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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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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고구려-당 전쟁은 7세기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한 일련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이 전쟁은 신라의 요청과 당나라의 팽창주의적 야심, 그리고 고구려 내부의 정치적 혼란이 배경이 되어 발발했다. 645년 제1차 전쟁을 시작으로, 당나라는 지속적인 소모전을 통해 고구려를 압박했고,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668년, 연개소문의 사후 고구려의 분열과 신라의 협공 속에 평양성이 함락되며 고구려는 멸망했다.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 옛 영토에 대한 지배를 시도했으나, 신라의 저항과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실패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전쟁은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발해 건국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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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당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고구려-당 전쟁
다른 명칭여당 전쟁
일부신라의 삼국통일 전쟁
시기645년 - 668년
장소만주와 한반도 북부, 황해
원인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야욕과 연개소문의 대당 강경책
결과신라당나라의 승리
당-한국 전쟁
주요 전투 지역
교전 세력
교전국 1고구려
말갈
거란
서돌궐
백제
야마토
교전국 2당나라
신라
동돌궐
실위
습족
해족
지휘관 및 지도자
고구려연개소문 (사망)
보장왕 (항복)
고정의
고연수 (항복)
고혜진 (항복)
고돌발
손대음 (항복)
고원
소부손
안고
두방루
아달혜
연남생 (항복)
연남건
연남산 (항복)
불덕 (항복)
뇌음신
사부구 (항복)
술탈 (전사)
신성 (항복)
오사 (항복)
고요묘 (항복)
고현 (항복)
고질 (항복)
고간 (항복)
이타인 (전사)
고족유 (항복)
고연무
안재석
고정문
양만춘
당-신라 연합군당 태종
당 고종
이세적
장량
장손무기
이도종
계필하력
아사나사이
이사마 (전사)
정명진
설만철
설만비
우진달
설인귀
소정방
강확 (전사)
설계두 (전사)
왕군악 (전사)
장군예 (전사)
부복애 (전사)
마문거 (전사)
방효태 (전사)
임아상 (전사)
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김흠순
김인문
동타천
가도자 (해족)
병력 규모
고구려20만여 명 이상 (645년)
당-신라 연합군30~40만 명 추정 (645년)
피해 규모
고구려정확히 알 수 없음
당-신라 연합군정확히 알 수 없음 (막대한 손실 기록)
주요 전투 및 사건
645년제1차 침공, 요동반도, 백암성 전투, 안시성 전투
660년백제 멸망, 백강 전투
662년 ~ 668년제2, 3차 침공, 평양성 함락, 고구려 멸망
영향
결과고구려 멸망
당나라안동도호부 설치
신라의 삼국통일 완성
신라-당 전쟁 발발

2. 배경

신라고구려에 대한 군사 지원을 여러 차례 요청했고, 당은 628년 돌궐을 패배시킨 직후부터 이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한편, 신라는 642년 백제와도 적대 관계에 있었는데, 의자왕은 그해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개의 거점을 함락시켰다.[3] 같은 해 고구려에서는 군사 독재자 연개소문이 180명이 넘는 고구려 귀족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5][4] 그는 국왕을 살해하고 괴뢰왕을 왕위에 올렸다. 이로써 백제와 고구려는 당과 신라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고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5][4]

2. 1. 당나라의 건국

수 양제고구려-수 전쟁에서 크게 패했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양저우의 별궁에서 사치스러운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수나라 내부에서는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엄청난 대토목 공사로 이미 국력이 피폐해져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으며, 지방의 호족들도 독립적인 정부를 세웠다. 또한 귀족 계층인 관롱 집단마저 등을 돌려 수나라는 정치적인 기반마저 잃어버렸다.

617년, 태원 유수 이연 역시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연은 수의 수도인 장안으로 들어가, 황태손인 양유를 황제로 잇게 했다. 또한, 자신은 수의 대승상이 되었다. 때마침 수 양제가 강도에서 그의 시위장이자 우문술의 아들인 우문화급·우문지급 형제에게 암살되자, 이연은 국호를 으로 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으며, 공이 컸던 둘째 아들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2. 2. 당 태종의 즉위

617년, 이연수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서 반란을 일으켜 양유를 황제로 세우고, 자신은 대승상이 되었다. 수 양제우문화급·우문지급 형제에게 암살되자, 이연은 국호를 (唐)으로 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으며, 둘째 아들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이세민은 각지의 반란군과 호족 세력을 제압하고, 624년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이세민의 인기가 높아지자, 형인 황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동생 제왕(齊王) 이원길은 이세민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626년 7월 2일,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이건성과 이원길을 살해했다. 3일 뒤 이세민은 황태자가 되었고, 2개월 뒤 이연에게서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 9월 4일에 황제에 즉위한 이세민은 이듬해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하였으니, 이가 바로 태종이다. 630년 동돌궐을 제압하고, [거란]과 [해족], [습족], [실위]가 당에 복속하였다.

2. 3. 고구려의 정세

고구려는 고구려-수 전쟁으로 흐트러진 국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에 자주 사신을 보내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평화적인 관계를 맺고자 했다. 고구려 영류왕은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침공 때 포로가 된 한인(漢人)을 송환하고 고구려의 포로를 찾아왔다. 624년 당에 조공(朝貢)하고 당 고조(高祖)로부터 상주국(上柱國)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왕에 봉해졌다. 영류왕은 당에 봉역도(封域圖)를 바치고 제후국임을 인정하였다.[13]

그러나 이세민이 태종으로 즉위한 뒤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 행위를 감행했고, 631년에는 고구려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경관(京觀)을 헐어버렸다. 같은 해 영류왕은 동북쪽의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의 축조를 시작하였고,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역사(役事)의 감독을 맡겼다. 연개소문은 강경파 외교론자였으며, 이는 온건파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13]

