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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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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6.25 전쟁 당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과 7사단 병력 일부가 후퇴 명령을 거부하고 불암산에 남아 조직한 유격대이다. 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에 맞서 싸웠으며, 퇴계원 보급 물자 보관소 공격, 창동국민학교 습격, 육군사관학교 기습, 내곡리 수송대 공격 등의 활동을 펼쳤다. 유격대 활동은 창동의 수송대 기착지 폐쇄와 농민 100여 명 구출 등의 결과를 가져왔으나, 대부분의 대원이 전사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2019년에는 유격대를 기리는 안내판 제막식이 불암산 입구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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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개요
명칭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활동 시기1950년대 초
활동 지역불암산 일대
주요 활동공산군에 맞선 유격전 수행
조직 및 구성
주도 인물알려지지 않음
구성원지역 주민 및 국군 낙오병 등으로 추정
규모정확한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소규모 게릴라 부대로 추정
활동 내용
주요 활동인민군에 대한 정보 수집 및 전달
보급로 차단
게릴라전을 통한 교란 작전 수행
배경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의 남하에 맞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유격대 중 하나로 추정
관련 기록
증언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일부 활동 내용이 전해짐
방송 프로그램MBC PD수첩에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에 대한 내용을 방영 (1996년)
평가
의의한국 전쟁 당시 민간인들의 자발적인 항전 사례 중 하나로 평가
한계기록 부족으로 인해 정확한 활동 내용 및 규모 파악에 어려움이 있음

2. 배경

1950년 6월 25일 새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빠르게 남하하자 수도 서울은 위기에 처했고, 육군본부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포함한 가용 병력을 동원하여 방어에 나섰다.[2]

그러나 전황은 급격히 악화되어 육군사관학교가 위치한 지역까지 조선인민군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6월 28일 새벽, 학교 지휘부는 생도들의 전멸을 막기 위해 후퇴 명령을 내렸으나, 이 명령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혼란을 피하여 침착하게 한강을 넘으라"는 본래 지시와 달리 "모두 후퇴하라" 또는 "타 중대는 다 후퇴하였다" 등으로 와전되어 큰 혼란이 발생했다.[3]

이 과정에서 일부 생도들은 후퇴 명령을 거부하고 육군사관학교에 남아 항전 의지를 다졌다. 끝까지 남은 생도 1기 10명과 생도 2기 3명, 그리고 이후 합류한 국군 제7사단 9연대 소속 병력(부사관 1명, 병사 6명[4])이 바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의 시작이었다. 지역 주민들은 이들을 '호랑이 유격대' 또는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라고 불렀다.[4]

2. 1. 건국 초기 육군사관학교와 생도 1, 2기

해방 이후, 자주적인 국방력 확보를 위해 장교 양성 기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고, 초기에는 군사 경험이 있는 인원들에게 미군정과의 소통 능력을 부여하는 단기 교육이 주를 이루었다.

본격적인 장교 양성 기관은 1946년 5월 1일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태릉에 문을 연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였다. 개교 당시 첫 입교생(육사 1기)은 군사영어학교에서 임관하지 못한 인원과 각 연대에서 선발된 병사들을 포함한 88명이었다. 1946년 6월 15일, 군정법령 제86호에 따라 조선경비대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학교 이름도 조선경비사관학교로 바뀌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5일, 육군사관학교로 다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초기 육군사관학교(1기~9기)는 단기 과정으로 장교를 배출했다. 이후 교육 기간을 늘려 정규 과정으로 전환하면서 '생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생도 1기와 생도 2기가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이전 기수와는 다른 선발 과정과 교육 체계를 적용받았다.

2. 1. 1. 생도 1기

육군사관학교의 초기 졸업생인 1기부터 9기까지는 단기 과정으로 장교를 양성했다. 1949년 7월 12일에 6개월 과정의 9기생이 입교한 직후인 7월 15일, 2년 교육과정으로 계획된 생도 1기가 입교하였다. '생도'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이 이때부터이며, 이들은 원래 10기였으나 정부의 결정에 따라 "생도 1기"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생도 1기는 신체검사와 학과시험으로 구성된 1차 시험, 인물고사와 구술시험이 포함된 2차 시험 등 엄격한 절차를 거쳐 선발되었다. 경쟁률은 10대 1에 달했으며, 최종적으로 338명이 입교하였다. 하지만 입교식 직전에 생도 1기의 교육 기간은 다시 1년으로 단축되었다. 이는 장기간의 장교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신설하려던 간부후보생 과정의 준비가 늦어졌고, 육군사관학교 내에 2년제 교육을 위한 교수진과 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교육 기간이 단축되었지만, 생도 1기는 기존 졸업생들보다 긴 교육 기간 동안 제식훈련, 화기 조작 등 전술 훈련과 함께 군사학, 일반학 교육을 받았다. 강도 높은 교육과 엄격한 내무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하는 인원도 많아, 6.25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25일 기준으로 생도 1기의 총원은 262명으로 줄어 있었다.

