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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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즈나 왕조는 977년 사부크티긴에 의해 건국되어 1186년 멸망한 투르크계 왕조이다. 사만 왕조의 맘루크 출신들이 세운 왕조로, 호라산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11세기에는 마흐무드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마흐무드는 인도를 여러 차례 침략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며, 수도 가즈니는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040년 셀주크 제국과의 단다나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후 구르 왕조와의 다툼 끝에 1186년 라호르를 점령당하면서 멸망했다. 가즈나 왕조는 페르시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페르시아 왕조'로 불리기도 하며, 튀르크-아프간 시대를 열고 델리 술탄국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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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나 왕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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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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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غزنویان |
로마자 표기 | Ġaznaviyān |
국가 유형 | 제국 |
존속 기간 | 977년 - 1186년 |
이전 국가 | 사만 왕조 사파르 왕조 마문 왕조 파리군 왕조 힌두 샤히 물탄 토후국 찰루키아 왕조 라슈트라쿠타 왕조 분파 프라티하라 왕조 합바리 왕조 |
다음 국가 | 구르 왕조 셀주크 제국 |
수도 | 가즈니 (977년–1163년) 라호르 (1163년–1186년) |
공용어 | 페르시아어 (공식 및 궁정 언어, 링구아 프랑카) 산스크리트어 (화폐) 아랍어 (화폐 및 신학) 튀르크어 (군사) |
종교 | 수니파 이슬람교 (공식) 힌두교 (인도 지역 다수) |
건국 | 963년 |
멸망 | 1186년 |
정치 | |
정치 체제 | 세습 군주제 |
군주 칭호 | 술탄 |
초대 술탄 | 사부크티긴 |
마지막 술탄 | 쿠스라우 말리크 |
초대 재상 | 아불 하산 이스파라이니 |
마지막 재상 | 아불 마알리 나스랄라 |
재상 칭호 | 와지르 |
초대 재상 임기 | 998년–1013년 |
역사 | |
변천사 | 사만 왕조에서 자립 (955년) 사부크티긴 가문의 세습 시작 (977년) 구르 왕조에 종속 (1150년) 멸망 (1187년) |
면적 및 인구 | |
최대 면적 | 3,400,000 km² |
면적 측정 시기 | 1029년 추정 |
기타 | |
현재 국가 |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이란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
2. 역사
8세기~9세기 초, 중동의 아바스 칼리파국은 번영했으나, 9세기 중반부터 바그다드 정부가 주변 지역 통제권을 상실하면서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 호라산·중앙아시아 일대에 여러 반독립적인 토후국들이 생겨났다.
819년 건국된 사만 왕조는 사산 제국의 영웅 바흐람 추빈을 조상으로 여겼으며, 트란스옥시아나 지역 부하라에 중심지를 두고 북방 유목민들의 침입에 맞섰다. 893년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는 카를루크 튀르크족의 근거지 탈라스를 정복하고, 막대한 전리품과 노예를 확보했다. 이후에도 사만 왕조는 국경을 넘어 대초원을 습격, 튀르크계 유목민 노예들을 이슬람 세계로 공급했다.
10세기 중엽, 사만 왕조는 경제적 어려움과 귀족 연합과의 대립으로 쇠퇴했다. 카를루크 연맹체 위협에 튀르크계 노예 병사(맘루크)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945년, 맘루크 군부가 실권을 장악, 왕은 허수아비가 되었다.
사만 왕조의 튀르크 노예 경비병 출신 심주리드와 가즈나 왕조가 등장했다. 961년 압드 알-말릭 1세 사후, 사만 왕조 장군 알프 티긴과 아부 알-하산 심주리는 권력 다툼을 벌였다.
알프 티긴은 만수르 1세 즉위 후 힌두쿠시 남쪽 가즈나를 점령, 사만 왕조 아래 통치자가 되었다. 심주리드는 아무다리야 남쪽 호라산을 지배했으나, 부이 왕조에 압박받았다.
투르크 노예 장군들의 권력 다툼은 사만 왕조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카를루크족은 992년 부하라를 점령, 카라칸 왕조를 세웠다.
963년 알프 티긴 사후, 노예 사부크테긴이 가즈나 총독이 되었다.
2. 1. 배경
8세기~9세기 초까지 번영을 누리던 중동의 아바스 칼리파국은, 9세기 중반부터 바그다드 정부가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면서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로서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아바스 왕조의 동방 영토, 즉 호라산·중앙아시아 일대에는 여러 반독립적인 토후국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819년에 건국된 사만 왕조도 그 중 하나였다. 그들은 자신의 조상을 사산 제국의 위대한 영웅이자 찬탈자 바흐람 추빈에서 추적했으며 10세기 초반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다. 사만 왕조는 그 중심지를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부하라에 두었는데, 이 곳은 북방의 대초원 지대와 상당히 근접해 있어 유목민들의 침입이 잦은 지역이었고, 따라서 사만 통치자들은 주변에 군사 작전을 개시하고 이슬람 국경을 방어함으로써 유목민들을 막는 조상의 의무를 대대로 물려받았다.
