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고구려-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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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고구려-당 전쟁은 661년부터 662년까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한 전쟁이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규모 해상 침공 작전을 감행했으나,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과 철륵의 반란으로 인한 당나라군의 고립으로 실패했다. 고구려는 칠중성과 북한산성 전투에서 신라와 말갈의 연합군을 격퇴하고, 당나라의 대규모 침공을 막아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당나라는 고구려 원정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이 전쟁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이후 고구려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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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1년 중국 - 고구려-당 전쟁
고구려-당 전쟁은 7세기 중후반 당나라가 동아시아 강자로 부상하며 고구려에 강경 정책을 펼치고, 연개소문 집권 후 내부 혼란과 당-신라 동맹이 형성된 배경 속에서 645년부터 668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쟁으로, 고구려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내부 분열로 멸망했다.
| 제2차 고구려-당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분쟁 | 제2차 고구려-당 전쟁 |
| 전체 | 고구려-당 전쟁 |
| 날짜 | 660년 ~ 662년 |
| 장소 | 랴오둥반도 일대 및 한반도 중·북부 |
| 결과 | 고구려의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당나라 동돌궐, 신라 |
| 교전국 2 | 고구려 말갈 |
| 지휘관 | |
| 지휘관 1 | |
| 지휘관 2 | |
| 병력 규모 | |
| 사상자 규모 | |
| 기타 | |
2. 배경
앞서 당나라는 설연타를 멸망시켜서 사실상 고구려를 제외한 주변국을 모두 제압하였다. 또한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의 대군이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침입,멸망시킴으로써 고구려는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것은 1차 고구려-당 전쟁 때와 달리 고구려 남쪽에서는 신라군 또한 당나라군을 도와 고구려를 공격함으로써 고구려는 남과 북 양쪽으로 공격을 받게되는 더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당나라 역시 전쟁 실패 이후 내부 정쟁으로 장손무기를 비롯한 관롱집단이 측천무후에게 숙청당하는 후폭풍이 있었다. 그런60년 백제의 멸망 시 당나라는 13만이나 되는 대군을 해상을 통해 공격하여 성공한 자신감으로 2차 고구려-당 전쟁 때는 대대적인 해상으로의 침공작전을 기획하게 된다.
661년(보장왕 20년) 5월, 고구려는 백제 부흥군 지원을 위해 장군 뇌음신과 말갈의 장군 생해(生偕)의 군대와 연합하여 신라의 칠중성을 침공하였다. 칠중성은 고구려가 수차례 신라를 침공했던 신라 북부지역의 요지였다. 20여일간 신라군은 맹렬히 저항했다. 마침내 함락이 용이하지 않아 고구려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나려 하였으나 칠중성 내부의 비삽이라는 관리의 배신으로 칠중성은 함락되고, 성주였던 필부와 그의 군사들은 전사하고 만다. 이 소식은 신라 서라벌까지 전달되었고 무열왕은 크게 슬퍼하여 그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뇌음신과 생해의 고구려,말갈군은 군사를 옮겨 북한산성을 포위하여 공격을 시작한다. 고구려군은 열흘이 지나도록 포위망을 풀지 않고, 포차(抛車)를 벌려놓고 돌을 던지며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북한산성의 성주(城主)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陁川)은 군사를 지휘하여 20여 일간을 견뎠으나 군량과 힘이 다하여 신라군은 위태롭게 되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전투 당시 장마철로 진입하던 때였고, 삼국사기에는 별안간 큰 별이 고구려 군진에 떨어지고 번개와 벼락이 치며 큰비를 퍼부으니, 고구려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칠중성, 북한산성 전투는 중국 측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삼국사기에만 등장한다. 661년은 이미 백제가 망한 직후이므로 백제 부흥군을 지원 또는 백제 멸망에 따른 신라에 대한 견제를 위해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 것으로 추측된다. 661년 시점에도 말갈은 고구려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2. 1.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의 고립
660년 음력 6월,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나라 군대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침략하였다.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백제는 결국 멸망하였다. 661년, 고구려는 뇌음신과 생해를 보내 신라의 술천성과 북한산성을 공격했으나, 동타천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백제가 멸망하면서 고구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로 진격하였다. 당 고종은 4만 4천 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 변방을 공격했다. 그러나 왜국의 지원을 받은 백제 부흥군이 나·당 연합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신라군이 남진하였고, 고구려는 이 틈을 타 서북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당나라군은 그해 음력 4월 다시 평양을 향해 진군했지만 패배하였고,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면서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중지하였다.
