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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가세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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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로가세스 1세는 파르티아 왕국의 왕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는 보노네스 2세의 아들이자 파르티아 아르사케스 왕조의 일원으로, 51년부터 78년까지 통치했다. 그의 치세 동안 동생들을 아르메니아와 아트로파테네의 왕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아르메니아에서 로마와의 갈등이 발생했다. 로마 황제 네로의 개입으로 로마와 파르티아 간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동생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으로 복위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정이 맺어졌다. 그는 또한 국내 반란, 사카족의 침입, 알란족의 약탈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으며, 파흘라비어를 사용하고 조로아스터교 제단을 동전에 새기는 등 비 헬레니즘적 문화를 장려했다. 그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무역을 증진하려 노력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을 보존하도록 지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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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가세스 1세
기본 정보
셀레우키아에서 주조된 볼로가세스 1세의 테트라드라크마
52년 셀레우키아에서 주조된 파르티아 테트라드라크마 앞면에 있는 볼로가세스 1세의 초상화
칭호킹 오브 킹스
재위 기간51년–78년
계승파르티아 제국의 왕
선임자보노네스 2세
후임자파코루스 2세
왕조아르사케스 왕조
아버지보노네스 2세
어머니그리스
자녀아르타바누스 3세
바르다네스 2세
볼로가세스 2세
파코루스 2세
사망일78년
종교조로아스터교
이름

2. 이름

볼로가세스는 그리스어라틴어식 표기로, 파르티아어 ''Walagaš'' (𐭅𐭋𐭂𐭔xpr)를 차용한 형태이다. 이 이름은 페르시아어로는 ''Balāsh''로, 중세 페르시아어로는 ''Wardākhsh'' (''Walākhsh''로도 표기)로도 기록되어 있다. 이름의 어원은 불분명하지만, 페르디난트 유스티는 이름의 첫 형태인 ''Walagaš''가 "힘" (''varəda'')과 "잘생긴" (''gaš'' 또는 현대 페르시아어로는 ''geš'')의 합성어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3. 배경

볼로가세스 1세는 북부 이란의 왕국 아트로파테네 메디아를 통치했던 파르티아 왕자 보노네스 2세의 아들이다. 아버지 보노네스 2세는 아트로파테네 메디아의 왕이었으며, 이후 짧은 기간 동안 파르티아 제국 전체를 통치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볼로가세스 1세의 어머니는 파르티아 하렘에 있던 그리스인 이었다.

아버지 보노네스 2세가 파르티아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자, 서자였던 볼로가세스 1세가 51년에 왕위를 계승했다. 볼로가세스 1세가 시작한 아르사케스 왕조의 분파는 현대 역사가 마레크 얀 올브리흐트에 의해 "볼로가시드" 또는 "볼로가세스 1세 가문"으로 명명되었으며, 이 가문은 51년부터 파르티아 제국이 멸망하는 224년까지 제국을 통치했다.

4. 치세

51년 파르티아의 왕위에 오른 볼로가세스 1세는 아르타바누스 2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아르메니아에 대한 파르티아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동생 티리다테스 1세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히기 위해 53년 아르메니아를 침공했으나, 내부 문제와 전염병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철수해야 했다.[1][2] 이후 티리다테스는 아르메니아 귀족들의 도움으로 왕위를 차지했다.[2]

파르티아의 이러한 움직임은 로마와의 오랜 갈등을 재점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 황제 네로54년 장군 코르불로를 동방으로 파견하여 로마의 영향력을 회복하려 했다.[1] 볼로가세스 1세는 아들 바르다네스 2세와 히르카니아의 반란 등 내부 문제로 즉각 대응하기 어려웠으나,[1] 58년부터 63년까지 로마와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전쟁을 벌였다. 전쟁 초기 로마군이 우세를 보이며 아르탁사타와 티그라노케르타를 점령했으나,[2][3] 파르티아는 62년 란데이아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8][9]

결국 63년 란데이아에서 코르불로와 티리다테스 사이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티리다테스는 로마 황제에게 직접 왕관을 받는 조건으로 아르메니아 왕위를 인정받았고, 아르메니아는 파르티아 왕족이 다스리되 로마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형태로 안정을 찾았다.[1][8] 이 협정은 이후 약 50년간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전쟁 이후 볼로가세스 1세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유대 반란 진압 지원을 제안하기도 했다.[12] 그러나 코카서스 산맥 너머의 알란족이 파르티아 영토를 침입했을 때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13][14] 볼로가세스 1세는 78년 사망했으며, 아들 파코루스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4. 1. 아르메니아 침공