893년, 사만 왕조의 대표적인 통치자 중 한명인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는 북쪽으로 군사 원정을 감행하여 카를루크 튀르크족의 근거지인 탈라스를 정복했으며, 그 과정에서 막대한 전리품과 노예들을 운반했다. 이후에도 사만 왕조 국경에서 지속적인 소규모 군사 활동이 보고되었으며, 그들의 군대는 국경을 넘어 대초원을 습격했다. 그 결과 튀르크계 유목민 출신의 노예들이 대거 이슬람 세계로 공급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광부나 군인 등으로 착취당했다.
10세기 중엽부터, 사만 왕조는 경제적으로는 중앙아시아 무역이 중단되고 정치적으로는 불만을 품은 귀족 연합과 대립하면서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허약해진 사만 왕조는 자연스럽게 중앙아시아에서 커져만 가는 카를루크 연맹체의 위협에 취약해졌다. 결국 그들은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무력이 뛰어난 튀르크계 노예 병사(맘루크)들에게 점점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동시대의 비잔티움 제국이 바랑기아인 또는 라틴인 용병들을 고용하거나, 이전의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포에데라티로 임명한 것, 그리고 아바스 칼리파국의 군부에서 튀르크계 장군들의 비율이 점차 높아진 현상 등과 연결될 수 있다.
945년까지, 사만 왕조에서는 맘루크 군부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왕은 명목상의 권력만 가진 허수아비로 전락해버렸다. 이것은 비슷한 시기에 이란의 부와이흐 왕조가 이라크를 정복하고 아바스 칼리파를 괴뢰로 만들어버린 것과 유사했다.
사마니드 제국의 투르크 노예 경비병 출신 두 군사 가문, 즉 심주리드와 가즈나 왕조가 등장했는데, 결국 사마니드 제국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심주리드는 호라산 동부의 코히스탄 지역에 영지를 받았다. 사마니드 장군 알프 티긴과 아부 알-하산 심주리는 961년 압드 알-말릭 1세 사후 그들이 지배할 수 있는 에미르를 옹립하여 호라산의 총독직과 사마니드 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했다. 그의 죽음은 그의 형제들 사이에 계승 위기를 초래했다.
서기관 계급의 사람들, 즉 투르크 장군이 아닌 민간 장관들이 주도한 궁정 세력은 알프 티긴의 사마니드 왕위 후보 자격을 거부했다. 대신 만수르 1세가 즉위했고, 알프 티긴은 신중하게 힌두쿠시 남쪽으로 물러났으며, 거기서 가즈나를 점령하고 사마니드의 권위 아래 도시의 통치자가 되었다. 심주리드는 아무다리야 남쪽 호라산을 지배했지만, 세 번째 거대한 이란 왕조인 부이 왕조에 압박을 받았고, 사마니드의 붕괴와 그 이후 가즈나 왕조의 부상을 견뎌낼 수 없었다.
궁정의 장관급 지도자들로부터의 변화하는 충성심의 도움으로 왕위를 장악하기 위한 투르크 노예 장군들의 투쟁은 사마니드의 쇠퇴를 보여주었고 가속화시켰다. 사마니드의 약화는 최근 이슬람으로 개종한 투르크계 민족인 카를루크족을 트란스옥시아나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992년 부하라를 점령하고 트란스옥시아나에 카라칸 왕조를 세웠다.
알프 티긴은 963년에 죽었고, 두 명의 굴람 총독과 3년 후 그의 노예 사부크테긴이 가즈나의 총독이 되었다.
2. 2. 기반을 다지다
8세기~9세기 초까지 번영을 누리던 중동의 아바스 칼리파국은, 9세기 중반부터 바그다드 정부가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면서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로서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아바스 왕조의 동방 영토, 즉 호라산·중앙아시아 일대에는 여러 반독립적인 토후국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819년에 건국된 사만 왕조도 그 중 하나였다. 그들은 사산 제국의 영웅 바흐람 추빈을 조상으로 여겼으며, 10세기 초반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다. 사만 왕조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부하라에 중심지를 두었는데, 이 곳은 북방의 대초원 지대와 가까워 유목민들의 침입이 잦았다. 따라서 사만 통치자들은 주변에 군사 작전을 개시하고 이슬람 국경을 방어함으로써 유목민들을 막는 의무를 물려받았다.
893년,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는 북쪽으로 군사 원정을 감행하여 카를루크 튀르크족의 근거지인 탈라스를 정복하고, 막대한 전리품과 노예들을 운반했다. 이후에도 사만 왕조 국경에서 지속적인 군사 활동이 보고되었으며, 그들의 군대는 국경을 넘어 대초원을 습격했다. 그 결과 튀르크계 유목민 출신의 노예들이 대거 이슬람 세계로 공급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광부나 군인 등으로 착취당했다.
10세기 중엽부터, 사만 왕조는 경제적으로는 중앙아시아 무역이 중단되고 정치적으로는 불만을 품은 귀족 연합과 대립하면서 쇠퇴하고 있었다. 허약해진 사만 왕조는 카를루크 연맹체의 위협에 취약해졌고, 튀르크계 노예 병사(맘루크)들에게 점점 의존하게 되었다.
