절 깨어있는 사상을 가진 인물로, 손녀에게 옥자(玉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1] 어린 시절 천경자는 외할아버지에게 천자문과 창, '심청전', '흥부전' 등을 배우며 유복하게 자랐다.[1]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1940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에 입학하면서 본명 옥자 대신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1]

1942년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각각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그린 작품이 입선하며 재능을 인정받았다.[1] 6·25 전쟁 이후 1953년 뱀 그림 '생태(生態)'를 발표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5] 1972년 베트남 전쟁 종군화가로 활동했고, 이후 해외 스케치 기행을 통해 '천경자 풍물화'라는 개성적인 화풍을 개척했다.[5]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1979년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6]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났으나, 이후 귀국하여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7] 1998년 자신의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7]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8] 2015년 8월 6일 사망했다.[10]

천경자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2남 2녀를 두었다.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천성욱군서기
어머니박운아
여동생천옥희폐병으로 사망
첫 남편이철식장결핵으로 요절
장녀이혜선1945년생
장남이남훈
두 번째 남편김남중
차녀김정희
차남김종우


2. 1. 성장기

1924년 11월 11일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아버지 천성욱(군서기)과 어머니 박운아(외할아버지 슬하 무남독녀) 사이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1]

천경자의 외할아버지는 대한제국 초기 시절, 자신의 딸 박운아에게 남장을 시켜 서당에 보낼 정도로 깨어있는 사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딸이 낳은 큰 손녀를 금지옥엽으로 예뻐하며 옥자(玉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1] 천경자는 밤마다 외할아버지의 무릎에 누워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 '삼국지', '수호전'을 듣고, 천자문과 창을 배우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1] 보통학교 1학년 때 일본인 담임 선생이 천경자의 그림 소질을 발견했고, 대청마루 흰 횟가루 벽에 그린 여인상이 외할머니 눈에 띄어 매를 맞기도 했다.[1]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시절, 천경자는 혼담이 오가자 시집가기 싫어 다듬잇돌 위에 앉아 미친 시늉을 했다.[1] 1940년 17세 때 여수항을 출발해 도쿄 유학길에 올랐으며,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에 입학하면서 본명 옥자(玉子) 대신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1] 도쿄에서는 야수파나 입체파 등을 가르치던 서양화 고등과 보다는 곱고 섬세한 일본화 풍이 마음에 들어 일본화 고등과에서 모델을 보고 관찰해 섬세하게 사생하는 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1]

1942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가 입선하고,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머니를 그린 '노부(老婦)'가 수석 입상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았다.[1] '조부'는 고혈압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이지만 손녀를 위해 모델이 되어준 외할아버지의 초상화였다.[1] 고흥에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면서 하이힐에 양장을 차려입었던 천경자의 청년기는 그녀가 평생 간직했던 자부심의 바탕이 되었다.[1]

2. 2. 결혼과 가족

천경자는 1944년 첫 남편 이철식과 결혼하여 1945년 첫 딸 이혜선을, 1946년 아들 이남훈을 낳았다. 이철식은 명문대 중퇴생으로, 천경자가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도쿄역에서 우연히 만나 인연을 맺게 되었다.[4] 그러나 이철식은 장결핵으로 요절하여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4]

이후 천경자는 1948년 전라남도 목포의 한 신문사 전직 사회부 기자 출신이었던 김남중을 만난다.[4] 두 아이를 홀로 키우던 천경자는 유머 넘치고 건장했던 그에게 푹 빠졌지만, 김남중은 이미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다.[4] 천경자는 김남중이 전 부인과 이혼할 때까지 기다리면서도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자괴감과 그의 변덕스러운 태도로 인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4]

천경자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2남 2녀를 두었다. 첫 남편 이철식과의 사이에서 1남 1녀(이혜선, 이남훈)를, 김남중과의 사이에서 1남 1녀(김정희, 김종우)를 낳았다.[4] 맏딸 이혜선은 뉴욕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켰으며, 막내아들 김종우는 '모기장 안의 쫑쫑이'라는 작품에 등장하기도 한다.[4] 천경자는 자녀들에게 남미짱(이혜선), 후닷닷(이남훈), 미도파(김정희), 쫑쫑이(김종우)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4]

