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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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토 시대는 4세기 초 일본 긴키 지방을 중심으로 성립된 일본 최초의 통일 국가 시대를 일컫는다. 5세기에는 규슈 북부, 시코쿠, 간사이 지역까지 지배하며 세습제를 확립하고, 오키미(大王)를 중심으로 한 귀족 계급이 형성되었다. 7세기에는 쇼토쿠 태자가 한국과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수입하여 국내 체제를 혁신하고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다. 710년 헤이조쿄(平城京) 천도로 나라 시대로 이어진다. 이 시기에는 한반도와 빈번한 교류가 있었으며,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면서 사회와 문화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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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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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시대 | |
시대 명칭 | 야마토 시대 |
존속 기간 | 250년경 ~ 710년 |
이전 시대 | 야요이 시대 |
다음 시대 | 나라 시대 |
정치 체제 | |
주요 권력 | 야마토 정권 |
세부 시대 구분 | |
전기 | 고훈 시대 (250년경 ~ 538년) |
후기 | 아스카 시대 (538년 ~ 710년) |
문화 | |
주요 문화 특징 | 고분 문화, 불교 전래 및 발전 |
역사적 사건 | |
주요 사건 | 다이카 개신 (645년), 진신의 난 (672년) |
기타 | |
관련 항목 | 일본의 역사 일본사 일본의 고대사 고대 일본 |
2. 최초의 통일 국가
야마토 정권이 언제부터 주변 부족들을 제치고 일본을 대표하는 위치를 얻었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고고학 및 역사적 연구에 따르면 4세기 초에 긴키 지방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통일국가가 생겨났다. 야마토 정권은 점차 지배권을 넓혀 5세기에는 규슈 북부, 시코쿠, 간사이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때부터 세습제를 확립하여 국호를 야마토로 하고, 현재 일본 천황의 전신인 오키미(大王)가 군림하였다. 오키미 밑에는 귀족 계급이 형성되어 성(姓)을 부여받고 광대한 토지와 백성을 소유하였다. 6세기부터는 일본 내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점했다. 7세기 쇼토쿠 태자는 한국과 중국의 제도, 문물 등을 수입하여 국내의 제반 체제를 혁신하고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다. 이는 640~650년대의 다이카 개신의 기초가 되었다.[23]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 및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했다.
3. 대외 관계
고훈 시대에는 이주, 무역, 여행, 문화 교류를 통해 중국 문화 요소들이 일본 열도의 문화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고고학적 증거는 이 시대에 본토와 일본 사이에 접촉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한국의 초기 삼국 시대와 고훈 시대 묘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을 통해, 한반도를 경유하여 중국에서 일본으로 대규모 기술 및 문화 전파가 있었던 것으로 믿고 있으며, 백제 망명객들의 후대 유입 또한 그 증거로 보고 있다.
고고학 기록과 중국 고대 문헌인 송서는 일본 열도의 여러 부족과 족장들이 300년경(고훈 시대 후반)부터 더욱 중앙집권적이고 계층적인 정치 체제로 통합되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대규모 고분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왜와 중국 사이에는 접촉이 없었다고 나타낸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신비로운 세기"를 여러 지역 군주국들이 규슈와 혼슈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내전의 시기로 묘사한다.
아즈미족은 북부 규슈 출신의 무사 부족으로, 뛰어난 항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11] 이들은 야마토 조정과 일찍 접촉하여 해상 무역 연결을 제공했고, 바다에서 야마토 조정의 군사적, 외교적 접근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12] 일본 조정은 3세기부터 5세기까지 이들을 해군으로 고용했다.[13][14] 일부 전문가들은 아즈미족을 "[일본]의 신흥 제국 국가의 가장 오래된 해군력"으로 간주한다.[12] 일부 일본 역사가들은 이들이 오스트로네시아계 출신이며 규슈 남부에 살았던 하야토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15][12] 야마토 조정은 이들의 충성심에 의문을 품고 7세기 이전에 추방했다.[16]
26대 계체천황은 응신천황의 5대손인 에치젠의 오호도 왕이었다. 이 무렵, 한반도 남부에서는 신라가 세력을 확장하여 압박을 받은 가라(임나 여러 나라 중 하나)는 일본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신라와 손을 잡은 축자군 반위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위의 난이 진압되자 임나에는 오미게노가 파견되었으나, 오만하고 서투른 협상이 더 큰 혼란을 초래했다.
