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에이리크의 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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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는 붉은 에이리크의 그린란드 정착과 토르핀 칼세프니의 빈란드 탐험을 다룬 아이슬란드 사가이다. 《그뢴렌딩가 사가》와 유사한 내용을 다루지만, 탐험 묘사가 더 구체적이고 기독교적 요소가 강조되며 구드리드의 이야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특징이 있다. 13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14세기와 15세기에 두 가지 버전으로 전해진다. 이 사가는 탐험, 개척, 문화 간의 만남과 갈등을 주제로 하며, 역사적, 문학적, 현대적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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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에이리크의 사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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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제목 (아이슬란드어) | Eiríks saga rauða |
제목 (한국어) | 붉은 머리 에이리크의 사가 |
언어 | 고대 노르드어 |
종류 | 사가 |
하위 사가 | 토르핀 카를세프니의 사가 |
내용 | |
주요 인물 | 에이리크 라우디 토르핀 카를세프니 레이프 에이릭손 |
지역 | 그린란드 빈란드 헬룰란드 마르클란드 |
기록 정보 | |
기록 시기 | 13세기 |
사본 | 하우크스보크 토르핀 카를세프니의 사가 |
OCLC | 604126691 (토르핀 카를세프니의 사가) 461045740 (하우크스보크) |
온라인 자료 | |
캐나다 인명사전 | 토르핀 카를세프니 토르다르손 |
관련 문서 | |
관련 문서 | 토르핀 카를세프니의 사가 그린란드 사람의 사가 빈란드 |
2. 배경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는 붉은 에이리크의 그린란드 정착과 토르핀 칼세프니의 빈란드 탐험을 중심으로 다루는 사가이다.
같은 소재를 다룬 《그린란드인의 사가》에 비해 탐험 묘사가 구체적이며, 기독교 색채가 강조되고, 구드리드 소르브 야르나도티르가 이야기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린란드인의 사가》에는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에 대한 언급이 있으므로[12], 《그린란드인의 사가》의 작가는 이 사가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사가에 기록된 내용은 상당히 다르며, 서로 모순되는 점도 많이 발견된다.
이 사가는 하우크스보크 (14세기)와 스칼호르트스보크 (Skálholtsbók, 15세기) 두 권의 필사본에 보존되어 있다. 현대 문헌학자들은 스칼호르트스보크가 더 원본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원본은 13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2. 1. 역사적 배경
토르발드 아스발드손과 그의 아들 붉은 에이리크는 살인 사건 때문에 노르웨이에서 추방되어 아이슬란드로 이주한다. 에이리크는 아이슬란드에서도 살인을 저질러 추방당한다. 이에 에이리크는 군비에른 울프손이 서쪽으로 표류했을 때 보았다는 육지를 찾아 이주하기로 결심하고, 그린란드를 발견하여 브라타리드에 정착했다.[13]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는 노르드인들의 항해와 탐험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이들은 노르웨이를 떠나 아이슬란드를 거쳐 그린란드까지 진출했다. 이러한 이주의 배경에는 살인 사건으로 인한 추방, 재정적 어려움, 새로운 땅을 찾고자 하는 욕망 등이 있었다.
2. 2. 지리적 배경

이 사가는 붉은 에이리크의 그린란드 정착과 토르핀 칼세프니의 빈란드 탐험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레이프 에릭손은 그린란드에서 노르웨이로 가던 중 헤브리디스 제도로 떠내려갔고, 그곳을 떠난 뒤 노르웨이 왕의 명령으로 그린란드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밀과 포도나무가 자생하는 육지 빈란드를 발견했다.[16]
2. 3. 문화적 배경
붉은 에이리크의 그린란드 정착과 토르핀 칼세프니의 윈란드 탐험을 중심으로 그린 사가이다. 동일한 주제를 다룬 《그뢴렌딩가 사가》에 비해 탐험의 묘사가 구체적이라는 점과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조되고 있는 점, 구드리드의 이야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2]《그뢴렌딩가 사가》에는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그뢴렌딩가 사가》는 이 사가를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사가에 기록된 내용은 상당히 다르며, 서로 모순되는 점도 있다.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는 고대 노르드 종교와 신념, 특히 예언의 관행에 대한 자료로 사용되었지만 신뢰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8] 한 학자는 이 사가를 "그린란드에서 서기 1000년경에 여전히 만연해 있다고 여겨지던 이교 관습에 대한 논쟁적인 공격"이라고 묘사했다.[9]
3. 등장인물
- '''올라프 백색''': 더블린을 정복한 바이킹으로, 오드 딥마인디드(케틸스도티르)와 결혼했으나 전투에서 사망했다.