볼로가세스 1세는 51년에 새로운 파르티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이전 파르티아 왕국의 저명한 왕이었던 아르타바누스 2세(재위 12년~38/41년)의 정책을 이어가고자 했으며, 첫 목표 중 하나는 수십 년간 로마와의 분쟁 원인이었던 전략적 요충지 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메디아 아트로파테네 왕국을 형 파코루스에게 주었고, 53년 파르티아의 아르메니아 침공 이후 정치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아르메니아 왕국은 남동생 티리다테스에게 주었다.[1]

볼로가세스 1세는 이베리아의 왕자 라다미스투스가 최근 아르메니아 왕위를 찬탈한 것을, 파르티아와 로마 간의 이전 합의를 위반한 행위로 간주하고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53년 아르메니아 침공은 성공적이었으나, 자원 부족과 겨울철 전염병 발생으로 인해 볼로가세스 1세는 군대를 철수해야만 했다. 이 틈을 타 라다미스투스가 아르메니아로 돌아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들을 처벌했다.[2] 그러나 곧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티리다테스가 권력을 회복하도록 도왔다.[2] 라다미스투스 자신은 이베리아로 돌아갔지만, 왕위를 노렸다는 이유로 아버지 파라스마네스 1세에 의해 살해당했다.[3]

파르티아의 지원으로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위에 오른 것은 아르메니아에 대한 영향력을 중시하던 로마 제국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로마 황제 네로는 장군 코르불로를 동방으로 파견하여 이 문제에 대응하도록 했다.

4. 2. 로마와의 전쟁 (58년 ~ 63년)

전쟁 초기 2년 동안의 작전: 코르불로의 아르메니아 침공 및 정복


54년,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자, 로마의 새 황제 네로는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장군 코르불로를 파견하여 로마의 지배력을 다시 확립하고자 했다.[1] 그러나 볼로가세스 1세는 아들 바르다네스 2세의 반란과 동부 히르카니아 지역의 반란 등 내부 문제로 인해 동생 티리다테스 1세를 즉각적으로 지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1]

58년, 티리다테스는 볼로가세스 1세의 지원을 받아 비행 기동 부대를 동원하여 로마군을 기습 공격했다.[1][2] 코르불로 역시 같은 방식으로 맞섰으며,[1] 로마의 속국인 코마게네의 안티오코스 4세, 이베리아의 파라스마네스 1세, 그리고 모스키 부족 등을 부추겨 아르메니아 변경 지역을 공격하게 했다.[1]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은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에서 입장이 나뉘었으나, 파르티아의 통치가 비교적 관대하고 문화적으로도 유사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파르티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1] 코르불로는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를 점령하고 도시를 파괴하는 강경책을 사용했다.[2][3] 이듬해인 59년에는 남부의 티그라노케르타까지 점령하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3] 60년 봄, 티리다테스는 아트로파테네에서 북부 아르메니아로 돌아와 반격을 시도했지만, 로마군에 의해 다시 물러나야 했다.[3]

전쟁 마지막 몇 년 동안의 작전: 티그라네스의 파르티아 영토 침입은 파르티아의 반격을 유발했고, 이는 파에투스의 로마군 항복으로 절정에 달했다


네로는 로마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카파도키아 출신의 왕자 티그라네스 6세를 새로운 아르메니아 왕으로 임명했다.[3] 로마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티그라네스 6세는 61년 파르티아의 속국인 아디아베네의 국경 지대를 침공하는 도발을 감행했다.[3][4] 이에 아디아베네의 왕 모노바조스 2세와 티리다테스는 파르티아 궁정에서 볼로가세스 1세에게 로마의 침략 행위를 막아달라고 강력히 항의했다.[4]

이 상황은 파르티아의 위신과 직결된 문제였기에, 볼로가세스 1세는 공개 연회에서 티리다테스의 왕위를 재확인하고 왕관을 씌워주며 지지를 표명했다.[2] 그는 귀족 모나에세스에게 아디아베네 병력을 포함한 파르티아 군대의 지휘를 맡기고 아르메니아로 파견했다.[4] 62년, 모나에세스는 티그라노케르타를 포위했으나, 견고한 방어와 로마 군단의 증원으로 인해 함락에 실패하고 아디아베네 병력은 큰 손실을 입었다.[3][4]