당의 세력은 점점 더 강해져 635년에는 토욕혼을, 640년에는 고창국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당나라에 대항할 세력은 동쪽의 고구려를 제외한 대부분 소멸되었다.[13]

640년 영류왕은 태자 고환권(高桓權)을 보내 당의 국자감에 입학시켰다. 자세한 기록은 없어서 사유는 알 수 없지만 일국의 왕자를 적국에 보낸 다는 것은 당나라와 전쟁을 할 뜻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641년에 당나라는 직방랑중(주로 군사지도를 관리하는 벼슬) 진대덕(陳大德)을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의 정세를 염탐하는 등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는 점차 긴장되어 갔다.[13]

2. 4. 연개소문의 정변

642년 연개소문의 세력이 강해지자 여러 대인(大臣)들이 왕과 상의하여 연개소문을 죽이려 하였다. 그것을 미리 안 연개소문은 자기 부(部)의 군사를 모아 거짓으로 열병(閱兵)한다면서 잔치를 베풀어 대신들을 초대한 뒤 모두 죽였는데, 이때 죽은 자가 18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5] 그리고 궁궐로 가서 영류왕을 죽이고[41] 왕의 조카인 장(臧)을 새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28대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다.

연개소문은 막리지에 오르고 이전 귀족회의가 가지고 있던 병권(兵權)과 인사권(人事權)을 장악하였으며,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 자리에 오르며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연개소문은 외교정책을 대당강경책(對唐强硬策)으로 이끌었다.

2. 5. 당나라의 침략 야욕

신라고구려백제의 침입을 받자,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화친을 요청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견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당나라는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고구려를 협박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지난번 수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 우리 땅 500리를 빼앗아...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은 그칠 수 없을 것이다."라며 이를 일축했다.[41]

당 태종은 644년에 장엄(蔣儼)을 보내 다시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마저도 일축하고 장엄을 토굴에 가두었다. 당 태종은 "요동은 원래 중국 땅인데... 고구려를 위하여 군부의 치욕을 씻으려 할 뿐이다."라며 고구려 정벌의 명분을 내세웠다.

당 태종은 장작 대감을 설치해 전선을 제조하고, 식량을 영주로 집결하여 전쟁을 준비하였다. 수나라의 예를 들어 많은 대신들이 고구려 정벌에 반대하였으나, 당 태종은 자신감에 차 이를 강행하였다. 결국 644년 10월,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시역을 성토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 침공을 명했다.

3. 645년 제1차 고구려-당 전쟁

642년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키자, 당나라는 이를 징벌한다는 명분으로 644년 11월 고구려를 침공하기 시작했다.[5]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끄는 대규모 전쟁은 645년에 시작되었다. 당나라는 수로와 육로 양면으로 공격을 진행했다.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선봉군은 유성을 출발하여 회원진으로 향하는 척했지만, 비밀리에 북쪽 샛길인 통정진으로 우회하여 요하를 건넜다. 이는 고구려-수 전쟁 당시 수나라가 요하에서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을 고려한 전략적 기습이었다. 카르타고한니발로마를 침공할 때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처럼, 허를 찌르는 기습 전법을 사용한 것이다.

5월 1일(음력 4월 1일), 이세적은 현도성에 도착했고, 고구려 성들은 문을 닫고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현도성이 함락된 후, 이도종신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5월 15일(음력 4월 15일) 군량이 보관된 개모성으로 이동했다. 연개소문은 가시성 군사 700명을 지원군으로 보냈지만, 5월 26일(음력 4월 26일) 개모성은 함락되고 2만 호의 인구와 10만 석의 양곡을 빼앗겼다.

한편, 영주 도독 장검은 이민족 군사를 이끌고 요수 남쪽 하구를 건너 건안성을 기습하여 고구려군 수천 명을 전사시켰다. 해로 방면에서는 장량이 이끄는 당나라 수군이 동래에서 출발하여 비사성을 공격했다. 정명진의 야습으로 5월 31일(음력 5월 1일) 비사성이 함락되고 8천 명이 사망했다.

이후 당나라는 백암성, 요동성을 함락하고 안시성을 포위했지만, 양만춘이 이끄는 안시성의 저항에 고전했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패배하고 고연수고혜진이 항복했지만, 안시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당 태종은 돌궐의 침입 소식과 겨울철 군량 보급의 어려움을 이유로 645년 9월 철군을 결정했다.

3. 1. 개전 초기: 신성·개모성·비사성 전투

642년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왕위에 앉혔다. 당나라는 이를 구실로 644년 고구려 침공을 시작, 645년 2월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5] 당은 수륙 양면 작전을 펼쳤는데, 장량이 이끄는 수군은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한편, 이세적이 이끄는 육군은 요하를 건너 고구려 영토로 진입하여, 5월 16일 개모성을 포위 공격해 11일 만에 함락시켰다.[6]

3. 2. 1차 요동성 전투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요동성으로 진격하여, 645년 6월 7일에 요동성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4만 명의 고구려 지원군을 격파했다. 며칠 후, 당 태종의 기병대가 요동성에 도착했다. 6월 16일, 당군은 방화 물체를 이용해 요동성에 불을 지르고 방어벽을 돌파하여 요동성을 함락시켰다.[6][11]

3. 3. 2차 요동성 전투

이세적의 군대는 요동성으로 진격하여 6월 7일, 고구려 지원군 4만 명을 격파했다. 며칠 후, 당 태종의 기병대가 요동성에 도착했다. 6월 16일, 당군은 방화 물체를 이용하여 요동성에 불을 지르고 방어벽을 돌파하여 요동성을 함락시켰다.[6][11]