29대 흠명천황은 남대적 천황의 셋째 아들이다. 이 무렵에도 임나일본부를 통해 임나를 둘러싼 여러 가지 협상이 이루어졌다. 백제로부터의 불교 전래도 이러한 일환이다. 그러나 백제, 임나 여러 나라, 일본부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았고, 이를 이용한 신라는 562년에 임나를 멸망시켰다. 격분한 천황은 신라에 토벌군을 보냈으나 적의 계략에 걸려 퇴각했다. 천황은 임나 탈환을 유언으로 남기고 붕어했다.
30대 타다 천황은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나, 백제에서 전래된 불교를 둘러싸고 물부씨와 소가씨가 대립하는 사태가 되었다. 추한 다툼이 계속된 끝에 천황은 붕어 직전에 불교를 금지했다.
31대 다치바나 토요히 천황은 타다 천황의 이복동생이다. 이 천황은 전대 천황의 방침을 뒤집고 불교에 귀의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불과 1년 반이었다. 천황이 붕어하자 직접적인 무력 항쟁이 일어나 숭불파 소가씨가 승리하여 폐불파 물부씨는 멸망했다(정미의 난). 이후 약 반세기 동안 소가씨가 대신으로서 권력을 잡았다.
32대 도메세베 황자는 타다 천황과 다치바나 토요히 천황의 이복동생이다. 그러나 소가 마코토와 불화하게 된 천황은 592년에 암살당했다. 신하에게 직접 살해당한 유일한 천황이다. 그러나 특별한 혼란 없이 소가 마코토는 타다 천황의 황후였던 누카타베 황녀를 33대 천황으로 추대했다. 일본 최초의 여제인 타키야히메 천황이다.
3. 1. 한반도와의 관계
일본서기에 따르면, 왜국 지배층은 대외 교류에서 신라의 통제를 받는 상황을 불편하게 여겼다. 야마토국의 역대 왕들은 ‘신라를 치고 임나를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24] 신라는 6세기 후반 가야 지역을 점령한 바 있다.[24]
이 시대에 백제는 일본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아신왕은 397년 아들 전지를 일본에 파견했고, 신라 실성왕은 402년 아들 미사헌을 일본에 파견하여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4] [5] 425년과 478년 야마토와 중국 본토 및 유송 왕조와의 관계는 중국과 특히 백제를 포함한 한국 반도의 삼국이 가진 해상 지식과 외교적 관계에 의해 가능했다.[8]
신선쇼지로쿠에 따르면, 백제 출신 120개 씨족, 고구려 출신 48개 씨족, 신라 출신 17개 씨족, 가야 출신 9개 씨족이 있었다.[9]
제14대 천황인 타라시나카츠히코(중애천황)는 일본무사의 아들이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구마소 정벌을 실시하였으나 도중에 병사하였다. 천황의 유지를 이은 황후인 오키나가타라시히메(신공황후)는 구마소를 완전히 복속시키고, 이어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도 침공하였다. 한반도 남부의 백제, 신라는 일본에 조공하게 되었고, 고구려의 광개토왕비에도 "왜(일본)가 백제·가라·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만들었다"라고 적혀 있다.
3. 2. 중국과의 관계
야마토 시대의 일본은 중국 문화 수용에 적극적이었다.[6] 425년과 478년 야마토 정권은 중국 남조의 유송과 외교 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백제를 포함한 한반도 삼국의 해상 지식과 외교 관계 덕분이었다.[8]
인덕천황은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 봉제 기술자를 요청하였는데, 이는 왜왕 "찬"의 조공으로 추정된다. 웅략천황 역시 중국에 두 차례 사신을 보내 봉제 기술자를 구하였으며, 이는 왜왕 "무"의 조공으로 비정된다.