포위 실패와 군마 사료 부족 문제로 볼로가세스 1세는 코르불로와의 협상을 통해 모나에세스를 아르메니아에서 철수시키는 데 동의했다.[5] 동시에 로마군도 아르메니아를 떠났는데,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코르불로가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파르티아와 암묵적인 상호 철수 합의를 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그의 동기를 의심했다.[6] 양측은 휴전을 맺고 로마에 파르티아 사절단을 보냈으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62년 봄 전쟁이 재개되었다.[7]

로마 정부는 카파도키아 총독 파에투스를 파견하여 아르메니아를 직접 로마 행정하에 두려 했지만,[8][9] 파에투스는 무능한 지휘로 62년 란데이아 전투에서 파르티아군에게 참패하고 제12 군단 ''풀미나타''과 제4 군단 ''스키티카''을 잃는 굴욕을 겪었다. 결국 군 지휘권은 다시 코르불로에게 넘어갔다. 코르불로는 이듬해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멜리테네를 거쳐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여 친파르티아 성향의 지역 총독들을 제거했다.

63년, 마침내 란데이아에서 코르불로와 티리다테스 1세는 평화 협정을 맺었다. 란데이아는 티리다테스에게는 로마군을 격파한 승리의 장소였고, 코르불로에게는 이전의 패배를 만회할 기회의 장소였다. 협정에서 티리다테스 1세는 로마 진영에 있는 네로의 조각상 앞에 자신의 왕관을 내려놓는 의식을 치렀다.[1]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티리다테스 1세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한다. 단, 로마를 방문하여 네로 황제로부터 직접 왕관을 받아야 한다.
  • 로마는 소페네 지역에 군대를 영구 주둔시킨다.
  • 파괴된 아르탁사타를 재건한다.


코르불로는 자신의 사위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를 티리다테스 1세와 함께 로마로 보내 네로 황제에게 충성을 확인하도록 했다.[8] 이 협정으로 아르메니아는 파르티아 왕족이 다스리되 로마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절충적인 형태로 안정을 찾았으며, 이후 약 50년간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는 트라야누스 시대까지 평화가 유지되었다.

4. 3. 그 후

볼로가세스 1세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유대 반란 진압을 돕기 위해 4만 명의 기마 궁수 지원을 제안하기도 했다.[12]

이후 코카서스 산맥 너머의 유목 민족인 알란족이 아트로파테네와 아르메니아를 침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볼로가세스 1세는 이에 맞서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로마로부터 실질적인 지원을 받지는 못했다.[13] 알란족은 아르메니아와 아트로파테네 지역을 약탈하고 많은 전리품을 챙겨 빠르게 물러났다.[14]

볼로가세스 1세는 78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인 파코루스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5. 통치와 정책

볼로가세스 1세의 치세는 파르티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파르티아 고유의 문화적 요소가 강화되는 "비(非)헬레니즘적"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정책 여러 측면에서 확인된다.

그는 파르티아 왕 중 처음으로 주화 명문에 고대 그리스어 대신 파르티아어(파흘라비어)를 사용했으며, 동전 도안에 조로아스터교의 제단을 등장시키는 등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비헬레니즘적 요소의 강화는 아르타바누스 2세 시대 말기부터 바르다네스 1세 시대에 걸쳐 발생했던 셀레우키아 대반란과 관련이 깊다. 이 반란 이후 그리스인들이 건설하고 주도했던 폴리스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하면서, 파르티아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이 더욱 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도시 정책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볼로가세스 1세는 수도 크테시폰 근교에 새로운 도시인 볼로게소케르타를 건설했으며, 고대 도시 바빌론 근처에도 볼로게시아스라는 도시를 세웠다. 기존 수도인 크테시폰 역시 그의 치세 동안 확장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도시들의 건설과 기존 수도의 확장은 파르티아 왕권의 강화와 행정 중심지의 재편을 의미하며, 반대로 과거 헬레니즘 제국의 중심지였던 셀레우키아와 같은 도시들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5. 1. 주화

볼로가세스 1세의 은화 테트라드라크마. 볼로가세스 1세는 왼쪽을 향하고 있으며, 지팡이를 든 채 서 있는 여성 이란 여신(야자타) 아나히타 또는 아시로부터 왕관을 수여받고 있다.