3. 4. 백암성 전투

645년 당 태종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백암성에 도착하자, 고구려는 오골성에서 1만 명의 군사를 보내 백암성을 구원하려 했다. 그러나 백암성주 손대음은 항복 의사를 밝혔고, 결국 6월 1일 백암성은 당나라에 함락되었다.[6] 당 태종은 백암성을 약탈하지 않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6]

3. 5. 신성·건안성 전투

당군은 신성건안성에 대한 공격을 다시 시도했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6]

3. 6. 주필산 전투

645년 7월 18일, 당군은 안시성에 도착했다. 말갈 병력을 포함한 고구려 군대가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6] 고구려 구원군은 총 15만 명에 달했다.[7] 당 태종이세적 장군에게 1만 5천 명의 군사를 주어 고구려군을 유인하게 했다. 한편, 다른 당군은 비밀리에 고구려군을 뒤에서 공격했다. 7월 20일, 양측은 주필산 전투에서 만났고 당군이 승리했다.[6] 대부분의 고구려 군대는 패배 후 흩어졌다.[7] 나머지 고구려 군대는 근처 언덕으로 도주했지만, 당군의 포위 후 다음 날 항복했다.

당군은 3만 6,800명의 군사를 포로로 잡았다. 이들 중 3,500명의 장교와 수령들은 중국으로 보내고, 3,300명의 말갈 병사들을 처형했으며, 나머지 일반 고구려 병사들은 석방했다.[6]

3. 7. 안시성 전투

645년 7월 18일, 당군은 안시성에 도착했다. 당군은 하루에 6~7번이나 성을 공격했지만, 양만춘이 이끄는 안시성 군대는 매번 격퇴했다.[8] 당 태종은 안시성 포위 공격을 포기하고 고구려 심장부로 진격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안시성은 원정 중에 버려두기에 너무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9]

결국 당군은 거대한 토산을 쌓는 데 모든 것을 걸었지만, 안시성 군사들이 이를 점령하고 성공적으로 지켜냈다.

추운 날씨와 식량 부족으로 상황이 악화되자, 당 태종은 10월 13일 고구려에서 철군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10] 그는 안시성 성주에게 엄청난 선물을 남겼다.

3. 8. 당나라의 퇴각과 평가

신채호당 태종이 패전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 자신들의 전과를 부풀리고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비판했다.[10]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당군이 요택으로 퇴각한 점, 군량미 부족을 핑계로 퇴각한 점, 황제가 직접 퇴각을 도운 점 등을 들어 당나라의 패배로 보고 있다.[10]

645년 9월 28일, 당 태종은 요동의 추위와 군량 부족을 이유로 철수를 명령했다.[10] 당군은 요동성에 도착한 후 요택으로 퇴각했는데, 이는 요동 지역의 고구려군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10] 장손무기에게 군사 1만 명을 시켜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로 삼아 건너도록 했다.[10] 당 태종이 직접 이 일을 도왔을 정도로 퇴각은 어려웠으며, 20일 동안의 퇴각 과정에서 바람과 눈, 추위로 인해 많은 군사와 말을 잃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10]

일각에서는 퇴각로가 요동 주요 성을 우회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 고구려군이 요동성 등 10성을 회복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10]

3. 9. 누락된 전쟁 기록의 의문

고구려 관련 기록은 대부분 중국 측 사서인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에 의존하고 있어, 당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고구려 장군이나 지휘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제1차 고구려-당 전쟁에서 당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고구려 측 장군이나 지휘관은 주필산 전투의 대대로 고정의만이 이름만 전해질 뿐이다.[5]

주필산 전투 등 일부 전투 기록이 누락되거나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당 태종의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한 이후 주필산 전투까지 상당한 시간 지체가 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한 끝까지 함락되지 않은 신성건안성 전투 기록도 생략되어 있다. 신성·건안성 전투는 주필산 전투, 667년의 금산 전투와 더불어 당나라 초기 고구려와의 4대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될 정도의 큰 전투였다. 안시성 전투로 잘 알려진 주필산 전투 역시 전투 초기의 당군 승리 부분만 남아 있고 이후 기록이 전혀 없다. 현대 학자들은 정예 당나라 대군이 단지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회군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주필산 전투와 같이 양측 수십만이 격돌한 큰 전투에서 남은 기록은 초전에 고연수, 고혜진이 항복한 기록뿐이기 때문이다.[6][7]

4. 647년~659년 당의 소모전 전략

646년 당은 동쪽의 고구려를 제외한 거의 유일한 위협 세력이었던 북쪽의 설연타를 멸망시켰다. 같은 해 8월, 철륵의 11개 부족장이 보낸 사신들이 공물을 바치며 당에 충성을 맹세하였다.[1]

647년 보장왕 6년, 당 태종고구려 침공을 다시 하려 하였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의가 있었다.[2]

> 평원의 다른 족속들과 달리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기에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앞서 왕이 직접 원정했을 때, 그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했으며, 우리가 정복한 성에서는 곡물들을 수확하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적은 군사를 자주 보내, 그 영역을 번갈아 침략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어에 지치게 하고, 쟁기를 놓고 싸움터로 나가게 한다면, 수년 내에 천리의 들판은 적막해질 것이며, 민심은 저절로 이반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당 태종은 지속적인 국지 소모전을 통해 고구려 변경을 끊임없이 침범하여 고구려 변방을 피폐하게 만든 후, 고구려를 크게 침공하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2] 이는 역사적으로 강국이 주변국을 침공할 때 대규모 원정을 통해 정복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2] 즉, 당은 고구려를 한 번에 정복할 수 없는 상대로 인식하고 있었다.[2]

647년 당 태종은 우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 이해안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10만여 명을 출동시켜 해로로 진격하게 하였다. 또한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손이랑 등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으로 진격하게 하였다.[1] 이세적의 당군은 요수를 건너 고구려 군과 교전하였고 외성을 불지르고 돌아갔다.[1] 그해 가을 9월, 당군은 석성을 격파하고, 적리성 아래까지 진격해왔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이 나가 싸웠으나, 당나라 장수 이해안이 고구려 군사를 공격하여 3천 명이 사망하였다.[1]