이 시기에 유교와 한자가 전래되었는데, 왕인이 그 예이다.[20]
4. 야마토 시대의 사회와 문화
야마토 시대는 조몬 시대에서 야요이 시대를 거쳐 고분 시대로 이어지는 문화적 변천을 겪었다. 1000년 전 일본 열도에는 조몬인들이 살고 있었고, 야마토 시대가 시작되기 수세기 전, 동북아시아와 중국 문명의 요소들이 여러 차례의 이주를 통해 일본 열도로 유입되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인 『고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왕자 아메노히보코가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 천황을 섬겼다고 한다.[1] 고고학적 증거는 신석기 시대 이전부터 중국 본토, 한국, 일본 간의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적어도 고분 시대에도 이러한 교류가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야마토 정권의 시작 시점과 주변 부족들을 제치고 일본을 대표하는 위치를 얻게 된 시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고고학 및 역사 연구에 따르면, 4세기 초 긴키(近畿) 지방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통일국가가 생겨났고, 점차 지배권을 넓혀 5세기에는 규슈 북부, 시코쿠, 간사이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때부터 세습제를 확립하여 국호를 야마토로 하고, 현재 일본 천황의 전신인 오키미(大王)가 군림하였다. 오키미 밑에는 귀족 계급이 형성되어 성(姓)을 부여받고 광대한 토지와 백성을 소유하였다. 6세기부터는 일본 내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점했다.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에 의해 고대 국가의 기초가 마련된 시대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에서는 초대 신무 천황(神武天皇)에 의한 건국 경위가 이야기된다. 구체적인 국가 사업은 10대 숭신 천황(崇神天皇)의 사도 장군(四道将軍) 파견, 과세 시작, 수진 천황(垂仁天皇)의 관개(灌漑) 사업, 경행 천황(景行天皇)과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日本武尊)의 규슈와 간토 원정, 성무 천황(成務天皇)의 국조(国造) 제정, 징코 황후(神功皇后)의 삼한 정벌(三韓征伐) 등 국가 발전이 이루어졌다.
오진 천황(応神天皇) 치세에는 많은 귀화인이 조정을 방문했고 유교(儒教)와 한자(漢字)가 전래되어 일본 열도(日本列島) 외부와의 교류가 깊어졌다. 린토쿠 천황(仁徳天皇)은 과세를 3년간 중단한 후 대규모 관개 사업을 실시했다. 유랴쿠 천황(雄略天皇)은 전제적인 통치로 한반도 간섭과 중국 (남조)에 대한 사신 파견을 활발하게 했다. 그러나 유랴쿠 천황 사후 천황(대왕)의 권력은 쇠퇴하고 오오토모 씨(大伴氏), 모노노베 씨(物部氏), 소가 씨(蘇我氏) 등의 호족이 차례로 실권을 장악했다.
7세기 쇼토쿠 태자는 한국과 중국의 제도, 문물 등을 수입하여 국내 제반 체제를 혁신하고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다. 이는 640~650년대의 다이카 개신의 기초가 되었다.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이후는 아스카 시대(飛鳥時代)라고도 한다. 중국으로부터의 외압이 강해지자 중앙 집권화(中央集権化) 경향이 높아지고 쇼토쿠 태자의 법률(17조 헌법(十七条憲法))·관제 개혁(관위 십이계(冠位十二階))을 거쳐 다이카 개신(645년) 후, 천황 중심의 정치가 법 체제적으로 확립되었다. 견수사(遣隋使)·견당사(遣唐使) 파견으로 농업·제철·건축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기술이 발전했고, 불교 미술이 발달했다.
오쓰미의 변(乙巳の変), 백촌강 전투(白村江の戦い), 진신의 난(壬申の乱) 등의 혼란을 거쳐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은 개혁에 나섰다. 씨족 제도(氏姓制度)를 바꾸고 공지 공민제(公地公民制)와 통일적인 세제(조용조(租庸調) 제도 등)를 시행하여 지방 행정 기구를 개편, 중앙 집권화를 꾀하며 율령 제도(律令制) 도입을 도모했다. 701년(701年)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이 제정되었다.
6세기(6世紀) 전반에는 불교(仏教)가 전래되었다. (일본의 불교 참조)
4. 1. 야요이 문화
벼농사를 짓던 정치적으로 분열된 야요이 문화는 더욱 중앙집권적이고, 가부장적이며, 군국주의적인 고분 시대의 새로운 일본 문화로 발전했거나, 야마토 사회에 지배당하고 결국 멸망했다.[2] 이 무렵 일본어족은 류큐 제도의 오키나와와 같은 지역으로도 퍼져 나갔다. 류큐어와 일본어는 이 시기에 갈라진 것으로 보인다.[3]4. 2. 고분 시대
古墳時代|고훈 시대일본어는 기원후 250년경부터 538년까지 일본 역사의 한 시대이다. '고훈(古墳)'은 이 시대의 무덤인 고분을 의미하는 일본어이다.고분 시대에는 벼농사를 짓던 정치적으로 분열된 야요이 문화가 중앙집권적이고, 가부장적이며, 군국주의적인 사회로 발전했다. 이 시기에는 지배 계층의 권력을 상징하는 대규모 고분이 축조되었다.
