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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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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바니아 공국은 1914년 2월 21일, 1913년 런던 조약 이후 알바니아의 독립이 승인되면서 수립되었다. 열강들은 루마니아의 엘리자베트 여왕의 조카인 빌헬름 공을 군주로 선택했고, 그는 1914년 3월 알바니아의 임시 수도 두르러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농민 반란과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빌헬름 공은 1914년 9월 알바니아를 떠났고, 이후 알바니아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정부 활동이 중단되고 여러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1925년 알바니아가 공화제를 선포하면서 공국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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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1916년 알바니아 공국 지도
1916년 알바니아 공국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알바니아 공국
존속 기간1914년 – 1925년
건국 시기1914년 2월 21일
멸망 시기1925년 1월 31일
이전 국가오스만 제국
다음 국가알바니아 공화국 (1925년-1928년)
알바니아 공국 국기
국기
알바니아 공국 국장
대문장
국가 표어
"조국이 모든 것 위에 있다"
국가깃발에 대한 찬가
수도두러스 (1914년–1920년)
루슈녜 (1920년)
티라나 (1920년–1924년)
공용어알바니아어
통화공식 통화 없음, 그리스 드라크마, 프랑스 프랑, 이탈리아 리라 사용
면적28,748 km²
인구약 979,000명 (1923년)
정치
정치 체제입헌군주제
군주빌헬름 1세
군주 재임 기간1914년–1925년
총리투르한 파샤 페르메티 (1914년)
아흐메트 조구 (1925년)
의회알바니아 의회
역사
주요 사건왕정 선포
종교이슬람교, 기독교
기타
별칭독립 알바니아
사용 언어알바니아어

2. 역사

wikitext

오스만 제국은 1478년경부터 오늘날 알바니아를 포함하는 지역을 지배했다.[4] 1913년 5월 런던 조약에서 열강들은 알바니아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1914년 2월 21일 알바니아 공국이 수립되었다.[4] 열강들은 루마니아의 엘리자베트 여왕의 조카이자, 독립 알바니아의 군주로 빌헬름 공(Wilhelm of Wied)을 선택했다.[4] 1914년 2월 21일, 알바니아 18개 지역을 대표하는 18명의 알바니아 대표들이 공식적으로 제안을 했고, 그는 이를 수락했다.[4] 알바니아 외부에서는 빌헬름은 공으로 불렸지만, 알바니아에서는 몬테네그로 국왕보다 열등해 보이지 않도록 왕으로 불렸다.[4]

1914년 알바니아 공국


빌헬름 공은 1914년 3월 7일 왕족과 함께 알바니아의 임시 수도인 두르러스에 도착했다.[4] 알바니아의 안보는 네덜란드 장교들이 지휘하는 국제 헌병대가 담당할 예정이었다.[4] 빌헬름은 에사드 파샤가 시작하고 나중에 하지 카밀리가 이끄는 농민 반란이 일어난 후 1914년 9월 3일 알바니아를 떠났다.[4] 후자는 티라나를 중심으로 한 "중앙 알바니아 무슬림 국가"의 군사 사령관이었다.[4] 빌헬름은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4]

1914년 봄, 그리스계 주민들은 그 지역에서 북 에피루스 자치 공화국을 선포했고, 알바니아 정부는 이를 인정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알바니아가 붕괴되면서 수명이 짧았다.[5]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알바니아 국내의 모든 정부 활동이 중단되었고, 여러 지역 정부로 분열되었다. 전후, 에사드 파샤가 파리에서 남알바니아 청년에게 살해당하자, 4명으로 구성된 고등평의회가 빌헬름의 섭정 역할을 맡았으나, 1925년에 알바니아가 공화제를 선포함에 따라 섭정은 권리를 상실했다.

