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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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이라트는 동부 몽골과 언어, 문화 등을 공유하며, 몽골 제국 시기에는 칭기스 칸에게 귀순하여 제국 내에서 활약했다. 14세기~15세기에는 오이라트 부족 연합을 형성하며 세력을 키웠으나, 명나라의 간섭과 에센 칸의 몰락으로 인해 쇠퇴했다. 이후 17세기에는 분열과 이동을 거쳐 준가르 제국을 건설했으나 청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오늘날 오이라트는 러시아의 칼미크 공화국, 몽골,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오이라트는 몽골 제국 이전부터 존재했던 '숲의 부족'에서 기원했으며,[5][6] 14세기에 남쪽으로 이동했다.[13] 몽골 제국 시대에 칭기스 칸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주요 부족으로 성장했다.[49]
2. 역사
13세기 초,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수령 쿠두카 베키는 칭기스 칸에게 귀순하여 오이라트 4개 투멘(만호대)의 장으로 임명되었다.[49] 쿠두카 베키 가문은 칭기스 칸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 부마(駙馬, 퀴레겐mn) 가문이 되었고, 몽골 제국의 유력 부족 집단으로 성장했다.[49]
원나라 멸망 후, 오이라트는 동부 몽골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발전시켰다.[10] 그들은 서부 몽골의 4개 주요 부족(몽골어: ''дөрвөн ойрд'', ''дөрвөн ойрaд'')의 느슨한 연합체로 재결집했다.[17][18] 이들은 알타이 산맥 외딴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동쪽으로 점차 영토를 넓혀갔다.[17]
15세기 초, 오이라트 부족장 마흐무드는 명나라 영락제의 몽골 원정에 협력하여 최대 세력으로 떠올랐으나, 영락제의 견제로 쇠퇴하였다.[19][20] 이후 몽골에서는 칸위가 잇따라 바뀌고 부족 집단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사십 몽골(도친 몽골, 韃靼)과 4 오이라트 (돌번 오이라트, 瓦剌)라 불리는 두 개의 큰 부족 연합이 형성되었다.[17][18]
영락제 사후 명나라의 압력이 약화되자, 마흐무드의 아들 토곤은 1434년 아스트 부족의 아르쿠타이를 멸망시키고 칸을 자신의 꼭두각시로 옹립하여 "40 몽골"을 복속시켰다.[10] 토곤과 그의 아들 에센은 서쪽의 모굴리스탄 칸국, 우즈베크 등 유목 국가와 싸워 세력을 확대했고, 몽골 고원의 거의 모든 부족을 제어하기에 이르렀다.
1449년, 에센은 명나라를 침공하여 정통제를 포로로 잡는 토목의 변을 일으켰다.[19][20] 1453년에는 스스로 칸위에 올랐으나, 칭기스 칸의 혈통이 아니었기에 몽골인들의 반발을 샀고, 1년 만에 살해당했다.[17][18]
에센 칸 사후, 오이라트는 쇠퇴하였으나 몽골 칸위 쟁탈전에 계속 개입하며 서부 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했다.[19][20] 1487년, 다얀 칸의 등장으로 몽골이 재통일되면서 오이라트는 서쪽으로 밀려났다. 16세기 중반, 알탄 칸에게 패배하고, 16세기 후반에는 할하 알탄 칸국에 복속되었다. 1623년, 4 오이라트 연합군이 할하부의 알탄 칸을 살해하면서 몽골로부터 독립했다.[17][18]
1632년, 케레이트의 옹 칸의 후예를 자칭하는 오이라트의 태사 등이 이끄는 토르구트 부족은 내분을 피해 서쪽의 우랄강(야이크 강) 유역으로 이동했다.[48] 1634년에는 볼가강 하류의 노가이 오르다를 침공하여 노가이인을 추방하고, 칼미크 칸국(1630년 - 1771년)을 건국했다. 이들의 후예가 현재의 칼미크 공화국에 사는 칼미크인이다.[48]
1630년경 내분 이후, 호쇼트부의 수장이 된 구시 칸(투르바이후)은 달라이 라마의 종파 겔룩파가 티베트에서 위기에 빠진 것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1636년에 오이라트 군을 이끌고 출동했다.[48] 1637년 초, 티베트 북동부 암도(현 칭하이성)를 제압한 후 라사에 올라 달라이 라마 5세로부터 "샤진바리쿠치 노민 칸, 텐진 츄키 걀포" 칭호를 받았다.[48] 1642년까지 티베트를 제압하고 구시 칸 왕조를 수립했다.[48]
17세기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 서부에서 알타이 산맥을 거쳐 동투르키스탄 북부의 준가리아에 걸쳐 초원 지대에 할거하며, 호쇼트 부족이 유력해졌다.[48] 오이라트 각부의 수장들은 칭기즈 칸의 자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칸이 될 수 없었고, 달라이 라마가 오이라트의 유력 지도자 중 한 명에게 칸 호칭과 인장을 수여하는 관례가 생겼다.[48]
1620년대부터 1630년대 중반에 걸쳐 몽골 남부(내몽골) 제후들이 청나라(다이칭국)에 복속해 갔을 때, 남은 몽골 북부(할하) 제후들은 오이라트와의 오랜 항쟁에 종지부를 찍고 오이라트와 대등한 입장에서 강화하고 동맹을 맺었다.[48]
오이라트 본국에서는 호쇼트, 준가르, 토르구트의 수장들이 교대로 순차적으로 칸호를, 준가르부의 수장이 독점적으로 콩타이지호를 받았다.[48]이름 부족 칭호(티베트어, 괄호 안은 몽골어) 시기 투르바이흐 호쇼트 텐진 츄키 걀포(샤진바리크치 노민 칸) 1637년 오칠트 호쇼트 세첸 걀포(샤진바리크치 노민 칸) 1666년 갈단 준가르 간덴 텐진 보쇼크투 칸 1678년 아유시(아유키) 토르구트 다이칭 아유시 칸 1697년 이름 부족 칭호(티베트어, 괄호 안은 몽골어) 재위 호토고친 준가르 바토르 콩타이지 1637년 - 1653년 셍게 준가르 콩타이지 1653년 - 1670년 갈단 준가르 콩타이지 1671년 - 1678년 (1678년부터 1696년까지 칸) 체왕 아브탄 준가르 에르데니 조리크투 콩타이지 1694년 - 1727년 갈단 체린 준가르 콩타이지 1727년 - 1745년 라마다르자 준가르 콩타이지 1750년 - 1752년 다와치 준가르 콩타이지 1753년 - 1755년
1672년, 바토르 콩타이지의 아들 센게가 내분으로 살해되자, 그의 동생 갈단이 준가르 부족장이 되었다. 갈단은 오이라트 내의 라이벌들을 굴복시키고 달라이 라마 5세의 지지를 받아 동투르키스탄에서 몽골 고원 서부에 이르는 대유목 제국을 건설했다.