- '''오드 딥마인디드(케틸스도티르)''': 올라프 백색의 아내. 남편이 사망한 후 아들 토르스테인 적과 함께 헤브리디스 제도를 떠났다.
- '''토르스테인 적''': 올라프 백색과 오드 딥마인디드(케틸스도티르)의 아들.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왕이 되었으나 사망했다.
- '''토르비요른''': 구드리드의 아버지. 부유한 상인 에이나르의 구혼을 거절했으나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그린란드로 이주했다.
- '''에이나르''': 부유한 상인으로 구드리드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 '''토르비외르그''': "작은 볼바"로 불리는 세이드 작업자. 구드리드에게 바르드록커non(경계 노래)를 부탁했고, 기근이 곧 끝날 것이며 구드리드가 두 번의 좋은 결혼을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 '''토르할 사냥꾼''': 에리크의 이교도 친구이자 하인. 빈란드 탐험 중 토르에게 기도하여 고래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탐험대 내에서 의견 대립으로 북쪽으로 갔다가 아일랜드에서 노예가 되었다.
- '''외다리''': 토르발드를 활과 화살로 살해한 인물.
- '''스노리 토르핀손''': 토르핀 칼세프니와 구드리드의 아들. 빈란드에서 태어났다.
- '''스크레링''': 빈란드 원주민. 노르드인들과 교역을 하기도 했지만,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 '''비아르니 그륀울프손''' : 군비에른 울프손이 서쪽으로 표류했을 때 보았다는 육지를 찾다가 그린란드를 발견한 인물.
3. 1. 붉은 에이리크 (Eiríkr rauði)
토르발드 아스발드손의 아들 붉은 에이리크는 아버지와 함께 살인 사건으로 노르웨이에서 추방되어 아이슬란드로 이주하였다.[13] 에이리크는 아이슬란드에서도 살인을 저질러 추방 처분을 받았다. 이에 에이리크는 군비에른 울프손이 서쪽으로 표류했을 때 보았다는 육지를 찾아 이주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에이리크는 성공적으로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브라타리드에 정착했다. 에이리크는 쇼즈힐드와 결혼하여 레이프와 토르스테인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토르스테인은 아버지와 함께 그린란드에 살았고, 레이프는 노르웨이에서 올라프 트리그바손 왕 곁에 머물렀다.[13] 에이리크는 세이드 의식을 거부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다.3. 2. 레이프 에이릭손 (Leifr Eiríksson)
레이프는 붉은 에이리크의 아들이다. 노르웨이로 항해하던 중 항로를 벗어나 헤브리디스 제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명문가의 여성과 관계를 맺어 아들 토르길스를 낳는다. 토르길스가 성장한 후, 그의 어머니는 그를 그린란드로 보냈고 레이프는 그를 알아본다. 레이프는 노르웨이에서 올라프 트리그바손 왕의 궁정에 들어가 그린란드로 돌아갈 때 기독교를 전파하라는 임무를 받는다.[16]항해 도중 폭풍으로 인해 그는 미지의 땅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야생 밀, 포도 덩굴, 단풍나무를 발견한다. 레이프는 또한 난파된 선원들을 구출하여 돌보고 기독교로 개종시킨다. 그린란드로 돌아와 어머니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그의 어머니는 교회를 짓지만, 그의 아버지 에이리크는 개종하지 않았고, 그 결과 에이리크의 아내는 그를 떠난다.[16]
에이리크의 장남 레이프 에릭손은 그린란드에서 노르웨이로 향하던 중 헤브리디스 제도로 떠내려가 마녀 소르군나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갖게 된다. 헤브리디스 제도를 출항한 레이프는 노르웨이에서 올라프 1세 트리그바손 왕을 알현하고 왕으로부터 그린란드 포교 임무를 받는다. 그린란드로 돌아가는 도중, 우연히 밀과 포도나무가 자생하는 육지 빈란드를 발견했다. 게다가 난파되어 표류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구출했다. 이후 그는 '''행복한 레이프'''라고 불리게 되었다.[16]