2. 1.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과 공국 수립

알바니아는 1478년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913년 5월 런던 조약에서 열강은 알바니아의 독립을 승인하고, 루마니아 왕비 엘리자베타의 조카인 비트 공자 빌헬름을 알바니아의 군주로 선택했다. 1914년 2월 21일 알바니아 18개 지역 대표 18명이 공식적으로 빌헬름에게 공작 지위를 제안했고, 빌헬름은 이를 수락했다. 빌헬름은 국외에서는 공(혹은 대공)으로 불렸지만, 알바니아 내에서는 몬테네그로 왕국의 군주보다 낮은 지위로 여겨지지 않도록 왕(Mbret)으로 불렸다.

빌헬름은 1914년 3월 7일 가족과 함께 알바니아 임시 수도 두러스에 도착했다. 알바니아의 치안은 네덜란드 장교 지휘 하의 국가헌병대가 담당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에사드 파샤가 이끄는 범이슬람주의자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빌헬름은 1914년 9월 3일 알바니아를 떠났다. 이 반란은 나중에 하지 카밀리가 계승했다. 빌헬름은 공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알바니아 국내의 모든 정부 활동이 중단되었고, 국내는 여러 지역 정부로 분열되었다. 전후, 에사드 파샤가 파리에서 남알바니아 청년에게 살해당했다. 4명으로 구성된 고등평의회가 빌헬름의 섭정 역할을 맡았으나, 1925년 알바니아가 공화제를 선포하면서 섭정은 권리를 상실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과 국내 혼란

제1차 세계 대전은 알바니아의 모든 정부 활동을 중단시켰고, 이 나라는 여러 지역 정부로 분열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알바니아는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다. 두르러스에서 반군들에 둘러싸인 빌헬름 공은 도착한 지 6개월 만인 1914년 9월 알바니아를 떠났고, 이후 독일군에 합류하여 동부 전선에서 복무했다. 공의 떠남 이후 알바니아 국민은 종교적, 부족적 계보를 따라 분열되었다. 무슬림들은 무슬림 공을 요구하며 자신들이 누려왔던 특권의 보호자로 오스만 제국을 찾았다. 많은 베이(bey)와 씨족장들은 어떤 상위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1914년 10월 말, 그리스군은 코르푸 의정서가 인정한 자치 북에피루스 공화국에 진입했다. 이탈리아는 블로레를 점령했고, 세르비아몬테네그로는 중앙 연합국의 공세가 세르비아군을 흩어놓기 전까지 알바니아 북부 지역을 점령했다. 세르비아군은 프랑스에 의해 테살로니키로 후송되었다. 그 후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불가리아군은 알바니아의 약 3분의 2를 점령했다.

1915년 4월에 체결된 비밀 런던 조약에 따라, 협상국 세력은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블로레와 인근 지역, 그리고 알바니아에 대한 보호령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알바니아 북부의 상당 부분을, 그리스는 알바니아 남부의 상당 부분을 약속받았다. 이 조약은 다른 주요 강국과의 관계에서 이탈리아가 대표하는 아주 작은 알바니아 국가를 남겨둘 것이었고, 따라서 외교 정책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1918년 9월, 협상국군은 테살로니키 북쪽에서 중앙 연합국의 전선을 돌파했고, 며칠 만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알바니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1918년 11월 11일 전쟁이 끝났을 때, 이탈리아군은 알바니아 대부분을 점령했고, 세르비아는 알바니아 북부 산악 지대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으며, 그리스는 1913년 알바니아 국경 내의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프랑스군은 코르처와 슈코더뿐만 아니라 코소보와 같이 상당한 알바니아 인구가 있는 다른 지역도 점령했으며, 세르비아의 일부로 남았다.

1913년 5월의 런던 조약에서 알바니아의 독립을 승인한 열강들은 루마니아 왕비 엘리자베타의 조카인 비트 공자 빌헬름을 알바니아의 군주로 선택했다. 1914년 2월 21일, 알바니아 18개 지역 대표 18명은 빌헬름에게 공식적으로 알바니아 군주 자리를 요청하였고, 빌헬름은 이를 수락했다. 빌헬름은 알바니아 국외에서는 공(대공)이라 불렸지만, 국내에서는 이웃나라 몬테네그로 왕국의 군주보다 낮은 지위로 여겨지지 않도록 왕(Mbret)이라 불렸다.

