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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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수 전투는 662년 고구려와 당나라 간에 벌어진 전투로,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 고종은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침공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사수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 장군 방효태와 그의 열세 명의 아들이 전사했으며, 평양을 포위했던 소정방의 군대는 신라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철수했다. 사수 전투의 승리로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고구려는 이후 수년간의 전쟁으로 쇠약해졌고 연개소문 사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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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분쟁 | 사수 전투 |
부분 | 고구려-당 전쟁 |
![]() | |
날짜 | 662년 2월 21일 |
장소 | 사수 (대동강의 지류, 현재의 북한 평양 부근으로 추정) |
결과 | 고구려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당나라 |
교전국 2 | 고구려 |
지휘관 및 지도자 | |
당나라 | 방효태 |
고구려 | 연개소문 |
병력 규모 | |
당나라 | 100,000명 |
고구려 | 100,000명 (수만 명으로 추정) |
사상자 규모 | |
당나라 | 전멸 |
고구려 | 기록 없음, 불명 |
관련 정보 |
2. 배경
당나라의 황제 고종은 아버지 태종의 고구려 원정 실패[1] 이후, 고구려 정복을 위한 재침공을 계획했다.
2. 1. 국제 정세
고종은 태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고, 고구려 정복의 꿈을 다시 꾸게 되었다.[1] 660년, 당은 35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고 신라의 지원을 받아 백제를 공격했다.[2]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나라 수군은 산둥 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백제로 향했고,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 정복을 수행했다.[3]백제 멸망 이후, 복신이 이끄는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일본이 망명한 백제 왕자 부여풍을 파견하여 백제를 지원하면서 국제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5] 한편, 당은 서쪽에서 철륵의 반란이 일어나 고구려에 투입한 병력 일부를 차출해야 했다.[6] 이러한 상황은 연개소문에게 사수 인근의 당나라 군대를 섬멸할 기회를 제공했다.
2. 2. 당의 군사 전략
3. 전개
3. 1. 당의 침공 (661년)
661년, 당나라는 35개 군(軍)으로 이루어진 대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 소사업의 부여도행군과 정명진의 누방도행군은 육군으로 요하를 건너 요동 지역으로 침공하였고,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은 해상을 통해 압록강 하구, 대동강 하구에 상륙하여 고구려 수도 평양을 직접 공격하려 하였다.당나라의 이러한 해상을 통한 대규모 침공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비견될 정도였다.
가을 8월, 소정방 등의 당나라 대군은 패수(지금의 대동강) 하류에 상륙하였고 격렬히 반격하던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인근 마읍산을 탈취하였으며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한편 9월,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그의 아들 연남생에게 고구려 정예부대 정병 수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수비하게 하고 있었다.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압록강에 얼음이 얼었다. 계필하력은 군사를 이끌고 얼음 위로 강을 건너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며 기습 공격해왔고 이에 방심하던 고구려 군사가 패주하였다. 계필하력이 수십 리를 추격하며 고구려 군사 3만 명을 죽였다. 남은 군사는 모두 항복하였고, 연남생은 간신히 자기 몸만 피하여 달아났다. 압록강 하류를 방어하던 고구려 정예부대가 섬멸되어 이제 육로로 평야까지 방어선이 뚫리게 된다. 무엇보다 압록강 유역의 당군의 점령으로 고구려는 주력 대다수 군이 있는 압록강 이북 요동 지역 및 국내성과 압록강 이남의 수도 평양이 단절되는 위기를 맞게 된다.
연개소문은 당에게 지배받은 철륵에게 군사를 일으키라고 제안하고 철륵은 이것을 수락했다. 그래서 본국 당나라에서는 철륵의 반란으로 변란이 발생했고 당의 수도 장안이 위급해지는 긴급상황이 발생한다. 이에 철륵 출신의 계필하력과 그의 정예 요동도행군과 소사업이 이끄는 부여도행군은 철륵 전선에 투입을 위해 긴급히 군사를 철수하라는 조서가 있었으므로 계필하력이 이끄는 주력 요동도행군은 다시 바다를 건너 당으로 돌아가야 했다.
3. 1. 1. 압록강 전투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군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했다.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이끄는 고구려 정예 부대가 패배하고, 압록강 방어선이 뚫렸다.압록강 유역 점령으로 고구려는 요동 지역과 평양이 단절되는 위기를 맞았다.
3. 1. 2. 평양 포위
소정방(蘇定方) 등은 대동강 하류에 상륙하여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했다. 고구려군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마읍산(馬邑山)을 탈환하기도 했다. 철륵(鐵勒)의 반란으로 인해 계필하력(契苾何力) 등 일부 당군(唐軍)이 철수하면서, 전선에 차질이 발생했다.3. 2. 사수 전투 (662년)
661년 겨울은 빨리 찾아왔고 무척이나 추웠다. 갑작스러운 철륵의 반란으로 당나라 내부 문제가 발생하여 고구려에 출정했던 상당수의 부대가 이미 급히 당나라로 회군하였다. 해상으로 고구려 내부 깊숙이 침공한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 등 당의 대부대는 완전 고립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압록강 하구를 점령했던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의 철수로 육로로의 식량보급도 끊겼다. 당나라 군사들은 무릎을 끌어안고 곡소리를 했다고 기록에 나와 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다.662년 2월, 고구려군은 각지의 부대를 모아 고립된 당나라 군대에 총공격을 시작했다. 특히 방효태가 이끄는 옥저도행군은 중국 영남 지역의 부대로 추운 고구려의 기후를 견디기 더더욱 어려웠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지휘하에 고구려군은 당나라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을 공격하여 몰살시켰다. 이 전투에서 패강도행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대총관 임아상은 행방불명되었다.