천경자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천성욱군서기
어머니박운아
여동생천옥희폐병으로 사망
첫 남편이철식장결핵으로 요절
장녀이혜선1945년생
장남이남훈
두 번째 남편김남중
차녀김정희
차남김종우


2. 3. 작품 활동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가 입선하고,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머니를 그린 수석 입상 작품 '노부(老婦)'가 입선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았다.[5] 6·25 전쟁이 끝나자 여동생마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 아픔을 견디기 위해 35마리의 뱀으로 가득 채운 그림 '생태(生態)'를 1953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내놓으며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5]

1972년 베트남 전쟁 당시 문공부의 종군화가로 파견되어 맹호부대에 종군하며 많은 스케치와 담채 작품을 남겼다.[5] 4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 타히티를 시작으로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해외 스케치 기행을 12번이나 다니며 '천경자 풍물화'라는 개성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타히티 여행 후 우수에 젖은 이국적인 여인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1973년작 '길례언니'를 시작으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년), '황금의 비'(1982년) 등을 그렸다.[5]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1979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6] 그림뿐만 아니라 문학적 재능도 뛰어나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등 10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다.[5]

'''주요 작품 활동'''

연도내용
1955-1981국전 추천, 초대작가, 현대화랑 초대전 4회
1963도쿄 서촌화랑에서 개인전
1965도쿄 이도 화랑에서 개인전
1967말레이시아 정부초청 초대전 출품
1969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
1970남태평양 풍물 시리즈 스케치전 (신문회관화랑)
1973천경자 화랑(현대화랑)
1974아프리카 풍물 시리즈 스케치전(현대화랑)
1977한국현대동양화 유럽 순회전 출전
1995천경자 회고작품전 (호암갤러리)


2. 4. '미인도' 위작 논란과 절필

1991년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논란은 그녀의 노년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당시 67세였던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라는 비난 속에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났다.[7] 4개월 후 귀국한 천 화백은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카리브해, 자메이카, 멕시코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미인도'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사업 중 복제품 판매 과정에서 작가가 원작을 보고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진위 논란이 시작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X-ray, 적외선, 자외선 촬영 등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고,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도 1991년 4월 11일 진품으로 판정하는 등 진품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천 화백은 이 과정에서 큰 정신적 피해를 입고 예술원 회원직을 사퇴, 작품 공개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1999년 고서화 위조범 권춘식이 자신이 '미인도'를 위조했다고 증언하면서 논란이 재점화되었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작품 입수 시점과 위조 시점 불일치, 위조자의 전문 분야 차이 등을 이유로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로 더 이상 수사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6년 11월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감정단은 '미인도'가 사실상 천 화백의 작품이 아니라는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화면 표층 분석만으로 성급히 결론을 내렸다"고 반박하며 프랑스 감정단의 결론을 강하게 부정했다.[14]

2. 5. 노년과 사망

천경자 화백의 노년에 가장 큰 고비는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이었다. 당시 67세였던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라는 수군거림 속에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4개월 후 다시 돌아와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카리브해, 자메이카, 멕시코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생애 마지막 전시라고 생각하고 72세 때인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15년 만에 가진 대규모 전시는 8만 명이 모여 줄을 서서 볼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7]

1998년 11월 채색화와 스케치 등 자신의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7] 섬유공예를 하는 딸 이혜선을 찾아 뉴욕으로 떠났다가 2003년 7월 2일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만다.[8]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7년부터 천경자의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군에는 천경자가 기증한 드로잉 55점, 판화 11점 등 총 66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소장품과 아트상품 등이 갖추어져 있는 천경자전시관이 개관되었다.[9]

대한민국예술원2014년 2월을 기하여 천경자 화백의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다. 2009년 1월 현재는 천경자의 행적이 묘연하고 근황이 알려지지 않아 생존여부에 관해 언론에서 미스테리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15][16][17][18] 천경자 화백 가족은 "말도 안 되는 행태"라면서 이에 반발하여 예술원 탈퇴서를 제출했다.[19]

한국표준시로 2015년 10월 22일 천경자 가족 측은 천경자가 2015년 8월 6일 새벽 5시에 타계했다고 전했다.[10]

첫째 딸 이혜선은 나머지 가족이 천경자 화백 생전에 수 년간 안부전화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천경자 화백의 둘째 딸과 둘째 사위는 첫째 딸이 어머니의 죽음을 숨겼다고 맞섰다.