빌헬름은 1914년 3월 7일, 가족과 함께 알바니아의 임시 수도 두라초에 도착했다. 알바니아의 치안은 네덜란드 장교의 지휘하에 있는 국가헌병대에 의해 유지될 예정이었으나, 에사드 파샤가 이끄는 범이슬람주의자들의 반란이 발발하여, 빌헬름은 1914년 9월 3일에 알바니아를 떠났다. 이 반란은 후에 알바니아 이슬람 국가의 군 사령관 하지 카밀이 계승했지만, 빌헬름은 결코 공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알바니아 국내의 모든 정부 활동이 중단된 데다, 국내는 여러 지역 정부로 분열되었다. 전후, 에사드 파샤가 파리에서 남알바니아 청년에게 살해당하자, 4명으로 구성된 고등평의회가 빌헬름의 섭정 역할을 맡았으나, 1925년에 알바니아가 공화제를 선포함에 따라 섭정은 권리를 상실했다.

2. 3. 전후 혼란과 공화국으로의 전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알바니아는 단일 정부를 인정받지 못하는 등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6]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는 알바니아의 독립을 소멸시키고 나라를 분할하려 했다.[6] 이탈리아군은 점령 지역의 알바니아 정치 활동을 통제했고, 세르비아인들은 북부 알바니아를, 그리스는 남부 알바니아 장악을 시도했다.[6]

1918년 12월 두르러스에서 열린 전후 알바니아 국민의회는 파리 평화 회의에서 알바니아의 이익을 옹호하려 했지만, 공식적인 대표권을 얻지 못했다.[6] 국민의회는 영토 유지를 위해 이탈리아의 보호를 받아들이고 이탈리아 왕자를 통치자로 받아들일 의향도 표명했다.[6] 세르비아군은 알바니아인이 거주하는 국경 지역에서 활동했고, 알바니아 게릴라들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양쪽에서 활동했다.[6]

1920년 1월 파리 평화 회의에서 프랑스, 영국, 그리스는 알바니아를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그리스에 분할하는 데 동의했다.[6] 이는 알바니아인들의 배후에서, 미국 협상가 없이 이루어졌다.[6] 1920년 1월 루슈냐에서 열린 알바니아 국민의회는 분할 계획을 거부하고, 알바니아인들이 독립과 영토 보전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경고했다.[6] 루슈냐 국민의회는 4명의 섭정을 임명하고 양원제 의회를 만들었다.[6] 1920년 2월 정부는 티라나로 이동했다.[6]

1920년 3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파리 협정을 막기 위해 개입했다.[6] 미국은 알바니아 독립에 대한 지지를 강조했고, 1920년 12월 17일 국제 연맹은 알바니아를 정회원으로 받아들여 주권을 인정했다.[6] 그러나 알바니아의 국경은 여전히 불확실했다.[6]

알바니아의 새 정부는 이탈리아의 점령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농민들에게 이탈리아군을 괴롭히도록 격려했다.[6] 1920년 9월, 블로러 전투 이후 로마는 런던 조약에 따른 알바니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사잔 섬을 제외한 알바니아 전역에서 군대를 철수했다.[6]

유고슬라비아는 알바니아에 대한 약탈 정책을 계속 추진했고, 알바니아 부족민들이 유고슬라비아군과 충돌한 후, 유고슬라비아군은 공격을 확대했다.[7] 베오그라드는 게그(Gheg) 족장 Gjon Markagjoni를 지원했고, 그는 미르디터(Mirditë) 부족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독립적인 "미르디타 공화국"을 선포했다.[7] 1921년 10월, 성스러운 연합 정부가 수립되었다.[7]