2. 1. 2. 생도 2기

생도 2기부터는 교육 기간을 4년으로 늘리기로 결정되었다. 1950년 6월 1일,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449명이 4년제 생도 2기로 입교했다. 하지만 가입교 직후 실시된 소양시험에서 115명이 탈락하여 최종적으로 334명만이 정식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20일 동안 제식훈련, 사격술 예비훈련, 영점 조준사격 등 기초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다.

2. 2. 한국전쟁의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습적인 대규모 남침으로 인해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인민군 병력이 38선을 넘어 수도 서울로 빠르게 남하하자, 육군본부는 수도 방위 병력 확보에 나섰다.

개전 당시 육군사관학교에는 임관을 약 20일 앞둔 생도 1기 313명과 입교한 지 20여 일 된 생도 2기 333명이 재학 중이었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장군은 육사 생도들을 전선에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처음 육군본부는 육사 생도대와 교도대, 육군보병학교 교도대를 통합하여 서울특별연대를 편성하려 했으나, 전방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계획을 변경했다. 육사 및 보병학교 교도대는 전방으로 보내고, 생도대는 포천 후방의 서피-퇴계원 지역 방어를 담당하도록 명령했다(육군본부 작전명령 제 90호).[2]

이에 따라 육사 교장 이준식 준장과 부교장 이한림 대령은 생도 1기 262명과 생도 2기 277명, 총 530여 명으로 생도대대를 긴급히 편성하여 전쟁에 참전시켰다. 생도대대의 지휘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직책이름계급
대대장조암중령
부대대장손관도소령
1중대장송인율대위
2중대장박응규소령
3중대장이원엽대위



생도 1기생들은 분대장, 부분대장, 공용화기 반장 및 사수 등의 지휘 역할을 맡았고, 생도 2기생들은 전원 소총수로 편성되었다. 생도들의 기본 무장은 M1 소총이었으며, 간부 역할을 맡은 생도들에게는 카빈 소총이 지급되었다. 실탄은 1인당 56발이라는 매우 부족한 양이 지급되었다.

생도들은 부평리(내촌), 금곡리, 태릉 등지에서 조선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이들은 부족한 병력과 물자 지원 속에서도 백병전을 벌이며 분투했다. 6월 27일, 이준식 교장은 교내에 있던 국군 제7사단 9연대 병력과 생도들을 학교 및 인근 삼육신학교(현 삼육대학교)와 92고지에 배치하여 방어선을 강화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조선인민군은 수도 서울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창동 방어선을 돌파하고 미아리 방어선까지 압박하고 있었으며, 이는 실질적으로 육사 후방에 적이 출현한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날 밤 10시경, 육사 부근에도 적의 포격이 시작되었고, 6월 28일 새벽에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대기하던 생도들에게 조선인민군의 직접적인 공격이 가해졌다. 학교 지휘부는 생도들의 전멸을 우려하여 "혼란을 피하여 침착하게 한강을 넘으라"는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명령은 전달 과정에서 "모두 후퇴하라" 또는 "타 중대는 다 후퇴하였다" 등으로 와전되어 큰 혼란을 야기했다.[3] 이로 인해 일부 생도들은 무리를 지어 철수했지만, 일부 생도들은 후퇴 명령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기 위해 자리에 남았다. 이때 남아 항전한 생도들이 이후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로 불리게 되는 핵심 인원들이었다.[4]

3. 생도대대의 전투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당시, 육사에는 생도 1기생 313명과 2기생 333명이 재학 중이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장군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육사 생도들을 전선에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육사 교장 이준식 준장과 부교장 이한림 대령은 생도 1기생 262명과 2기생 277명을 모아 생도대대를 긴급히 편성했다. 대대장으로는 조암 중령, 부대대장으로는 손관도 소령이 임명되었으며, 1, 2, 3중대장은 각각 송인율 대위, 박응규 소령, 이원엽 대위가 맡았다. 전투 경험이 없는 생도들이었지만, 1기생들은 분대장, 부분대장, 공용화기 반장 및 사수 등의 지휘 및 중요 보직을 맡았고, 2기생들은 전원 소총수로 편성되었다. 생도들에게는 기본 무장으로 M1 개런드 소총이 지급되었고, 간부들에게는 M1 카빈이 지급되었다. 실탄은 1인당 56발이라는 매우 적은 양만 주어졌다.

3. 1. 내촌-태릉 전투

차량 부족으로 육사에서 대기하던 생도대대는 6월 26일 저녁 5시경 징발된 민간 트럭을 이용해 부평리로 이동하여 도로 동쪽의 372고지에 배치되었다. 이는 당시 2개 대대 병력으로 넓은 방어선을 맡고 있던 제7사단의 방어 공백을 메우기 위한 조치였다.