648년 설만철은 배행방을 부장으로 삼아 3만여 명의 병력과 전함을 이끌고 내주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 고구려 박작성을 공격했으나, 박작성은 험준한 요새였고, 압록강으로 막혀 있어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42]

649년 당 태종이 사망하면서 모든 고구려-당 전쟁 관련 중단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 이후 한동안 고구려와 당의 국지전은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1]

654년 겨울 10월, 고구려는 당에 빼앗긴 거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장수 안고에게 고구려군과 말갈군을 보내 거란을 공격하게 했으나 패하였다.[1] 같은 해,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655년 봄 정월, 고구려는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 북쪽 변경을 침공해 33개 성을 점령했다. 신라의 김춘추는 당에 구원을 요청했고, 당은 이를 받아들였다.[1]

655년 2월, 당나라는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고 영주 도독 정명진과 좌위 중랑장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1] 정명진은 645년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때 고구려의 비사성을 야간 기습하여 함락시킨 유격전에 능한 장수였다.[1] 그해 여름 5월, 정명진이 이끄는 당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1천여 명의 피해를 입혔다.[1]

658년, 당나라 영주 도독 겸 동이 도호 정명진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요서 지역의 고구려 영토를 기습 침범하였다. 설인귀는 고구려의 적봉진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군사 100여 명을 포로로 잡는 공을 세웠다.[4]

659년,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횡산(橫山)과 석성(石城)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했다.[1] 횡산 전투에서는 고구려 대장 온사문이 요격에 나섰으나 패배했다.[1] 석성 전투에서는 설인귀가 단기로 돌격하여 고구려 신궁(神弓)을 생포하는 활약을 펼쳤다.[1]

4. 1. 연개소문 암살 계획

645년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당나라는 복수심에 불탔다. 당나라는 이전의 모든 내전에서 승리하고, 대외적으로 주변 이민족 정벌에도 성공했기에 패전의 분함을 참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고구려 원정에 참전했던 왕부참군 교보명은 장안으로 돌아와 사공 방현령에게 고구려를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고, 방현령은 소개장을 써서 당 태종에게 그를 추천했다.

당 태종이 교보명을 불러 묻자, 교보명은 "직접 평양에 가서 고구려를 설득하고, 만약 실패하면 한나라 때의 자객 부개자처럼 연개소문을 암살하여 고구려를 항복시키겠다"고 말했다. 당 태종은 그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고 자신이 찾던 인물이 바로 이와 같다고 칭찬했으나, 그를 위험한 고구려 땅에 보낼 수 없어 자신의 곁에 두었다.

4. 2. 설연타의 멸망과 고구려 침공 전략 수정

646년 당은 동쪽의 고구려를 제외한 거의 유일한 위협 세력이었던 북쪽의 설연타마저 멸망시켰다. 같은 해 8월, 철륵의 11개 부족장이 보낸 사신들이 공물을 바치며 당에 충성을 맹세하였다.[1]

647년 보장왕 6년, 당 태종은 마지막 남은 숙적 고구려 침공을 다시 하려 하였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의가 있었다.[2]

> 평원의 다른 족속들과 달리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기에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앞서 왕이 직접 원정했을 때, 그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했으며, 우리가 정복한 성에서는 곡물들을 수확하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적은 군사를 자주 보내, 그 영역을 번갈아 침략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어에 지치게 하고, 쟁기를 놓고 싸움터로 나가게 한다면, 수년 내에 천리의 들판은 적막해질 것이며, 민심은 저절로 이반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당 태종은 지속적인 국지 소모전을 통해 고구려 변경을 끊임없이 침범하여 고구려 변방을 피폐하게 만든 후, 고구려를 크게 침공하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2] 이는 역사적으로 강국이 주변국을 침공할 때 대규모 원정을 통해 정복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2] 과거 역대 중화 왕조 또한 그러했고 이후에도 그러했지만, 당시 당나라에게 고구려 정복은 그만큼 쉽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소국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장기적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2] 즉, 당은 고구려를 한 번에 정복할 수 없는 상대로 인식하고 있었다.[2]

4. 3. 647년 신성·적리성 전투

당 태종은 유격전에 능한 좌무위 대장군 우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이해안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10만여 명을 출동시켜 누선을 타고 내주로부터 해로로 진격하게 하였다. 또한 태자 첨사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손이랑 등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 도독부의 군사와 함께 신성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이 두 부대에는 모두 수전에 익숙하고 전투에 능한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1]

이세적의 당군이 요수를 건너 남소 등의 몇 성을 지났는데, 고구려 군이 모두 성을 등지고 싸웠으므로, 이세적의 당군이 이들과 교전하였고 외성을 불지르고 돌아갔다.[1]

가을 9월, 당나라는 유격전에 능한 우진달·이해안 등을 다시 보내어 고구려 국경에 들어와 1백여 차례 싸웠다. 당군은 석성을 격파하고, 적리성 아래까지 진격해왔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이 나가 싸웠다. 당나라 장수 이해안이 고구려 군사를 공격하여 이때 사망한 고구려 군사가 3천 명이었다.[1]

4. 4. 648년 박작성 전투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이 실패로 끝난 후, 당 태종648년 설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게 하였다. 설만철은 배행방을 부장으로 삼아 3만여 명의 병력과 전함을 이끌고 내주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했다.[42]

설만철이 이끄는 당군은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다. 박작성 성주 소부손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당군에 맞섰다. 배행방이 이끄는 당군은 소부손의 고구려군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박작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박작성은 산을 이용한 험준한 요새였고, 압록강으로 막혀 있어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한편, 고구려 장군 고문오골성·안지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이끌고 와서 두 진으로 나누어 박작성을 구원하였다. 설만철은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여 고구려군과 크게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물러났다.[42]

