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이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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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보이아 공국은 141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아마데오 8세 백작에게 공작 작위를 수여하면서 건국되었다. 모리엔, 발레다오스타, 피에몬테를 포함한 영토를 다스렸으며, 아메데오 8세 통치 시기에 영토 확장, 개혁, 법령 제정을 통해 공국의 기반을 다졌다. 15세기에는 프랑스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16세기에는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영토를 잃기도 했지만,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의 노력으로 자치권을 회복하고 수도를 토리노로 이전했다. 17세기에는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였고, 18세기에는 사르데냐 왕국으로 발전하여 이탈리아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사보이아 공국의 군대는 지역 군사 강국으로 활동했으며,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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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부아 - 사보이아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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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스 백국은 로마 시대 이탈리아의 일부였다가 프랑크족 지배, 사보이 가문 귀속을 거쳐 1860년 프랑스에 합병되었으며,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니스어를 사용했다. - 라인강 상류 관구 - 자유제국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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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아 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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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사보이아 |
공식 명칭 | 사보이아 공국 |
표어 | FERT (사보이아 가문의 표어) |
지위 | 1792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법적 제국 국가 사보이아 국가의 핵심 국가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언어 | 라틴어 (15세기까지 공식어) 프랑스어 (15세기부터 공식어) 이탈리아어 (16세기부터 공식어) 프랑코프로방스어 (사용) |
수도 | 샹베리 (1416년~1562년) 토리노 (1562년~1792년, 1814년~1847년) |
통치 가문 | 사보이아가 |
별칭 | 사보이아인 |
역사 | |
설립 | 사보이아 백국에서 공국으로 승격 (1416년) |
프랑스 점령 | 1536년~59년, 1630년, 1690년~96년, 1703년~13년 |
위트레흐트 조약 | 시칠리아와 밀라노 공국 일부 획득 (1713년 4월 11일) |
사르데냐 왕국 획득 |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교환 (1720년) |
프랑스 합병 | 혁명 프랑스에 합병 (1792년~1814년) |
해체 | 완전 합병 (1847년) |
지도자 | |
공작 | 아메데오 8세 (1416년~1440년) 카를로 알베르토 (1831년~1847년) |
국기 및 문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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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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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 |
2. 역사
141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사보이아 백국의 아메데오 8세 백작에게 공작 작위를 수여하면서 사보이아 공국이 성립되었다.[11] 사보이아 공국의 영토는 현재의 이탈리아 북서부(발레다오스타주, 피에몬테주)와 프랑스 동부 사보와 지역, 알프마리팀주, 제네바(현 스위스)를 포함했다. 수도는 샹베리(현 프랑스)였으나, 1563년에 토리노로 옮겨졌다.[11]
1718년 런던 조약에 따라, 1720년에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시칠리아 섬을 포기하는 대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였던 사르데냐 섬을 획득하였다. 이후 사보이아 공국은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이탈리아 왕국에 통합되어 사라졌다.
2. 1. 15세기
141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아마데오 8세 백작에게 공작 작위를 수여하면서 사보이아 공국이 세워졌다. 공국의 영토는 모리엔, 발레다오스타, 피에몬테가 포함되었다.사보이아 백국은 육지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1388년 아마데오 7세는 니차(Nizza, 현 프랑스 니스) 주변 수 킬로미터의 해안선을 획득했다. 아메데오 8세 통치 시기는 사보이아의 경제와 정책의 전환점이 되던 시기였고, 이 영향은 나라의 역사에 깊은 흔적을 만들었다. 그의 장기 통치 중 두드러진 것으로서 전쟁(그는 몬페라토 공국과 살루초 공국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장하였다)과 더불어 개혁과 법령 제정이 있었으며 그리고 일부 논란거리가 될 행동들도 있었다. 첫째로는 1434년에 그가 성 모리스회를 세우고 리파이 성으로 들어가 은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일이다. 1439년에는 펠릭스 5세로서 대립교황으로 옹립되는 것을 수락하였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도의 일치를 해친다는 두려움 때문에 10년 만에 대립교황직을 그만두었다.
아메데오 8세 정부의 두 번째 중요 행위는 1424년 8월에 피에몬테 공국을 세운 것인데, 이 대공국을 관리하는 일은 가문의 장자에게 영예로운 칭호로서 맡겨졌다. 공작은 대부분 옛 사보이아 지배지로부터 형성된 영토를 남겼다.
교양있고 세련된 사람이였던 아메데오 공작은 예술에 큰 중요성을 두었다. 여러 예술가들 중에서 자코모 야퀘리오가 공작과 함께 문학과 건축 분야에서 힘쓰며,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에 예술이 도입되는 것을 장려하였다.
