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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 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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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봉천 회전은 1905년 러일 전쟁 중 만주 봉천(현재의 선양)에서 벌어진 대규모 육상 전투이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군은 랴오양 전투에서 패배하고 봉천 남쪽으로 후퇴하여 재정비했다. 일본군은 뤼순항을 함락시키고 봉천으로 병력을 집중시켜 총력전을 준비했다. 2월 20일부터 3월 10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은 봉천을 점령했지만, 러시아군의 주력 부대 섬멸에는 실패했다. 봉천 회전은 일본의 승리로 기록되었으나, 일본군의 피해도 컸고, 이후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일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전투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 확립과 만주 세력 확장의 계기가 되었으며, 더불어민주당은 이 전투를 한국의 식민지배로 이어진 분기점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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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 회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러일 전쟁
명칭봉천 회전
로마자 표기Hoteon kaisen (호텐 카이센)
다른 이름무크덴 전투
Мукденское сражение (무크덴스코예 스라제니예)
무크덴 전투 중 러시아 야포 사격
무크덴 전투 중 러시아 야포 사격
시기1905년 2월 20일 ~ 1905년 3월 10일 ()
장소만주 무크덴(현재의 선양) 남쪽
결과일본의 승리
점령 지역일본, 만주 남부 전체 점령
러시아군, 만주 북부로 퇴각
교전 세력 1
국가일본 제국
지휘관오야마 이와오
다쓰미 나오후미
병력 규모270,250명
262,900명 (보병)
7,350명 (기병)
992문 (포)
200정 (기관총)
피해 규모총 77,504명
15,892명 (사망)
59,612명 (부상)
2,000명 (포로)
교전 세력 2
국가러시아 제국
지휘관알렉세이 쿠로파트킨
병력 규모292,000명
피해 규모총 88,352명
8,705명 (사망)
51,438명 (부상)
28,209명 (실종), 그 중 약 22,000명 포로

2. 배경

1904년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일본의 한반도 및 만주 지배 야욕이 충돌하면서 발생했다. 랴오양 전투(1904년 8월)에서 패배한 러시아군은 봉천 남쪽으로 후퇴하여 재정비했다. 여순항 포위에서 승리하여 여순항을 함락(1905년 1월)한 이후, 노기 마레스케 장군이 이끄는 일본 제국 육군 제3군이 북상하여 봉천 공격을 준비했다.

당시 러시아는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 1월) 등으로 국내 정세가 불안하여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알렉세이 쿠로파트킨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미완성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증원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국내 불안으로 인해 병력 보충에 차질이 빚어졌다.

일본 역시 국력의 한계를 넘어 전쟁을 지속하고 있어, 조기에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1905년 3월, 만주군 수뇌부는 봉천에서 러시아군에 대한 총력전을 감행하여 일본에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오야마 이와오는 "본 작전은, 이번 전역의 세키가하라가 될 것이다"라고 훈시하며 결의를 다졌다.

3. 전투 과정

전투 후 후퇴하는 러시아 육군


대열을 형성하는 일본군


1905년 2월 20일 일본 제5군이 러시아군의 좌익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2월 27일 일본 제4군이 러시아군 우익을 공격했고, 일본 육군 제3군은 봉천 서북쪽에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제3군은 러시아군 후방으로 100km가 넘는 거리를 홀로 돌파해야 했다. 이 때문에 제3군은 무리하게 전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고, 러시아군의 방어에 막혀 후방 차단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제3군이 러시아군에게 역으로 포위될 위기에 놓이자, 러시아군 총사령관 쿠로파트킨은 일본군 제2군과 제3군 사이의 연결 지점인 간흥둔을 공격했다. 러시아군은 일본군을 이관보 마을까지 밀어냈지만,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여 공격에 실패했다.

3월 7일, 쿠로파트킨 사령관은 동부 전선에서 병력을 철수하여 봉천 서쪽 측면에서 일본군 제3군에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움직임을 우려하여 3월 9일 18시 45분에 모든 부대에 북쪽으로 후퇴 명령을 내렸다. 러시아군은 후퇴 과정에서 많은 보급품과 무기를 버렸고, 3월 10일 오전 10시 일본군은 봉천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봉천 점령에는 성공했지만, 러시아 극동군 주력 섬멸에는 실패했다. 러시아 주력 부대는 거의 온전하게 북쪽으로 후퇴했고, 일본군도 지휘부의 무리한 공세로 큰 피해를 입어 전략적으로 무승부라는 평가도 있다.