6월 27일 아침, 전차의 지원을 받는 조선인민군 제3사단 9연대 2대대가 생도대대 지원 임무를 맡은 경찰대대를 공격하여 쉽게 격파했다. 인민군 전차 2대가 생도대대 진지의 좌측을 통과했으며, 뒤따르던 인민군 보병들이 진지를 방어하던 생도대대와 교전을 시작했다. 오후 1시경 시작된 전투에서 생도대대는 탄약 부족과 인민군의 45mm 대전차포 공격에 밀려, 오후 6시경 부대대장 손관도 소령의 명령에 따라 후퇴했다. 후퇴 명령은 태릉의 화랑대로 집결하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생도대대는 다시 전선 투입 명령을 받고 불암산-창동 일대 방어를 위해 92고지에 진지를 구축했다. 27일 오후 진지 편성을 마쳤으나, 부평리 전투에서 대부분의 중화기를 잃어 81mm 박격포 2문과 기관총 3문만 남은 상태였다. 인민군이 생도대대의 방어 구역을 우회하여 서울로 진입하자, 고립될 위험에 처한 손관도 소령은 한강 이남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 철수 과정에서 일부 생도들은 육사를 지키겠다며 명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당시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한강선 방어를 총괄하던 김홍일 소장은 생도대대가 전선에 복귀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에게 최종적으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3. 2. 한강 방어선 작전

차량이 없어 육사에서 대기하던 생도대대는 6월 26일 저녁 5시가 넘어 징발한 민간 트럭을 타고 부평리로 이동하여 도로 동쪽의 372고지에 배치되었다. 이는 당시 2개 대대 병력만 보유했던 7사단의 방어선 공백을 메우기 위한 조치였다.

6월 27일 아침, 전차의 지원을 받는 조선인민군 3사단 9연대 2대대가 생도대대의 지원을 맡았던 경찰대대를 공격하여 쉽게 무너뜨렸다. 인민군 전차 2대는 생도대대의 좌측을 통과했고, 뒤따르던 인민군 보병 부대가 진지를 지키던 생도대대와 전투를 벌였다. 오후 1시경 시작된 전투는 탄약 부족과 인민군의 45mm 대전차포 공격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부대대장 손관도 소령의 명령으로 오후 6시경 후퇴하게 되었다. 이때 생도들에게는 후퇴하여 태릉 화랑대로 집결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생도대대에게 다시 전선 투입 명령이 내려졌다. 불암산-창동 일대 방어를 맡아 92고지에 진지를 구축한 생도대대는 27일 오후 진지 편성을 완료하고 방어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앞선 부평리 전투에서 대부분의 중화기를 잃어 81mm 박격포 2문과 기관총 3문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인민군 주력 부대가 생도대대의 방어 구역을 우회하여 서울로 진입하자, 고립될 것을 우려한 손관도 소령은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일부 생도들은 육사를 지키겠다며 철수를 거부하기도 했다. 당시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서 한강선 방어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김홍일 소장은 생도대대의 전선 복귀 소식을 듣고 이들에게 직접 철수 명령을 내렸다.

3. 3. 결과

철수를 거듭하던 생도대대평택에 도착한 후에야 비전투부대로 분류되었다. 7월 10일, 생존한 생도 1기 134명은 대전 충청남도청 광장에서 임관식을 갖고 소위로 정식 임관하였다. 생도 2기생들은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8월 15일 설치된 6주 과정의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았다. 당시 150명의 생도 2기생이 종합학교 생도가 되었다. 이들은 종합학교 졸업 후 전선에 투입되어 인민군에 맞서 싸우며 공헌하였다.

4.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육군의 공식적인 후퇴 명령에도 불구하고 육군사관학교 생도 일부와 제7보병사단 병력 일부는 불암산에 남아 항전하기로 결의하고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라 칭하며, 조선인민군에 맞서 싸웠다.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육군사관학교 생도 1기 및 2기생들과 제7사단 소속 부사관 및 병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생도 1기 김동원을 대장으로 선출하여 지휘체계를 갖추었다. 약 3개월(80일) 동안 활동하며 퇴계원의 북한군 보급소 습격, 창동국민학교 및 인근 수송부대/보안소 기습, 육군사관학교 탈환 시도, 북한군 수송대 공격 및 주민 구출 등 총 4차례의 주요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불암사 주지 스님과 신도들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다. 열악한 무기와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유격대는 조선인민군의 보급과 병력 운용에 차질을 빚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치열한 전투 끝에 서울 수복을 불과 1주일 앞두고 대부분의 대원이 전사하였다.