3. 학력

4. 경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1] 1954년부터 1973년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였으며,[1] 1970년부터 1973년까지는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과장을 역임하였다.[1]

1960년부터 1981년까지 국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1] 1963년에 국전심사위원(8회)을,[1] 1976년부터 1979년까지 국전운영위원을 역임하였다.[1]

1978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1] 1981년에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을 역임하였다.[1]

연도경력
1954년~1973년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60년~1981년국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부위원장
1963년국전심사위원(8회)
1970년~1973년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과장
1976년~1979년국전운영위원
1978년~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1년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


5. 주요 작품

천경자는 일본 유학 시절인 1942년,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1943년에는 외할머니를 그린 '노부(老婦)'로 입선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았다.[5] 1953년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출품한 '생태(生態)'는 35마리의 뱀을 그린 충격적인 작품으로, 천경자를 화단의 주목을 받게 했다.[5]

1972년에는 베트남 전쟁에 종군화가로 참여하여 M-16 소총을 든 병사들, 아오자이를 입은 아가씨 등 이국적인 풍경을 담은 스케치와 담채 작품을 남겼다.[5] 40대 후반부터는 타히티,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지를 여행하며 '천경자 풍물화'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다.[5] '길례언니'(1973),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황금의 비'(1982) 등 우수에 젖은 이국적인 여인 그림은 이 시기 대표작이다.[5]

2005년부터 10년간 경매 시장 분석 결과, 천경자 작품의 평균 호당 가격은 현존 작가 중 최고가로 평가받았다.[11] 최고가 낙찰 작품은 2009년 K옥션에서 12억에 거래된 '초원Ⅱ'(1978)이다.[11] '원'(園)(1962)은 11.5억, '막은 내리고'(1989)는 8.6억에 낙찰되었다.[11]

다음은 천경자의 주요 전시 목록이다.

연도전시
1955-1981국전 추천, 초대작가 현대화랑 초대전 4회
1963동경 서촌화랑에서 개인전
1965동경 「이또」화랑에서 개인전
1967말레시아 정부초청 초대전 출품
1969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
1970남태평양 풍물 시리즈 스케치전 (신문회관화랑)
1973천경자 화랑(현대화랑)
1974아프리카 풍물 시리즈 스케치전(현대화랑)
1977한국현대동양화 유럽 순회전 출전
1995천경자 회고작품전 (호암갤러리)


6. 저서

천경자는 그림뿐만 아니라 문학적 재능도 뛰어나 여러 권의 수필집과 자서전을 남겼다.[5] 1955년 '여인소묘'를 시작으로, 10권 이상의 저서를 출간했으며,[5] 타고난 글재주로 단행본, 수필집, 신문 잡지 연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했다.[5]


  • 〈여인 素描〉
  • 〈유성이 가는 곳〉
  • 〈언덕 위의 洋屋〉
  •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
  • 〈아프리카 기행화문집〉
  • 〈恨〉
  • 〈자서전 내 슬픔 전설의 49페이지〉
  • 〈자유로운 여자〉
  • 〈쫑쫑〉
  • 〈꽃과 색채와 바람〉
  •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 〈탱고가 흐르는 황혼〉
  • 〈천경자 화집〉
  •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03.02)

7. 수상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1979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6]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연도상 이름
1955년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1964년문예상
1971년서울특별시문화상
1975년3·1문화상
1979년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은관문화훈장
1999년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8. 평가

천경자는 그림뿐만 아니라 문학적 재능도 뛰어나,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등 10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다. 1955년 '여인소묘' 등 단행본 15건과 수필집 10권, 신문 잡지 연재 12건 등을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5] 2006년에는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를 출간했는데, 이는 1976년 잡지 '문학사상'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1978년에 출간했다가 절판된 것을 다시 펴낸 것이다. 자서전에서 천경자는 자신의 삶과 예술 세계를 '꿈', '사랑', '모정' 세 가지 요소로 설명했다.