갈단은 몽골 할하 부족의 내분에 개입하여 몽골 고원 중부에 쳐들어갔으나, 할하의 반갈단 세력은 내몽골로 도망쳐 청 강희제에게 복속했다. 이로 인해 몽골 고원 지배권을 둘러싸고 오이라트와 청의 전면전이 벌어졌다. 갈단은 패배하고 도주 중 사망했으며, 이 항쟁으로 할하는 청에 복속되었다.
체왕랍탄 등 준가르 부족장들은 갈단의 기반을 이어받아 오이라트를 계속 지배하며 티베트와 청해를 두고 청과 대립했다. 청은 1723년부터 1724년에 걸쳐 티베트, 1754년부터 1755년에 걸쳐 준가리아에 출병하여 구시 칸 왕조와 준가르 제국을 정복·해체했다.
1760년 일리 강 계곡의 준가르 제국 본령에서 반청 반란이 일어났지만, 건륭제는 격렬한 탄압으로 응했고, 청군이 들여온 천연두 유행으로 일리 강 계곡의 준가르 부족은 거의 절멸했다.
청나라 멸망 후, 몽골 지역의 오이라트는 몽골국(현 몽골)에, 신장 지역의 오이라트는 중국에 편입되었다. 볼가 강 유역의 칼미크인은 러시아 제국, 소비에트 연방을 거쳐 현재 러시아 연방 칼미크 공화국을 이루고 있다.[25]
2. 1. 몽골 제국 시대
13세기 초,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수령 쿠두카 베키는 칭기스 칸에게 귀순하여 오이라트 4개 투멘(만호대)의 장으로 임명되었다.[49] 쿠두카 베키 가문은 칭기스 칸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 부마(駙馬, 퀴레겐mn) 가문이 되었고, 몽골 제국의 유력 부족 집단으로 성장했다.[49]
몽골 제국에는 아르군 아가와 그의 아들 나우루즈와 같은 주목할 만한 오이라트인들이 있었다. 1256년, 부하-테무르(Буха-Төмөр, Бөхтөмөрmn) 휘하의 오이라트 집단이 훌라구의 아바스 왕조 원정에 합류하여 이란에서 니자리파에 대한 몽골 원정에 참여했다. 일 칸국의 훌라구와 그의 후계자 아바카는 그들을 터키로 재정착시켰다. 그들은 제2차 호므스 전투에 참여하여 몽골군이 패배했다.[14]
몽골 제국의 제위 계승 전쟁에서 아리크 부케를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지지했으나 패배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었다.[15]
오이라트족의 쿠두카 베키 가문은 13세기를 통해 콩기라트 부족 등과 함께 칭기스 칸 가문의 주요 인척이 된 민족이다. 쿠두카 베키 자신은 그 후 톨루이의 우익군 막료가 되었지만, 이날치와 토렐치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칭기스 칸은 이날치에게는 바투의 누이동생 코리 에게치를, 토렐치에게는 보르테와의 사이에서 낳은 제2 황녀 치체겐을 아내로 주었다. 몽골 제국의 마지막 이란 총독이었던 아르군 아가도 쿠두카 베키 가문은 아니지만 오이라트 부족 출신이었다.
토렐치의 딸들은 칭기스 가문과의 인척 관계가 특히 많았는데, 톨루이에게 시집갔다가 나중에 몽케의 제1 정비가 된 오굴 토미쉬 황후(구육의 비 오굴 가이미쉬와는 다른 인물)와 훌레구의 제4 정비 올제이 하툰, 조치 울루스의 바투의 차남 토크칸에게 시집가 몽케 테무르, 토데 몽케의 생모가 된 쿠추 하툰이 있다. 또한 치체겐과의 딸로는, 차카타이의 적손 카라 훌레구에게 시집가 무바라크 샤를 낳아 일시적으로 차카타이 가의 감국이 된 오르크나 하툰과 아릭부케의 제1 정비 일치가미쉬, 훌레구의 제2 정비 구육 하툰이 알려져 있다.
훌레구의 일족에서도 콩기라트 부족과 함께 오이라트 왕가와의 인척 관계가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쿠두카 베키의 적자 토렐치 퀴레겐과 칭기스의 제2 황녀 치체겐과의 딸 구육 하툰은, 후에 훌레구의 제2 정비가 되었다. 치체겐은 그 외에 부카 테무르 등을 낳았는데, 이 부카 테무르는 훌레구를 따라 비가 된 자매들과 함께 만호대(투멘)를 이끌고 서방 원정에 참가했으며, 그 자매 올제이가 아바카의 정비가 되고, 아바카의 형제 조므쿨, 테크시는 부카 테무르의 딸을 취했다. 또한 일 칸국의 올제이투의 제4 정비인 하지 하툰도, 바이두 칸의 필두 부장이었던 오이라트 부족의 치차크 퀴레겐의 딸로, 아부 사이드의 모친이 된 인물이다.