945년까지, 사만 왕조에서는 맘루크 군부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왕은 명목상의 권력만 가진 허수아비로 전락해버렸다.
사만 왕조의 투르크 노예 경비병 출신 두 군사 가문, 즉 심주리드와 가즈나 왕조가 등장했는데, 결국 사만 왕조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심주리드는 호라산 동부 코히스탄 지역에 영지를 받았다. 961년 압드 알-말릭 1세 사후, 사만 왕조 장군 알프 티긴과 아부 알-하산 심주리는 권력을 두고 경쟁했다. 그의 죽음은 그의 형제들 사이에 계승 위기를 초래했다.
알프 티긴은 만수르 1세 즉위 후, 힌두쿠시 남쪽으로 물러나 가즈나를 점령하고 사만 왕조의 권위 아래 도시의 통치자가 되었다. 심주리드는 아무다리야 남쪽 호라산을 지배했지만, 부이 왕조에 압박을 받았고, 사만 왕조의 붕괴와 그 이후 가즈나 왕조의 부상을 견뎌낼 수 없었다.
궁정의 장관급 지도자들로부터의 변화하는 충성심의 도움으로 왕위를 장악하기 위한 투르크 노예 장군들의 투쟁은 사만 왕조의 쇠퇴를 보여주었고 가속화시켰다. 사만 왕조의 약화는 카를루크족을 트란스옥시아나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992년 부하라를 점령하고 트란스옥시아나에 카라칸 왕조를 세웠다.
963년 알프 티긴이 죽은 후, 그의 노예 사부크테긴이 가즈나의 총독이 되었다.
2. 2. 1. 사부크티긴
사부크티긴(سبکتگینfa)은 젊은 시절 사만 왕조의 맘루크로 일했으나, 962년 주인 알프 티긴을 따라 가즈니를 정복했다. 963년 알프 티긴 사후, 사부크티긴은 그의 아들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을 섬겼다.[38]966년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이 사망하자, 가즈니의 맘루크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자치권을 얻어 지도자를 선출해 도시를 통치했다. 빌게 티긴(966-975)과 뵈리 티긴(975-977)이 연이어 통치하는 동안, 사부크티긴은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와 명성을 얻었다.
977년, 가즈니 시민들은 인기 없는 뵈리 티긴에게 등을 돌리고 이전 지배자 아부 바크르 라위크의 아들 아부 알리에게 통치를 요구했다. 아부 알리는 카불의 힌두 샤히 왕조에게 지원받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가즈니로 진격했다. 사부크티긴은 가르데즈, 가즈니, 바미얀의 튀르크 병력을 모아 침공을 격퇴하고, 이 승리로 전임자를 해임하고 가즈니 총독이 되었다.

994년, 사만 왕조에 내분이 발생하자, 사만 통치자 누흐 2세는 사부크티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부크티긴은 아들 마흐무드와 함께 정예병을 이끌고 누흐 2세에게 합류했다. 그해 여름, 반란 지도자 파이크는 호라산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발흐와 니샤푸르에서 벌어진 두 차례 전투에서 대패하고 잔당은 카스피 해 연안 고르간까지 도주했다. 누흐 2세는 사부크티긴에게 나시르 앗 딘(Nāsir ud-Dīn, 신앙의 구원자), 마흐무드에게는 사이프 웃 다울라(Saif ud-Dawlah)라는 칭호와 함께 호라산 군대 총사령관직을 하사하며 공로를 치하했다.
997년 사부크티긴 사후, 아들들은 유언에 따라 영지를 나누어 가졌다. 마흐무드는 호라산, 나스르는 보스트, 이스마일은 가즈니를 차지했다. 사부크티긴이 경험 많고 나이도 많은 마흐무드 대신 미숙한 이스마일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준 이유는 불분명하다.[38] 마흐무드는 권력 분할을 제안했으나, 이스마일은 거부하고 오히려 그를 호라산 총독에서 해임했다. 이에 마흐무드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 가즈니 인근에서 이스마일을 격파하고 구즈간의 탑에 유폐시켰다.
2. 3. 전성기
사부크티긴(سبکتگینfa)은 젊은 시절 사만 왕조의 맘루크로 일했으나, 962년 알프 티긴을 따라 가즈니를 정복했다. 977년 가즈니 시민들은 뵈리 티긴에게 불만을 품고 아부 바크르 라위크의 아들 아부 알리에게 통치를 요구했다. 아부 알리는 힌두 샤히 왕조의 지원을 받아 가즈니로 진격했으나, 사부크티긴은 가르데즈, 가즈니, 바미얀의 튀르크 병력을 모아 격퇴하고 가즈니 총독이 되었다.