하지만 그의 장남 아메데오가 1431년에 이른 나이로 사망하자, 둘째 아들 루도비코가 작위를 계승하였다. 다시 루도비코를 계승한 병약한 아메데오 9세는 극히 독실하였지만,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아내이자 루이 11세의 여동생인 욜랑드 드 발루아(비올란테 디 발루아)에게 대단히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도록 허용하였다. 이 시기에 프랑스는 사보이아 국가적 사안들을 비교적 마음대로 통제하였으며, 피에몬테는 프랑스 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공국의 경제는 전쟁 뿐만이 아니라, 비올란테의 형편없는 통치 그리고 베르첼리의 빈민들에 대한 아마데오 9세의 끊임없는 기부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면치 못했다. 나라의 미래는 소년인 필리베르토 1세의 손에 맡겨졌지만 10년을 통치한 뒤, 17살이란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의 자리는 국가 부흥의 약속처럼 보인 카를로 1세가 계승하였다.
2. 2. 16세기
1504년 필리베르토 2세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카를로 3세가 통치했다. 카를로 3세는 통치 능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1515년 이후 피에몬테는 외국 군대에 점령되었고, 프랑수아 1세는 사보이아 공국을 영구 합병할 기회를 노렸다. 1536년 프랑수아 1세는 군대를 보내 사보이아 공국 점령을 명령했다. 카를로 3세는 뒤늦게 국가의 약점을 깨닫고 토리노를 사수하려 했으나, 4월 3일 토리노는 함락되었다. 카를로 3세는 베르첼리에서 반격을 시도했지만, 프랑스의 점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11]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공작은 20년 넘게 이어진 프랑스 점령을 끝내고 사보이아 공국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 체결로 사보이아 공국은 자치권을 회복했다.[11]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프랑스를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수도를 토리노로 옮기고 치타델라라는 요새를 구축하여 방어 시설을 강화했다. 그는 플랑드르에서의 군사 경험을 바탕으로 군대를 운영했으며, 생캉탱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는 용병 대신 피에몬테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군사 조직을 설치하고, 공용어를 라틴어와 프랑스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변경하여 사보이아 공국이 이탈리아 역사에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의 아들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는 몬페라토 군주국과 1601년 리옹 조약에서 프랑스에 넘겨준 살루초를 획득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의 전쟁은 대부분 패배로 끝났지만, 그는 다재다능하고 세련된 인물이었으며, 시인이자 유능한 개혁가로 "위대한 카를로"로 기억된다. 그는 유럽 강국들 사이에서 공국을 다스렸고 합스부르크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카를로 에마누엘레의 정책은 살루초 후작 재산 분쟁, 만토바와 몬페라토 공국의 계승 전쟁 같은 국제 분쟁에 기반을 두었다. 사보이아는 스페인 편에 섰지만, 때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예: 수사 조약).
2. 3. 17세기
17세기 동안, 베르사유 궁전의 영향력이 사보이아 공국을 압박하였다. 밀라노 공국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피네롤로가 처분되고 나서 프랑스에 배치된 군대는 토리노 근처에 있었다.[12]삼십년 전쟁 동안, 사보이아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황제와 스페인에 대항하여 프랑스 편을 크게 든 국가 중 하나였다. 사보이아 군대는 프랑스 편에서 사보이아-제노바 전쟁, 만투아 계승 전쟁, 토르나벤토 전투 및 부분적으로 피에몬테 내전 등에 참전했다.
강력한 프랑스의 영향력과 여러 불행은 사보이아 공작 샤를 에마뉘엘 1세 사후 사보이아를 반복적으로 강타했다. 무엇보다도 1630년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이미 만연한 빈곤에 상당히 기여했다.
만투아 계승 전쟁은 시골에서 매우 유혈 사태를 겪었고 카살레 몬페라토는 장기간 포위 공격(1629)을 받았다. 무기와 정치의 발전은 경제와 미래의 역사에 영향을 미쳐 사보이아 공작 빅토르 아마데우스 1세가 1637년 사망한 후 이미 어려운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는 잠시 동안 그의 장남이자 5세였던 사보이아 공작 프랑수아 이아생트에게 계승되었다. 차남인 사보이아 공작 샤를 에마뉘엘 2세의 섭정직은 그의 어머니인 프랑스의 크리스틴에게 돌아갔고, 그녀의 추종자들은 '마다미스티'(Madama Reale 지지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보이아는 섭정의 형제인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의 위성국이 되었다. 추기경 사보이아 공작 모리스와 카리냐노 공작 토마스 프랑수아(둘 다 샤를 에마뉘엘 1세의 아들)의 지지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프린치피스티'(왕자 지지자)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곧 각 전투 세력은 토리노 시를 포위했다. '프린치피스티'는 초기 승리를 거두었고 1639년 7월 27일 토리노를 심각하게 약탈했다. 두 세력은 1642년에야 합의에 도달했는데, 이제 빅토르 아마데우스 1세의 미망인이 빅토르의 아들 샤를 에마뉘엘 2세를 왕위에 올리고 그의 대리로 섭정을 했으며, 심지어 성년이 된 후에도 그랬다.