쿠두카 베키의 후예를 중심으로 하는 오이라트 부족의 장군들은 칭기스 가문의 인척으로서 제국의 각지로 이주하여 일 칸국 아래의 이란에서 활약했지만, 원주지인 몽골 고원에서는 번창하지 못했다. 몽골 고원의 오이라트 부족은 칭기스 칸의 넷째 아들 톨루이의 막내아들 아릭부케의 일족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1264년에 아릭부케가 형 쿠빌라이와의 제위 다툼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아릭부케 일문이 정치적으로 번창하지 못하게 되었고, 오이라트 부족도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쿠두카 베키 가계도'''
이름 | 비고 |
---|---|
쿠도카 베키 | 오이라트부의 통치자, 칭기스 칸에게 항복 |
이날치 | 조치의 딸 코리 에게치를 아내로 맞이함 |
토렐치 큐레겐 | 칭기스 칸의 딸 치체겐을 아내로 맞이함 |
부카 테무르 | |
바르스 부카 큐레겐 | 톨루이의 딸 엘테무르를 아내로 맞이함 |
엘치크미쉬 카툰 | 아릭부케에게 시집감 |
쿠이크 카툰 | 훌레구에게 시집감 |
올가나 카툰 | 카라 훌레구에게 시집감 |
쿠추 카툰 | 토크칸에게 시집감 |
올제이 카툰 | 훌레구에게 시집감 |
오굴토트미쉬 | 몽케 카안에게 시집감 |
2. 2.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형성 (14세기~15세기)
14세기 후반 몽골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아릭부케의 후예 예스데르가 북원의 토구스 테무르 칸을 살해하고 칸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몽골 고원에서는 서부의 여러 부족, 특히 아리크부케 일문의 지지 세력인 오이라트의 세력이 강해졌다.[17][18]15세기 초, 오이라트 부족장 마흐무드는 명나라 영락제가 고원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던 아스트 부족의 아르쿠타이를 공격하는 데 협력하여 단숨에 고원 최대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영락제는 오이라트의 패권을 견제하고자 1414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마흐무드를 토벌하여 오이라트는 쇠퇴하였다. 이처럼 오이라트의 마흐무드와 아스트의 아르쿠타이는 영락제의 개입을 둘러싸고 몽골 고원의 패권을 다투었다.[19][20]
이러한 혼란 속에서 몽골에서는 칸이 잇따라 바뀌고 부족 집단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부족 재편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십 몽골(도친 몽골, 韃靼)과 4 오이라트 (돌번 오이라트, 瓦剌)라 불리는 두 개의 큰 부족 연합이 형성되었으며, 오이라트 집단은 케레이트, 나이만, 바르구트 등을 포함하는 부족 연합체로 변모했다.[17][18]
2. 3. 에센 칸의 시대 (15세기 중반)
영락제 사후 명나라의 압력이 약화되자, 마흐무드의 아들 토곤은 1434년 아스트 부족의 아르쿠타이를 멸망시키고 칸을 자신의 꼭두각시로 옹립하여 "40 몽골"을 복속시켰다.[10] 토곤과 그의 아들 에센은 서쪽의 모굴리스탄 칸국, 우즈베크 등 유목 국가와 싸워 세력을 확대했고, 몽골 고원의 거의 모든 부족을 제어하기에 이르렀다.토곤이 죽자 에센은 토구스 테무르 사후 50년 만에 찾아온 통일을 배경으로 명나라 침공을 시작, 1449년 정통제의 친정군을 격파하고 정통제를 포로로 잡았다(토목의 변).[19][20] 명나라는 정통제의 동생 경태제를 즉위시켜 철저 항전 태세를 보였기에 에센에게 큰 이익은 없었지만, 에센은 1453년 꼭두각시 칸을 멸하고 스스로 칸위에 올랐다.
그러나 칭기스 칸의 자손이 아닌 에센의 즉위는 몽골인들 사이에서 매우 불경스럽게 여겨져 평판이 좋지 않았고(칭기스 칸의 원리), 동료 중 으뜸이었던 에센이 군주로 군림하려 한 것은 오이라트 부족 연합 내 여러 부족장들의 불만을 폭발시켰다.[17][18] 에센은 즉위 1년 만인 1454년 살해당했고, 오이라트의 패권은 좌절되었다. 이 혼란으로 몽골 왕족·귀족 다수가 살해되었고, 생존자는 오이라트 부족 출신 어머니를 둔 몇몇 왕자뿐이었으며, 몽골 고원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2. 4. 에센 칸 사후 (15세기 후반~17세기 초)
에센 칸 사후, 오이라트는 쇠퇴하였으나 몽골 칸위 쟁탈전에 계속 개입하며 서부 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했다.[19][20] 1487년, 다얀 칸의 등장으로 몽골이 재통일되면서 오이라트는 서쪽으로 밀려났다. 16세기 중반, 알탄 칸에게 패배하고, 16세기 후반에는 할하 알탄 칸국에 복속되었다. 1623년, 4 오이라트 연합군이 할하부의 알탄 칸을 살해하면서 몽골로부터 독립했다.[17][18]2. 5. 오이라트의 분열과 이동 (17세기)
1632년, 케레이트의 옹 칸의 후예를 자칭하는 오이라트의 태사 등이 이끄는 토르구트 부족은 내분을 피해 서쪽의 우랄강(야이크 강) 유역으로 이동했다.[48] 1634년에는 볼가강 하류의 노가이 오르다를 침공하여 노가이인을 추방하고, 칼미크 칸국(1630년 - 1771년)을 건국했다. 이들의 후예가 현재의 칼미크 공화국에 사는 칼미크인이다.[48]1630년경의 내분 이후, 호쇼트부의 수장이 된 구시 칸(투르바이후)은 달라이 라마의 종파 겔룩파가 티베트에서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진 것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1636년에 오이라트 군을 이끌고 출동했다.[48] 1637년 초, 티베트 북동부의 암도(현 칭하이성)를 제압한 후 라사에 올라 달라이 라마 5세로부터 "샤진바리쿠치 노민 칸, 텐진 츄키 걀포"의 칭호를 받았다.[48] 1638년부터 1639년에 걸쳐 방계 형제들, 오이라트 각부의 수장 가문의 방계자들을 그 휘하와 함께 불러 모아, 그들을 이끌고 나머지 티베트 각지의 정복에 나섰다.[48] 1642년까지 티베트의 대부분을 제압하고, 호쇼트 본령은 형의 아들이자 정통 계승자인 오치르투 칸에게 물려주었으며, 티베트에서 구시 칸 왕조를 수립했다.[48] 구시 칸이 이끄는 오이라트군은 암도를 주로 하여 티베트 각지에 배치되었지만, 그들 중 암도에 거주하는 자들이 후에 칭하이 몽골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48]
17세기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 서부에서 알타이 산맥을 거쳐 동투르키스탄 북부의 준가리아에 걸쳐 초원 지대에 할거하며, 호쇼트 부족이 유력해졌다.[48] 오이라트 각부의 수장들은 칭기즈 칸의 자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칸이 될 수 없었고, 종전에는 전체 오이라트를 통솔하는 실력자라도 타이시(중국어: 太師) 등의 칭호를 자칭했지만, 구시 칸 이후 시대마다 오이라트의 유력 지도자 중 한 명에게 달라이 라마가 칸 호칭과 인장을 수여하는 절차를 거쳐 칸을 자칭할 수 있는 관례가 생겼다.[48]
1620년대부터 1630년대 중반에 걸쳐 몽골 남부(내몽골)의 제후들이 청나라(다이칭국)에 복속해 갔을 때, 남은 몽골 북부(할하)의 제후들은 오이라트와의 오랜 항쟁에 종지부를 찍고 오이라트와 대등한 입장에서 강화하고 동맹을 맺었다.[48] 할하 각 부의 수장들은 달라이 라마로부터 다수의 형용사로 수식된 칸호나 바토르호를, 오이라트의 수장들은 오이라트 본국과 티베트 각각에서 칸이나 콩타이지, 지농, 타이치 등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48]
오이라트 본국에서는 호쇼트, 준가르, 토르구트의 수장들이 교대로 순차적으로 칸호를, 준가르부의 수장이 독점적으로 콩타이지호를 받았다.[48]
이름 | 부족 | 칭호(티베트어, 괄호 안은 몽골어) | 시기 |
---|---|---|---|
투르바이흐 | 호쇼트 | 텐진 츄키 걀포(샤진바리크치 노민 칸) | 1637년 |
오칠트 | 호쇼트 | 세첸 걀포(샤진바리크치 노민 칸) | 1666년 |
갈단 | 준가르 | 간덴 텐진 보쇼크투 칸 | 1678년 |
아유시(아유키) | 토르구트 | 다이칭 아유시 칸 | 1697년 |
이름 | 부족 | 칭호(티베트어, 괄호 안은 몽골어) | 재위 |
---|---|---|---|
호토고친 | 준가르 | 바토르 콩타이지 | 1637년 - 1653년 |
셍게 | 준가르 | 콩타이지 | 1653년 - 1670년 |
갈단 | 준가르 | 콩타이지 | 1671년 - 1678년 (1678년부터 1696년까지 칸) |
체왕 아브탄 | 준가르 | 에르데니 조리크투 콩타이지 | 1694년 - 1727년 |
갈단 체린 | 준가르 | 콩타이지 | 1727년 - 1745년 |
라마다르자 | 준가르 | 콩타이지 | 1750년 - 1752년 |
다와치 | 준가르 | 콩타이지 | 1753년 - 1755년 |
2. 6. 준가르 제국 (17세기 후반~18세기 중반)



17세기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 서부에서 알타이 산맥을 거쳐 동투르키스탄 북부의 준가리아에 걸쳐 초원 지대에 할거했으며, 호쇼트 부족이 유력해졌다.