4. 1. 유격 대원

유격대는 육군사관학교 생도 1기 10명, 생도 2기 3명, 그리고 제7보병사단 소속 부사관 1명과 병사 6명, 총 2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생도 1기 김동원을 대장으로 선출하여 조직적인 유격 활동을 전개했다.

유격 대원 구성
구분인원이름
육군사관학교 생도 1기10명강원기, 김동원(대장), 김봉교, 박금천, 박인기, 이장관, 전희택, 조영달, 한효준, 홍명집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3명성명 미상
제7보병사단7명김만석 중사, 성명 미상 용사 6명


4. 2. 직접적 전투 과정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약 3개월(80일) 동안 활동하며 총 4차례의 주요 유격 작전을 수행하였다.[1]

4. 2. 1. 전투 준비

1950년 6월 26일, 포천 방면에서 남하하는 인민군을 저지하던 유격대는 후퇴하여 6월 27일 밤 육군사관학교 뒷편 불암산을 기습 점령하고, 92고지 능선과 연결된 F고지를 중심으로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28일 아침 인민군의 재공격이 시작되었고, 오전 11시경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나 집결지조차 명시되지 않았고 현실적으로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낼 힘도 부족했다. 유격대는 인민군이 굳이 불암산을 우회하여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철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불암산에 남아 항전하기로 결정했다.[1]

당시 유격대가 보유한 무기는 김동원 유격대장의 지시에 따라 조사한 결과, M1 소총 15정, 카빈 소총 3정, 기관단총 2정, 경기관총 1정, 수류탄 5발, 그리고 각종 실탄 약 3천여 발에 불과했다. 부족한 화력을 보충하기 위해 대원들은 빈 병과 헌 솜뭉치로 화염병을 직접 만들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줄을 이용해 서로 연락할 신호 체계를 마련했다.[5]

은신처를 확보한 후, 유격대는 자체적인 지휘체계를 세웠다. 김동원(생도 1기)이 대장으로 선출되었고, 제1조 조장에는 조달 생도, 제2조 조장에는 박인기 생도, 제3조 조장에는 김만석 중사가 임명되었다. 정보 수집을 위해 홍명집 생도를 정보책으로 임명하여 불암사 주지스님과의 연락을 담당하게 했다. 불암사 윤용문 주지는 주변 마을의 신뢰할 수 있는 신도들을 통해 얻은 정보를 유격대에 전달하며 지원했다.[1]

또한, 유격대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지고 내부 규율을 확립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자체 수칙을 제정했다.[1][6]

  • 첫째, 우리 유격대는 전원이 결사의 각오로 유격 활동에 임할 것을 다짐한다. 그것이 후일에 전쟁을 기피했다는 누명을 벗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겠다.
  • 둘째, 우리 유격대는 병력과 그 장비의 규모로 보나 본래의 목적으로 보나 적 병력의 살상이나 보급품, 기타 시설 장비의 파손보다는 적 교란을 주임무로 한다. 그래서 우리 유격대는 가능한 유격활동의 범위를 넓혀 적 병력의 분산과 유인으로 그들의 일선투입을 저극적으로 방해할 것을 다짐한다.
  • 셋째, 우리 유격대는 자체 진지를 불암산과 그 북방 12km의 수락산 및 동북방 9km의 국사봉에 두고 그곳을 전진하면서 적의 수색을 피하기로 하고 또한 그곳에 잠입한 반공인사와 접촉하여 그들의 지원도 받기로 한다.
  • 넷째, 우리 유격대는 서로 강요당해 집결된 집단이 아니므로 기탄없는 의견과 토론은 환영하는 바이지만 일단 결정된 사항에는 복종할 것을 다짐하며 만약 이탈자나 결정을 어긴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을 천명한다.

4. 2. 2. 주요 전투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약 3개월(80일) 동안 활동하며 총 4차례의 주요 유격 작전을 수행했다.[1]

첫 번째 유격전은 1950년 7월, 퇴계원에 위치한 북한군 보급물자 보관소를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북한군은 전선으로 물자를 신속히 보급하기 위해 퇴계원에 물자를 쌓아두고 있었다. 유격대는 이 정보를 파악하고 공격을 계획했다. 7월 5일과 8일, 두 차례에 걸쳐 야간에 생도 두 명이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정찰을 실시했다. 이후 유격대는 주력조와 지원조로 나뉘어 기습 작전을 펼쳤다. 이 작전으로 적의 보급품을 불태우고 북한군 약 30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생도 1기 김봉교, 박인기 생도와 생도 2기 1명 등 총 3명의 생도가 희생되었고, 생도 1기 한호준 생도가 부상을 입었다.[7]

두 번째 유격전은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던 창동국민학교와 인근의 수송부대 및 보안소를 습격하는 작전이었다. 생도 6명이 참여하여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적의 숙영지와 보급차량, 보안부대 사무실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지만, 작전을 제안했던 제3조 조장 김만석 중사가 희생되었다.[7]