옥저도행군 대총관 방효태는 부장들이 포위망을 뚫고 다른 진영으로 탈출하기를 권하였으나 "내가 데리고 온 향리 자제 5천여 명이 모두 죽었는데, 어찌 나 한 몸만 살아남길 구하겠는가?" 라며 거부했다.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공격하니 방효태는 몸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집중되어 그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했고, 그가 이끌던 옥저도행군은 사수(현재의 보통강으로 추정)에서 몰살당했다.
661년 겨울, 사수 전투는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났다.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사수에서 당나라 군대를 요격하여 전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 장군 방효태와 그의 열세 명의 아들이 모두 전사했다.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의 군대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의 군량 지원을 받고 철수하였다. 혹독한 눈보라까지 겹치자, 소정방은 군대를 철수시키고 포위를 풀었다. 이 전투로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은 실질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3. 2. 1. 전투 과정
661년 겨울은 빨리 찾아왔고 무척이나 추웠다. 갑작스러운 철륵의 반란으로 당나라 내부 문제가 발생하여 고구려에 출정했던 상당수의 부대가 이미 급히 당나라로 회군하였다. 해상으로 고구려 내부 깊숙이 침공한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 등 당의 대부대는 완전 고립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압록강 하구를 점령했던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의 철수로 육로로의 식량보급도 끊겼다.[7] 당나라 군사들은 무릎을 끌어안고 곡소리를 했다고 기록에 나와 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다.[8]662년 2월, 고구려군은 각지의 부대를 모아 고립된 당나라 군대에 총공격을 시작했다. 특히 방효태가 이끄는 옥저도행군은 중국 영남 지역의 부대로 추운 고구려의 기후를 견디기 더더욱 어려웠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지휘하에 고구려군은 당나라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을 공격하여 몰살시켰다. 이 전투에서 패강도행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대총관 임아상은 행방불명되었다.[9]
옥저도행군 대총관 방효태는 부장들이 포위망을 뚫고 다른 진영으로 탈출하기를 권하였으나 "내가 데리고 온 향리 자제 5천여 명이 모두 죽었는데, 어찌 나 한 몸만 살아남길 구하겠는가?" 라며 거부했다.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공격하니 방효태는 몸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집중되어 그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했고, 그가 이끌던 옥저도행군은 사수에서 몰살당했다.
3. 2. 2. 전투 결과
661년 겨울, 사수 전투는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났다.[7]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사수에서 당나라 군대를 요격하여 전멸시켰다.[7] 이 전투에서 당나라 장군 방효태와 그의 열세 명의 아들이 모두 전사했다.[8]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의 군대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의 군량 지원을 받고 철수하였다.[9] 혹독한 눈보라까지 겹치자, 소정방은 군대를 철수시키고 포위를 풀었다.[9] 이 전투로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은 실질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4. 결과 및 영향
고구려는 사수에서의 승리를 축하할 틈도 없이 수십 년간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황폐해졌다.[10] 연개소문은 4년 뒤 사망했고, 6년 뒤 고구려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4. 1. 역사적 기록의 한계
661년부터 662년까지 벌어진 제2차 고구려-당 전쟁은 645년의 1차 고구려-당 전쟁과는 달리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한국 사학자들은 1차 고구려-당 전쟁 때에도 요동성 전투 이후 신성 및 건안성의 전투, 주필산 전투 등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이 누락되어 있어 당나라 측이 사서에 자신의 전과가 높은 전쟁 위주로 기록하고 그 외에 크게 패전한 기록은 삭제하거나 크게 축소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제2차 고구려-당 전쟁은 요동 방면으로 진출한 부여도행군의 행적이 전혀 알 수 없으며 얼마 되지 않는 기록은 압록수 부근에서의 계필하력의 당군에게 연남생의 고구려 군이 패배한 것, 그리고 사수에서 방효태가 아들 13명과 함께 옥저도행군이 전멸했다는 정도만이 중국측 사서와 한국측 삼국사기, 일본의 일본서기에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당시 전투를 지휘한 상세 지휘관 또한 알 수 없고 수 년 뒤에 연개소문이 사망한 점으로 비정하여 2차 고구려 당 전쟁 중에 연개소문이 병석에 있었다라는 가정 또한 정확한 근거가 없다.
5. 평가
5. 1. 긍정적 평가 (더불어민주당 관점)
5. 2. 부정적 평가 (국민의힘 관점)
참조
[1]
서적
East Asia: A New History
https://books.google[...]
AuthorHouse
2012-11-20
[2]
서적
The history of Korea
Greenwood Press
[3]
서적
Korea and East Asia: The story of a phoenix
Praeger
[4]
웹사이트
大唐不良人(庚新): 第三十章 程务挺_点阅小说网
http://www.cndyxs.co[...]
[5]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Press
[6]
문서
Dingling, Gaoju and Tiele
[7]
서적
Medieval Chinese Warfare 300-900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3-09-02
[8]
서적
https://books.google[...]
EASTASIA
2013-09-02
[9]
서적
Korea and East Asia: The story of a phoenix
Praeger
[10]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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