1630년경의 내분 이후, 호쇼트부의 수장이 된 구시 칸 (투르바이후)은 달라이 라마의 종파 겔룩파가 티베트에서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진 것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1636년에 오이라트 군을 이끌고 출동했다. 1637년 초, 티베트 북동부의 암도 (현 칭하이성)를 제압한 후 라사에 올라 달라이 라마 5세로부터 "샤진바리쿠치 노민 칸, 텐진 츄키 걀포"의 칭호를 받았다. 오이라트 각부의 수장들은 칭기즈 칸의 자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칸이 될 수 없었고, 종전에는 전체 오이라트를 통솔하는 실력자라도 타이시(중국어: 太師) 등의 칭호를 자칭했지만, 구시 칸 이후 시대마다 오이라트의 유력 지도자 중 한 명에게 달라이 라마가 칸 호칭과 인장을 수여하는 절차를 거쳐 칸을 자칭할 수 있는 관례가 생겼다.
구시 칸은 1638년부터 1639년에 걸쳐 방계 형제들, 오이라트 각부의 수장 가문의 방계자들을 그 휘하와 함께 불러 모아, 그들을 이끌고 나머지 티베트 각지의 정복에 나섰다. 구시 칸의 군은 1642년까지 티베트의 대부분을 제압하고, 호쇼트 본령은 형의 아들이자 정통 계승자에게 물려주었으며, 티베트에서 구시 칸 왕조를 수립했다.
구시 칸은 증원군으로서 티베트 원정에 종군한 오이라트의 준가르부(준가르)의 수장 호토고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고 바토르 콩타이지의 칭호를 수여한 후, 준가리아의 오이라트 본국으로 귀국시켜 그 지배를 위임했다. 바토르 콩타이지 사후, 준가리아에서는 다시 부족 간의 내분이 재연되었고, 1672년에는 바토르 콩타이지의 아들 센게가 내분으로 살해되었다. 센게의 동생으로,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5세 밑에서 불문에 들어갔던 갈단은 그 소식을 접하고 티베트에서 준가리아로 귀환하여 환속하고 준가르 부족장이 되었다. 그리고 갈단은 오이라트 내의 라이벌들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전 오이라트의 지배권을 쥐는 유력한 지배자로 성장했다.
달라이 라마 5세는 과거의 제자이기도 한 갈단에게 강한 지지를 보냈고, 갈단은 이에 응하여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로서 이슬람교 세력이나 겔룩파에 반항하는 세력과의 싸움에 매달려 동투르키스탄 전역에서 몽골 고원의 서부에 이르는 대유목 제국을 건설했다.
더욱이 갈단은 몽골의 할하 부족의 내분에 개입하여 몽골 고원 중부에 쳐들어갔으나, 할하의 반갈단 세력은 눈사태처럼 내몽골로 도망쳐 청의 강희제에게 복속했기 때문에, 몽골 고원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오이라트와 청조의 전면전이 되었다. 갈단은 유목 병력의 기동력을 살려 잘 항전했지만, 우발적으로 강희제의 친정군과 조우하여 패배하고 도주했다. 이 때 준가리아의 오이라트 본국에서 갈단의 조카 체왕랍탄이 숙부에게 반기를 들고 자립했고, 보급이 끊긴 갈단은 도주 중에 사망했다. 이 항쟁의 결과, 할하는 내몽골 제부족과 마찬가지로 청에 복속했고, 오이라트는 청에 조공하게 되었지만, 체왕랍탄 이하 역대 준가르 부족장들은 갈단의 기반을 이어받아 오이라트를 계속 지배했고, 티베트와 청해를 둘러싸고 때로는 청과 대립했다.
그 결과, 준가르에 대한 불신감을 강화한 청은 1723년부터 1724년에 걸쳐 티베트, 1754년부터 1755년에 걸쳐 준가리아에 출병하여 구시 칸 왕조와 준가르 제국을 함께 정복·해체하고, 그 영토와 부족민을 청조의 지배 체제에 편입시켰다.
1760년에는 일리 강 계곡에 있던 준가르 제국 본령의 고토에서 반청 반란이 발발했지만, 건륭제는 이에 격렬한 탄압으로 응했고, 청군이 들여온 천연두의 유행도 있어서 일리 강 계곡에 있던 준가르 부족은 거의 절멸했다. 현재 일리 강 계곡에 살고 있는 것은 그 후 청이 이주시킨 카자흐인이나 만주 군인들의 후손이다.
2. 7. 청나라 이후의 오이라트
청나라는 오이라트를 맹기제도에 편입시켜 통치했다. 청나라 멸망 후, 몽골 지역의 오이라트는 몽골국(현 몽골)에 편입되었고, 신장 지역의 오이라트는 중국에 편입되었다. 볼가 강 유역의 칼미크인은 러시아 제국, 소비에트 연방을 거쳐 현재 러시아 연방 칼미크 공화국을 이루고 있다.[25]17세기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 서부에서 알타이 산맥을 거쳐 동투르키스탄 북부 준가리아에 이르는 초원 지대에 살았으며, 호쇼트 부족이 유력했다.