세 번째 유격전은 유격대원들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서 벌어졌다. 당시 육사는 북한군에 점령되어 의용군 훈련소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그곳에는 북한군뿐만 아니라 강제로 끌려온 우리 국민들도 있었다. 주둔 병력 규모가 상당했기 때문에 생도들은 신중하게 작전을 계획했다. 작전 직후 북한군의 불암산 수색을 예상하여 은거지를 수락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유격대원 15명이 참여한 이 전투에서 북한군 약 50여 명을 사상시켰지만, 유격대장인 김동원 생도를 포함하여 6명의 생도가 희생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7]

마지막 유격전은 북한군의 수송대를 공격하여 주민들을 구출하는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된 9월 15일 이후, 유격대는 정보원으로부터 북한군이 유엔군의 서울 진격에 대비하여 마을 사람들을 화물차에 싣고 북쪽으로 이동시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유격대가 보유한 장비는 개인별 소총 1정과 실탄 10여 발에 불과했지만, 국가와 국민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작전을 감행했다. 전투는 야간에 시작되었다. 생도들은 북한군이 통과할 것으로 예상되는 내곡리 마을 주변에 매복했다. 밤 11시경, 북한군 수송대가 마을을 통과하려 하자 생도들은 소총 사격으로 기습 공격을 시작했다. 혼란 속에서 새로운 유격대장으로 선출된 조영달 생도가 주민들에게 피신하라고 외쳐 많은 주민들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지고 있던 탄약을 모두 소진한 생도들은 불암산 기지로 복귀하던 중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남은 대원 전원이 전사했다. 이는 서울 수복을 불과 1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이로써 수도 서울과 육사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생도들의 유격전은 막을 내렸다.[7]

4. 2. 3. 부수적 과정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외에도 육사 생도 중 유격전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육사 1기 이성재, 2기 김대영 등이 있으며, 이들은 불암산 근처 지역에서 조선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1] 이들은 김함구 스님을 통해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와의 연락을 시도하고 합류하기를 희망했으나, 호랑이 유격대는 보안상의 이유로 이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다른 유격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1]

4. 3. 간접적 전투 지원

불암사 주지 윤용문 스님은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절을 방문하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의복과 식량을 제공하며 유격대 활동을 도왔다. 또한, 절의 독실한 신자 5명을 생도들에게 연결해주어 정보원으로 활동하게 함으로써 유격대를 지원했다. 이 정보원들은 동쪽으로 퇴계원 방면, 서쪽으로 창동과 미아리, 북쪽으로 의정부, 남쪽으로 육군사관학교와 망우리 일대까지 활동하며 정보를 수집했다.[8] 윤용문 스님은 생도들이 전투복 차림으로 작전을 수행하다 인민군에게 노출될 위험을 막기 위해, 이들에게 승복을 입히고 머리를 깎아 스님으로 신분을 위장시켜 주었다. 유격대가 활동을 시작한 초기에는 물과 식사를 조달해주기도 했다.

4. 4. 유격전의 결과

유격대의 창동 기습은 조선인민군 수송대에 타격을 주었으며, 정보원의 보고에 따르면 이 기습 이후 창동의 수송대 기착지가 폐쇄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인민군은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삼각산 일대에서 대규모 수색전을 벌이게 되었다.[9] 이는 유격대의 활동이 조선인민군의 보급과 병력 운용에 상당한 차질을 초래했음을 보여준다.

육군사관학교 기습 작전 중에는 조선인민군에게 끌려가던 농민 약 100명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이 전개되었다. 유격대는 밤 2시에 조선인민군 수송 부대를 추격하여 "우리는 육사 생도들이다. 모두 짐을 버리고 도망하라!"고 외치며 교전을 시작했다. 유격대의 엄호 사격 속에 농민들은 짐을 버리고 흩어져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인당 10여 발의 탄환밖에 남지 않았던 유격대는 조선인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고, 강원기 대원을 제외한 모든 대원이 전사하는 희생을 치렀다. 이 시기 육군사관학교 건물 역시 B29 폭격기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9]

약 80여 일에 걸친 치열한 유격전 끝에,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대부분의 대원이 전사하였다. 유일한 생존자는 부상을 입은 강원기 대원이었으나, 그 역시 병원으로 후송된 후 총상 후유증으로 인해 1951년 7월 10일 사망했다.[9]

5. 분석과 의의

6.25 전쟁 발발 초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사관생도들을 전투에 투입한 결정은 여러 평가가 엇갈린다.[11] 충분한 훈련 없이 전선에 투입되어 준비 부족과 지휘 체계 혼란 등의 문제점이 드러났고, 미래의 군 장교가 될 인재들을 잃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11]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의 활동 자체가 전세를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전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11]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이 후퇴를 거듭하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보여준 사관생도들의 애국심과 군인정신은 높이 평가된다.[11] 비록 전술적 성과는 미미했을지라도, 조국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이들의 정신은 오늘날 육군사관학교의 교육 자료로 활용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1]