4. 5. 649년~654년 당 태종의 사망과 일시 소강상태

당 태종이 사망하면서 모든 고구려-당 전쟁 관련 중단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 이후 한동안 고구려와 당의 국지전은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1] 이무렵 당은 당 태종 사망 이후 당 고종이 등극하였고 장손무기가 사실상 권력을 쥐고 정관의 치에 이은 영휘의 치로 불리는 안정적인 정세에 있었고, 이후 당나라 측천무후와의 내부 권력 투쟁이 발생하면서 대외적으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1]

4. 6. 654년 고구려의 거란 원정 및 655년 백제와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 침공

654년 겨울 10월, 고구려는 당에 빼앗긴 거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장수 안고에게 고구려군과 말갈군을 보내 거란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거란의 송막 도독 이굴가가 신성에서 고구려군을 기습하여 500명을 죽이고 700여 필의 말을 빼앗는 전과를 올리며 고구려군을 물리쳤다.[1]

같은 해,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655년 봄 정월, 고구려는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 북쪽 변경을 침공해 33개 성을 점령했다. 고구려, 백제, 말갈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수세에 몰린 신라의 김춘추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당에 구원을 요청했고, 당은 이를 받아들여 고구려, 백제, 말갈을 견제하기 위해 소규모 침공을 계획하게 된다.[1]

4. 7. 655년 귀단수(貴湍水) 전투

655년(보장왕 14년) 2월, 당나라는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고 영주 도독 정명진과 좌위 중랑장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1] 정명진은 645년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때 고구려의 비사성을 야간 기습하여 함락시킨 유격전에 능한 장수였다.[1]

여름 5월, 정명진이 이끄는 당군이 요하를 건너오자, 고구려 군사는 당군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를 건너가 전투를 벌였다.[1] 정명진 등은 고구려군을 맹공하여 크게 격파하였고, 고구려군은 1천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1] 당나라 군은 고구려의 외성과 촌락에 불을 지르고 철수했다.[1]

4. 8. 658년 적봉진(赤烽鎭) 전투

658년, 당나라 영주 도독 겸 동이 도호 정명진(程名振중국어)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요서 지역의 고구려 영토를 기습 침범하였다. 설인귀는 이 때 처음으로 군을 직접 지휘하게 되었는데, 고구려의 적봉진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군사 100여 명을 포로로 잡는 공을 세웠다.[4]

4. 9. 659년 횡산(橫山)·석성(石城) 전투

659년,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횡산(橫山)과 석성(石城)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했다.[1] 횡산 전투에서는 고구려 대장 온사문이 요격에 나섰으나 패배했다.[1] 석성 전투에서는 설인귀가 단기로 돌격하여 고구려 신궁(神弓)을 생포하는 활약을 펼쳤다.[1]

5. 661년~662년 제2차 고구려-당 전쟁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면서 고구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당나라 양쪽에서 공격받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661년, 당나라는 백제 침공의 성공을 바탕으로 대규모 해상 침공을 기획했다.

당 고종 시기, 당나라는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고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받자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658년 당 고종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무열왕은 당나라에 백제를 먼저 정복한 후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15]

661년 여름, 소정방이 이끄는 4만 4천 명의 당나라 군대가 바다를 건너 평양을 포위 공격했고, 계필하력이 이끄는 육군도 함께 진격했다. 당나라 군대는 총 35만 명에 달했고, 신라는 보급을 담당했다. 계필하력은 압록강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했지만, 소정방은 평양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방효태가 이끄는 당나라 보조군은 사수 전투에서 연개소문에게 패배했고, 662년 2월에 당나라의 침공은 중단되었다.[24][25][26][32]

662년, 연개소문방효태가 이끄는 당나라 옥저도행군을 사수에서 격파하고, 방효태와 그의 아들들을 전사시켰다.[3]

661년 겨울, 철륵의 반란과 추위로 인해 당나라 군은 고립되었고, 소정방은 신라에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당군에 군량을 보급했고,[1]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은 바다를 통해 철수했다.[1] 김유신은 표하(䕯河)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신라로 귀환했다.

5. 1.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의 고립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나라 군대와 신라군이 연합하여 백제를 침략했다.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백제는 결국 멸망하였다.[18] 이로써 고구려는 동맹국을 잃고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661년, 고구려는 뇌음신과 말갈 장군 생해를 보내 신라의 술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어서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으나, 성주 동타천의 반격으로 퇴각하였다.

같은 해,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로 진격하였다. 당나라 군은 평양을 직접 공격하고, 당 고종은 4만 4천 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이 왜의 지원을 받으며 나·당 연합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신라군은 백제 부흥군과 싸워야 했다. 고구려는 이 틈을 타 서북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당나라 군을 격퇴하였다.

당나라 군은 661년 음력 4월에 다시 평양을 향해 진군했으나 패배하였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고,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격을 중지하였다.

5. 2. 고구려의 신라 침공: 칠중성(七重城)·북한산성(北漢山城) 전투

661년 보장왕 20년 5월, 고구려는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장군 뇌음신(惱音信)과 말갈의 장군 생해(生偕)가 이끄는 군대를 연합하여 신라의 칠중성(七重城, 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을 침공하였다. 칠중성은 고구려가 여러 차례 신라를 침공했던 신라 북부 지역의 요충지였다. 신라군은 20여 일간 맹렬히 저항했다. 고구려군은 함락이 쉽지 않아 포위를 풀고 물러나려 했으나, 칠중성 내부의 분열로 함락에 성공한다. 성 내부의 대나마(大奈麻) 비삽(比歃)이 몰래 고구려 진영에 편지를 보내 성의 식량이 떨어지고 힘이 다했으니 공격하면 항복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렸다. 이에 뇌음신생해의 고구려·말갈 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성주였던 필부(匹夫)는 비삽의 배신을 알고 그의 머리를 베어 성 밖으로 던지며 항전 의지를 다졌으나, 병사들은 지치고 부상자가 많았다. 고구려와 말갈군은 불을 질러 맹공격했고, 필부와 군사들은 저항했지만 모두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었다. 이 소식에 무열왕은 필부에게 급찬(級湌)을 추증하며 슬퍼했다.