2. 2. 고구려의 신라 침공: 칠중성, 북한산성 전투
661년(보장왕 20년) 5월, 고구려는 백제 부흥군 지원을 위해 장군 뇌음신과 말갈의 장군 생해(生偕)의 군대와 연합하여 신라의 칠중성을 침공하였다. 칠중성은 고구려가 수차례 신라를 침공했던 신라 북부지역의 요지였다. 20여일간 신라군은 맹렬히 저항했다. 마침내 함락이 용이하지 않아 고구려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나려 하였으나 칠중성 내부의 비삽이라는 관리의 배신으로 칠중성은 함락되고, 성주였던 필부와 그의 군사들은 전사하고 만다. 이 소식은 신라 서라벌까지 전달되었고 무열왕은 크게 슬퍼하여 그의 관등을 추증하였다.뇌음신과 생해의 고구려,말갈군은 군사를 옮겨 북한산성을 포위하여 공격을 시작한다. 고구려군은 열흘이 지나도록 포위망을 풀지 않고, 포차(抛車)를 벌려놓고 돌을 던지며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북한산성의 성주(城主)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陁川)은 군사를 지휘하여 20여 일간을 견뎠으나 군량과 힘이 다하여 신라군은 위태롭게 되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전투 당시 장마철로 진입하던 때였고, 삼국사기에는 별안간 큰 별이 고구려 군진에 떨어지고 번개와 벼락이 치며 큰비를 퍼부으니, 고구려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칠중성, 북한산성 전투는 중국 측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삼국사기에만 등장한다. 661년은 이미 백제가 망한 직후이므로 백제 부흥군을 지원 또는 백제 멸망에 따른 신라에 대한 견제를 위해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 것으로 추측된다. 661년 시점에도 말갈은 고구려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3. 전쟁의 전개
3. 1. 당의 대규모 해상 침공
661년 음력 8월, 당나라는 총 44만의 대군을 6개 부대로 편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 침공은 수 양제나 당 태종의 1차 침공 때와는 달리, 주력군이 해상을 통해 고구려에 상륙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과거에는 육상으로 요하를 건너 요동으로 진공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었으나, 당나라는 해상을 통한 대규모 침공을 기획했다.소사업의 부여도행군과 정명진의 누방도행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 지역으로 침공하여 고구려의 주의를 끄는 양동작전을 펼쳤다. 반면,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은 해상을 통해 침공했다.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은 압록강 하구를 점령하여 고구려 북부와 남부를 단절시키려 했고, 나머지 3개 부대는 평양성의 대동강 하구에 상륙하여 평양성을 함락시키려 했다. 특히 소정방, 방효태, 임아상의 부대는 660년 백제 침공 때 해상 침공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주력 부대였다.
당나라의 이러한 해상 침공 작전은 이후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 2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으로 재연되었다. 소정방 등은 백제 침공 때와 같은 방식으로 해안 방어군을 격파하고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킨 경험이 있었다. 이번 침공은 백제 정벌 때보다 3배가 넘는 규모였다. 고구려의 주력군을 요동 지역에 묶어두기 위해 정명진을 파견하여 요동과 부여 방면으로도 침공하였다.