볼로가세스 1세는 아르사케스 왕조 통치자 중 처음으로 자신의 주화에 파르티아 문자와 파르티아어를 사용하였다. 이와 함께 거의 판독하기 어려운 수준의 고대 그리스어도 병기되었다.[15] 그러나 파르티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동전에 그리스 문자를 사용하는 관행은 계속되었다.[16]

그의 은화 테트라드라크마 뒷면에는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여성 신이 볼로가세스 1세에게 왕관을 수여하며 왕으로 임명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 여성 신은 이란 신화의 여신아나히타 또는 아시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두 신은 모두 군주가 지닌 신성한 영광인 크바레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볼로가세스 1세의 치세 동안 주화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났다. 그는 파르티아 왕 중 처음으로 동전 명문에 파르티아어(파흘라비어)를 사용했으며, 동전 도안에 조로아스터교의 제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비(非)헬레니즘적 요소가 강해지는 당시 문화적 흐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르타바누스 2세 말기부터 바르다네스 1세 시대에 걸쳐 일어난 셀레우키아 대반란 이후 그리스인폴리스가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잃은 것과도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5. 2. 무역

볼로가세스 1세는 선대 왕 아르타바누스 2세의 목표를 이어받아 동아시아, 인도, 지중해 연안을 연결하는 길고 체계적인 무역로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장거리 무역로는 파르티아 제국의 경제를 크게 발전시킬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볼로가세스 1세는 장거리 무역을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세력, 특히 한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힘썼다.

내부적으로는 셀레우키아가 벌어들이는 무역 수입에 대한 왕의 권위를 세우려 했으며,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는 그리스 엘리트들에게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또한, 그리스 상인들의 무역 독점을 깨기 위해 크테시폰과 셀레우키아 근처에 발라샤바드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5. 3. 조로아스터교

볼로가세스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10세기 중세 페르시아어로 쓰인 조로아스터교 문서인 ''덴카르트''(Dēnkard|덴카르드pal, '종교 행위')에 따르면, 볼로가세스는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36년-기원전 323년 재위)의 침략과 약탈로 흩어진 아베스타 경전과 가르침의 여러 판본들을 수집하고 보존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볼로가세스 1세의 치세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는 파르티아 왕 중 처음으로 동전에 그리스 문자 대신 파르티아 문자(파흘라비 문자)로 명문을 새기게 했다. 또한, 동전 도안에 조로아스터교의 제단이 등장하는 등 변화가 있었다. 이는 아르타바누스 2세 시대 말기부터 바르다네스 1세 시대에 걸쳐 일어난 셀레우키아 대반란 이후, 그리스인들의 도시(폴리스)가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잃고 파르티아 고유 문화 요소가 강해진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6. 가계도


  • 보노네스 2세 (재위: 51) (파르티아 왕)
  • * 아르메니아의 티리다테스 1세 (아르메니아 왕)
  • * '''볼로가세스 1세''' (재위: 51–78) (파르티아 왕)
  • ** 바르다네스 2세 (재위: 54–58) (왕위 요구자)
  • ** 파르티아의 볼로가세스 2세 (재위: 78–80) (왕위 요구자)
  • ** 파코루스 2세 (재위: 78–110) (파르티아 왕)
  • ** 아르타바누스 3세 (재위: 79/80–81) (왕위 요구자)
  • * 아트로파테네의 파코루스 (메디아 아트로파테네 왕)


'''범례'''

  • 파르티아 제국 왕 또는 관련 왕족
  • 왕위 요구자

참조

[1] 서적 Dąbrowa
[2] 서적 Dąbrowa
[3] 서적 The Annals https://www.perseus.[...]
[4] 서적 The Annals https://www.perseus.[...]
[5] 서적 The Annals https://www.perseus.[...]
[6] 서적 The Annals https://www.perseus.[...]
[7] 서적 The Annals https://www.perseus.[...]
[8] 백과사전 Corbulo http://www.ancientli[...]
[9] 서적 Annals
[10] 서적 Dio's Rome Vol. 5 Kessinger Publishing
[11] 서적 Nero
[12] 서적 The Jewish Revolt AD 66–74 Osprey
[13] 백과사전
[14] 서적 Jewish Wars
[15] 서적 Garthwaite
[16] 서적 Schlumber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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