뇌음신생해의 고구려·말갈 군은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열흘이 넘도록 포차(抛車)로 돌을 던지며 공격했다. 신라 북한산성의 성주(城主)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陁川)은 20여 일간을 견뎠으나 군량과 힘이 다하여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별안간 큰 별이 고구려군 진영에 떨어지고 번개와 벼락이 치며 큰비를 퍼부으니, 고구려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마철로 접어드는 시기였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철수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와 신라의 칠중성·북한산성 전투는 중국 측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삼국사기》에만 등장한다. 661년은 이미 백제가 망한 직후이므로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거나 백제 멸망에 따른 신라 견제를 위해 고구려신라를 공격한 것으로 추측된다. 661년 시점에도 말갈은 고구려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3. 당의 대규모 해상 침공

661년 고구려 보장왕 20년 음력 8월, 당나라는 총 44만 대군을 6개 부대로 편성하여 고구려를 향해 2차 침공을 개시했다. 이전의 수나라당 태종의 1차 침공과는 달리, 주력 침공군은 해상을 통해 고구려에 상륙하는 방식을 택했다. 과거에는 육상을 통해 요하를 건너 요동으로 진공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었지만, 이번에는 해상을 통한 대규모 침공을 기획했다.

당 태종 때부터 오랜 기간 선박을 건조하고 수군을 양성하여 충분한 준비를 마친 당나라는 6개의 대부대 중 소사업의 부여도행군과 정명진의 누방도행군은 전통적인 침공 경로인 요하를 건너 요동 지역으로 침공하게 했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의 주의를 끌기 위한 양동작전이었고, 실제 주력 부대는 해상을 통해 침공하는 4개의 대부대였다.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은 압록강 하구를 점령하여 북쪽 요동 지역과 고구려 남부 지역을 단절시키려 했고,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은 고구려 수도 평양성의 대동강 하구에 상륙하여 방어군을 격파하고 평양성을 함락시키려 했다. 특히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려 한 소정방, 방효태, 임아상의 부대는 660년 백제 침공 때도 성공적으로 해상 침공 작전을 수행했던 주력 부대였다.

이러한 대규모 상륙 작전은 규모 면에서 한국전쟁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끌던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을 훨씬 상회하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견될 정도였다.

649년 당 태종이 사망한 후, 당나라는 전략을 장기 소모전으로 전환하여 소규모 공격을 지속하며 고구려를 약화시켰다. 또한 고구려와 적대 관계에 있던 신라책봉하고, 661년 백제의 전쟁에서 고구려의 동맹국이었던 백제를 멸망시켜 고구려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같은 해, 당나라 고종과 무측천은 소정방, 계필하력, 정명진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다. 계필하력은 압록강에서 연개소문의 장남인 연남생을 격파했다.[1] 당군은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연개소문이 사수에서 방효태의 군대를 격파하고 방효태를 전사시켰다.[1] 남은 당군도 보급 문제로 인해 후퇴했다.[1]

5. 4. 철륵의 반란과 고립된 당의 대군

661년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등 당나라 대군은 패수(지금의 대동강) 하류에 상륙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마읍산을 탈취한 뒤 평양성을 포위했다. 9월에는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압록강 하류로 상륙,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이끄는 고구려 정예부대를 격파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이북 요동 지역 및 국내성과 수도 평양이 단절되는 위기를 맞았다.

649년 당 태종이 죽은 후, 당나라는 고구려를 쇠약하게 만들기 위해 장기 소모전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661년 당 고종과 무측천은 소정방, 계필하력, 정명진 등에게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다. 계필하력은 압록강에서 연남생을 물리쳤지만, 연개소문이 사수에서 방효태의 군대를 격파하고 방효태를 전사하게 만들었다. 남은 당군도 보급 문제로 후퇴했다.[1]

5. 5. 사수(蛇水) 전투

662년, 연개소문은 의 옥저도행군을 사수에서 격파하고, 방효태와 그의 아들들을 전사시켰다.[3]

5. 6. 신라군의 보급과 당군의 대탈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당군에 군량을 보급하였다.[1]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은 바다를 통해 철수했다.[1]

661년 겨울은 빨리 찾아왔고 매우 추웠다. 게다가 철륵의 반란으로 당나라 내부 문제가 발생하여 고구려에 출정했던 상당수의 부대가 이미 당나라로 급히 회군하였다. 해상으로 침입했던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 등 당의 대부대는 고립 상태에 빠졌다. 압록강 하구를 점령했던 계필하력(契苾何力)의 요동도행군마저 철수하면서 육로를 통한 식량 보급도 끊겼다.[1]

당나라 군사들은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고, 소정방은 신라에 긴급히 식량 및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1년 전 백제를 침공했을 때와는 달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견고했고, 때 이른 추위와 고립으로 당나라 대군은 전멸 위기에 놓였다.[1]

5. 7. 표하(䕯河) 전투

김유신소정방이 보낸 "어서 군사를 돌리라(速還)"는 뜻의 암호를 원효의 풀이로 확인하고 퇴각 중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비했다. 김유신은 양오(楊隩)에 진을 치고 김인문과 김양도·김군승 부자를 보내어 당나라 진영에 군량을 보냈고,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은 군량을 받자마자 바다를 통해 철수했다.[1] 이후 김유신은 표하(䕯河)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신라로 귀환했다.