1630년경 내분 이후, 호쇼트부의 수장이 된 구시 칸 (투르바이후)은 달라이 라마의 종파 겔룩파가 티베트에서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진 것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1636년에 오이라트 군을 이끌고 출동했다. 1637년 초, 티베트 북동부 암도 (현 칭하이성)를 제압한 후 라사에 올라 달라이 라마 5세로부터 "샤진바리쿠치 노민 칸, 텐진 츄키 걀포" 칭호를 받았다. 오이라트 각 부의 수장들은 칭기즈 칸의 자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칸이 될 수 없었고, 이전에는 전체 오이라트를 통솔하는 실력자라도 타이시(중국어: 太師) 등의 칭호를 썼지만, 구시 칸 이후에는 달라이 라마가 오이라트의 유력 지도자 중 한 명에게 칸 칭호와 인장을 수여하는 관례가 생겼다.
구시 칸은 1638년부터 1639년에 걸쳐 방계 형제들과 오이라트 각 부 수장 가문의 방계자들을 불러모아 티베트 각지를 정복했다. 1642년까지 티베트 대부분을 제압하고, 호쇼트 본령은 형의 아들에게 물려주고 티베트에서 구시 칸 왕조를 수립했다. 구시 칸이 이끄는 오이라트군은 암도를 중심으로 티베트 각지에 배치되었는데, 암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후에 칭하이 몽골족이라 불렸다. 일부 오이라트 백성은 라사 북방 100km 부근 담 지방으로 이주하여 구시 칸 왕가에 봉사하는 직속 부대가 되었고, 이들의 후예가 현재 티베트의 오이라트인이다.
구시 칸은 증원군으로 티베트 원정에 종군한 오이라트 준가르부(준가르)의 수장 호토고친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바토르 콩타이지 칭호를 준 뒤, 준가리아의 오이라트 본국으로 돌려보내 지배를 위임했다. 바토르 콩타이지 사후, 준가리아에서는 다시 부족 간 내분이 일어났고, 1672년 바토르 콩타이지의 아들 센게가 살해되었다. 센게의 동생으로 티베트 달라이 라마 5세 밑에서 불문에 들어갔던 갈단은 준가리아로 돌아와 환속하고 준가르 부족장이 되었다. 그리고 오이라트 내의 라이벌들을 굴복시키고 전 오이라트의 지배권을 쥐는 유력한 지배자로 성장했다.
달라이 라마 5세는 제자였던 갈단에게 강한 지지를 보냈고, 갈단은 티베트 불교 수호자로서 이슬람교 세력이나 겔룩파에 반항하는 세력과 싸우며 동투르키스탄 전역에서 몽골 고원 서부에 이르는 대유목 제국을 건설했다.
갈단은 몽골 할하 부족의 내분에 개입하여 몽골 고원 중부에 쳐들어갔으나, 할하의 반갈단 세력은 내몽골로 도망쳐 청 강희제에게 복속했다. 이로 인해 몽골 고원 지배권을 둘러싸고 오이라트와 청의 전면전이 벌어졌다. 갈단은 유목 병력의 기동력을 살려 항전했지만, 강희제의 친정군과 조우하여 패배하고 도주했다. 이때 준가리아에서 갈단의 조카 체왕랍탄이 반기를 들고 자립했고, 보급이 끊긴 갈단은 도주 중 사망했다. 이 항쟁으로 할하는 내몽골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청에 복속되었고, 오이라트는 청에 조공하게 되었지만, 체왕랍탄 등 준가르 부족장들은 갈단의 기반을 이어받아 오이라트를 계속 지배하며 티베트와 청해를 두고 청과 대립했다.
준가르에 대한 불신을 강화한 청은 1723년부터 1724년에 걸쳐 티베트, 1754년부터 1755년에 걸쳐 준가리아에 출병하여 구시 칸 왕조와 준가르 제국을 정복·해체하고 영토와 백성을 청 지배 체제에 편입시켰다.
1760년 일리 강 계곡의 준가르 제국 본령에서 반청 반란이 일어났지만, 건륭제는 격렬한 탄압으로 응했고, 청군이 들여온 천연두 유행으로 일리 강 계곡의 준가르 부족은 거의 절멸했다. 현재 일리 강 계곡에 사는 사람들은 청이 이주시킨 카자흐인이나 만주 군인들의 후손이다.
3. 주요 부족
오이라트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오이라트는 동부 몽골과 역사, 지리, 문화, 언어를 공유하며, 오이라트 출신이든 칭기스 왕조 출신이든 더 큰 몽골 실체로서 때때로 동일한 지도자 아래 통일되었다.
호쇼트(몽골어: "хошууд", ''호슈드''), 초로스 또는 욀레트 ("өөлд", ''욀드''), 토르구트 ("торгууд", ''토르구드''), 도르베트 ("дөрвөд", ''도르보드'') 민족 집단으로 구성된 이들은 서쪽의 튀르크족 이웃들에 의해 칼미크 또는 칼마크로 불렸는데, 이는 "잔여" 또는 "남다"를 의미한다. 다양한 자료에서는 바르구트, 부자바, 케레이트, 나이만 부족도 도르벤 외르드의 일부로 나열한다. 일부 부족은 나중에 원래 4개에 합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칼미크족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기보다는 불교를 '유지'했음을 반영하거나, 튀르크족이 서쪽으로 더 이동했을 때 칼미크족이 알타이 지역에 '남아'있었음을 반영할 수 있다.[10]
원나라가 멸망한 후, 오이라트와 동부 몽골은 오이라트가 스스로를 "4 오이라트"라고 부르고 동쪽의 카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몽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될 정도로 별개의 정체성을 발전시켰다.[10]
오이라트인에 대한 가장 초기의 언급 중 하나는 칭기스 칸의 권력 상승에 대한 13세기 연대기인 ''몽골 비밀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밀사"에서 오이라트는 "숲의 사람들"에 속하며, ''바키''라고 알려진 샤먼 추장의 지배를 받는다고 언급된다. 그들은 투바와 몽골의 후브스굴 주에 거주했으며, 오이라트는 14세기에 남쪽으로 이동했다.[13]
칸의 신하가 된 오이라트는 몽골 군대의 충성스럽고 강력한 세력으로 변모했다. 1256년, 부하-테무르(몽골어: Буха-Төмөр, Бөхтөмөр) 휘하의 오이라트 집단이 훌라구의 아바스 왕조 원정에 합류하여 이란에서 니자리파에 대한 몽골 원정에 참여했다. 일 칸국의 훌라구와 그의 후계자 아바카는 그들을 터키로 재정착시켰다.
