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백기완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가, 통일 운동가, 작가이다. 1960년대 한일협정 반대 운동에 참여하고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김구의 사상을 연구하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청원운동으로 투옥되었고, 1987년과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의 원작인 시 '묏비나리'를 썼으며, 《장산곶매 이야기》, 《부심이의 엄마생각》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후보 - 김영삼
김영삼은 1929년 거제 출생으로, 제14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군사 정권에 저항하고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금융실명제 실시 등의 개혁 정책을 추진했으나 IMF 외환 위기를 겪고 2015년 서거했다. -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후보 - 박찬종
박찬종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변호사, 공인회계사로, 고시 3관왕 및 5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유신 정권 시절 소신 발언과 대선 출마, 정당 활동 등을 통해 활동해왔으나 지역감정 조장 발언 등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신정당 당원 - 함세웅
함세웅은 한국 전쟁의 참상을 겪고 사제의 길을 걸으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을 주도하여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민주화 운동가이다. - 신정당 당원 - 조경철
조경철은 '아폴로 박사'로 알려진 대한민국의 천문학자이자 과학 저술가로, 한국 천문학 대중화에 기여하고, 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과학계 발전에도 힘썼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소행성과 천문대에 이름이 명명되었다. -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 백낙청
백낙청은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로서, 《창작과비평》 창간, D. H. 로런스 연구, 유신 정권 비판, 남북 화해와 통일 운동 참여, 민족 문학론과 분단 극복론 주창 등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 태영호
태영호는 1962년 평양 출생으로 북한 외교관 출신이며, 2016년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로 있다가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여 국회의원과 국민의힘 최고위원을 거쳐 현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으로 활동한다.
백기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백기완 |
필명 | 민초(民草), 부심이 |
출생일 | 1932년 1월 24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황해도 은률군 장련면 |
사망일 | 2021년 2월 15일 |
배우자 | 김정숙 |
자녀 | 1남 3녀 |
국적 | 대한민국 |
종교 | 무신론 |
직업 | 정치인 사회운동가 언론인 작가 소설가 |
활동 기간 | 1956년 ~ 2021년 |
기타 |
2. 생애
백기완은 황해도 은률군 출신으로, 해방 이후 남한으로 내려왔다. 초등학교 졸업 후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공부했다.[1] 1964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에 참여하며 사회 운동을 시작했다.[1]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해 김구 사상을 연구하고 보급했으며,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했다.[1] 1973년 유신 헌법 개정 청원 운동을 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고, 1979년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1981년 3·1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1987년과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1987년에는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지만, 1992년에는 재야 독자 후보로 출마해 완주했다. 두 번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며, '백기완 선거대책운동본부(백선본)'가 조직되기도 했다.
낙선 후 통일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통일 운동과 노동 운동을 이어갔다. 《장산곶매 이야기》, 《부심이의 엄마생각》 등을 출간하고,[6] 1999년 계간지 《노나메기》를 창간하는 등 문필 활동도 했다.
2000년대 이후에도 시민사회 운동에 참여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과 만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백기완은 황해도 은률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1946년 황해도 일도초등학교를 졸업했고 해방 이후 월남했다. 초등학교 이외의 정규 교육 과정은 거치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공부하였다.[1] 실향민 출신으로 일찍이 통일 문제에 눈을 떠 1964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백범 사상 연구와 보급에 힘썼으며,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했다.[1]2. 2. 민주화 운동 참여
백기완은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여했고,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백범 사상 연구와 보급에 힘썼으며, 이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청원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1975년 9월에는 양일동, 김동길과 함께 장준하 장례식을 주관하고 추도사를 낭독했다.
1979년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어 계엄법 위반 혐의로 구속,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81년 3·1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을 지냈다.
2. 3. 1987년, 1992년 대선 출마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재야 운동권의 일부인 "제헌의회파" 그룹의 추대로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군정 종식을 위해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하였다. 1987년 9월 김영삼과 김대중은 후보단일화 협상에서 이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고, 노태우가 3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군사정권이 연장되자 그는 제도권 정치권과 타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보수 야당과 결별하였다.이후 1992년 재야 운동권의 추대를 받아 독자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였다. 두 번의 대선 모두 별도의 정당 없이 출마하였으며, 백기완 선거대책운동본부(약칭 백선본)가 구성되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2. 4. 통일 운동과 시민 사회 운동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를 맡아 재야에서 계속 통일 운동과 진보적 노동운동에 힘썼다. 한편, 독학으로 쌓은 해박한 지식으로 창작활동에도 힘써 《장산곶매 이야기》, 《부심이의 엄마생각》등의 소설과 수필집을 펴내기도 하였다.이후 장준하 선생 암살 진상규명위원회 공동대표, 민족문화대학설립위원회 대표 등을 역임하였고, 1996년 고 장준하 선생 21주기 추도식 준비위원회 공동대표에 선출되었다. 1999년 11월 계간잡지 《노나메기》를 창간하여 발행인이 되었다.