1921년 11월, 유고슬라비아군은 알바니아 영토를 침략했다.[7] 국제 연맹은 위원회를 파견하여 1913년 알바니아 국경을 재확인했다.[7] 유고슬라비아는 불평했지만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미르디타 공화국은 해체되었다.[7]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알바니아 국내의 모든 정부 활동이 중단되고 여러 지역 정부로 분열되었다. 전후, 에사드 파샤(w:en:Essad Pasha|에사드 파샤)가 파리에서 살해당하자, 4명으로 구성된 고등평의회가 빌헬름의 섭정(摂政) 역할을 맡았으나, 1925년에 알바니아가 공화제(共和制)를 선포함에 따라 섭정은 권리를 상실했다.

3. 정치

전간기 알바니아 정부는 급속히 등장하고 사라졌다. 1921년 7월부터 12월 사이에만 총리직이 5번이나 바뀌었다.[8]

알바니아의 최초 정당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등장했다. 다른 발칸반도 지역들보다도 더욱 정당들은 저명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덧없는 모임들이었고, 그들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시적인 동맹을 맺었다. 주요 보수 정당인 진보당은 북부의 일부 씨족장들과 남부 알바니아의 저명한 무슬림 지주들을 끌어들였는데, 그들의 주요 강령은 그들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이전하는 어떠한 농업 개혁 프로그램에도 단호히 반대하는 것이었다.[8]

셰프켓 베이 벌라치(Shefqet Vërlaci)는 국가 최대 지주로 진보당을 이끌었다. 인민당에는 드르(Durrës)의 개혁적인 정교회 주교인 판 놀리(Fan Noli)가 포함되었는데, 그는 모교인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서구 사상을 깊이 받아들였고, 심지어 셰익스피어입센의 작품을 알바니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8] 인민당에는 마티 씨족(북부 알바니아 씨족) 수장의 스물네 살 아들인 알바니아의 조그 1세(Zog I of Albania)도 포함되었다. 미래의 국왕 조그는 북부 일부 씨족으로부터 지지를 얻었고, 자신의 부하로 무장한 갱단을 유지했다. 그러나 많은 게그 씨족 지도자들은 두 주요 정당 중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

자페르 이피(Xhafer Ypi)가 이끄는 인민당은 1921년 12월 놀리를 외무장관으로, 조그를 내무장관으로 하여 정부를 구성했지만, 조그가 저지대 알바니아인들을 무장 해제하려고 탄압을 가하자 놀리는 곧 사임했다. 무기를 소지하는 것은 전통적인 관습이었음에도 말이다.[8]

'''루슈녀 의회'''(콩그레시 이 루슈너스/Kongresi i Lushnjëssq)는 1920년 1월 27일부터 1월 31일까지 5차례에 걸쳐 루슈녀에서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개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알바니아가 다른 나라들에 분할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알바니아의 상황을 연구하고 채택할 조치를 강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의회는 카소 후가의 집에서 열렸으며 알바니아 전역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위대한 애국자로 존경받던 아키프 파셰 엘바사니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의회는 고등평의회(''Këshilli i Lartë''), 국가평의회(''Këshillin Kombëtar'')를 설립하고 수도를 루슈녀에서 티라나로 이전했다.

고등평의회는 루이지 붐치, 아키프 파셰 엘바사니, 압디 톱타니, 그리고 미할 투르툴리 박사로 구성되어 새로운 알바니아 국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반면 국가평의회는 의회의 기능을 수행했다.

새롭게 구성된 정부는 다음과 같다.


  • 술레이만 델비나 - 총리
  • 아흐메트 조구 - 내무장관
  • 메흐메드 코니차 - 외무장관
  • 호자 카드리 - 사법장관
  • 앤독 초바 - 재무장관, 소티르 페치 - 교육장관
  • 알리 리자 콜론야 - 국방장관
  • 에슈레프 프라셰리 - 국제업무 총국장
  • 이도멘 코스투리 - 우정전신청 총국장


1922년 초, 조구는 정부의 적들이 티라나를 공격했을 때 영국 대사의 지원을 받아 이를 격퇴하고 그 해 후반 총리직을 맡았다. 그는 진보당 지도자의 딸과의 약혼을 발표하며 국민당과 결별했다. 조구의 비호 아래 정부당이 조직되었고, 놀리를 비롯한 서구 지향적인 지도자들은 민주당 야당을 결성했다. 민주당은 조구의 개인적인 적, 이념적 반대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포함했다.