원나라가 중국에서 축출된 후, 오이라트는 서부 몽골의 4개의 주요 부족(몽골어: ''дөрвөн ойрд'', ''дөрвөн ойрaд'')의 느슨한 연합으로 재결집했다. 이 동맹은 알타이 산맥의 외딴 지역, 하미 오아시스의 북서쪽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점차적으로 동쪽으로 퍼져나가 동부 몽골의 지배하에 있던 영토를 병합했다. 그들은 4개의 오이라트(케레이트, 나이만, 바르구드, 구 오이라트)의 깃발 아래 통일된 유목민 지배를 재건하기를 희망했다.[17][18]
14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오이라트는 동부 몽골인과 자주 전쟁을 벌였지만, 다얀 칸과 투멘 자사그트 칸의 통치 기간 동안 다시 통합되었다.
오이라트는 1615년경 티베트 불교로 개종했다.
1753년, 에진강 유역에 정착했고, 이렇게 하여 에진강 토르구트 '호쇼'가 형성되었다.[45]
주요 부족은 다음과 같다.
3. 1. 4 오이라트 (15세기)
14세기 후반 이후 몽골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아리크부케의 후예인 예스데르가 쿠빌라이 가문의 정통 계승자인 북원의 토구스 테무르 칸을 살해하고 칸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몽골 고원에서는 서부의 여러 부족, 특히 아리크부케 일문의 지지 세력인 오이라트의 세력이 강해졌다.[17][18]15세기 초, 오이라트 부족장 마흐무드는 고원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던 아스트 부족의 아르쿠타이를 명의 영락제가 공격하는 데 협력하여 일약 고원 최대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오이라트의 패권을 막기 위해 1414년에 친정을 단행하여 마흐무드를 토벌했고, 오이라트는 쇠퇴했다.[19][20] 이처럼 오이라트의 마흐무드와 아스트의 아르쿠타이는 영락제의 개입을 둘러싸고 몽골 고원을 좌우하는 다툼을 벌였다.
이 혼란의 결과, 몽골에서는 칸이 잇따라 바뀌고 부족 집단이 집합과 이산을 반복하는 대혼란이 일어나 부족의 재편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것이 사십 몽골(도친 몽골, 韃靼)과 4 오이라트 (돌번 오이라트, 瓦剌)라고 불리는 2대 부족 연합이며, 오이라트 집단은 케레이트, 나이만, 바르구트 등을 포함하는 부족 연합 집단으로 변모했다.[17][18]
영락제 사후 명나라의 압력이 약해지자, 마흐무드의 아들 토곤은 1434년에 아르크타이를 멸망시키고 칸을 자신의 꼭두각시로 옹립하여 40 몽골을 따르게 했다. 토곤과 그의 아들 에센은 서쪽으로는 모굴리스탄 칸국과 우즈베크 등 유목 국가와 싸워 세력을 확대했고, 몽골 고원의 거의 모든 부족을 제어했다.
토곤이 죽자 에센은 토구스 테무르의 횡사 이후 50년 만에 찾아온 통일을 배경으로 명나라 침공을 시작, 1449년에는 정통제의 친정군을 격파하고 정통제를 포로로 잡았다 (토목의 변). 명나라는 정통제의 동생 경태제를 즉위시켜 철저 항전 태세를 보였고, 에센은 큰 이익을 얻지 못했다. 1453년 에센은 꼭두각시 칸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칸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칭기스 칸의 자손이 아닌 에센의 즉위는 몽골인들에게 불경스럽게 여겨져 평판이 좋지 않았고 (칭기스 칸의 원리), 오이라트 부족 연합 내에서도 불만이 폭발했다. 1454년 에센은 살해당했고, 오이라트의 패권은 좌절되었다. 이 혼란으로 몽골 왕족·귀족 다수가 살해되었고, 살아남은 것은 오이라트 부족 출신 어머니를 둔 몇몇 왕자뿐이었다. 몽골 고원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15세기 오이라트 부족 구성은 다음과 같다.
3. 2. 8 부족 연합 (17세기)
17세기의 오이라트는 8부족 연합이었지만, 스스로 "4(돌벤) 오이라트"라고 불렀다.[52] 8부족은 다음과 같다.[52]4. 문화
오이라트의 문화는 몽골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몽골 민요인 붐부르잔을 참고할 수 있다. 17세기 호쇼트 부족 출신의 겔룩 승려 자야 판디타는 오이라트어를 위해 토드 문자(클리어 스크립트)를 고안했다.
4. 1. 문자
17세기 호쇼트 부족 출신의 겔룩 승려 자야 판디타[7]는 오이라트족이 사용할 새로운 문자 체계인 클리어 스크립트(토드 문자)를 고안했다. 이 체계는 기존의 몽골 문자를 기반으로 개발되었지만, 오독을 방지하기 위해 더욱 발전된 분음 부호 체계를 갖추었고, 오이라트어가 몽골어와 가지는 몇 가지 어휘적, 문법적 차이점을 반영했다.[8]클리어 스크립트는 칼미크 공화국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 사용되었으나, 이후 라틴 문자와 키릴 문자로 대체되었다. 현재 엘리스타 (칼미크 공화국의 수도)의 일부 공공 표지판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학교에서 피상적으로 가르치기도 한다. 몽골에서도 1941년에 키릴 문자로 대체되었다. 중국의 일부 오이라트족은 여전히 클리어 스크립트를 주요 문자 체계로 사용하며, 몽골 문자도 함께 사용한다.
자야 판디타 탄생 400주년 및 클리어 스크립트 창제 350주년을 기념하여 자야 판디타 기념비가 공개되었다.[9]
5. 현대의 오이라트
현대의 오이라트는 크게 러시아의 칼미크인, 몽골의 오이라트, 중국의 오이라트로 나뉜다.