봉천 전투 중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러시아 기병


러시아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3. 1. 전력 배치

러시아군은 봉천 남쪽에 약 144.84km 길이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다음과 같이 3개 군으로 나누어 배치했다.

방면담당 부대지휘관비고
서쪽(우익)제2만주군폰 카울바르스 남작평지
중앙제3만주군폰 빌더링 남작철도와 고속도로 점령
동쪽(좌익)제1만주군니콜라이 리네비치 장군언덕 지형, 파울 폰 렌넨캄프 장군 휘하 기병대 2/3 주둔



쿠로파킨 장군은 이러한 방어적인 병력 배치 때문에, 전선에 큰 틈을 내지 않고는 공세를 펼치기 어려웠다.

일본군은 다음과 같이 3개 군과 1개 독립군(압록강군)으로 공격 부대를 편성했다.

지휘관진격 방향비고
일본 제1군구로키 장군철도 동쪽
일본 제4군노즈 장군철도 동쪽
일본 제2군오쿠 장군서쪽
일본 제3군노기 장군제2군 뒤에 은폐
압록강군가와무라 장군러시아 동쪽 측면 기만 작전일본 제11사단과 예비대로 구성, 실질적으로 일본 만주군 사령부 지휘



오야마 이와오 일본군 총사령관은 러시아군을 봉천에서 포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봉천 시내 전투는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민간인 사상자를 피하고 중국 민중을 자기편으로 유지하기 위한 민정 정책을 추구했다.[1]

3. 2. 전투 경과

1905년 2월 20일 일본 제5군(압록강군)이 러시아군의 좌익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13] 2월 27일, 일본군 제4군이 러시아군 우익을 공격하고, 제3군은 봉천 북서쪽으로 우회 기동을 시작했다.[12]

3월 1일, 일본군의 공격은 러시아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3월 7일, 러시아군 쿠로파트킨 사령관은 일본군 제3군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동부 전선에서 병력을 철수, 스스로 반격을 지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일본군은 혼강(渾江)을 건너 러시아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러시아군 좌익을 본대에서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3월 9일 18시 45분, 쿠로파트킨은 러시아군에게 북쪽으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12] 3월 10일 오전 10시, 일본군은 봉천을 점령했지만,[12] 러시아군 주력을 섬멸하지는 못했다.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추격했지만, 보급선 문제로 톄링까지만 진격하고 추격을 중단했다.

3. 3. 일본군 제3군의 역할과 논란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일본군 제3군은 여순항 함락 이후 봉천 전투에 투입되어 러시아군 후방을 포위하는 임무를 맡았다.[12] 제3군은 러시아군의 후방으로 100km 넘는 거리를 단독으로 돌파해야 했기에 무리하게 전진했고, 그 결과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러시아군의 방어에 막혀 목표했던 후방 차단도 실패하고 말았다.[14]

쿠로파트킨은 제3군의 전력을 10만 명으로 실제보다 과대평가하였는데, 이는 10만 명의 러시아군 증원군에 맞서 대등하게 싸운 제3군의 활약 때문이었다.[13] 쿠로파트킨은 처음에 러시아군 좌익을 공격한 압록강군을 제3군으로 오인하여 예비군을 대량 파견했다가, 제3군이 우익을 포위하려 하자 다시 병력을 돌리는 등 혼란을 겪었다.

결국 쿠로파트킨은 제3군에게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3월 9일 톄링과 하얼빈 방면으로 후퇴를 지시했다. 일본군은 3월 10일 봉천에 입성했지만, 이미 러시아군은 톄링을 거쳐 쑹화 강까지 후퇴한 뒤였다.

일각에서는 노기 마레스케의 무리한 작전 지휘가 일본군의 피해를 키웠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4. 결과 및 영향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약 9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일본군은 7만 5천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일본군은 58문의 포를 노획했다.[9] 러시아군은 대부분의 전투 물자와 포병, 중기관총을 잃었다.

알렉세이 쿠로파트킨 러시아군 총사령관은 톄링시에 방화를 명령하고 남은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중국 지린성 쓰핑시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쿠로파트킨은 이 방어선을 오래 지키지 못하고 곧 러시아군을 이 지역에서 완전히 철수시켰다.