돌아온 레이프는 노르웨이 왕의 명령대로 그린란드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아버지 에이리크는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 셰르힐드는 곧 개종하고 에이리크스피요르드에 교회를 세웠다. 이후로 두 부부의 사이는 나빠졌다.[16]
3. 3. 토르핀 칼세프니 (Þorfinnr Karlsefni)
아이슬란드 출신의 부유한 상인 토르핀 칼세프니는 두 척의 배를 이끌고 그린란드를 방문하여 브라타리드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는 에리크 붉은머리의 웅장한 율 축제를 도왔고, 이후 구드리드와 결혼했다.[19]칼세프니는 160명의 선원들과 함께 빈란드 탐험을 떠났다. 이들은 대부분 그린란드인이었지만, 칼세프니를 포함한 다른 아이슬란드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헬루란드(큰 돌덩어리가 많고 여우도 많은 곳), 마르크란드(숲이 우거진 지역), 킬라르네스를 거쳐 스트라움피오르드라고 불리는 피오르드에서 겨울을 났다. 이들은 레이프 에릭손에게서 받은 발 빠른 스코틀랜드 노예들을 시켜 땅을 정찰하게 했고, 그들은 포도와 밀을 가져왔다.[20]
혹독한 겨울 동안 식량이 부족해지자, 에리크의 이교도 친구이자 하인이었던 토르할 사냥꾼이 사라졌다가 절벽 꼭대기에서 발견되었다. 곧이어 이상한 종류의 고래가 해안으로 밀려왔는데, 이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병에 걸렸다. 토르할은 자신이 토르에게 기도했기 때문에 고래가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고래를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고 하느님께 기도했고, 날씨가 맑아져 좋은 어획량과 충분한 식량을 얻게 되었다.
토르발드는 칼세프니와 함께 여행하던 중 외다리에게 살해당했고, 칼세프니는 그를 빈란드(현재 캐나다 노바스코샤 지역)에 묻었다. 칼세프니의 아들 스노리는 빈란드에서 태어났으며, 그들이 떠날 때 세 살이었다.
마르크란드에서 칼세프니 일행은 다섯 명의 스크레링을 만났다. 그들은 두 소년을 붙잡아 세례를 주었고, 스크레링은 아발다몬과 아발디디다라는 두 왕이 통치하는 동굴 거주민이며, 근처 나라에는 하얀 옷을 입고 깃발이 달린 막대기를 들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가 작가는 이것이 전설적인 ''휘트라만날란드''(혹은 대 아일랜드)로 여겨졌다고 덧붙인다. 그들은 그린란드로 돌아가 에리크 르오드의 집에서 겨울을 났다.[21]
어느 여름, 뛰어난 뱃사람이었던 아이슬란드의 젊은이 솔핀 칼르세프니는, 동료와 함께 40명이 배를 타고 가을에 브라타리흐에 도착했다. 솔핀 일행은 에이리크에게 호의적으로 거래에 응했고, 에이리크도 관대하게 답례하여,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아졌다. 그리고 동지 축제를 준비하는 편의를 제공한 것을 계기로, 에이리크는 아들의 미망인 구드리드를 솔핀과 결혼시켰다.[19]
그 겨울, 브라타리흐에서는 빈란드 탐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면서, 봄에 솔핀이 가기로 했다. 이 항해에는 에이리크가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프레이디스와 남편 소르발드, 더 나아가 에이리크의 또 다른 아들 소르발드도 일행에 합류했다. 일행의 총원은 160명이었다.
솔핀 일행은 먼저 그린란드 서부 정착지로 향하여, 비아르네이 (곰 섬)를 목표로 했다. 이틀 동안 그곳에서 남쪽으로 나아가니, 크고 평평한 바위가 있는 육지를 발견하여, 이곳을 '''헬루랜드'''(Helluland, 평평한 바위의 나라)라고 이름 붙였다. 거기서 이틀을 항해하고, 진로를 남동쪽으로 바꾸니, 숲으로 덮인 땅을 발견했다. 이곳을 '''마르크란드'''(:en:Markland, 숲의 나라)라고 이름 붙였다. 더 나아가, 마르크랜드의 남동쪽 맞은편에 섬을 발견했다. 그 섬에서 곰을 잡았으므로, 비아르네이 (곰 섬)라고 이름 붙였다.