알바니아 남부 저지대의 정교회 농민, 슈코더 시민, 민족주의자들은 조구 정부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1924년 초 국민의회 선거에서 조구의 당이 승리했지만, 금융 스캔들과 암살 시도 여파로 조구는 총리직을 사임했다. 야당은 의회에서 철수했고, 1924년 6월 농민들이 지지하는 반란이 티라나를 장악하면서 놀리가 총리가 되고 조구는 유고슬라비아로 도피했다.

놀리는 봉건제 폐지, 서구식 헌법 정부 수립 등을 촉구했지만, 그의 개혁 계획은 저항에 직면했다. 놀리 정권은 조구 등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조구에게 군대를 지원했고, 1924년 12월 조구의 군대가 알바니아 영토로 진입하여 크리스마스 이브에 수도를 탈환했다. 놀리와 그의 정부는 이탈리아로 도피했다. 조구는 쿠데타로 권력을 되찾고 공국을 폐지했다.

3. 1. 정치 상황

전간기 알바니아 정부는 빠르게 등장하고 사라졌다. 1921년 7월부터 12월 사이에만 총리직이 5번이나 바뀌었다.[8]

알바니아의 최초 정당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등장했다. 다른 발칸반도 지역들보다도 더욱 정당들은 저명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덧없는 모임들이었고, 그들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시적인 동맹을 맺었다. 주요 보수 정당인 진보당은 북부의 일부 씨족장들과 남부 알바니아의 저명한 무슬림 지주들을 끌어들였는데, 그들의 주요 강령은 그들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이전하는 어떠한 농업 개혁 프로그램에도 단호히 반대하는 것이었다.[8]

셰프켓 베이 벌라치(Shefqet Vërlaci)는 국가 최대 지주로 진보당을 이끌었다. 인민당에는 드르(Durrës)의 개혁적인 정교회 주교인 판 놀리(Fan Noli)가 포함되었는데, 그는 모교인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서구 사상을 깊이 받아들였고, 심지어 셰익스피어입센의 작품을 알바니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8] 인민당에는 마티 씨족(북부 알바니아 씨족) 수장의 스물네 살 아들인 알바니아의 조그 1세(Zog I of Albania)도 포함되었다. 미래의 국왕 조그는 북부 일부 씨족으로부터 지지를 얻었고, 자신의 부하로 무장한 갱단을 유지했다. 그러나 많은 게그 씨족 지도자들은 두 주요 정당 중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

자페르 이피(Xhafer Ypi)가 이끄는 인민당은 1921년 12월 놀리를 외무장관으로, 조그를 내무장관으로 하여 정부를 구성했지만, 조그가 저지대 알바니아인들을 무장 해제하려고 탄압을 가하자 놀리는 곧 사임했다. 무기를 소지하는 것은 전통적인 관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8]

3. 2. 루슈녀 의회

'''루슈녀 의회'''(콩그레시 이 루슈너스/Kongresi i Lushnjëssq)는 1920년 1월 27일부터 1월 31일까지 5차례에 걸쳐 루슈녀에서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개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알바니아가 다른 나라들에 분할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알바니아의 상황을 연구하고 채택할 조치를 강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의회는 카소 후가의 집에서 열렸으며 알바니아 전역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위대한 애국자로 존경받던 아키프 파셰 엘바사니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의회는 고등평의회(''Këshilli i Lartë''), 국가평의회(''Këshillin Kombëtar'')를 설립하고 수도를 루슈녀에서 티라나로 이전했다.