고분 시대 동안, 이주와 무역, 여행, 문화 교류를 통해 중국 문화의 요소들이 일본 열도의 문화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고고학적 증거는 이 시대에 본토와 일본 사이의 접촉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한국의 초기 삼국 시대와 고훈 시대의 묘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을 통해, 한반도를 경유하여 중국에서 일본으로 대규모 기술 및 문화 전파가 있었던 것으로 믿고 있으며, 백제 망명객들의 후대 유입 또한 그 증거로 보고 있다.[4] [5] 특히,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아신왕은 397년 아들 전지를, 신라 실성왕은 402년 아들 미사흔을 일본에 파견하여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고고학 기록과 중국 고대 문헌인 송서는 일본 열도의 여러 부족과 족장들이 더욱 중앙집권적이고 계층적인 정치 체제로 통합되기 시작한 것은 300년경(고훈 시대 후반)부터이며, 이때부터 대규모 고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나타낸다.
고훈 시대의 일본은 중국 문화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여러 종류의 물품이 수입되었는데, 중국 서적이 가장 중요한 무역품 중 하나였다. 이 시대에 도입된 중국 철학은 일본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식된 청동 거울(신주경)이 중국에서 수입되었고, 6세기 후반까지 한국 반도에서 철을 수입했다.
5세기 후반에 등장한 야마토 정치체는 그들의 의존민을 포함한 강력한 대귀족이나 확대가족으로 구별되었다. 고훈 시대의 일본 문화는 서구 학자들에 의해 이 지역의 수장이 고훈 시대 말기에 덴노가문이 되었기 때문에 야마토 시대로 불리기도 한다.
4. 2. 1. 고분

고분(古墳, "옛 무덤")은 3세기부터 7세기까지 지배 계급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무덤이다. 고분 시대는 당시 풍부한 장례 의식과 관련된 독특한 흙무덤인 고분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이 무덤에는 큰 돌로 된 묘실이 있었으며, 어떤 것들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고분은 다양한 모양으로 존재하며, 원형과 사각형이 가장 간단한 형태이다. 독특한 양식으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zenpō kōen fun'')이 있는데, 앞쪽은 사각형이고 뒤쪽은 원형이다. 많은 고분은 자연 언덕이었으며, 최종 형태로 조각되었을 수도 있다. 고분의 크기는 수 미터에서 400m가 넘는 길이까지 다양하다.
후기 고분 시대에는 지배 엘리트가 원래 사용하던 독특한 묘실이 일반인을 위해서도 건설되었다.
가장 큰 고분은 오진 천황(応神天皇 ''Ōjin Tennō'')과 닌토쿠 천황(仁徳天皇 ''Nintoku Tennō'')과 같은 천황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고분은 또한 돌 묘실의 입구가 수직(縦穴 ''tate-ana'')인지 수평(横穴 ''yoko-ana'')인지에 따라 분류된다.
4. 2. 2. 이주민
한반도와 중국에서 온 이주민들은 일본에 선진 문화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 425년과 478년 야마토와 중국 본토 및 유송 왕조와의 관계는 중국과 특히 백제를 포함한 한반도의 삼국이 가진 해상 지식과 외교적 관계에 의해 가능했다.[8]815년 야마토 조정은 귀족 명부인 ''신선쇼지로쿠''를 공식 편찬했는데, 이 명부에는 기나이 지역 1182개 씨족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으며, 이 중 다수가 한반도와 중국 출신 씨족이었다.[9] 신선쇼지로쿠에 따르면, 백제 출신 씨족은 120개, 고구려 출신 씨족은 48개, 신라 출신 씨족은 17개, 가야 출신 씨족은 9개였으며, 나머지 174개 씨족은 "한(漢)"(고대 한국인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10]
아즈미족은 규슈 북부 출신의 무사 부족으로,[11] 뛰어난 항해 기술을 바탕으로 야마토 조정과 일찍부터 접촉하여 해상 무역을 담당하고, 야마토 조정의 군사적, 외교적 해상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12]
4. 2. 3. 사회
야마토 시대의 사회는 강력한 대귀족(씨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각 씨족은 족장이 이끌었는데, 이들은 씨족의 장기적인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 씨족의 ''카미''에게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는 종교적 역할도 수행했다.[21] 씨족 구성원들은 귀족이었으며, 야마토 조정을 통제한 왕족 계열이 그 정점에 있었다.4. 3. 아스카 시대

'''아스카 시대(飛鳥時代)'''는 일반적으로 538년부터 710년까지로 정의된다. 불교의 전래는 일본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고 야마토 정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야마토 왕권은 아스카 시대에 걸쳐 크게 발전했는데, 이 시대의 이름은 현재의 나라 남쪽에 위치한 아스카 지역을 따서 지어졌다. 이 지역에는 이 시대에 건설된 여러 임시 수도 유적이 남아 있다. 아스카 시대는 예술, 사회, 정치적으로 중요한 변혁이 일어난 시대이며, 그 기원은 후기 고분 시대에 있다.