거기서 육지를 따라 오랫동안 남쪽으로 나아가니, 곶을 발견했다. 그 곶에서 난파선의 용골을 발견하여, 캬르네스 (용골 곶)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오른쪽에는 놀랍도록 긴 모래 해변의 해안선이 뻗어 있었고, 그 해안선에는 후르즈스트란디르 (경이의 해안)라고 이름 붙였다. 거기서 육지에 만이 들어와 있었기에, 그중 하나에 배를 진입시켰다. 거기서 포도 송이와 야생 밀을 발견했다. 그 후, 어떤 만으로 배를 진입시키고, 그 만과 입구에 있는 섬을 각각 스트라움피요르드 (급류의 만)와 스트라움에이 (급류의 섬)라고 이름 붙여, 만에 상륙했다. 거기서 겨울을 보냈지만, 식량이 부족한 사태에 빠졌다. 해안에 고래가 밀려와 해체해서 먹었더니, 모두 식중독에 걸렸다.[20]
다음에 북상할 것인가, 아니면 남하할 것인가를 두고, 선원 중 한 명인 "사냥꾼" 소르할루르와 솔핀의 의견이 대립했다. 소르할루르는 가짜 기독교도로, 원래 다른 선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결국, 소수의 동료와 함께 배를 타고 독단적으로 북쪽으로 진로를 잡았지만, 그대로 서쪽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을 만나 아일랜드까지 떠내려갔다. 그들은 거기서 노예가 되어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21]
한편, 솔핀 일행은 다른 배로 더 육지를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배를 달리자, 강을 발견하여, 그 하구에 닻을 내렸다. 이 땅은 매우 비옥하여, 그 땅의 저지대에는 야생 밀밭이, 숲이 보이는 곳에는 포도나무가 펼쳐져 있었으며, 강은 물고기로 가득했다. 숲에는 온갖 종류의 동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은 거기에 반 달 정도 머무르며, 가축을 길러 살았다.[22]
3. 4. 구드리드 토르브야르나도티르 (Guðríðr Þorbjarnardóttir)
구드리드 토르브야르나도티르는 아이슬란드의 아우드 족쇄의 아들 토르비요른의 딸로 태어났다. 부유한 상인 에이나르의 청혼을 거절당한 후, 아버지 토르비요른은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가족과 함께 그린란드로 이주한다.[14] 그린란드에서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여성 예언자 솔비외르그가 구드리드의 도움을 받아 예언을 하고, 구드리드의 미래와 아이슬란드에서의 자손 번영을 예언한다.[15]이후 구드리드는 소르스테인과 결혼하지만, 겨울에 역병으로 소르스테인이 사망한다. 소르스테인은 죽은 후 잠시 되살아나 구드리드에게 그린란드 사람과의 결혼을 피하고 재산을 기부할 것을 부탁한다. 남편을 잃은 구드리드는 에이리크의 집으로 거두어진다.

어느 여름, 아이슬란드의 뛰어난 뱃사람 솔핀 칼르세프니가 브라타리흐에 도착하고, 에이리크는 구드리드와 솔핀의 결혼을 주선한다.[19]
그 겨울, 브라타리흐에서 빈란드 탐험 이야기가 오가고, 솔핀은 봄에 탐험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총 160명의 탐험대는 헬루랜드(평평한 바위의 나라), 마르크랜드(숲의 나라) 등을 거쳐 빈란드에 도착한다. 그들은 스트라움피요르드(급류의 만)와 스트라움에이(급류의 섬)에서 겨울을 보내지만, 식량 부족을 겪는다. 해안에 밀려온 고래를 먹고 식중독에 걸리기도 한다.[20]
탐험대 내에서 북상과 남하를 두고 의견 대립이 발생하고, "사냥꾼" 소르할루르는 소수의 동료와 함께 북쪽으로 갔다가 아일랜드에서 노예가 된다.[21] 솔핀 일행은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비옥한 땅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선주민과 교역을 하기도 한다.
3. 5. 토르스테인 에이릭손 (Þorsteinn Eiríksson)
토르스테인 에이릭손은 붉은 에이리크의 아들이자 레이프 에이릭손의 형제였다. 토르스테인은 아버지와 함께 그린란드에 살았다.[26]빈란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며, 토르스테인은 빈란드 탐험대의 지도자로 결정되었다. 아버지 에이리크도 동행을 요청받았으나, 낙마 사고로 인해 항해를 포기했다. 토르스테인 일행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가을 말에 그린란드로 돌아와 겨울을 넘겼다.[26]
돌아온 토르스테인은 구드리드에게 청혼하여 결혼했다. 그러나 겨울에 역병이 돌아 토르스테인은 사망했다. 토르스테인의 시신은 잠시 동안 일어나 구드리드에게 그린란드 사람과 결혼하지 말고 재산을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라는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 그의 유해는 에이릭스피요르드의 교회에 묻혔다.[26]
3. 6. 프레이디스 에이리크스도티르 (Freydís Eiríksdóttir)
붉은 에이리크가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빈란드 탐험에 동행했다.[19] 남편 소르발드 및 에이리크의 또 다른 아들 소르발드도 이 탐험에 함께 했다. 탐험대의 총원은 160명이었다.