사부크티긴은 룩카즈와 보스트를 공격하고, 칸다하르 일대를 점령하는 등 군사적 확장을 통해 권위를 유지했다. 994년 사만 왕조에 내분이 발생하자, 사부크티긴은 아들 마흐무드와 함께 누흐 2세를 도와 반란군을 격파했다. 누흐 2세는 사부크티긴에게 나시르 앗 딘(Nāsir ud-Dīn, 신앙의 구원자) 칭호를, 마흐무드에게는 사이프 웃 다울라(Saif ud-Dawlah) 칭호와 호라산 군대 총사령관직을 하사했다.
997년 사부크티긴이 사망한 후,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마흐무드가 통치권을 승계하면서 가즈나 왕조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2. 3. 1. 가즈니의 마흐무드


998년, 사부크티긴의 아들 마흐무드가 통치권을 승계했고, 이때부터 가즈나 왕조는 본격적인 전성기에 돌입하며 주변 국가들을 정벌하기 시작했다.
당시 가즈나 왕조의 서쪽에는 사파르 토후국과 부와이흐 왕조, 북쪽에는 사만 왕조 및 카라한 칸국, 그리고 동남쪽에는 힌두 샤히 등 다양한 적대 세력들이 있었다. 이들은 막 성장하던 가즈나 왕조에게 큰 위협이었기 때문에 군사 원정이 필요했다. 마흐무드는 관료 출신 아불 하산 알리 이스파라이니를 와지르로 임명하고 자금 조달을 맡겼는데, 그는 며칠 만에 상당한 액수의 자금을 모았다.
마흐무드가 우선 공격한 것은 쇠퇴하던 사만 왕조였다. 사만 왕조는 992년 수도 부하라가 카라한 칸국에게 점령되면서 멸망 직전의 상태였다. 마흐무드는 발흐, 헤라트 등을 점령했다. 999년 카라한 칸국이 재차 남진하면서 사만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마흐무드는 옥수스 강을 경계로 사만 왕조의 영토를 카라한 칸국과 분할 점령했는데, 가즈나 왕조는 호라산을, 카라한 칸국은 트란스옥시아나를 차지했다.
다음으로 마흐무드가 공격한 세력은 시스탄의 사파르 토후국이었다. 당시 사파르 통치자 칼라프 1세는 아들 타히르를 보내 가즈나 왕조 치하의 쿠히스탄과 바드기스를 공격하게 했다. 이를 방어하던 중 마흐무드의 삼촌 부그라축이 사망했다. 마흐무드는 남하하여 시스탄으로 진군, 고원의 별장에 있던 칼라프를 포위했다. 칼라프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마흐무드의 이름을 자신이 발행하는 동전과 금요예배(쿠트바)에서 언급하는 조건으로 왕위를 유지했다.[39]
991년, 부와이흐 왕조는 아바스 칼리파 알 타이를 폐위시키고 알 카디르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동부 이슬람 세계의 왕조들은 새로운 칼리파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흐무드는 알 카디르에게 복종을 선언했고, 칼리파는 그에게 '''술탄''' 칭호와 선물을 하사했다. 술탄 칭호는 이전에 아바스 칼리파 알 무타미드(870-892)가 자신의 동생 알 무와파크에게 준 것이 처음이었으나, 칼리파 가문 이외의 인물에게 하사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후, 마흐무드는 1002년 재차 시스탄을 침공하여 사파르 토후국을 멸하고 이란 동부 지역을 제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재위 초반 적대 세력들을 제압하여 제국의 북부~서부 국경을 안정화시킨 그의 관심은 남쪽의 인도로 향했다.

마흐무드는 인도의 풍요로움과 부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언젠가 인도로 원정을 떠날 생각을 했다. 인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펀자브로 들어가야 했는데, 이곳은 힌두 샤히의 지배 하에 있었다. 마흐무드는 힌두 샤히 공략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보스트와 칸다하르 일대를 평정하고, 보스트를 군사 기지화 하였다.
1001년부터 인도 원정이 시작되어 1027년에 마무리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수많은 힌두 유적들과 대도시들이 파괴되었으며 200만 명 이상의 인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026년 솜나트 원정에서는 최소 5만 명의 인도인이 사망하고 사원 및 시가지가 철거되는 등 인적·물적 피해가 컸다.
다음은 사부크티긴-마흐무드 시기에 인도를 대상으로 한 가즈나 왕조의 군사 원정을 정리한 표이다.
사건 | 가즈나 왕조 통치자 | 적대 세력 | 결과 |
---|---|---|---|
차르크 전투 (973) | 사부크티긴 | 라위크 왕조와 힌두 샤히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제 1차 라그만 전투 (988) | 사부크티긴 | 힌두 샤히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제 2차 라그만 전투 (991) | 사부크티긴 | 힌두 샤히와 라지푸트족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페샤와르 전투(1001) | 마흐무드 | 힌두 샤히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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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탄 점령 (1006) | 마흐무드 | 물탄 토후국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물탄 전투 (1007) | 마흐무드 | 힌두 샤히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차흐 전투 (1009) | 마흐무드 | 힌두 샤히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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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나트 원정 (1026) | 마흐무드 | 라지푸트족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인더스 강변 전투 (1027) | 마흐무드 | 자트족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마흐무드의 공격은 인도 북부를 가로질러 갠지스 강 유역까지 도달했지만, 그의 목적은 영토 정복이 아닌 힌두 국가들을 약탈하는 것이었으므로, 펀자브와 신드 일부만이 가즈나 왕조의 통치권 하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그의 치세가 끝날 무렵, 가즈나 왕조는 이란의 레이에서부터 북동쪽의 사마르칸트, 카스피해에서 야무나 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점유한 대제국이 되었다. 마흐무드의 통치 시기는 왕조의 황금기였다.