고등평의회는 루이지 붐치, 아키프 파셰 엘바사니, 압디 톱타니, 그리고 미할 투르툴리 박사로 구성되어 새로운 알바니아 국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반면 국가평의회는 의회의 기능을 수행했다.

새롭게 구성된 정부는 다음과 같다.

  • 술레이만 델비나 - 총리
  • 아흐메트 조구 - 내무장관
  • 메흐메드 코니차 - 외무장관
  • 호자 카드리 - 사법장관
  • 앤독 초바 - 재무장관, 소티르 페치 - 교육장관
  • 알리 리자 콜론야 - 국방장관
  • 에슈레프 프라셰리 - 국제업무 총국장
  • 이도멘 코스투리 - 우정전신청 총국장

3. 3. 조구 정부와 놀리 정부

1922년 초, 조구는 정부의 적들이 티라나를 공격했을 때 영국 대사의 지원을 받아 이를 격퇴하고 그 해 후반 총리직을 맡았다. 그는 진보당 지도자의 딸과의 약혼을 발표하며 국민당과 결별했다. 조구의 비호 아래 정부당이 조직되었고, 놀리를 비롯한 서구 지향적인 지도자들은 민주당 야당을 결성했다. 민주당은 조구의 개인적인 적, 이념적 반대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포함했다.

알바니아 남부 저지대의 정교회 농민, 슈코더 시민, 민족주의자들은 조구 정부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1924년 초 국민의회 선거에서 조구의 당이 승리했지만, 금융 스캔들과 암살 시도 여파로 조구는 총리직을 사임했다. 야당은 의회에서 철수했고, 1924년 6월 농민들이 지지하는 반란이 티라나를 장악하면서 놀리가 총리가 되고 조구는 유고슬라비아로 도피했다.

놀리는 봉건제 폐지, 서구식 헌법 정부 수립 등을 촉구했지만, 그의 개혁 계획은 저항에 직면했다. 놀리 정권은 조구 등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조구에게 군대를 지원했고, 1924년 12월 조구의 군대가 알바니아 영토로 진입하여 크리스마스 이브에 수도를 탈환했다. 놀리와 그의 정부는 이탈리아로 도피했다. 조구는 쿠데타로 권력을 되찾고 공국을 폐지했다.

4. 경제

1912년 알바니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관세 행정은 특별 제정 법률에 따라 운영되었다. 새로운 법률에 따라 수입품에는 가격의 11%, 수출품에는 1%의 관세가 부과되었다.

브로라(Vlora) 임시 정부 시대에는 담배 수입세가 30%까지 인상되었다. 1913년부터 1914년까지 두르러스(Durrës) 정부는 1912년부터 1913년까지의 관세를 유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1914년~1918년) 동안 알바니아에 주둔한 외국군(이탈리아군, 프랑스군,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등)의 관련 명령을 이행하는 법률에 따라 관세 규정이 운영되었으며, 때때로 수정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프랑스군은 1914년 두르러스 정부의 관세법을 유지했다. 1916년 슈코드라(Shkodra)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사령부는 8개 조항으로 구성된 규제 결정을 내렸는데, 제1조에는 "밀수라는 단어는 밀수품의 판매가 재무부 또는 국민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의미한다. 피해는 즉시 발생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코르처(Korçë)의 프랑스 사령부는 관세를 인상하는 결정을 내렸으며, 이 결정은 11개 조항으로 구성되었고, 말리크(Maliq) 주둔 군대 사령관인 프랑스 장군 H. 살레(H. Salle)가 서명했다. 1920년 3월 15일, 이 사령부는 "옥트로브(Oktrovës) 규정"을 발표했으며, 알바니아 국경 사령관 크레탱(Cretin)이 서명했다.