스크레링(Skrælings)이 더 큰 무리로 돌아와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노르드인들은 후퇴했다. 프레이디스는 임신한 채로 오두막에서 나와 그들을 쫓으며 겁쟁이라고 꾸짖었다. 스클렐링이 그녀를 에워싸자, 그녀는 죽은 자의 손에서 검을 뽑아 한쪽 가슴을 드러내고 검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스클렐링은 겁에 질려 떠났다.
4. 주요 사건
사가 초반부에는 비아르니 그림올프손이 이끄는 탐험대가 그린란드 해 혹은 아일랜드 서쪽 바다에서 표류하다 바다 벌레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한다. 배의 작은 배는 물개 기름으로 만든 타르를 칠했기 때문에 튼튼했지만, 승선자 절반만을 태울 수 있었다. 비아르니의 제안에 따라 제비를 뽑았지만, 그는 젊은 아이슬란드인에게 배의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배에 남아 익사하는 희생정신을 보여준다. 배에 탄 사람들은 육지에 무사히 도착한다.
4. 1. 에이리크의 그린란드 정착
에이리크는 노르웨이에서 살인 사건을 일으켜 아버지 토르발드 아스발드손(Þorvaldr Ásvaldsson)과 함께 아이슬란드로 추방당했다.[13] 아이슬란드에서도 살인을 저질러 다시 추방당하자, 군비에른 울프손(Gunnbjörn Ulfsson)이 서쪽으로 표류했을 때 보았다는 육지를 찾아 이주하기로 결심했다.[13] 에이리크는 성공적으로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브라타리드(Brattahlid)에 정착했다.[13] 그는 그곳에서 쇼즈힐드와 결혼하여 레이프와 토르스테인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토르스테인은 아버지와 함께 그린란드에 살았고, 레이프는 노르웨이에서 올라프 트리그바손 왕 곁에 머물렀다.[13]에이리크를 도왔던 동료 솔비외른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딸 구드리드를 데리고 그린란드로 이주했다.[14] 이주한 그린란드에서 큰 기근이 발생하자, 솔비외른 일족은 여성 예언자 솔비외르그를 초대하여 점을 치게 했다.[15] 솔비외르그는 점에 필요한 '발드로쿠르'(영혼을 불러오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성을 찾았고, 기독교인이라 망설이던 구드리드가 노래를 불러 점이 성공했다.[15] 솔비외르그는 구드리드의 자손이 아이슬란드에서 번영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곧 날씨가 회복되었다.[15]
4. 2. 레이프의 빈란드 발견
레이프는 노르웨이로 항해하던 중 항로를 벗어나 헤브리디스 제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그는 명문가의 여성과의 사이에서 아들 토르길스를 얻는다. 토르길스가 성장하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그린란드로 보냈고, 레이프는 그를 알아본다. 레이프는 노르웨이에서 올라프 트리그바손 왕의 궁정에 들어가 그린란드로 돌아갈 때 기독교를 전파하라는 임무를 받는다.[16]귀향 항해 중 폭풍으로 인해 그는 미지의 땅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야생 밀, 포도 덩굴, 단풍나무를 발견한다. 레이프는 또한 난파된 선원들을 구출하여 돌보고 기독교로 개종시킨다. 그린란드로 돌아와 그는 어머니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그의 어머니는 교회를 짓지만, 그의 아버지 에이리크는 개종하지 않았고, 그 결과 에이리크의 아내는 그를 떠난다.[16]
에이리크의 장남 레이프 에릭손은 그린란드에서 노르웨이로 향하던 중 헤브리디스 제도로 떠내려가 그곳에서 아이를 갖게 된다. 헤브리디스 제도를 출항한 레이프는 노르웨이에서 올라프 1세 왕을 알현하고 왕으로부터 그린란드 포교 임무를 받는다. 그린란드로 돌아가는 도중, 우연히 밀과 포도나무가 자생하는 육지 빈란드를 발견했다. 게다가 난파되어 표류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구출했다. 이후 그는 '''행복한 레이프'''라고 불리게 되었다.[16]
돌아온 레이프는 노르웨이 왕의 명령대로 그린란드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아버지 에이리크는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 셰르힐드는 곧 개종하고 에이리크스피요르드에 교회를 세웠다. 이 이후로 두 부부의 사이는 나빠졌다.[16]
4. 3. 토르스테인의 탐험과 죽음
그해 겨울 그린란드에 기근이 닥치자, 토르비외르그라는 예언자가 기근이 곧 끝날 것이며, 구드리드는 두 번 결혼하여 훌륭한 가문을 이룰 것이라고 예언했다. 봄에 토르비외른은 브라타리드로 가서 에이리크 라우디의 환영을 받고 땅을 얻었다.곧 빈란드 이야기가 나왔고, 에이리크의 아들 토르스테인이 탐험대 지도자로 결정되었다. 에이리크도 동행을 요청받았지만, 낙마 사고로 항해를 포기했다. 토르스테인 일행은 20명의 사람과 가축, 무기, 식량을 싣고 출발했지만,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가을 말에 에이리크스피요르드에 돌아와 겨울을 넘겼다.