3. 2. 개전 초기: 대동강, 압록강 전투
가을 8월,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등 당나라 대군은 패수 하류에 상륙하였다. 이들은 1년 전 백제 침공 때 기벌포에 상륙하여 백제군을 물리치고 사비성을 함락시킨 경험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당군의 기습에 고구려 군사들은 크게 격파당하고 마읍산을 탈취당했으며, 당군은 얼마 멀지 않은 평양성까지 도달하여 포위하였다.9월,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은 압록강 하류로 상륙하였다. 연개소문은 아들 연남생에게 정예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661년 겨울이 빨리 찾아와 압록강이 얼자, 계필하력은 군사를 이끌고 얼음 위로 강을 건너 기습 공격하였다. 방심하던 고구려 군사는 패주하였고, 계필하력은 수십 리를 추격하며 고구려 군사 3만 명을 죽였다. 남은 군사는 모두 항복하였고, 연남생은 간신히 자기 몸만 피하여 달아났다.
이로써 개전 초기 당의 주력 대군은 대동강에 상륙하여 평양성을 포위하고, 또 다른 정예 주력 부대는 압록강 하류를 방어하던 고구려 정예부대를 섬멸하였다. 고구려는 압록강 이북 요동 지역 및 국내성과 압록강 이남의 수도 평양이 단절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는 마치 한니발의 카르타고 주력 부대와 대치하던 로마군이 스키피오의 지휘 하에 카르타고의 수도를 직공했던 상황과 비슷했다. 전쟁은 당나라가 기획했던 방향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철옹성이었던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외부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고립된 상황이 되어 큰 위기를 맞았다.
3. 3. 철륵의 반란과 고립된 당의 대군
661년 10월, 철륵 회흘부 추장 비속독의 대규모 봉기로 당나라 수도 장안이 위급해졌다. 당나라는 정인태를 대총관으로 철륵도행군을 편성하고, 고구려에 출병했던 소사업의 부대를 회군시켜 선악도행군으로 편성, 설인귀, 손인사, 유심례 등을 부총관으로 참전시켰다. 그러나 정인태의 철륵도행군은 전멸했고,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마저 철륵 전선에 투입되며 당은 위기에 빠졌다.661년 겨울, 갑작스러운 철륵의 반란으로 고구려에 출정했던 당나라 부대 상당수가 회군하면서, 평양성을 포위한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 등은 적국 한가운데 고립되었다. 압록강 하구를 점령했던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 철수는 고립을 심화시켰다. 이는 마치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독일군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당군은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고, 소정방은 신라에 식량 및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660년 백제 침공 때와 달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견고했고, 장기전과 이른 추위는 당군을 더욱 힘들게 했다. 계필하력의 철수로 요동 지역과의 단절이 해제되면서 북쪽의 정예 고구려군이 평양성으로 몰려올 수 있었고, 당군은 전멸 위기에 놓였다.
3. 4. 사수 전투
661년 12월, 몹시 추운 날씨로 패수(浿水)가 얼어붙자, 당나라 군대는 운차(雲車)와 충팽(衝)을 앞세워 공격해왔다. 고구려군은 총반격으로 당군을 크게 물리치고 두 진지를 빼앗았다. 당군은 추가 공격을 계획했으나, 갑작스러운 철륵의 반란과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 철수로 인해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다.662년 2월, 연개소문의 지휘 아래 고구려군은 각지의 부대를 모아 고립된 당군에 총공격을 가했다. 특히, 방효태가 이끄는 옥저도행군은 추위에 약한 중국 남부 영남 지역 부대로 구성되어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고구려군은 임아상의 패강도행군과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을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패강도행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대총관 임아상은 행방불명되었다. 방효태는 부하들의 탈출 권유를 거절하고, 13명의 아들과 함께 사수에서 전사하였다.