배우 윤여정은 천경자를 '가락 있는 멋쟁이 화가'라고 표현하며, 1976년 뉴욕 맨해튼에서 만난 그의 전라도 사투리와 멋진 모습을 회상했다. 방송인 황인용은 인터뷰를 통해 천경자의 민요 자락 같은 목소리와 이국적인 액세서리를 기억했다. 시인 고은은 "천경자는 누구인가. 그는 그것밖에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천형(天形)의 예술가이다."라고 말했다.[12]

소설가 박경리는 오랜 지기인 천경자를 '고약한 예술가'로 부른 시 '천경자를 노래함'을 통해 그의 성품과 기질을 묘사했다. 세간에서는 천경자의 삶을 프리다 칼로에 비유하기도 한다. 고통의 내용은 달랐지만, 한과 고독으로 점철된 그의 삶에는 사랑에 대한 아픔과 삶의 비애가 끊이지 않았다.

천경자는 큰 키에 파격적인 옷, 뾰족한 하이힐, 화려한 화관이나 선글라스, 독특한 눈썹과 붉은 입술, 담배를 문 모습으로 주변을 압도했던 당대의 패션 리더였다. 언론 인터뷰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담긴 입담을 자랑했으며, 김환기, 박고석, 최순우, 김흥수, 박노수, 손응성, 유영국, 김현승, 고은, 김지하, 서정주 등 남성 예술인과 박경리, 한무숙, 손소희, 조경희, 박완서, 한말숙, 전숙희 등 당대 여성 문인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시사만화가 김성환은 천경자의 작품에 대해 "선 하나하나가 모두 다 살아있는 선"이라며 "그림을 보면 정신이 번쩍 난다."고 평가했다. 가수 조영남은 "천경자 화백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는데도 항상 소녀 같은 어른이었다."고 회상했다. 배우 김수미는 "한번 붓을 잡으면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서 참는다'고 했다"며 천경자의 그림에 대한 집념과 열정을 전했다.[13]

9. 논란

천경자 화백은 생전에 미인도 위작 사건, 사망 시기 논란 등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9. 1. 미인도 위작 사건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움직이는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미인도 원작을 복제해 판매하던 중, 복제본에 의구심을 가진 천경자가 원작을 직접 보고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미인도 위작 사건이 시작되었다. 천경자의 위작 주장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은 진위를 가리기 위해 X-ray, 적외선, 자외선 촬영 등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였고,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는 1991년 4월 11일 진품이라고 판정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앞으로 위작임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밝혀지면 받아들이겠다"는 단서를 붙인 끝에 진품임을 주장하였다.[14]

이 과정에서 천경자 화백은 상당한 정신적 피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사건 직후 예술원 회원직을 사퇴하고 전시회 출품 등 작품 공개 활동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하고 미국으로 갔다. 이후 대규모 회고전을 가진 적은 있으나 신작은 보기 어려워졌다.[14]

1999년 고서화 위조범 권춘식이 자신이 미인도를 위조했다고 증언함으로써 논란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은 작품 입수 시점과 위조했다고 진술한 시점이 불일치하고, 위조자가 수묵화 위조 전문이어서 천경자 화백의 채색화를 위조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기존 입장을 고수하였다. 검찰에서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더 이상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14]