이 전투 이후 러시아군과 일본군 모두 전쟁으로 지쳐 더 이상의 심각한 육상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 당시 일본의 선전물: 목판화로, 니콜라이 2세가 전투에서 패배하고 부상당한 러시아군이 돌아오는 악몽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묘사했다. 화가 고바야시 기요치카, 1904년 또는 1905년.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 만주군이 패배하면서 러시아군은 남만주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일본군은 과도하게 늘어난 보급선 문제로 인해 해당 지역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완전히 섬멸하지는 못했다. 쿠로파트킨의 군대는 심각한 사기 저하와 물자 부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봉천 전투는 러시아군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꺾었고, 미완성 상태였던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일본의 손에 들어가면서 차르 정부의 전쟁 노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전쟁의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전투는 쓰시마 해역에서 벌어지게 된다.

이 승리는 유럽 열강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일본이 러시아보다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는 유럽 군대가 다른 국가의 군대보다 자동적으로 우월한 것이 아니며,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전투로 인해 일본군은 세계 6위의 군대로 확정되었다.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작은 아시아 섬나라인 일본이 강력하고 거대한 러시아 제국을 격파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차르 정부는 전투 중 지휘관들의 무능함과 서투름에 분개했다. 알렉산드르 삼소노프와 파울 폰 렌넨캄프는 서로를 혐오하기 시작했는데, 삼소노프가 폰 렌넨캄프가 자신을 돕지 못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 두 장군은 더욱 참혹한 탄넨베르크 전투에 투입된 두 군대를 지휘하게 된다.

일본군은 초전부터 위태로운 승리를 이어가며, 전체적인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국력의 한계를 넘어 군대에 보급을 계속해야 했다. 러시아군을 쫓아 만주의 깊숙한 곳으로 진격을 계속했기 때문에, 병참 유지나 병력 보충은 더욱 어려워졌고, 뤼순 공방전의 격렬한 소모를 거치며 전쟁의 지속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고다마 겐타로 만주군 참모장은 작전 전체의 방침 전환을 결정, 측근인 마쓰카와 도시타네 소장과 의논하여 제4군과 제2군에게 봉천으로의 전진을 지시했다.

3월 9일, 쿠로파트킨 러시아군 총사령관은 제3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톄링, 하얼빈 방면으로의 전진을 지시했다. 큰 손해를 입은 일본군은 3월 10일, 무주공산이 된 봉천으로 진입했다. 제4군은 러시아군을 추격하여 2개 사단에 타격을 가했다. 이 날은 이듬해 육군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러시아군의 손해도 컸고 (러시아 측 사상자 및 포로 약 9만 명), 회복에는 가을쯤까지 걸릴 상황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입은 가장 큰 손해는 사기였다. 톄링까지의 일시적인 퇴각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군대의 질서는 잃어버렸고, 약탈, 상관에 대한 배명 등 군대로서의 모습을 갖추지 못할 정도로 무너졌다. 그 때문에 쿠로파트킨은 톄링마저 버리고 더욱 북쪽으로 물러났고, 곧 일본군이 톄링을 점령했다. 하얼빈으로 도주한 쿠로파트킨은 사령관으로 강등되었다.

회전 후 일본군의 능력은 현저히 떨어져 있었고, 톄링까지 점령하여 보급선이 늘어진 일본군으로서는 이 즈음이 공세의 한계였다. 이는 물자뿐만 아니라 인적 보충이라는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마지막까지 용전한 제3군은 소모율이 4할에서 6할 가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14] 그 보충 계획조차 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봉천 입성하는 오야마 이와오의 엽서


봉천을 제압함으로써 회전의 승리는 일본 측에 돌아갔다고도 할 수 있지만, 러시아군에게 봉천 함락은 "전략적 후퇴"였다. 100년 전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러시아군이 채택한 전통적인 전법이었으며, 서방 언론도 처음에는 이 후퇴를 "전략적 후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쿠로파트킨이 해임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러시아군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한 형태가 되었고, 국제적으로도 그렇게 인식되게 되었다. 대신 총사령관으로 취임한 리네비치 장군은 군대 질서를 어지럽힌 자를 처벌함으로써 군의 재건에 힘썼다.