- 칼미크인: 카스피해 서쪽 스텝 지역에 거주하며, 17세기 초 토르구트 부족을 중심으로 볼가강 하류로 이주해 칼미크 칸국을 세웠다.[24] 칼미크 칸국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으나, 이후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8세기에는 차르 정부의 억압으로 인해 많은 칼미크인들이 준가리아로 이주했다.[26] 러시아 혁명 이후 칼미크인 정착은 가속화되었고, 스탈린에 의해 시베리아로 추방되기도 했다.[33] 오늘날 칼미크인들은 언어와 종교 부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39]
- 몽골의 오이라트: 몽골 서부에 거주하며, 몽골족의 일원으로 간주된다.[10] 할하 몽골인과의 동화가 진행되고 있다. 원나라 멸망 후, 오이라트는 동부 몽골과 별개의 정체성을 발전시켰으며,[10] 14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동부 몽골인과 자주 전쟁을 벌였다. 몽골국이 몽골 인민 공화국이 되자, 오이라트인들은 서몽골인으로 간주되어 소수 부족으로 취급되었지만, 문화적으로는 할하 몽골인으로의 동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 중국의 오이라트: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몽골족은 소수 민족으로, 주로 지역 북부에 거주한다.[40] 이들은 대부분 칼미크 공화국에서 귀환한 토르구트와 호쇼트의 후손이며, 18세기에 주둔군으로 배치된 차하르의 후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몽골족으로 식별되어 내몽골의 몽골인과 동일 민족으로 취급되었다. 청나라 시기에는 맹기제도에 의해 편성되어 자치를 인정받았다.[50] 청 붕괴 후, 일부는 몽골국에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편입되었다.
이름 | 부족 | 칭호(티베트어, 괄호 안은 몽골어) | 시기 |
---|---|---|---|
투르바이흐 | 호쇼트 | 텐진 츄키 걀포(샤진바리크치 노민 칸) | 1637년 |
오칠트 | 호쇼트 | 세첸 걀포(샤진바리크치 노민 칸) | 1666년 |
갈단 | 준가르 | 간덴 텐진 보쇼크투 칸 | 1678년 |
아유시(아유키) | 토르구트 | 다이칭 아유시 칸 | 1697년 |
이름 | 부족 | 칭호(티베트어, 괄호 안은 몽골어) | 재위 |
---|---|---|---|
호토고친 | 준가르 | 바토르 콩타이지 | 1637년 - 1653년 |
셍게 | 준가르 | 콩타이지 | 1653년 - 1670년 |
갈단 | 준가르 | 콩타이지 | 1671년 - 1678년 (1678년부터 1696년까지 칸) |
체왕 아브탄 | 준가르 | 에르데니 조리크투 콩타이지 | 1694년 - 1727년 |
갈단 체린 | 준가르 | 콩타이지 | 1727년 - 1745년 |
라마다르자 | 준가르 | 콩타이지 | 1750년 - 1752년 |
다와치 | 준가르 | 콩타이지 | 1753년 - 1755년 |
5. 1. 칼미크인
칼미크인은 카스피해 서쪽 스텝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이다. 이들은 17세기 초 토르구트 부족을 중심으로 볼가강 하류로 이주해 칼미크 칸국을 세웠다.[24]호르 로크, 토르구트의 타이시, 도르베트의 달라이 타이시는 20만~25만 명(주로 토르구트족)의 백성을 이끌고 1607년 서쪽 볼가강으로 이동했다. 이 이동은 내부 분열이나 호쇼트 부족과의 갈등 때문이라는 설과, 부족한 가축 방목지를 찾아 나섰다는 설이 있다. 일부 호쇼트족과 욀레트족은 প্রায় 한 세기 후에 이주에 합류했다. 1630년, 칼미크족은 동남부 유럽 스텝 지역에 도달했는데, 당시 이 지역은 노가이 호르데가 거주하고 있었다. 칼미크 전사들은 노가이족을 크림반도와 쿠반강으로 몰아냈고, 이후 유라시아 스텝의 다른 유목 민족들이 칼미크 칸국의 봉신이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현재 칼미크 공화국 지역에 속한다.[25]
칼미크 칸국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러시아 남부 국경을 보호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칼미크족은 러시아 차르의 신하가 되었고, 1724년에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세기 초, 칼미크인은 약 30만~35만 명, 러시아인은 1500만 명이었다. 러시아는 칼미크 칸국의 자치권을 점차 축소하고, 칼미크족의 목초지에 러시아와 독일 정착촌을 건설하도록 장려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불교 신자인 칼미크인에게 정교회 개종을 강요했다. 1771년 1월, 차르 정부의 억압으로 3만 3천 가구(약 17만 명)의 칼미크인이 준가리아로 이주했다.[26]
20만 명(17만 명)[27]의 칼미크인들은 볼가강 좌안 목초지에서 바시키르와 카자흐 영토를 거쳐 준가리아로 이주를 시작했다. 마지막 칼미크 칸 우바시 칸은 준가르 칸국과 몽골 독립 회복을 위해 이주를 이끌었다.[27] C. D. 바크만은 "토르구트족은 중국에 항복할 의도가 없었고, 준가리아에서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고 지적한다.[28] 우바시 칸은 이주 전 무기 확보를 위해 1768~1769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3만 기병을 파견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군, 바시키르족, 카자흐족에게 이주민 몰살을 명령하고 칼미크 칸국을 폐지했다.[27][29][30]
카자흐족은 발하슈 호수 근처에서 칼미크인들을 공격했다. 1771년 겨울, 볼가강이 얼지 않아 강 서안에 정착한 약 10만~15만 명의 칼미크인들은 강을 건너지 못했고, 예카테리나 2세는 영향력 있는 귀족들을 처형했다.[27] 7개월 이동 후, 원래 집단의 3분의 1(66,073명)[27]만이 준가리아(만주 청 제국 서쪽 경계)에 도달했다.[31] 청 제국은 반란 방지를 위해 칼미크인들을 다섯 개 지역에 재정착시켰고, 일부 지도자들은 곧 살해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칼미크인 정착은 가속화되었고, 불교는 근절되었으며, 가축은 집단화되었다.
1920년대 칼미키아에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자, 칼미크 민족주의자와 범몽골주의자들은 칼미키아에서 몽골로 이주하려 했다. 1922년 1월 22일, 몽골은 이주를 수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거부했다. 약 7만 1천~7만 2천 명(인구의 약 절반)이 기근으로 사망했다.[32] 칼미크족은 1926년, 1930년, 1942~1943년에 러시아에 반란을 일으켰다. 1927년 3월, 소비에트는 2만 명의 칼미크인을 시베리아와 카렐리야로 추방했다.[32] 1930년 3월 22일, 칼미크족은 독립 오이라트-칼미크 공화국을 건국했다. 오이라트 국가는 소규모 군대로 칼미키아 두르부드 지방에서 1,700명의 소비에트 군대를 격파했지만, 그해 말 소비에트 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몽골 정부는 칼미크인을 포함한 소련 몽골족 수용을 제안했지만, 소비에트는 거부했다.[32]
1943년, 12만 명의 칼미크인 전체가 스탈린에 의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스탈린그라드 (볼고그라드) 공격 추축군 지원 혐의를 받은 이들은 추방 중과 직후 인구의 5분의 1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3][34][35] 시베리아 추방 칼미크인의 약 절반(9만 7천~9만 8천 명)이 1957년 귀향 허용 전 사망했다.[36] 소련 정부는 추방 기간 칼미크어 교육을 금지했다.[37][38][39] 몽골 지도자 호르로깅 초이발산은 추방자들의 몽골 이주를 추진하며 러시아 방문 중 시베리아에서 그들을 만났다. 1991년 4월 26일, 러시아 연방 법률 "추방된 민족의 재활에 관한 법률"에 따라 칼미크인 및 기타 민족 억압은 집단 학살로 간주되었지만, 많은 러시아 역사가들은 이러한 추방을 독일 지원 의혹을 받은 칼미크인들에 대한 린치를 막기 위한 시도로 본다. 오늘날 칼미크인들은 언어와 종교 부활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러시아어로의 전환은 계속되고 있다.