마흐무드는 문학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여 후원했는데, 이는 피르다우시 및 알 비루니와 같은 예술가들이 훌륭한 작품을 집필하는 데 일조했다. 아볼 파즐 베이하키와 같은 동시대의 역사학자들은, 제국의 수도 가즈니의 장엄함과 마흐무드의 '빛나는' 후원에 대해 기록했다.
11세기 호라즘의 학자 알 비루니는 마흐무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2. 3. 2. 인도 원정
988년, 사부크티긴의 아들 마흐무드가 통치권을 승계한 후, 가즈나 왕조는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여 주변 국가들을 정벌하기 시작했다.[38] 당시 가즈나 왕조 주변에는 사파르 토후국, 부와이흐 왕조, 사만 왕조, 카라한 칸국, 힌두 샤히 등 여러 적대 세력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가즈나 왕조에게 큰 위협이었기에 군사 원정이 필요했다.마흐무드는 우선 사만 왕조를 공격하여 발흐, 헤라트 등을 점령했다. 999년에는 카라한 칸국과 함께 사만 왕조를 멸망시키고 옥수스 강을 경계로 영토를 분할했다. 이후 시스탄의 사파르 토후국을 공격하여 칼라프 1세에게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했다.[39] 1002년에는 사파르 토후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이란 동부를 병합했다.
마흐무드는 아버지 사부크티긴과 함께한 원정을 통해 인도의 풍요로움을 알고 있었기에, 언젠가 인도로 원정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인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펀자브로 들어가야 했는데, 이곳은 힌두 샤히의 지배 하에 있었다. 마흐무드는 힌두 샤히 공략을 위해 보스트와 칸다하르 일대를 평정하고 군사 기지로 삼았다.
1001년부터 1027년까지 마흐무드는 인도 원정을 진행하여 수많은 힌두교 유적과 도시를 파괴하고, 200만 명 이상의 인도인을 학살했다.[40] 특히 1026년 솜나트 원정에서는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사원과 시가지가 파괴되었다.
다음은 사부크티긴-마흐무드 시기 가즈나 왕조의 인도 원정을 정리한 표이다.
사건 | 가즈나 왕조 통치자 | 적대 세력 | 결과 |
---|---|---|---|
차르크 전투 (973) | 사부크티긴 | 라위크 왕조와 힌두 샤히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제 1차 라그만 전투 (988) | 사부크티긴 | 힌두 샤히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제 2차 라그만 전투 (991) | 사부크티긴 | 힌두 샤히와 라지푸트족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페샤와르 전투 (1001) | 마흐무드 | 힌두 샤히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바티아(베라) 점령 (1004) | 마흐무드 | 바티아 왕국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인더스 강변 전투 (1006) | 마흐무드 | 힌두 샤히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물탄 점령 (1006) | 마흐무드 | 물탄 토후국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물탄 전투 (1007) | 마흐무드 | 힌두 샤히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차흐 전투 (1009) | 마흐무드 | 힌두 샤히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나라얀푸르(라자스탄) 정복 (1009) | 마흐무드 | 나라얀푸르의 왕과 힌두 샤히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물탄 재복속 (1010) | 마흐무드 | 물탄 토후국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데라 전투 (1012) | 마흐무드 | 데라 족장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타네사르 전투 (1012) | 마흐무드 | 토마라 왕조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난다나 공방전 (1016) | 마흐무드 | 힌두 샤히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제 1차 카슈미르 침공 (1016) | 마흐무드 | 힌두 샤히와 로하라 왕조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로흐콧 공방전 | 마흐무드 | 로하라 왕조 | 로하라 왕조의 승리[41] |
불란드샤르 공방전 (1018) | 마흐무드 | 불란드샤르 왕국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마하반 공방전 (1018) | 마흐무드 | 마하반 왕국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마투라 공격 (1018) | 마흐무드 | 토마라 왕조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카나우지 침공 (1018) | 마흐무드 | 구르자라-프라티하라 왕조(라지푸트계)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칸푸르 함락 (1018) | 마흐무드 | 브라만들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아시 요새 공격 (1018) | 마흐무드 | 찬드라팔라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시르사간즈 공격 (1019) | 마흐무드 | 시르사간즈의 힌두 부족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라히브 강 전투 (1021) | 마흐무드 | 힌두 샤히와 라지푸트족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괄리오르 공방전 (1021) | 마흐무드 | 카차파가타 왕조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칼린자르 공방전 (1021) | 마흐무드 | 찬델라 왕조(라지푸트계) | 평화 조약 체결. |
로흐콧 공방전 (1021) | 마흐무드 | 로하라 왕조 | 로하라 왕조의 승리[48] |
솜나트 원정 (1026) | 마흐무드 | 라지푸트족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인더스 강변 전투 (1027) | 마흐무드 | 자트족 | 가즈나 왕조의 승리 |
마흐무드의 공격은 갠지스 강 유역까지 이르렀지만, 영토 정복보다는 약탈이 목적이었기에 펀자브와 신드 일부만 가즈나 왕조의 통치 하에 들어왔다. 카슈미르, 라자스탄, 구자라트 등은 여전히 힌두계 왕조가 지배했다.