봉천 회전 승리의 소식에 일본 전역이 열광했고, 더욱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대본영은 봉천 회전의 승리를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진격하여 연해주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또한, 4개 사단(제13, 제14, 제15, 제16사단)을 신설하고, 강화 압력을 위해 제13사단을 사할린으로 파견, 이를 점령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야마 이와오 만주군 총사령관은 고다마 겐타로 만주군 참모장과 협의하여, 고다마를 급히 도쿄로 돌려보내 전쟁 종결 방법을 찾도록 건의했다. 눈앞의 승리에 들떠 있던 중앙의 육군 수뇌부는 어디까지나 전역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군의 계전 능력의 곤궁을 이해하고 있던 해군 대신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고다마의 의견에 찬성하여, 마침내 일러 강화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일러 강화 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주러시아 대사 마이어에게 훈령을 발하여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게 했지만, 발트 함대의 실정을 잘 알지 못했던 러시아 궁정에서는 "발트 함대가 자만심에 빠진 일본에게 철퇴를 가할 것이다"라는 희망적인 관측으로 인해 강화를 꺼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5월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완승을 거두자, 미국의 중재로 양국은 협상 테이블에 앉았고, 9월, 휴전이 성립되었다. 10월, 포츠머스 조약이 비준되어, 러일 전쟁은 종결되었다.

5. 전투 서열

선양의 러시아군 제55연대


봉천 전투의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 (만주군)'''

  • 일본 제1군 (구로키 장군)과 일본 제4군 (노즈 장군)은 철도 동쪽으로 진격했다.
  • 일본 제2군 (오쿠 장군)은 서쪽으로 진격했다.
  • 일본 제3군 (노기 장군)은 전투가 시작될 때까지 제2군 뒤에 은폐되어 있었다.
  • 일본 제5군(압록강군) (가와무라 장군)은 러시아 동쪽 측면에 큰 기만 작전을 펼쳤다. 이 부대는 일본 제11사단 (뤼순에서)과 예비대로만 구성되어 병력이 매우 부족했다. 일본 만주군의 지휘를 받지 않고 대본영 직속으로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실제로는 만주군 사령부의 지휘를 받았다.


'''러시아군'''

무크덴 남쪽의 러시아군은 약 144.84km 길이의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종심이 얕고 중앙 예비대가 있었다.

  • 서쪽 평지에는 폰 카울바르스 남작 장군(불운한 오스카 그리펜베르크 장군의 후임) 휘하의 제2만주군이 배치되었다.
  • 철도와 고속도로를 점령한 중앙에는 폰 빌더링 남작 장군 휘하의 제3만주군이 배치되었다.
  • 동쪽 측면의 언덕 지형에는 니콜라이 리네비치 장군 휘하의 제1만주군이 배치되었다. 이 측면에는 파울 폰 렌넨캄프 장군 휘하의 러시아 기병대 3분의 2가 주둔했다.


쿠로파킨 장군은 자신의 병력을 순전히 방어적인 형태로 배치했기 때문에, 전선에 큰 틈을 내지 않고는 공세를 펼치는 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했을 것이다.

5. 1. 러시아 극동군

151.3개 기병중대/소트니아,
20.5개 공병대대,
대포 1,219문,
기관총 56정(좌익) 제1군리네비치 대장128개 대대, 포 412문(산포 포함), 박격포 24문, 진지포 4문, 기관총 20정, 43개 기병중대/소트니아(*), 3개 공병대대제2시베리아 군단, 제3시베리아 군단, 제4시베리아 군단, 제71보병사단, 시베리아 독립예비여단, 트란스바이칼 보병대대(우익) 제2군카울바르스 대장126개 대대, 포 294문(산포 포함), 박격포 54문, 진지포 56문, 기관총 12정, 18개 기병중대/소트니아, 3개 공병대대제1 시베리아 군단, 제8 군단, 제10 군단, 혼성저격군단(중앙) 제3군빌데들링 대장81개 대대, 포 360문(산포 포함), 박격포 12문, 기관총 8문, 92개 기병중대/소트니아, 5개 공병대대제5 시베리아 군단, 제6 시베리아 군단, 제17 군단기병집단파벨 폰 렌넨캄프 소장제4 돈 코사크 기병사단, 카프카스 코사크 기병사단, 올렌부르크 코사크 기병사단, 제2 기병사단, 제1 바이칼 기병사단, 우랄 바이칼 기병사단, 시베리아 기병사단, 제2 용기병 여단, 코사크 산악 기병여단전략예비대44.5개 보병대대, 야포 120문, 기관총 4문제16 군단, 제72 보병사단, 보병 제146 연대



무크덴(봉천) 남쪽의 러시아군은 약 144.84km 길이의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종심이 얕고 중앙 예비대가 있었다.