2016년 11월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감정단은 위작 논란에 휩싸인 '미인도'에 대해 사실상 천 화백의 작품이 아니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검찰 측에 제출했다. 그러자 11월 4일 국립현대미술관은 '프랑스 감정단의 미인도 감정 결과 보도에 대한 입장' 자료를 내고 프랑스 감정단이 천경자의 미인도에 대해 위작 의견을 낸 것과 관련해 "화면 표층 분석만으로 성급히 결론을 내렸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프랑스 감정단이 감정 개시 전 브리핑에선 캔버스 화면의 층위 조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이미지와 붓질, 작업 방식 등의 패턴을 종합적으로 규명한다고 했으나 조사 결과를 보면 당초 공언한 바와는 반대로 극히 일부 자료에 대한 통계적, 인상적 분석 결과만 내놨다"고 주장하며 프랑스 감정단의 결론을 강하게 부정했다.[14]

9. 2. 사망 시기 논란

1998년 미국으로 이주해 2002년부터 뉴욕에 거주하였으나, 2009년 1월 현재 천경자의 행적이 묘연하고 근황이 알려지지 않아 언론에서 생존 여부에 대해 미스터리라고 보도했다.[15][16][17][18]

대한민국예술원은 천경자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014년 2월을 기하여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다. 그러자 천경자 화백 가족은 이에 반발하여 "말도 안 되는 행태"라며 예술원 탈퇴서를 제출했다.[19]

천경자의 첫째 딸 이혜선은 나머지 가족이 천 화백 생전에 수 년간 안부 전화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천경자 화백의 둘째 딸과 둘째 사위는 첫째 딸이 어머니의 죽음을 숨겼다고 맞섰다.

10.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천성욱
어머니박운아
여동생천옥희폐병으로 사망
첫째 남편이철식명문대 중퇴, 장결핵으로 요절[4]
장녀이혜선1945년생, 뉴욕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킴[4]
장남이남훈1946년생
둘째 남편김남중전라남도 목포 모 신문 전직 사회부 기자[4]
차녀김정희
차남김종우모 서점 대표, 모기장 안의 쫑쫑이에 등장[4]


참조

[1] 뉴스 Artist Chun's life, death shrouded in mystery http://www.koreahera[...] 2017-03-26
[2] 뉴스 Korean Painter Chun Kyun-ja Dies at 91 http://artasiapacifi[...] 2017-03-26
[3] 뉴스 Chun Kyung-ja Lived Like Flame https://www.koreatim[...] 2017-03-26
[4] 서적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5] 웹인용 꽃과 영혼의 화가 '영혼의 꽃밭' 속으로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5-10-22
[6] 웹사이트 네이버 인물정보 천경자 https://search.naver[...]
[7] 뉴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http://news.tvchosun[...] tv조선 2014-09-04
[8] 웹인용 천경자 恨과 고독으로 점철된 인생의 페이지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5-10-22
[9] 백과사전 천경자전시관 http://www.doopedia.[...] 두산백과 2014-09-21
[10] 웹인용 두달前 세상 떠난 천경자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5-10-22
[11] 웹인용 천경자 화백 작품 가격은?…최고가 12억원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5-10-22
[12] 웹인용 천경자의 지인들…문화예술계와 깊은 인연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5-10-22
[13] 웹인용 조영남 "故 천경자 화백, 항상 소녀 같은 어른" http://tvdaily.asiae[...] 티브이데일리 2015-11-03
[14] 뉴스 국립현대미술관 미인도 위작 의견 반박…"성급한 결론"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6-11-04
[15] 뉴스 "워싱턴 있는 천경자 화백 사위도 근황 전혀 모른다" http://www.ajunews.c[...] 아주경제 2014-06-13
[16] 뉴스 사라진 천재 여화가 ‘천경자 미스터리’ http://star.mbn.co.k[...] mbn 2014-06-27
[17] 뉴스 사라진 천경자 화백…가족 생사여부 확인 거부, 무슨 일이? http://imnews.imbc.c[...] mbc뉴스 2014-06-12
[18] 뉴스 천경자 미스터리 http://news.tvchosun[...] tv조선 2014-06-12
[19] 웹인용 천경자 화백, 수개월 전 별세…‘잠자듯’ 눈 감은 꽃의 여인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5-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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