제33대 천황인 스이코 천황은 593년에 쇼토쿠 태자를 황태자로 세우고 섭정으로 삼았다. 쇼토쿠 태자는 603년에 관위십이계, 604년에 십칠조헌법을 제정하고 불교 흥륭에 힘써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 구축을 추진했다. (아스카 문화) 607년에는 오노노이모코 등을 수나라에 파견하여 황제에게 상표문(국서)을 보냈다. 620년에는 소가노 우마코와 함께 「천황기·국기, 신련반조국조 백팔십부 병공민등본기」를 기록했다.
제34대 천황인 조메이 천황이 즉위할 때 야마시로오에 왕과 황위 다툼이 일어날 뻔했다. 같은 무렵 소가노 우마코의 아들인 소가노 에미시, 손자인 소가노 이루카로 소가씨의 대가 이어졌다. 최초의 견당사가 파견된 것은 이 무렵이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온 사신인 고표인은 매우 무례하여 천황을 알현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4. 3. 1. 불교의 도입

일본서기(Nihon Shoki)에 따르면, 대승불교(大乗仏教, Daijō Bukkyō)는 552년에 백제를 통해 야마토 조정에 공식적으로 전래되었지만,[4] 쇼토쿠 태자(聖徳太子, Jōgū Shōtoku Hōō Teisetsu)의 전기와 강고지(岡寺, Gangōji Garan Engi)의 기록을 바탕으로 538년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초기 불교 수용은 더뎠다. 일본서기는 킨메이 천황이 이 새로운 외래 종교 수용에 대해 논의했을 때, 소가 이나메는 찬성했지만, 모노노베노 오코시와 나카토미노 가마코(후에 후지와라 씨족)는 종교적 이유보다는 민족주의적 감정과 국수주의 때문에 반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5]
아스카 시대가 시작되면서, 인간 삶의 무상함을 강조하는 새로운 불교 사상 때문에 황실과 엘리트 계층이 정교한 고분 무덤을 사용하는 관습이 사라졌다. 그러나 일반 백성과 외곽 지역 엘리트들은 7세기 후반까지 고분을 계속 사용했으며, 더 단순하지만 독특한 무덤은 그 이후 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불교는 모노노베 모리야가 587년 시기산 전투에서 패배하고 모노노베 씨족이 멸망한 후에야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스이코 천황은 모든 일본인에게 불교 수용을 공개적으로 장려했다. 607년에는 경전 사본을 얻기 위해 수나라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4. 3. 2. 토리 양식
토리 양식은 중국 이민자 시바 탓토의 손자인 조각가 구라쓰쿠리 토리에서 유래하였다. 토리 양식은 중국 북위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1] 아스카와 나라 시대의 예술은 당시 중국과 한국의 예술과 유사하다.[1] 그 예로 토리 불사의 석가삼존상이 있는데, 이는 6세기 전반에서 중반의 중국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1]5. 야마토 조정
야마토 정권은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에 걸쳐 나라의 야마토 평원 남부에 위치했다.[23] 야마토 조정은 규슈와 혼슈의 씨족들에게 권력을 행사하여 씨족장들에게 세습되는 작위를 수여했다. 야마토 지배자들이 씨족들을 진압하고 농지를 획득하면서 야마토라는 이름은 일본 전체와 동의어가 되었다.