토르스테인은 구드리드에게 결혼을 신청했고, 둘은 가을에 결혼했다. 그러나 겨울에 역병이 돌아 토르스테인이 죽었다. 그날 밤, 토르스테인의 시체가 일어나 구드리드에게 그린란드 사람과 결혼하지 말고 재산을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라고 부탁했다. 그의 유해는 에이리크스피요르드의 교회에 묻혔고, 구드리드는 에이리크의 집으로 거두어졌다.[3]
4. 4. 토르핀 칼세프니의 탐험
아이슬란드의 젊은 뱃사람 솔핀 칼르세프니는 동료 40명과 함께 배를 타고 가을에 브라타리드에 도착했다. 솔핀 일행은 에이리크에게 거래를 제안했고, 에이리크는 관대하게 답례하며 둘은 사이가 좋아졌다. 에이리크는 동지 축제 준비를 도운 것을 계기로 아들의 미망인 구드리드를 솔핀과 결혼시켰다.[19]그 겨울, 브라타리흐에서는 빈란드 탐험 이야기가 오갔고, 봄에 솔핀이 탐험을 떠나기로 했다. 이 항해에는 에이리크가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프레이디스와 남편 소르발드, 그리고 에이리크의 또 다른 아들 소르발드도 합류했다. 일행은 총 160명이었다.
솔핀 일행은 먼저 그린란드 서부 정착지로 향하여 비아르네이 (곰 섬)를 목표로 했다. 이틀 동안 남쪽으로 항해하여 크고 평평한 바위가 있는 육지를 발견하고 '''헬루랜드'''(Helluland, 평평한 바위의 나라)라고 이름 붙였다. 다시 이틀을 항해하여 남동쪽으로 진로를 바꾸니 숲으로 덮인 땅을 발견하고 '''마르크랜드'''(:en:Markland, 숲의 나라)라고 이름 붙였다. 마르크랜드 남동쪽 맞은편의 섬에서 곰을 잡아 비아르네이 (곰 섬)라고 이름 붙였다.
육지를 따라 오랫동안 남쪽으로 나아가 곶을 발견했다. 곶에서 난파선의 용골을 발견하여 캬르네스(용골 곶)라고 이름 붙였다. 놀랍도록 긴 모래 해변의 해안선에는 후르즈스트란디르 (경이의 해안)라고 이름 붙였다. 육지에 만이 들어와 있어 그중 하나에 배를 진입시켰다. 포도 송이와 야생 밀을 발견한 후, 어떤 만으로 배를 진입시키고 만과 입구의 섬을 각각 스트라움피요르드 (급류의 만)와 스트라움에이 (급류의 섬)라고 이름 붙여 상륙했다.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지만 식량이 부족해졌다. 해안에 고래가 밀려와 해체해서 먹었더니 모두 식중독에 걸렸다.[20]
북상할 것인지 남하할 것인지를 두고 선원 "사냥꾼" 소르할루르와 솔핀의 의견이 대립했다. 소르할루르는 가짜 기독교도로 다른 선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소수의 동료와 배를 타고 북쪽으로 갔지만 서쪽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을 만나 아일랜드까지 떠내려갔다. 그들은 노예가 되어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21]
솔핀 일행은 다른 배로 육지를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항해하여 강을 발견하고 하구에 닻을 내렸다. 이 땅은 매우 비옥하여 저지대에는 야생 밀밭이, 숲에는 포도나무가 펼쳐져 있었으며 강은 물고기로 가득했다. 숲에는 온갖 종류의 동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은 반 달 정도 머무르며 가축을 길러 살았다.[22]
4. 5. 스크렐링과의 만남과 갈등
스크렐링과의 첫 만남은 평화로웠다. 어느 날 아침 일찍, 가죽으로 덮인 배를 탄 원주민(스크렐링)과 조우했다. 스크렐링들은 홉(Hóp)에서 노르드인들과 마주쳤는데, 그들은 동물의 가죽으로 덮인 배를 사용하고, 공중에서 타작 소리를 내는 막대기를 흔들었다. 노르드인들은 평화의 표시로 흰 방패를 내보였다.[23]thumb
이후 스크렐링들은 더 큰 무리로 돌아와 노르드인들과 교역을 제안했다. 그들은 붉은 천을 동물 가죽과 교환하려 했다. 칼세프니는 칼과 창을 교환하는 것은 거부했다.[23] 원주민들은 특히 붉은 천을 원했고, 가져온 가죽 제품과 모피와 교환했다. 또한, 원주민들은 노르드인의 무기를 교환하려 했지만, 토르핀은 그것을 금지했다.[23]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스크렐링이 풀려난 황소를 보고 겁에 질려 떠난 것이다. 3주 후, 그들은 훨씬 더 많은 수로 돌아와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막대기를 시계 방향이 아닌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울부짖었다. 스크렐링은 노르드인들의 머리 위로 크고 무거운 구체를 던지기 위해 발리스타와 비슷한 것을 사용했고, 이로 인해 노르드인들은 후퇴했다.[23]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원주민들은 막대기 끝에 붙인 크고 검은 구체를 던져왔다. 미지의 무기를 만난 노르드인들은 두려움을 느껴 모두 일제히 바위로 도망쳐 거기서 싸웠다.[23]