마흐무드 치세 말, 가즈나 왕조는 이란의 레이에서 사마르칸트, 카스피 해에서 야무나 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대제국이 되었다.
2. 4. 쇠퇴
마수드 1세는 1040년 단다나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에 패하여 호라산 등 서쪽 영토를 잃었다.[14] 이후 이브라힘 치세에 다소 안정을 찾았으나, 12세기 전반에는 셀주크 제국의 산자르에게 조공을 바치는 정도로 쇠퇴했다.2. 4. 1. 셀주크 제국의 부상 및 왕위 계승 분쟁
무함마드가 1030년에 사망할 무렵, 그는 온화한 성품의 아들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형 마수드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마수드는 재위 초반에 준수한 통치를 이어갔지만, 1040년 단다나칸 전투에서 셀주크 군대에게 처참히 패배하여, 가즈나 왕조는 이란 중부와 호라산 등 서부 영토를 모조리 상실했다.[14]패배의 책임을 군인들에게 돌린 마수드는 곧 군부의 반란에 직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복위한 그의 동생 무함마드에게 처형당했다. 그러나 발흐 총독으로 부임 중이었던 마수드의 아들 마우두드가 군대를 이끌고 거병, 무함마드를 격파하고 역시 처형한 뒤 술탄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마흐무드가 건설한 대제국은 이미 붕괴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신하들은 그에게 완전히 복종하지 않았다. 이후 9년 동안 4명의 왕이 갈아치워졌다.
1058년, 마수드의 아들 중 한 명이었던 이브라힘이 술탄으로 즉위했다. 이브라힘은 셀주크 제국과 평화 협정을 맺고 페르시아 지역과 문화적·정치적인 교류를 다시 연결함으로써 무너져가던 제국을 더욱 공고히 재건했다.
2. 4. 2. 가즈니의 이브라힘
1058년, 마수드의 아들 중 한 명이었던 이브라힘이 술탄으로 즉위했다. 이브라힘은 셀주크 제국과 평화 협정을 맺고, 페르시아 지역과 문화적·정치적인 교류를 다시 연결함으로써 무너져가던 제국을 더욱 공고히 재건했다. 그는 매년 손수 『쿠란』을 필사하여 아바스 칼리파에게 보냈다고 한다.이브라힘 치하에서 가즈나 왕조는 일시적인 부흥기를 구가했다. 비록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농산물과 실크로드 무역로로부터 창출되는 부, 그리고 전문적인 공예품 생산으로 제국의 세입 대부분을 담당하던 핵심 지역 호라산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북인도의 부유한 힌두 왕국들을 약탈하여 축적된 부로 대체될 수 있었다. 그는 1098년까지 약 40년간 제국을 통치했다.
2. 4. 3. 바흐람 샤

바흐람 샤는 가즈니를 통치한 가즈나 왕조의 마지막 술탄이었다. 1148년, 구르 통치자 사이프 앗 딘 수리에게 패배했지만, 이듬해 수도를 탈환했다.[17] 1151년, 구르 통치자 알라 앗 딘 후세인이 친족의 복수를 명분으로 가즈니를 공격하여 바흐람 샤를 패배시키고 도시를 점령했다. 알라 앗 딘 후세인은 7일 동안 도시를 불태워 '세계를 불태운 자(Jahānsūz)'라는 별명을 얻었다.[18]
이후 가즈나 왕조는 구르 왕조와의 싸움을 계속해야 했는데, 이는 가즈나 왕조의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바흐람 샤를 도우러 온 셀주크 군대 덕분에 수도 가즈니는 다시 가즈나 왕조의 손에 들어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불리스탄 일대와 함께 오구즈 튀르크족에게 빼앗겼고, 1170년경 구르 왕조에게 완전히 함락되었다.[17][18]
2. 5. 멸망
1150년, 당시 가즈나 왕조의 종주권 아래 있던 지방 정권이었던 구르 왕조에 의해 수도 가즈나가 함락되었고, 약탈로 인해 가즈나의 번영은 몰락하게 되었다.[19] 1163년 가즈니를 구르 왕조에게 넘겨준 가즈나 왕조는 제국의 제2 도시였던 펀자브의 라호르로 천도했다. 이후 그들은 힌두 세력들을 공격하여 북인도에서 제국을 재건하려 했으나, 약화된 국력으로는 제한된 성과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뒤 가즈나 왕조는 라호르에서 얼마 동안 명맥을 유지했지만, 1186년에 이르러 구르 왕조의 술탄 무이즈 웃 딘 무함마드에 의해 멸망했다. 마지막 가즈나 술탄인 쿠스라우 말리크는 감금되었다가 1191년 피로즈코에서 약식 처형되었고,[19] 그의 죽음과 함께 가즈나 왕조의 혈통은 모두 끊기고 말았다.3. 군대