2. 5. 문필 활동과 저서
백기완은 독학으로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창작 활동에도 힘써 《장산곶매 이야기》, 《부심이의 엄마생각》 등의 소설과 수필집을 펴냈다.[6] 1999년 11월에는 계간잡지 《노나메기》를 창간하여 발행인이 되었다.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2. 6. 2000년대 이후 활동과 일화
2000년대 이후에도 백기완은 시민사회 운동에 꾸준히 참여했으며, 2000년 5월에는 한양대학교 겸임 교수로 임용되었다.[2] 그는 독특한 화법으로 유명했는데, 대통령 선거 연설 녹화 때 한 번도 중단하지 않고 주어진 시간을 채워 방송국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에는 축구협회의 요청으로 파주 대표팀 트레이닝센터(NFC)에서 대표 선수들에게 강연을 하면서 거스 히딩크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히딩크 감독은 백기완의 열정적인 강연 모습, 한복 차림, 통일 운동 이력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아 출국 전에 다시 만나고 싶어했다.[3] 히딩크 감독은 바쁜 일정 때문에 백기완을 만나지 못해 친필 서명 서신으로 마음을 대신하려 했지만, 백기완이 공항으로 나오면서 둘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해 줘 고맙다. 당신을 보면 '한국사람'을 만나는 듯하다"고 말했고, 백기완은 "사람은 만났다 헤어지지만 뜻과 뜻은 헤어지는 게 아니라 역사와 함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화답했다.[4] 신학자 정승우 박사에 따르면, 백기완은 대중 연설에서 "나는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기생오라비처럼 곱상한 예수는 당최 마음에 들지 않아. 내 생각에 그건 잘못된 그림이야. 예수는 노동자였어. 예수의 직업이 목수가 아니라서. 노동으로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예수는 부당한 사회질서에 대항한 깡따구 있는 인물이었다구."라고 말하며 지배 질서와 결탁한 기독교를 비판했다.[5] 2009년 겨울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용산 참사 희생자 노제에서는 "용산 참사가 아니라 용산 학살이야"라고 외치기도 했다.3. 사상과 신념
백기완은 황해도 은률군 출신으로, 실향민으로서 일찍부터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여했고,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백범 사상 연구와 보급에 힘썼으며,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을 지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으나, 군정 종식을 위해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다. 그러나 후보 단일화가 결렬되고 군사정권이 연장되자, 제도권 정치와 타협하지 않고 보수 야당과 결별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두 번의 대선 모두 정당 없이 출마하여 백기완선거대책운동본부(백선본)가 구성되기도 했다.
3. 1.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
백기완은 1973년 유신헌법 개정 청원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2] 1979년에는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어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81년 3·1절 특사로 석방되었다.[3] 이처럼 그는 유신 독재와 신군부 권위주의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옹호하였다.3. 2. 통일 철학
황해도 은률군 출신의 실향민 백기완은 일찍부터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시작으로,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백범 사상을 연구하고 보급했으며, 민주화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73년에는 유신헌법 개정 청원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으나, 군정 종식을 위해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다. 그러나 후보 단일화 협상이 결렬되고 군사정권이 연장되자, 백기완은 제도권 정치와 타협하지 않고 보수 야당과 결별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했으나 낙선한 후에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통일문제연구소를 통해 재야에서 통일운동과 진보적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백기완은 통일운동 외에도 《장산곶매 이야기》, 《부심이의 엄마생각》 등의 소설과 수필집을 발표하며 자신의 통일 철학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3. 3. 민중 중심 사상
백기완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노동자, 농민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고 그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5]그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역시 민중 중심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승우 박사의 말에 따르면, 백기완은 대중 연설에서 "나는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기생오라비처럼 곱상한 예수는 당최 마음에 들지 않아. 내 생각에 그건 잘못된 그림이야. 예수는 노동자였어. 예수의 직업이 목수가 아니라서. 노동으로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예수는 부당한 사회질서에 대항한 깡따구 있는 인물이었다구."라고 말하며, 힘 있는 사람들과 손잡고 역사적 예수와 멀어진 기독교를 비판했다.[5]
4. '임을 위한 행진곡'과 연관성
백기완이 지은 시 '묏비나리'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가사로 한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망한 윤상원과 1978년 노동운동 중 사망한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연주된 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노래는 1980년대와 1990년대 학생, 노동운동의 대표적인 애창곡이 되었다.
5. 평가와 영향
백기완은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헌신하며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시작으로 여러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1987년과 1992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2][3][4] 1987년 대선에서는 후보 단일화를 위해 사퇴했고, 1992년 대선에서는 독자적인 민중 후보로 출마했다. 선거 이후에는 통일문제연구소를 통해 통일 운동과 진보적 노동운동을 지원했으며, 창작 활동도 병행했다.[2][3][4]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그의 강연에 감명을 받았다고 하며,[2][3][4] 신학자 정승우 박사는 백기완이 예수를 노동자이자 저항가로 묘사하며 기존 기독교를 비판했다고 전한다.[5] 용산참사 희생자 노제에서는 "용산학살"이라고 외치며 사회적 약자를 대변했다.