이때 프레이디스가 용감하게 나서서 스크렐링에 맞섰다. 프레이디스는 에리크 붉은머리(Erik the Red)의 사생아 딸로, 임신한 채로 오두막에서 나와 그들을 쫓으며 겁쟁이라고 꾸짖었다. 스클렐링이 그녀를 에워싸자, 그녀는 죽은 자의 손에서 검을 뽑아 한쪽 가슴을 드러내고 검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스클렐링은 겁에 질려 떠났다.[23]
이 전투에서 노르드인은 2명, 원주민은 다수가 사망했다. 일행은 공격 부대의 일부가 환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곳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북쪽 스트라우므피외르드(Straumfjord)로 돌아갔다.[23]
4. 6. 탐험의 முடிவில்
빈란드는 비옥했지만 원주민의 공격 위험이 있어, 솔핀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스트라움피요르드(Straumfjörðr)로 돌아온 후, 비야르니(Bjarni)와 구즈리즈(Guðríðr)를 포함한 100명의 동료는 그곳에 남았다고 전해진다.[21]
솔핀 일행은 북상하여 캬르날네스(Kjalarnes)를 지나 서쪽으로 향했다. 좌현에 황량한 원야가 펼쳐진 육지가 보였다. 더 나아가 강을 발견하고 하구에 배를 정박시켜 남쪽 강가에 닻을 내렸다.
어느 날 아침, 다리가 하나뿐인 낯선 남자가 솔핀 일행에게 달려들어 빠른 속도로 화살을 쏘았다. 에이리크(Eiríkr)의 아들 솔발드(Þorvaldr)가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외다리 남자는 도망쳤고, 솔핀 일행은 추격했지만 놓치고 말았다. 이후 북쪽으로 돌아가 세 번째 겨울을 스트라움피요르드에서 보냈다. 솔핀의 아들 스노리(Snorri)는 이 땅에 처음 도착한 겨울에 태어났으며, 이때 3살이었다.[19]
그린란드로 돌아가는 길에, 마르크란드에서 원주민 아이 두 명을 붙잡아 말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다. 아이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두 명의 왕이 다스리는 바위 구멍이나 동굴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또한, 흰 옷을 입고 천 조각이 달린 막대기를 들고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이 사는 땅이 그들 땅 맞은편에 있다고 한다.
일행은 그린란드에 도착하여 그 겨울을 에이리크의 보살핌 아래 보냈다. 다음 해 여름, 솔핀은 처자를 데리고 아이슬란드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솔핀의 아들 스노리의 후손 중에는 주교 세 명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5.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의 의의와 영향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는 붉은 에이리크의 그린란드 정착과 토르핀 칼세프니의 빈란드 탐험을 다룬 사가이다. 그린란드인의 사가에 비해 탐험 묘사가 구체적이며, 기독교 색채가 강조되고, 구드리드 소르브 야르나도티르가 이야기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2]
그린란드인의 사가에는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에 대한 언급이 있으므로[12], 그린란드인의 사가는 이 사가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사가의 내용은 상당히 다르고, 서로 모순되는 점도 많다.