가즈나 왕조의 군대는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북인도 등 넓은 영토에 걸쳐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민족 | 설명 |
---|---|
힌두인 | 이교도라는 이유로 노예로 삼아 병사로 훈련시키기 좋았고, 신체 능력이 뛰어나 어려운 임무에 투입되었다. 시스탄의 역사학자는 힌두 군대가 무슬림과 기독교인을 학살한 것을 기록했다.[21] |
다일람인 | 카스피해 남부 민족으로, 사산 제국 시기부터 병사로 활용되었다. 이슬람에 저항하며 능력을 입증받았고, 이슬람으로 개종 후에는 파티마 왕조, 아바스 왕조, 부와이흐 왕조 등에서 용병으로 활약했다. 특히 정예 보병으로 유명했으며, 가즈나 왕조에서도 보병으로 활용되어 마흐무드가 튀르크계 세력을 물리치는 데 기여했다. 왕조 멸망까지 왕실 근위대나 호위 병사 등으로 채택되었다. |
아랍인과 쿠르드족 | 주로 군대 지휘관을 맡아 호라산과 자그로스 산맥 지역 방비를 담당했다. 일부 아랍 군대는 기병대로 활약하여 악마의 기수라고 불렸다. |
튀르크인 | 유목민 출신으로 기병 훈련에 능숙했으며, 칸다하르와 키르기스스탄의 고원 지대를 보유하여 기병 육성에 유리했다. 왕조 설립 초기부터 멸망 시기까지 군대의 핵심 병종이자 주력 군대로 사용되었다. |
군사력, 효율성, 전투력, 무기도 중요했지만, 병사 수가 가장 중요했다. 마흐무드 시기에는 약 10만 명의 보병과 기병이 있었다고 한다.[50] 1035년 술탄 마수드는 2만 명, 1038년에는 약 4만 명의 기병과 보병을 동원했다.[50]
가즈나 왕조는 전투 코끼리를 도입한 최초의 이슬람 군대 중 하나였다.[22] 호라산과 발루치스탄 북부에서 낙타를 사육하여 낙타 기병대를 편성, 1040년 단다나칸 전투에서 활용했다.
가즈나 왕조 군대의 핵심은 주로 투르크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 남쪽 힌두쿠시 산맥 이남 지역에서 훈련받고 모집된 수천 명의 아프가니스탄인들도 있었다. 라시카르가에 군사 훈련 센터가 설립되었고, 이 지역은 무기 제조로 유명했다. 펀자브 지역 점령 후, 힌두교도들을 군대에 고용하기 시작했다.
인도 병사들은 ''시파살라르-이-힌두완'' 지휘 아래 군대의 한 부분을 이루었고, 가즈니에 거주하며 종교를 실천했다. 수벤드레이(Suvendhray) 휘하의 인도 병사들은 마흐무드에게 충성을 지켰다. 틸락(Tilak)이라는 힌두교도의 지휘 아래 투르크 반군에 대항하기도 했다.[21]
가즈나 왕조의 군사 관행은 아바스 왕조에서 유래했다. 초기 원정에서 아라비아 말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008년 아난다팔라(Anandapala) 왕에 대항하여 '6000마리의 아라비아 말'이 파견되었다. 아라비아 기병대는 라호르의 가즈나 왕조 총독 아래 1118년까지 존속했다.
인도-갠지스 평원에 접근하여, 가즈나 왕조는 11세기와 12세기 동안 전투 코끼리를 사용한 최초의 무슬림 군대를 발전시켰다.[22] 코끼리들은 장갑판으로 보호되었다. 코끼리 사용은 중앙아시아에서는 외국 무기였다.
4. 문화
가즈나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유목민 출신이지만, 언어, 문화, 문학, 습관 등 여러 면에서 페르시아화되어 '페르시아 왕조'로 여겨졌다.[23] 가즈나 술탄들은 민족적으로 튀르크인이었지만, 그들의 사료는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 기록되어 튀르크인들의 관습과 사고방식을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가즈나 왕조 군대의 근간이 튀르크 군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의 필요와 열망에 맞춰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가즈나 왕조는 국가의 통치와 군주 통치에 있어 페르시아-이슬람 전통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통치자는 신의 호의를 받는 존재로 여겨졌고, 상인, 장인, 농민 등 백성을 다스렸다. 국가 운영과 재정 관리는 사만 왕조의 행정 전통을 이어받은 페르시아인 관료들이 담당했다. 이러한 점은 세속 권력에 대한 페르시아적 개념을 강화했다.