5. 1. 비판적 시각

6.25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사관생도들을 전선에 투입한 결정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11]

우선, 생도들의 전투 준비 상태가 미흡했다는 점이 지적된다. 당시 생도 1기는 임관을 불과 20여 일 앞둔 상태였고, 생도 2기는 입교한 지 24일밖에 되지 않아 기본적인 제식훈련과 영점사격만 마친 상태였다. 이처럼 제대로 된 전투 훈련을 받지 못한 생도들을 실전에 투입한 것은 무리한 결정이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11]

또한, 10: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우수한 인재들인 사관생도들을 전투에 투입한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큰 인적 자원 낭비라는 지적이 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국군은 각 전선에서 유능한 초급지휘자 부족 문제에 직면했는데, 미래의 핵심 지휘관이 될 생도들을 충분한 준비 없이 전투에서 잃은 것은 막심한 손해라 볼 수 있다.[11]

전투 과정에서의 지휘 및 통신 체계 문제도 비판의 대상이다. 각 부대 간 통신과 연락이 원활하지 않아 불필요한 인명 손실이 발생했으며, 6월 26일 부평리 전투와 6월 28일 태릉 전투 이후 철수 과정에서는 대대장의 후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육사 복귀가 늦어지는 등 혼란이 있었다. 심지어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 왜곡되거나 5시간 이상 지연 전달되어 후퇴 기회를 놓친 생도들도 많았다.[11]

학교 지휘부의 소극적인 대처 또한 아쉬운 점으로 꼽힌다. 비록 생도들의 전선 투입과 초기 방어선 배치가 육군본부의 결정이었다 하더라도, 북한군의 서울 함락 이후 한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된 생도들을 신속히 후방으로 이동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맥아더 장군의 한강 시찰(6월 29일) 이후 미군 참전이 확실시된 상황에서도 생도들의 대전 이동이 7월 5일에야 이루어진 점은 학교장과 학교 지휘부의 소극적 조치로 아쉬움을 남긴다.[11]

결과적으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의 활동 자체가 6.25 전쟁 초기의 불리한 전세를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전과를 올렸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미래의 국군 장교가 될 사관생도들을 다수 잃음으로써 장기적인 관점에서 군의 인력 충원에 차질을 빚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11]

5. 2. 긍정적 평가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활동은 6.25 전쟁 초기 대한민국 국군의 전세를 뒤집을 만한 큰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11] 또한 군 장교로 임관할 우수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다수 잃었다는 점에서 인력 손실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11]

하지만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특히 대한민국 국군이 계속 후퇴하던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사관생도들과 제7보병사단 9연대 병력들이 자발적으로 유격대 활동을 펼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애국심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11] 또한, 이들이 조선인민군에게 붙잡힌 대한민국 농민들을 구출하고 적의 보급선을 교란하는 등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려 노력한 모습은 투철한 군인정신의 표본으로 여겨진다.[11]

이처럼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의 활동은 비록 전술적인 성과는 미미했을지라도, 위기 속에서 보여준 생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심, 군인정신은 오늘날 육군사관학교에서 중요한 교육 자료로 활용될 만큼 큰 의미를 남겼다고 평가된다.[11]

6. 생도 참전전투에 대한 기억 및 기록

6.25 전쟁 초기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참전과 불암산 유격대의 활동에 대한 내용은 참전자들의 증언과 제시 자료, 국방부육군본부, 육군사관학교가 소장한 역사 자료를 통한 검증 과정을 거쳐 후세에 알려졌다.[12]

초기에는 전쟁 직후의 사회적 분위기와 기록 부족으로 인해 이들의 활동이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미국의 기록에서도 관련 내용을 찾기 어려웠으며, 일부 언론 보도나 관계자의 언급이 있었으나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12]

1960년대 후반부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국방부의 '한국전쟁사' 발간을 계기로 참전자들의 증언이 기록되기 시작했으며, 생도 출신 참전자들의 적극적인 자료 수집과 증언 노력이 이어졌다. 또한, 당시 육군사관학교 관계자들의 회고록 등을 통해 관련 내용이 보완되었다.[12]

특히 생도들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는 학교 역사서 발간, 기념행사 개최, 관련 연구 등을 통해 생도 참전 전투와 불암산 유격대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2]

이처럼 사관생도들의 참전과 희생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관련자들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참전자들과 육군사관학교 등의 노력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12]

6. 1. 초기 기록의 부재

6.25 전쟁 초기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참전과 불암산 유격대의 활동에 대한 내용은 참전자들의 증언과 제시 자료, 국방부와 육군본부, 육군사관학교가 소장한 역사 자료를 통한 검증 과정을 거쳐 후세에 알려졌다.