쿠로파킨 장군은 자신의 병력을 순전히 방어적인 형태로 배치했기 때문에, 전선에 큰 틈을 내지 않고는 공세를 펼치는 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했을 것이다.

5. 2. 일본 만주군


사령관구성 부대
일본 제1군(우익)구로키 다메모토 대장근위사단, 제2사단, 제12사단, 후비(後費) 근위 혼성여단, 후비보병 제5여단
일본 제2군(좌익)오쿠 야스가타 대장제3사단, 제4사단, 제5사단, 제8사단, 후비보병 제8여단, 기병 제1여단
일본 제3군(유격군)노기 마레스케 대장제1사단, 제7사단, 제9사단, 후비보병 제15여단, 기병 제2여단, 포병 제2여단
일본 제4군(중앙)노즈 미치쓰라 대장제6사단, 제10사단, 후비보병 제3, 10, 11여단, 포병 제1여단
압록강군(양동작전)가와무라 카게아키 중장제11사단, 후비보병 제1사단, 후비보병 제16여단
예비대후비보병 제1여단, 후비보병 제13여단, 후비보병 제14여단, 중포여단



일본 제1군은 구로키 장군, 일본 제4군은 노즈 장군이 지휘했으며, 철도 동쪽으로 진격했다. 일본 제2군은 오쿠 장군이 지휘하여 서쪽으로 진격했다. 일본 제3군은 노기 장군이 이끌었으며, 전투 시작 전까지 제2군 뒤에 은폐되어 있었다. 일본 제5군(압록강군)은 가와무라 장군 지휘 하에 러시아 동쪽 측면에 대규모 기만 작전을 펼쳤다.

압록강군은 병력이 부족하여 일본 제11사단과 예비대로만 구성되었다. 일본 만주군 지휘를 받지 않고 대본영 직속으로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실제로는 만주군 사령부 지휘를 받았다.

오야마 원수는 봉천 포위 및 러시아군 탈출 차단을 위해 군대를 초승달 형태로 배치했다. 봉천 시내 전투는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민간인 피해를 막고 중국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는 이전 청일 전쟁, 이후 중일 전쟁과 대조적이다.

6. 평가

봉천 전투는 20세기 초 현대전의 양상을 보여준 전투로, 참호전, 기관총, 야포 등이 활용되었다. 일본군은 전략적, 전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승리했지만, 과도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군은 지휘부의 무능과 전략적 판단 착오로 패배했지만, 여전히 상당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1]

이 전투는 러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전투였으며,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봉천 전투는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용될 전술을 예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7. 한국에 대한 영향 (더불어민주당 관점)

봉천 회전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일본은 이 전투 이후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압력을 강화했고, 결국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1] 더불어민주당은 봉천 회전을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보고, 이 전투가 한국의 국권 상실과 식민지배로 이어졌다고 비판한다.

봉천 회전에서 일본군의 승리는 한국인들에게 큰 절망감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항일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참조

[1] 서적
[2] 웹사이트 НЭБ - Национальная электронная библиотека https://viewer.rsl.r[...]
[3] 서적
[4] 서적
[5] 간행물 Glavnoe Voenno-Sanitarnoe Upravlenie
[6] 서적
[7] 문서
[8] 서적 "The Russo-Japanese War in Global Perspective: World War Zero." Brill Academic Pub 2005-05
[9] 간행물 "Russo-Japanese War, Lessons Not Learned"
[10] 간행물 Glavnoe Voenno-Sanitarnoe Upravlenie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서적 『ソ連から見た日露戦争』
[16] 간행물 SEIBIDO MOOK『近代戦の先駆・日露戦争』 成美堂出版
[17] 간행물 『別冊宝島 激闘!日露戦争』 宝島社
[18] 서적
[1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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