가즈나 왕조의 궁정 문화도 페르시아화되었다. 이브라힘과 그의 후계자 바흐람 샤 시대에는 아불 파라즈 루니, 사나이, 오스만 모크타리, 마수드 에 사이데 살만, 사이이드 하산 가즈나비와 같은 시인들이 활동하며 문학적 창의성이 높아졌다. 쿠스라우 말리크의 라호르 궁정에도 많은 훌륭한 시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작품은 전해지지 않는다.
11세기 가즈나 왕조 치하에서 페르시아 문학은 부흥기를 맞았다. 가즈나 궁정은 페르시아 문학을 후원하여 시스탄 출신의 시인 파루키 시스타니가 가즈니로 와서 활동했다. 시인 운수리는 마흐무드에게 바치는 짧은 산문시를 썼고, 마누체리는 와인을 마시는 것의 장점에 대한 시를 썼다.
마흐무드는 부하라를 본떠 가즈니를 학문의 중심지로 만들고, 파르다우시, 알 비루니 등 학자들을 초청했다. 그는 이븐 시나를 초청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마흐무드는 자신의 명성이 페르시아어로 알려지기를 원했고, 수백 명의 시인을 궁정에 모았다. 그는 레이와 이스파한의 도서관을 가즈니로 옮기고, 호라즘 학자들을 가즈나로 오게 했다. 그의 이란 침공으로 아제르바이잔과 이라크에서 페르시아어 문학이 시작되었다.
가즈나 왕조는 사만 왕조가 시작한 페르시아어 역사서 편찬 사업을 이어갔다. 11세기 후반에 집필된 역사학자 아볼 파즐 베이하키의 역사서『타리크 에 베이하키』가 대표적인 예이다.
가즈나 왕조는 튀르크계였지만, 사부크티긴과 마흐무드가 사만 왕조의 봉신으로 활동하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여 완전히 페르시아화되었다. 가즈나 왕조의 이란 통치는 통치자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외세의 지배로 보기 어렵다. 가즈나 왕조는 페르시아 시인들을 후원하고 문화를 주도하여, 페르시아어보다 아랍어를 선호한 부와이흐 왕조보다 더 페르시아적이었다.
역사가 보스워스는 "페르시아의 행정적·문화적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가즈나인들은 원래 튀르크계 출신이라는 배경을 버리고 페르시아-이슬람 전통과 대부분 동화되었다."라고 설명한다.
술탄 마흐무드의 인도 침공으로 펀자브 일대에 페르시아 문화가 정착되었고, 라호르는 주요 페르시아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가즈나 왕조가 발행하는 주화가 아랍어와 데바나가리 문자로 구성된 이중 언어 스타일을 갖기 시작한 것도 마흐무드 시기부터이다.
가즈니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에서 가즈나 왕조가 쌓아 올린 페르시아 문화는 12세기의 구르 침공에서도 살아남아 13세기 몽골 침공 때까지 이어졌다.
5. 유산
가즈나 왕조는 병사 수를 중요시하는 전통적인 군사 시스템에 의존했다. 마흐무드 시기에는 약 10만 명의 보병과 기병이 있었으며, 전쟁에 따라 병력 규모가 달라졌다. 술탄 마수드는 1035년에 2만 명, 1038년에는 약 4만 명의 군대를 동원했다.[50] 가즈나 왕조는 전투 코끼리를 도입하고 낙타 기병대를 편성하는 등 군사적인 시도를 했다.
절정기 가즈나 왕조는 오늘날의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대부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전역, 인도 북서부를 지배했다. 이들은 이슬람을 인도 아대륙으로 전파한 첫 번째 군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중국과 지중해 사이의 무역로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여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1040년 셀주크 제국에게 패배하여 페르시아 영토를 잃었고, 1세기 후 구르족에게 남은 영토를 모두 정복당했다.
가즈나 왕조의 정복은 튀르크-아프간 시대의 개막을 알렸으며, 이는 구르 왕조를 거쳐 델리 술탄국으로 이어졌다. 가즈나 왕조는 옥수스 강에서 인더스 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977년~1186년), 이 왕조의 역사는 아부 나스르 알-우트비가 기록했다.[24]
가즈나 왕조는 인도 도시 약탈과 인도 라자들로부터의 조공 징수를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중국과 지중해 사이의 무역로 중개자로서 이득을 얻었다. 가즈나 왕조 통치자들은 인도 아대륙으로 이슬람을 전파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가즈나 왕조는 1040년 셀주크 제국에게 페르시아 영토를 빼앗겼고, 한 세기 후에는 구리드가 남은 아대륙 영토를 장악했다.[25][26]
6. 통치자 목록
(신앙의 수호자)
(국가의 오른팔)
왈리 아미르 알 무미닌
(칼리파의 수호자)
(왕조의 권능)
(1차 재위)
(국가의 별)
(국가의 권능)
(2차 재위)
(국가의 별)
(국가의 찬란함)
(국가의 영광)
(국가의 지원자)
(국가의 아름다움)
(국가의 도움)
(국가의 고결함)
(국가의 완벽함)
(술탄 압달라)
(국가의 오른팔)
(국가의 명예)
(국가의 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