생도 참전 전투와 불암산 유격대에 관한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중반까지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전쟁 중이나 휴전 직후 과거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려 하지 않으려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6.25 전쟁 중이나 직후에 작성된 미국의 기록에서도 육사 생도의 참전 사실을 입증할 만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1958년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장의 고문관을 지낸 윌리엄 루츠(William Lutz) 미 육군 중령이 미 육사 동창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6.25전쟁 중 대한민국 육사 생도들이 교정에서 공산군과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교정이 불탔고 많은 생도들이 희생되었다”고 소개한 것이 전부였다.

전쟁 중에는 육사 생도들의 참전 사실이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6.25 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6월 전쟁 발발 4주년을 맞아 당시 국방부 교육과장이 신문 기고문을 통해 육사 생도 1기와 2기의 참전 사실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며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55년 10월에는 경향신문이 정규 육사 1기의 졸업식 기사를 전하면서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생도 1기와 2기의 참전을 상기시키자는 의미의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관생도들이 싸우다 희생된 역사적 사실은 1960년대 중반까지 관련자들의 기억 속에만 머물렀다.[12]

6. 2. 참전자들의 노력

6.25 전쟁 초기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참전과 불암산 유격대의 활동에 대한 내용은 참전자들의 증언과 제시 자료, 국방부육군본부, 육군사관학교가 소장한 역사 자료를 통한 검증 과정을 거쳐 후세에 알려졌다.

생도 참전 전투와 불암산 유격대에 관한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중반까지 사회의 주목을 끌지 못했던 이유는 전쟁 중이나 휴전 직후에 과거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려 하지 않으려는 소위 6.25세대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6.25 전쟁 중이나 직후에 작성된 미국의 기록에서도 육사 생도의 참전 사실을 입증할 만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1958년 육사 교수부장의 고문관을 지낸 윌리엄 루츠 중령이 미국 육군사관학교 동창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6.25전쟁 중 대한민국 육사 생도들이 교정에서 공산군과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교정이 불탔고 많은 생도들이 희생되었다.”고 소개한 것이 전부였다.

전쟁 중에는 육사 생도들의 참전 사실이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6.25 전쟁이 휴전을 맞은 다음 해인 1954년 6월에 처음으로 전쟁 발발 4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국방부 교육과장은 신문 기고문을 통해 육사 생도 1기와 2기 참전 사실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며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55년 10월에 경향신문은 정규 육사 1기의 졸업식 기사를 전하면서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생도 1기와 2기의 참전을 상기하자는 의미에서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생도 참전 전투에 대한 관심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68년 국방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 2권' 이후였다. 전선편찬위원회는 참전자들을 대상으로 생도대대의 출전 과정, 전투 경과 및 사후 처리에 대한 구술을 채록하였고, 약 4페이지에 걸쳐 생도 참전전투에 대한 공식 기록을 남겼다. 이와 같이 1960년대 후반에 갑자기 생도 참전 전투에 관한 자료가 많아지는 과정에는 생도 1기 출신 남상선이 동기생들로부터 참전 기록에 대한 자료와 기록을 수집하여 적극적으로 제공한 것이 큰 기여를 했다. 특히 그는 1978년에 ‘불멸탑의 증언: 육사생도대 실전기’를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개전 이후부터 7월 10일 대전에서의 임관식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불암산 유격대의 활동도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후에는 생도 참전 전투에 대한 기록들은 육사에서 근무했던 이들의 자서전이 발간되면서 보완되었다. 육군사관학교의 부교장이었던 이한림은 생도 참전 전투에 얽힌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하였고 생도대장을 역임하다 개전 3주 전에 육사를 떠나 수도사단 참모장으로 전쟁을 맞이한 김웅수는 생도 1기와 2기의 선발, 교육과정에 대한 내용을 덧붙였다.

무엇보다도 생도 참전 전투를 가장 연구하고 세상에 알린 것은 생도들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이다. 육군사관학교는 1977년에 발간한 개교 30주년에 맞춰 발행한 ‘30년사’에 사관생도 참전 전투를 자세하게 기록하여 후배 생도들에게 알렸고 1996년에 발간한 ‘50년사’는 그동안 보완된 내용을 추가하고 불암산 유격대의 활동을 추가하였다. 특히 개교 5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생도 참전 전투와 불암산 유격대에 대한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하여 후배 생도들에게 선배들의 애국정신과 불굴의 전투 의지를 강조하였다. 또한 1997년에는 모교를 빛낸 동문들에 대한 연구를 펴냈는데, 이 연구에서 생도 1기와 2기에 의한 전투 참전, 불암산 유격대에 대한 현대적 평가를 제시하였다.