섭정 기간 동안 종교 전쟁이 다시 일어났다. 그 후 1655년에 사보이아 군대는 왈덴스인 학살을 자행했다. 왈덴스 계곡의 프로테스탄트 주민 상당수를 학살한 사건으로, 이는 피에몬테 부활절(Pasque Piedmont프랑스어)로 알려져 있다.[12] 학살에 대한 보고서는 프로테스탄트 유럽 전역에 빠르게 퍼져, 특히 영국에서 분노를 촉발했다.[12] 보호령 올리버 크롬웰은 사보이아 공국에 개입을 위협하며, 공작이 내린 군사적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1655년 8월 18일, 피네롤로 자비 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이는 샤를 에마뉘엘 2세와 왈덴스인 간의 평화 조약을 구성했다.[13]
사보이아 공작 샤를 에마뉘엘 2세의 정부는 다음 세기에 그의 후계자 사보이아 공작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가 실시한 주요 개혁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보이아에 민병대를 창설하고 1661년 최초의 공립학교 시스템을 설립한 것이다. 문화인이자 위대한 정치가이기도 했던 샤를 에마뉘엘은 호화로운 베나리아 궁전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를 모방했는데, 이는 바로크 건축의 걸작이자 베르사유 궁전의 장엄함을 이탈리아에서 재현한 복제품이었다. 그것은 도시의 큰 확장의 시대였고, 샤를 에마뉘엘 2세는 토리노의 성장과 바로크 양식으로의 재건을 촉진했다. 1675년 그의 사망 후, 그의 미망인이자 새로운 '마다마 레알레'인 사보이아-네무르의 마리 잔느 바티스트의 섭정기(1675-1684)가 뒤따랐다.
2. 4. 18세기: 공국에서 왕국으로
샤를 에마뉘엘 2세의 뒤를 이어 11세의 아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즉위했고, 그의 어머니이자 프랑스 출신인 사보이아-네무르의 마리 잔느 바티스트가 섭정을 맡았다. 마리 잔느는 아들을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의 딸이자 왕위 계승권자인 공주와 결혼시키려 했다. 이는 사보이아 가문이 포르투갈의 통치자가 될 수도 있었음을 의미한다.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권력을 잡은 후, 사보이아는 9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프랑스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사보이아는 쿠네오 공성전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지만, 스타파르다 전투와 마르살리아 전투에서는 크게 패했다. 이후 사보이아는 프랑스의 위성국이 되었고,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루이 14세의 조카딸인 앙리에트 마리 드 오를레앙과 결혼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초기에 사보이아는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참전했지만, 나중에 동맹을 바꾸었다. 프랑스는 다시 사보이아를 침략했고, 사보이아 공작의 사촌인 사보이아의 외젠 왕자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토리노 공성전에서 사보이아를 구원했다.
1713년 전쟁이 끝나고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시칠리아 왕국을 얻었다. 1718년 런던 조약에 따라,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1720년 시칠리아를 사르데냐와 교환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다스렸던 영토에는 사르데냐, 사보이아, 피에몬테, 아오스타 계곡, 니스, 오넬리아가 포함되었다. 이 영토들은 일반적으로 "사르데냐 왕국"으로 불렸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샤를 에마뉘엘 3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아시에타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조약을 통해 앙게라와 비제바노 등 서부 롬바르디아의 일부 지역을 얻었다.
3. 역대 사보이 공작 목록
4. 군대
사보이아 공국은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의 전쟁에 자주 개입한, 주목할 만한 지역 군사 강국이었다. 17세기 평시 병력은 약 4,800명의 정규군(보병 3,600명, 기병 1,200명)과 다수의 농민 민병대로 구성되었다. 전시에는 민병대원들이 훈련을 받고 동원되었으며, 용병들이 고용되어 군대 규모가 급격히 증가했다.
1625년 공국의 군대는 26,600명의 정규군(보병 25,381명, 기병 1,213명)과 약 8,000명의 민병대로 구성되었다. 정규군은 5~7개의 피에몬테 연대와 나머지 용병(프랑스 용병 9개 연대, 이탈리아 용병 2개 연대 포함)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정규군 규모는 1635년 12,250명, 1637년 15,710명, 1649년 18,000명, 평화로운 1660년 5,500명, 1672년 26,178명, 1705년 35,000명으로 변화했다(1705년에는 10,000명의 민병대가 추가로 소집되었고 더 많은 비소집 병력이 있었다).
민병대는 비교적 잘 무장되어 있었으며, 1566년에는 24,000명으로 구성되었고, 그중 약 3분의 1이 자신의 지역 밖에서도 활용될 수 있었다.[14]
5. 국기
사보이아 공국의 깃발은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형태이다. 이는 십자군 깃발을 기반으로 하며, 몰타 기사단(현대 몰타의 깃발과 몰타 군사 수도회의 깃발의 기원이기도 하다) 및 덴마크와 스위스의 깃발, 색깔이 반전된 잉글랜드와 제노바의 깃발 등과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18세기에는 몰타 깃발과 구별하기 위해 간혹 문장에 "FERT"라는 글자가 추가되기도 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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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Translating a massacre : Jean-Baptiste Stouppe and the waldensian slaughter of 1655 between propaganda, religion and diplom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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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저자명, 페이지 정보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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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사보이아 공국의 변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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