이 사가는 하우크스보크 (14세기)와 스칼호르트스보크 (Skálholtsbók, 15세기)에 보존되어 있으며, 현대 문헌학자들은 스칼호르트스보크가 더 원본에 가깝다고 본다. 원본은 13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5. 1. 역사적 의의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노르드인들의 탐험과 정착 시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특히 란세오메도스 유적과 같은 고고학적 발견과의 연관성을 통해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이 사가는 "그린란드인의 사가"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지만, 빈란드 정착지에 대한 설명과 빈란드의 최초 발견에 대한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에서는 레이프 에이릭손이 노르웨이에서 그린란드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빈란드를 발견했다고 묘사하는 반면, "그린란드인의 사가"에서는 비아르니 헤르욜프손이 레이프가 탐험을 조직하기 약 15년 전에 서쪽 땅을 목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7] 이러한 차이는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화와 관련된 이야기의 포함 여부 등 사가의 작성 목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7]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는 아이슬란드 사가 중 하나로 분류되지만, 중세 여행담에 더 가까운 내용 구성을 보이며, 여성 구드리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6] 또한, 이교 관습, 마법, 유령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어 고대 노르드 종교와 신념, 특히 예언의 관행에 대한 자료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 신뢰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8]
5. 2. 문학적 의의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는 붉은 에이리크의 그린란드 정착과 토르핀 칼세프니의 빈란드 탐험을 중심으로 그린 사가이다. 동일한 주제를 다룬 《그린란드인의 사가》에 비해 탐험 묘사가 구체적이고,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조되며, 구드리드의 이야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2]《그린란드인의 사가》에는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그린란드인의 사가》는 이 사가를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12] 그러나 두 사가에 기록된 내용은 상당히 다르고, 서로 모순되는 점도 있다.
14세기 Hauksbók|하우크스보크non와 15세기 Skálholtsbók|스칼호르트스보크non에 실린 두 가지 버전의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는 13세기에 쓰여진 공통 원본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지만,[2][4] 세부 내용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호우크 에를렌손과 그의 조수들은 텍스트를 개정하여 덜 일상적이고 더 세련되게 만들었고, 반면 Skálholtsbók|스칼호르트스보크non 버전은 원본을 충실하게 복사했지만 다소 부주의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5]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는 아이슬란드 사가 중 하나로 분류되지만, 아이슬란드의 가족과 지역에 관한 사가나 한 사람의 전기에 관한 사가보다는 중세 여행담의 내용에 더 가깝고, 여성 구드리드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특이하다.[6]
이 사가는 "그린란드인의 사가"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며, 반복되는 등장인물, 동일한 원정 및 사건의 기록을 포함하지만, 스트라우므피요르드와 호프 두 개의 기지를 설명하는 데 차이가 있으며, 반면 "그린란드인의 사가"에서는 토르핀 칼세프니와 그의 일행이 단순히 빈란드라고 언급된 곳에 정착한다.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는 고대 노르드 종교와 신념, 특히 예언의 관행에 대한 자료로 사용되었지만 신뢰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8]
6. 비판적 관점
이 사가는 구전되다가 기록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그뢴렌딩가 사가』와 비교했을 때 내용상 모순점이 많고, 고대 노르드 종교 관련 내용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있다.[2][4][8]
6. 1. 사료적 한계
이 사가는 구전되다가 기록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의 불일치 가능성이 존재한다. 특히, 『그뢴렌딩가 사가』와 비교했을 때 내용이 상당히 다르고 모순되는 점이 많다.[2][4] 예를 들어, 빈란드의 최초 발견에 대한 묘사가 두 사가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에서는 레이프 에이릭손이 항해 도중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뢴렌딩가 사가』에서는 비아르니 헤르욜프손이 먼저 목격한 것으로 나온다.[7]또한,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에는 고대 노르드 종교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담겨 있지만, 이는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8]
6. 2. 진보적 관점의 비판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는 고대 노르드 종교와 신앙, 특히 예언과 같은 이교 관습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기도 하지만, 이러한 묘사가 신뢰하기 어렵다는 비판도 받는다.[8] 어떤 학자는 이 사가를 "그린란드에서 서기 1000년경에도 여전히 만연했다고 여겨지는 이교 관습에 대한 논쟁적인 공격"으로 묘사하기도 했다.[9]사가에 등장하는 토르비외르그는 "작은 볼바"로 불리며, 세이드 의식을 통해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당시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교 문화를 부정적으로 그리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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