이처럼 사관생도들이 싸우다 희생된 역사적 사실은 1960년대 중반까지 관련자들의 기억 속에만 머물렀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는 참전자들의 노력에 의해 이 사실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연구를 통해 관련 자료와 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세상에 알려졌다.[12]

6. 3. 육군사관학교의 역할

6.25 전쟁 초기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참전과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의 활동에 대한 내용은 참전자들의 증언과 제시 자료, 국방부와 육군본부, 육군사관학교가 소장한 역사 자료를 통한 검증 과정을 거쳐 후세에 알려졌다. 초기에는 전쟁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지 않으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주목받지 못했으나, 1960년대 후반부터 참전자들의 노력과 연구를 통해 점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12]

이 과정에서 생도 참전 전투를 연구하고 세상에 알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생도들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이다.

  • '30년사' 발간 (1977년): 육군사관학교는 개교 30주년에 맞춰 발행한 '30년사'에 사관생도 참전 전투를 자세히 기록하여 후배 생도들에게 선배들의 희생과 용기를 알렸다.[12]
  • '50년사' 발간 (1996년): '50년사'에서는 그동안 보완된 내용을 추가하고, 특히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의 활동 내용을 새롭게 포함시켜 기록의 폭을 넓혔다.[12]
  • 개교 50주년 기념행사 (1996년): 육군사관학교는 개교 50주년을 맞아 생도 참전 전투와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를 기리는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했다. 이를 통해 후배 생도들에게 선배들의 애국정신과 불굴의 전투 의지를 강조하고 그 의미를 되새겼다.[12]
  • 동문 연구 발간 (1997년): 모교를 빛낸 동문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생도 1기와 2기의 전투 참전,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활동에 대한 현대적인 평가를 제시하며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했다.[12]


이처럼 육군사관학교는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연구하며, 다양한 기념 활동을 통해 잊힐 뻔했던 사관생도들의 6.25 전쟁 참전과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의 활약상을 밝히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2]

7. 유격대 관련 행사 (제막식)

2019년 6월 19일, 6.25 전쟁 당시 계급과 군번 없이 싸운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를 기리기 위한 안내판 제막식이 불암산 입구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육군사관학교남양주시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공동으로 주최했으며, 1996년에 설치했던 기존 안내판이 노후되고 파손되어 새로운 안내판으로 교체하게 되었다. 제막식에는 정진경 육군사관학교장과 생도, 조광한 남양주시장, 시의회 의장, 불암사 주지 스님 등이 참석했다.

정진경 육군사관학교장은 “6·25전쟁 당시 장교 임관도 하지 못했던 1·2기 생도 539명 전원이 내촌-태릉 전투, 한강 방어선 작전, 금곡리 전투 등에 참전해 151명이 전사했다”며 “계급도, 군번도 없는 사관생도 신분으로 참전했던 유격대원들, 서울 수복 이전에 전사한 생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다시금 되새겼으면 한다”고 밝혔다.[13][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0620/2/BBSMSTR_000000010023/view.do 국방일보 기사]

조광한 남양주시장은 “계급과 군번도 없는 사관생도들이 4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주민 100여명을 구출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을 널리 알려야 하는 의미 있는 역사”라며, 한국전쟁 69주기를 앞두고 열린 제막식의 의미를 강조했다.[14]

육군사관학교와 남양주시는 이번 제막식을 시작으로 기념비 설치, 주변 환경 정비 등 호국보훈의 의미를 알리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8. 불암산 전장 사진 및 등산로 설명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제1동굴


불암산에 있는 호랑이 유격대 은신 동굴은 1996년 5월 중순, 석천암 김한구 주지의 손자인 김만웅 씨에 의해 발견되었다. 육군사관학교는 유격대원들을 기리기 위해 1996년 불암산에 철판 안내문을 설치했다. 이 안내문이 23년 만인 2019년 6월, 낡고 녹슬어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8. 1. 제1동굴

엎드려서 손을 뻗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크기의 동굴이다. 내부에는 비밀 통로가 있으며, 경사진 좁은 통로를 3m 정도 기어가면 동굴 안쪽에 도달할 수 있다. 큰 바위 두 개가 서로 기대어 있는 공간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1] 규모가 작기 때문에 주로 경계나 초소 용도로 활용되었다. 석천암 바로 아래에 안내 표지판이 있지만, 일반적인 동굴 형태가 아니어서 찾기 어려울 수 있다.

참조

[1] 에피소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MBC 프로덕션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웹인용 불멸탑 자료_불멸탑 QR코드 https://web.archive.[...] 2019-12-11
[11] 서적
[12] 서적
[13] 뉴스 ‘푸른 눈의 용사’에 감사하고, 육사 생도 공적 기리고… https://web.archive.[...] 국방일보 2019-06-19
[14] 뉴스 남양주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안내판 제막식 개최 http://www.shinailbo[...] 신아일보 2019-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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