1920년 이후 관세 서비스를 규제하기 위해 브로라(관세국장), 코르처(옥트로브 국장), 슈코드라, 레자(Lezha)에 별도의 관세청이 설립되었다. 레자 관세청은 1920년 두르러스를 거쳐 티라나로 이전했다. 아흐메드 보리치(Ahmed Boriçi)가 이끄는 재무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관세청장은 1923년 폐지되었다.

1920년 루슈녜(Lushnjes) 회의 이후 정부는 곡물과 기타 지역 생산품 수출에 대한 특정 조항을 마련했다. 1912년부터 1939년까지 알바니아 관세법은 지속적으로 개선되어 서구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 당시 외국과의 무역은 전례 없는 성장을 이루었으며, 이는 1939년부터 1944년까지의 전쟁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5. 사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등장한 알바니아는 매우 낙후된 상태였다. 인구는 100만 명이 채 되지 않았고, 세 개의 주요 종교 집단과 두 개의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계층은 토지를 소유하고 반봉건적 특권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토지 소유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가져온 보수주의에 젖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 주요 통치직을 맡아 왔다. 토지 소유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계속 우위를 누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농민들은 토지 귀족의 지배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알바니아 북부에서 정부는 슈코더와 그 주변 지역만 직접 통제했다. 고지대 씨족들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입법을 한다고 주장하는 헌법 정부를 의심했다. 인구 대부분이 무슬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티라나와 부족민 사이의 주요 연결 고리가 되었다. 많은 경우, 행정 통신은 사제들에게 보내져 신자들에게 전달되었다.

5. 1. 사회 상황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등장한 알바니아는 매우 낙후된 상태였다. 인구는 100만 명이 채 되지 않았고, 세 개의 주요 종교 집단과 두 개의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계층은 토지를 소유하고 반봉건적 특권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토지 소유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가져온 보수주의에 젖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 주요 통치직을 맡아 왔다. 토지 소유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계속 우위를 누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농민들은 토지 귀족의 지배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알바니아 북부에서 정부는 슈코더와 그 주변 지역만 직접 통제했다. 고지대 씨족들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입법을 한다고 주장하는 헌법 정부를 의심했다. 인구 대부분이 무슬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티라나와 부족민 사이의 주요 연결 고리가 되었다. 많은 경우, 행정 통신은 사제들에게 보내져 신자들에게 전달되었다.

5. 2. 종교

이 시기에 알바니아의 종교는 독립을 얻었다. 1922년 8월 베라트에서 열린 알바니아 정교회 신자들의 회의 이후 콘스탄티노플의 세계 총대주교가 알바니아 정교회의 자치(autocephaly)를 인정했다. 알바니아에서 가장 활발한 개혁가들은 알바니아가 터키 지배의 과거에서 신속하게 벗어나기를 원했던 정교회 인구 출신이었는데, 그 과거 기간 동안 기독교인들은 하층민을 구성했다.

알바니아의 보수적인 수니파 무슬림 공동체는 1923년 콘스탄티노플과의 마지막 유대를 끊고, 무함마드 이후로 칼리프가 없었으며 알바니아 무슬림들은 그들의 조국에 대한 일차적인 충성을 서약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무슬림들은 또한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여성들이 베일을 착용할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6. 각주

참조

[1] harvnb
[2] 웹사이트 Population of Albania from 1800 to 2020 https://www.statista[...] 2022-01-19
[3] 간행물 Trade Information Bulletin Trade Information Bulletin 1923
[4] 서적 The Ottoman Empire and Its Successors, 1801-1927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2-10-12
[5] 웹사이트 Northern Epirus https://en.wikipedia[...] 2024-12-09
[6] 서적 Albania and King Zog: independence, republic and monarchy 1908-1939 I.B.Tauris 2004
[7] 문서
[8] 서적 Harvard Encyclopedia of American Ethnic Groups https://books.google[...] Library of Congress 1980
[9] 서적 Albania https://books.google[...] Fitzroy Dearborn Publishers null
[10] 웹사이트 Population of Albania from 1800 to 2020 https://www.statista[...] 2022-01-19
[11] harv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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