5. 8. 당나라의 퇴각과 평가

김유신은 퇴각하면서 고구려 군의 기습에 대비해 여러 교란 작전을 펼치면서 밤중에 몰래 표하(임진강)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면서 김유신은 "나중에 건너는 놈은 베겠다!"는 명을 내렸고, 군사들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병사들이 추격해 와서 미처 건너지 못한 신라 병사들을 잡아 죽였다. 김유신은 다음날 고구려 병사를 뒤쫓아 격퇴하였다. 신라 군이 강가에서 쉬는데 고구려 군이 또 다시 강을 건너 공격해 왔지만, 김유신의 신라 군은 쇠뇌를 이용한 집단사격으로 고구려 군을 역습했고 소형 아달혜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으며 고구려 군을 만여 명이나 쓰러뜨려 패퇴시키고 무사히 신라로 귀환하였다.[1]

649년에 당 태종이 죽자, 당나라는 전략을 장기 소모전으로 전환하여 소규모 공격을 지속하며 고구려를 쇠약하게 만들었다.[2] 또한 고구려와 적대하는 신라책봉하고, 661년 백제의 전쟁에서 고구려의 동맹국인 백제를 멸망시켜 고구려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2] 같은 해, 당의 고종과 무측천은 소정방, 계필하력, 정명진 등에게 군사를 이끌게 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다.[2] 계필하력은 압록강에서 연개소문의 장남인 연남생을 물리쳤다.[2] 당군은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연개소문이 사수의 전투에서 방효태의 군대를 격파하고 방효태를 전사하게 만들었다.[2] 남은 당군도 보급이 이어지지 않는 상황 때문에 후퇴했다.[2]

5. 9. 누락된 전쟁 기록의 의문

제2차 고구려-당 전쟁은 고구려가 당나라를 물리쳤지만, 1차 전쟁과 달리 전쟁의 범위가 넓었다. 1차 전쟁은 주로 요동 지역에서 벌어졌지만, 2차 전쟁에서는 당군이 여섯 갈래로 침공했고, 후반에는 신라군도 북진하여 평양성에 합류했다.[1] 따라서 압록강 이남 지역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고, 평양성은 오랫동안 포위되었다. 신라군도 당나라의 요청으로 참전하여 고구려 남부 지역을 포함한 고구려 전 지역의 경제에 큰 피해를 입혔다.[1]

당나라는 백제 원정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어 다시 대규모 고구려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철륵이 봉기하여 철륵과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많은 병사와 군수물자를 잃는 등 피해가 커서 고구려 원정을 포기했다.[1]

649년 태종이 죽자 당나라는 장기 소모전으로 전략을 바꾸어 소규모 공격을 지속하며 고구려를 약화시키려 했다. 또한 고구려와 적대적인 신라를 책봉하고, 661년 백강 전투에서 고구려의 동맹국인 백제를 멸망시켜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1] 같은 해, 당나라 고종과 무측천은 소정방, 계필하력, 정명진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다. 계필하력은 압록강에서 연개소문의 장남인 연남생을 물리쳤다. 당군은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연개소문이 방효태의 군대를 격파하고 방효태를 전사하게 만들었다. 남은 당군도 보급 문제로 후퇴했다.[1]

6. 664년~666년 연개소문의 사망과 고구려의 분열

淵蓋蘇文|연개소문중국어666년에 죽자, 맏아들 淵男生|연남생중국어이 뒤를 이었으나, 동생인 淵男建|연남건중국어, 淵男産|연남산중국어과의 권력 다툼으로 내분이 발생하여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였다.[1] 이 기회를 틈타 당나라 군은 연남생을 앞세워 李勣|이적중국어 등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1] 연개소문의 동생 淵淨土|연정토중국어신라에 투항하였다.[1]

7. 667년~668년 제3차 고구려-당 전쟁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 막리지직을 계승했으나, 동생들인 연남건, 연남산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다. 연남생은 국내성으로 달아나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당 고종은 이를 기회로 삼아 고구려 침공을 개시했다.[43]

당 고종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계필하력을 요동도안무대사로 삼아 연남생을 지원하게 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보장왕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임명하여 군사권을 맡겼으나,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신라에 투항하는 등 내부 분열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와 신라가 고구려를 협공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조성했다. 결국 667년, 당나라는 이세적을 필두로 고구려 침공을 재개했다.

7. 1. 개전 초기: 신성(新城) 전투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연남생이 뒤를 이었으나, 동생인 연남건, 연남산과의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연남생은 당에 투항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당군은 연남생을 선두로 하여 이세적 등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1] 이듬해인 667년, 당군은 고구려의 요충지 신성을 함락시켰다.[1]

7. 2. 금산 전투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연남생이 뒤를 이었으나, 동생들인 연남건, 연남산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당 고종은 이 기회를 틈타 연남생을 앞세워 이세적 등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667년, 고구려군과 당군은 금산에서 격돌하였고, 이 전투에서 당군이 승리하였다.[1]

7. 3. 부여성(扶餘城) 전투

扶餘城|부여성중국어 전투는 668년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부여성을 기습 공격하여 점령한 사건이다. 이 승리로 당나라는 주변 40여 성의 항복을 받아냈다.[1]

7. 4. 압록강 방어선 구축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667년 11월 하순, 2000명의 정예병(현갑기)을 이끌고 부여성으로 진격했다. 병력이 적다는 부하 장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설인귀는 "병사는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신속하게 이동했다.

한편, 부여성에서는 10만에 가까운 고구려 군대를 신성으로 보내 잃어버린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고구려 군은 당나라 군대가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다. 겨울철 하얀 눈이 내린 곳에서 흰 옷을 입은 설인귀의 2000명 현갑기병이 기습하자, 고구려 군은 크게 혼란에 빠져 2만여 명의 병사를 잃고, 나머지 7만여 명은 부여성으로 돌아가 수비에 들어갔다.