그러나 그의 직설적인 화법과 표현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5] 1987년 대선 사퇴는 군사정권 연장에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1992년 대선 출마는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5. 1. 긍정적 평가
백기완은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헌신하여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시작으로, 유신헌법 개정 청원운동, YMCA 위장결혼식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르면서도 민주화 운동을 이어갔다.[2][3][4] 1987년과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후보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하였으나,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하였다.1987년 대통령 선거에는 재야 운동권의 일부인 "제헌의회파" 그룹의 추대로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대선후보직을 양보하여 군정종식을 위한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의 후보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하였다.[2][3][4]
1992년 대통령 선거에는 독자 민중후보로 재야운동권의 추대를 받아 다시 출마하였다.[2][3][4] 두 번의 대선 모두 별도의 정당 없이 출마하였고, 백기완선거대책운동본부(약칭 백선본)가 구성되기도 했다.
선거에서 낙선한 뒤에는 통일문제연구소를 통해 통일 운동과 진보적 노동운동에 힘썼다. 또한, 《장산곶매 이야기》, 《부심이의 엄마생각》 등 소설과 수필집을 통해 창작 활동을 펼쳤다.[2][3][4]
그의 사상과 신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은 백기완의 강연과 통일 운동 이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2][3][4] 신학자 정승우 박사에 따르면, 백기완은 대중 연설에서 예수를 노동자이자 부당한 사회 질서에 저항한 인물로 묘사하며, 지배 질서와 결탁한 기독교를 비판했다.[5] 용산참사 희생자 노제에서는 "용산참사가 아니라 용산학살"이라고 외치며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다.
5. 2. 비판적 평가
백기완은 독특한 화법과 진보적인 정치 활동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연설은 때때로 직설적이고 과격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예수를 '기생오라비'에 비유하거나 용산참사를 '용산학살'이라고 표현한 것은 논란을 일으켰다.[5]1987년과 1992년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 출마는 그의 정치적 신념을 보여주는 행보였지만,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87년 대선에서는 후보 단일화를 주장하며 사퇴했지만, 결과적으로 군사정권 연장에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92년 대선에서는 독자 후보로 출마했지만, 제도권 정치와 타협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6. 가족 관계
배우자 | 김정숙 (초등학교 교사) |
---|---|
장녀 | 백원담 (성공회대학교 중어중국학과 전임교수) |
아들 | 백일 (울산과학대학교 융복합유통플랫폼학과 학과장) |
차녀 | 백미담 (화가) |
삼녀 | 백현담 |
7. 저서 및 작품 목록
제목 | 출판/발표 연도 | 비고 |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6] | 2009년 | |
《부심이의 엄마생각》 | 2005년 | |
《백기완의 통일이야기》 | 2003년 | |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 1999년 | |
《장산곶매 이야기》 | 1993년 | |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 ||
《이심이 이야기》 | ||
《우리 겨레 위대한 이야기》 | ||
《그들이 대통령이 되면 누가 백성노릇을 할까》 | ||
《나도 한때 사랑을 해본 놈 아니요》 | ||
《버선발 이야기》 | 2019년 | |
《항일 민족론》 | ||
《통일이냐 반통일이냐》 | ||
《백범어록》 | 김구, 백기완 편저 | |
이제 때는 왔다 | ||
젊은 날 | ||
백두산 천지 | ||
아! 나에게도 | ||
대륙 | 영화 시나리오 | |
단돈 만원 | 영화 시나리오 | |
쾌지나 칭칭 나네 | 영화 시나리오 |
8.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대수 | 직책 | 지역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순위 | 당락 | 비고 |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5대 | 국회의원 | 용산구 을 | 무소속 | 700표 | 1.73 | 5위 | 낙선 |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7대 | 국회의원 | 영등포구 갑 | 민주당1967 | 2,234표 | 1.85 | 3위 | 낙선 | |
제13대 대통령 선거 | 13대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소속 | 없음 | 0.00 | 없음 | 사퇴 | |
제14대 대통령 선거 | 14대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소속 | 238,648표 | 1.00 | 5위 | 낙선 |
참조
[1]
웹사이트
백기완 선생님 서거 소식
https://www.ibuk5do.[...]
이북5도위원회
null
[2]
뉴스
백기완 소장, 이색 주례 조건
http://www.sportsseo[...]
스포츠서울
2006-09-19
[3]
뉴스
히딩크, 백기완 소장에 우애 표시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2-07-07
[4]
뉴스
백기완소장 히딩크 환송 눈길
https://news.naver.c[...]
한국경제
2002-07-07
[5]
서적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6]
일반
임을 위한 행진곡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김영훈 노동 장관, 취임 첫날 모란 공원 찾았다
‘한국의 호찌민’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별세
마은혁 향한 좌파·친북몰이…그 거짓과 망령의 실체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