5세기에는 규슈 북부, 시코쿠, 간사이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이때부터 세습제를 확립해 국호를 야마토로 하고, 현재 일본 천황의 전신인 오키미(大王)가 군림하였다. 오키미 밑에는 귀족 계급이 형성되어 성(姓)을 부여받고 광대한 토지와 백성을 소유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에 따르면, 초대 신무 천황(神武天皇)에 의한 건국 이후, 숭신 천황(崇神天皇)은 사도 장군(四道将軍) 파견과 과세 시작, 수진 천황(垂仁天皇)은 관개(灌漑) 사업, 경행 천황(景行天皇)과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日本武尊)는 규슈와 간토 원정, 성무 천황(成務天皇)은 국조(国造) 제정, 징코 황후(神功皇后)는 삼한 정벌(三韓征伐) 등을 통해 국가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오진 천황(応神天皇) 치세에는 많은 귀화인이 조정을 방문했고 유교(儒教)와 한자(漢字)가 전래되어 일본 열도(日本列島)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린토쿠 천황(仁徳天皇)은 3년간 과세를 중단하고 대규모 관개 사업을 실시하는 선정을 베풀었다. 린토쿠 천황의 손자인 유랴쿠 천황(雄略天皇)은 전제적인 통치를 통해 한반도에 간섭하고 중국(남조(南朝))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러나 유랴쿠 천황 사후 천황(대왕(大王))의 권력이 쇠퇴하고 오오토모 씨(大伴氏), 모노노베 씨(物部氏), 소가 씨(蘇我氏) 등의 호족들이 번갈아 실권을 장악했다. 6세기(6世紀) 전반에는 불교(仏教)가 전래되었다.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이후의 시대는 아스카 시대(飛鳥時代)라고도 불린다. 쇼토쿠 태자(聖徳太子)는 법률(17조 헌법(十七条憲法))과 관제 개혁(관위 십이계(冠位十二階))을 통해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또한 견수사(遣隋使)·견당사(遣唐使) 파견을 통해 농업, 제철, 건축 등 여러 분야의 기술이 발전했고, 특히 불교 미술이 발달했다.
5. 1. 중앙 집권화
야마토 정권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 중앙 행정부와 종속 씨족장들이 참석하는 궁정을 개발하였다. 7세기 중반에는 농지가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는 공유지로 성장하면서 중앙 집권화가 진전되었다.[23] 고키시치도 제도의 기본 행정 단위는 현(縣)이었다.[23] 사회는 직업 집단으로 조직되었는데, 대부분 농민이었고, 그 외에 어부, 직조공, 도공, 장인, 무기 제작자, 의례 전문가들이 있었다.[23]5. 2. 율령 제도 도입
오쓰미의 변(乙巳の変), 백촌강 전투(白村江の戦い), 진신의 난(壬申の乱) 등 여러 혼란을 겪은 후,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은 개혁에 착수했다. 기존의 씨족 제도(氏姓制度)를 개혁하고 공지 공민제(公地公民制)를 시행했으며, 통일된 조용조(租庸調) 제도와 같은 세제를 도입했다. 또한 지방 행정 기구를 개편하여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는 등 율령 제도(律令制) 도입을 시도했다. 701년(701年)에는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을 제정하여 율령 제도(律令制)의 기틀을 마련했다. 710년(710年) 헤이조쿄(平城京) 천도를 기점으로 야마토 시대는 막을 내리고 율령 국가(律令国家) 시대가 시작되었다.[23] 율령 제도는 10세기 초에 붕괴되었으나, 명목상으로는 19세기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유지되었다.6. 주요 사건
- 538년: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다.[23]
- 593년: 쇼토쿠 태자가 섭정이 되어 불교를 장려하였다.
- 600년: 쇼토쿠 태자가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 604년: 쇼토쿠 태자가 십칠조헌법을 발표하였다.
- 607년: 호류지가 건립되었다.
- 645년: 다이카 개신 - 소가 씨가 몰락하고 황권이 강화되었으며, 중앙 집권화가 추진되었다.
- 663년: 백강 전투 - 백제 부흥이 실패하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 672년: 임신의 난 - 덴무 천황이 즉위하고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되었다.
- 701년: 다이호 율령이 제정되었다.
- 710년: 헤이조쿄 천도, 나라 시대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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