결국 설인귀는 668년 2월 20일 부여성을 기습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크게 놀란 부여성 주변 40여 성이 모두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북쪽 지역의 예비 병력 자원을 잃게 되어 더욱 전력의 열세를 겪게 되었다. 요동 남쪽의 안시성, 건안성 등은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지만, 당나라는 바다를 건너 해상으로도 대규모 부대를 보내 대대적인 침공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7. 5. 당의 추가 파병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연남생이 뒤를 이었으나, 동생인 연남건, 연남산과의 내분으로 인해 연남생은 당에 투항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당군은 연남생을 앞세워 이적 등과 함께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신라에 투항하였다. 668년 당군에 의해 수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7. 6. 안시성의 반격

668년 봄, 당 고종유인궤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고, 학처준, 김인문 등이 보좌하게 하여 추가 병력을 파병하였다.[1] 유인궤의 부대가 안시성 부근에 도착했을 때, 안시성의 고구려군이 공격하여 당군을 격퇴했다.[1]

7. 7. 압록강 전선의 붕괴

666년 연개소문이 죽고 연남생이 뒤를 이었으나, 동생인 연남건, 연남산과의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연남생은 당에 투항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당군은 연남생을 앞세워 이세적 등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1]

추가로 파병된 유인궤가 이끄는 당나라 요동도부대는 압록강 전선에서 고착화되어 있는 이세적, 연남생 등의 당의 대군과 합류하려 빠르게 진군하였다. 유인궤, 학처준의 부대는 이세적의 부대에 합류하여 압록강을 도하한 것으로 보아 안시성 등 요동지역에서 격렬히 저항하는 고구려의 성들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하여 압록강 전선에서 고구려 군과 대치하던 이세적의 부대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2]

7. 8. 신라 군의 북진과 사천(蛇川) 전투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 연남생이 뒤를 이었으나, 동생인 연남건, 연남산과의 내분으로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당은 연남생을 앞세워 이세적 등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신라에 투항하였다. 668년 당군에 의해 수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멸망하였다.[1]

7. 9. 평양성 함락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 연남생이 뒤를 이었으나, 동생인 연남건, 연남산과의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연남생은 당에 투항하였다. 이 기회를 타서 당군은 연남생을 선두로 하여 이적 등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신라에 투항하였다. 668년 음력 9월 21일,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보장왕은 항복하였으나 연남건은 끝까지 저항하였다. 그러나 승려 신성이 성문을 열면서, 당군이 평양성을 함락시켰고,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8. 고구려의 멸망 이후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장남 연남생이 뒤를 이었으나 동생 연남건, 연남산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당나라에 투항하였다.[24][27][28]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신라에 투항하였다. 이러한 내분은 고구려를 약화시켰고,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668년,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연남생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공격했다.[13][29][24] 보장왕연남산을 보내 항복했으나, 연남건은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승려 신성의 배신으로 평양성이 함락되었고, 보장왕연남건은 포로로 잡혔다.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였다.[44]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20만 명이 넘는 고구려인을 장안으로 끌고 갔다.[30][24]

9. 평가

고구려-당 전쟁은 668년 고구려의 패배로 끝났지만, 이 전쟁은 단순한 패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고구려는 연씨 가문의 내분,[31] 국력 약화, 외교적 고립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멸망했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권력 다툼은 당나라에 침략의 빌미를 제공했다.[31]

666년 연개소문이 죽고 큰아들 연남생이 대를 이었으나 동생 연남건, 연남산과의 내분으로 인해 연남생은 당에 투항하였다.[31] 당은 이 기회를 타서 연남생을 선두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31]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신라에 투항하였다.[31] 668년에는 수도 평양성이 함락되며 고구려는 멸망하였다.[31]

그러나 고구려의 끈질긴 저항은 당나라의 동아시아 지배를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시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의 많은 성들은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했으며, 고연무, 검모잠, 고정문 등은 구국 운동을 벌이며 당나라에 저항했다. 이러한 저항은 훗날 발해 건국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성장하였다.

중국 사료 『책부원귀』는 당 태종이 “요동은 고래로 중국의 것”이라며 고구려 침략의 명분을 내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36] 하지만, 북한의 전영률은 고구려 유민들이 옛 땅에 발해를 건국했고, 조선을 처음으로 통일한 것은 신라가 아니라 고려라고 주장한다.[37][38]

결론적으로 고구려-당 전쟁은 한국사에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중요한 사례로 기억된다. 특히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인의 용맹함과 지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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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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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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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서적 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1 https://books.google[...] East AsiaE 2016-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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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11-06
[28] 서적 The History of Korea, 2nd Edition https://books.google[...] ABC-CLIO 2016-11-06
[29] 서적 2012
[30] 서적 2009
[31] 서적 2007
[32] 서적 1997
[33] 서적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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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백과사전 여당전쟁(麗唐戰爭) http://encykorea.aks[...] 2022-09-19
[36] 서적 7世紀以前の中国・朝鮮関係史 法政大学経済学部学会 2020-03-20
[37] 논문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현명한 령도 밑에 력사과학이 걸어온 자랑찬 40년 과학백과사전출판사
[38] 논문 북한의 역사과학 40년 한길사
[39] 서적 북한의 발해사 연구와 전망 http://contents.nahf[...] 東北アジア歴史財団 2009
[40] 문서 삼국사기
[41] 문서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것
[42] 웹사이트 고구려 유민 고질(高質) 묘지명 출토 http://media.daum.ne[...] 2007-03-19
[43] 웹사이트 고구려 유민 묘비명
[44] 웹사이트 고구려 멸망 부른 역적 '요묘' 묘지명 中서 발견 http://media.daum.ne[...] 2009-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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