2010년 러시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칼미크인은 176,800명이었고, 그중 칼미크어 사용자는 80,546명에 불과했다. 이는 2002년 인구 조사의 화자 수 153,602명(총 173,996명)에 비해 크게 감소한 수치이다. 1989년 소련 인구 조사에서는 칼미크어 사용자 156,386명, 총 칼미크인 수 173,821명이었다.
볼가 칼미크족 또는 칼미크족은 오이라트의 하위 그룹이다.
5. 2. 몽골의 오이라트
몽골 서부에 거주하며, 몽골족의 일원으로 간주된다. 할하 몽골인과의 동화가 진행되고 있다.원나라 멸망 후, 오이라트와 동부 몽골은 오이라트가 스스로를 "4 오이라트"라 칭하고 동쪽의 카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몽골"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 별개의 정체성을 발전시켰다.[10]
14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오이라트는 동부 몽골인과 자주 전쟁을 벌였지만, 다얀 칸과 투멘 자사그트 칸 통치 기간 동안 다시 통합되었다.
몽골국이 몽골 인민 공화국이 되자, 오이라트인들은 서몽골인으로 간주되어 다수 부족인 할하에 대한 소수 부족으로 취급되었지만, 문화적으로는 할하 몽골인으로의 동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오이라트인은 민족적으로 압도적 소수파이며, 주변의 한족, 위구르인, 카자흐인 등과의 혼혈이 진행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몽골족으로 식별되어 내몽골의 몽골인과 동일 민족으로 취급되었다. 이후, 문화적 자각을 강화하는 가운데 신장에서도 토드 문자 대신 몽골 문자가 사용되는 등, 내몽골의 몽골인과의 민족 의식 일체화가 진행되어, 다양한 외인으로부터 서몽골인 또는 오이라트 몽골인이라는 용어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오이라트족의 문화와 습관에 큰 변용을 주고 있다.
15세기부터 18세기에 몽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몽골 고원의 유력 부족 연합이었던 오이라트족 연합에 속한 여러 부족의 민족이다. 이들은 근대 중화인민공화국, 몽골국의 일부가 된 후, 몽골 민족의 일원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름 | 부족 | 칭호(티베트어, 괄호 안은 몽골어) | 시기 |
---|---|---|---|
투르바이흐 | 호쇼트 | 텐진 츄키 걀포(샤진바리크치 노민 칸) | 1637년 |
오칠트 | 호쇼트 | 세첸 걀포(샤진바리크치 노민 칸) | 1666년 |
갈단 | 준가르 | 간덴 텐진 보쇼크투 칸 | 1678년 |
아유시(아유키) | 토르구트 | 다이칭 아유시 칸 | 1697년 |
이름 | 부족 | 칭호(티베트어, 괄호 안은 몽골어) | 재위 |
---|---|---|---|
호토고친 | 준가르 | 바토르 콩타이지 | 1637년 - 1653년 |
셍게 | 준가르 | 콩타이지 | 1653년 - 1670년 |
갈단 | 준가르 | 콩타이지 | 1671년 - 1678년 (1678년부터 1696년까지 칸) |
체왕 아브탄 | 준가르 | 에르데니 조리크투 콩타이지 | 1694년 - 1727년 |
갈단 체린 | 준가르 | 콩타이지 | 1727년 - 1745년 |
라마다르자 | 준가르 | 콩타이지 | 1750년 - 1752년 |
다와치 | 준가르 | 콩타이지 | 1753년 - 1755년 |
5. 3. 중국의 오이라트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몽골족은 소수 민족으로, 주로 지역 북부에 거주하며 2010년 기준 194,500명에 달한다.[40] 이들은 대부분 칼미크 공화국에서 귀환한 토르구트와 호쇼트의 후손이며, 18세기에 주둔군으로 배치된 차하르의 후손이다. 한족, 위구르족, 카자흐족 등과의 혼혈이 진행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몽골족으로 식별되어 내몽골의 몽골인과 동일 민족으로 취급되었다.청나라는 정복한 오이라트를 만주어로 오로트라고 불렀으며, 몽골 제 부족과 마찬가지로 맹기제도에 의해 편성하여 각 부족장에게 작위를 수여하여 귀족으로 대우함과 동시에 자치를 인정했다. 청조 치하의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 서부의 호부드 지역에 30개 기, 이리 장군 관할 하의 준가리아에 17개 기, 청해 판사 대신 관할 하의 청해 지방(티베트·암도 지방)에 30개 기가 있었다.[50]
청 붕괴 후, 몽골국이 보그드 칸 아래 독립을 선언하자, 호부드 지역의 오이라트 제 부족은 몽골 정부를 따르고 몽골국에 편입되었다. 몽골국은 알타이 산맥 방면의 오이라트도 병합하려 군대를 파견했지만, 중국에 의해 저지당했고, 이 지역은 신장성을 거쳐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편입되었다.
이후, 문화적 자각을 강화하는 가운데 신장에서도 토드 문자 대신 몽골 문자가 사용되는 등, 내몽골의 몽골인과의 민족 의식의 일체화가 진행되어, 다양한 외인으로 서몽골인 또는 오이라트 몽골이라는 용어로 불리게 되었다.
6. 한국과의 관계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한반도 북부에는 '오랑캐'라고 불리는 민족 집단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오이라트"로 추정된다. 이들은 조선 왕조 건국 과정에서 이성계를 도와 여진족과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함경도, 평안도 등 조선 북부 지방 개척 과정에서 "오롱개", "오량캐" 등 오이라트와 관련된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북방 민족과의 교류 흔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대에는 청나라 사신으로 온 칼미크인(오이라트의 일파)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오이라트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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