3. 5. 신라군의 보급과 당군의 대탈출
신라군은 당군의 고구려 협공 요청에 따라 평양으로 향하던 중, 소정방으로부터 군량 수송 요청을 받았다. 김유신은 어려운 임무를 자청하여 661년 12월 10일, 부장군 김인문, 김진복(金眞服), 김양도 등과 함께 쌀 4천 섬과 조(租) 22,250섬을 싣고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갔다.662년 2월 16일(음력 정월 23일), 칠중하(七重河)를 건넌 김유신은 고구려군의 방어를 피해 험한 길을 택했다. 도중에 적병과 교전하며 장새(獐塞)에 이르렀을 때, 혹한으로 병사들이 지쳐 쓰러지자 김유신은 웃옷을 벗고 직접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병사들을 이끌었다. 이후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구근(仇近) 등 15명을 평양에 보내 소정방에게 신라군의 도착을 알렸다. 소정방은 난새와 송아지를 그린 그림을 보내 신라군에게 “어서 군사를 돌리라(速還)”는 암호를 보냈고, 원효가 이를 해독했다.
양오(楊隩)에 진을 친 김유신은 김인문과 김양도, 김군승 부자를 보내 당군에 군량을 전달했고,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은 군량을 받자마자 바다를 통해 철수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군에 포위된 연합군이 덩케르크에서 다이나모 작전을 통해 철수한 것과 유사했다.
3. 6. 표하 전투
김유신은 퇴각하는 길에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비해 여러 교란 작전을 펼치면서 밤중에 몰래 표하(瓢河, 임진강)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기에 이르러 김유신은 “나중에 건너는 놈은 베겠다!”는 명을 내렸고, 군사들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병사들이 추격해 와서 미처 건너지 못한 신라 병사들을 잡아 죽였다. 김유신은 다음날 고구려 병사를 뒤쫓아 격퇴하였다. 신라군이 강나루를 건너 강가에서 쉬는데 고구려군이 또 다시 강을 건너 공격 해 왔다. 하지만 노련한 백전노장 김유신의 신라군은 이미 방비가 되어 있었다. 신라군은 이번에 쇠뇌를 이용한 집단사격으로 고구려군을 역습했고 추격전을 폏쳤던 고구려 장수였던 소형 아달혜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으며 고구려군을 만여 명이나 쓰러뜨려 패퇴시키고 무사히 신라로 귀환하였다.4. 전쟁의 결과 및 영향
4. 1. 고구려의 피해
4. 2. 당나라의 퇴각과 평가
고구려는 제2차 고구려-당 전쟁에서도 당나라를 물리쳤다. 그러나 1차 고구려-당 전쟁 때와는 달리, 2차 전쟁에서는 당군이 6갈래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였고, 후반에는 신라군도 북진하여 평양성에 합류하였다.이에 따라 요동 지역뿐만 아니라 그 후방인 압록강 이남 지역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다. 평양성은 오랫동안 포위되었고,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신라도 침공군을 보내 북진하여 평양성에 합류하면서 고구려 남부 지역을 포함, 고구려 전 지역의 경제 활동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한편, 당나라는 백제 원정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어 다시 대규모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철륵이 봉기하여 철륵과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많은 장병과 군수물자를 잃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어, 고구려 원정을 사실상 당분간 포기하게 되었다.
4. 3. 누락된 전쟁 기록의 의문
제2차 고구려-당 전쟁에 대한 기록은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때보다 더 부족하며,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당나라는 고구려-수 전쟁과 1차 고구려-당 전쟁 때처럼 6개 방면 44만 군의 대규모 출병을 했지만, 중국 측 사서에는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압록강 유역에서 연남생의 부대를 이기고 철군한 것,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이 대동강 유역에 상륙하여 평양성을 포위한 것, 사수 대첩에서 방효태와 그의 아들들이 전사한 기록 정도만 간략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소사업의 부여도행군과 정명진의 누방도행군의 요동 지역 전투 기록 및 행적, 그리고 해상으로 침공했던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의 상세한 이동 및 전투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전황 및 전쟁의 추이를 알 수 없다.5. 2차 고구려-당 전쟁의 현대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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