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쓰마번 지사 숙청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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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쓰마번 지사 숙청 사건은 1862년, 사쓰마번의 지사들이 공무합체를 추구하는 시마즈 히사미쓰에 반발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히사미쓰는 조정의 지사 처단 명령에 따라, 급진적인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데라다야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히사미쓰는 조정의 신뢰를 얻어 분큐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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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큐 개혁은 막부 말기 분큐 시기에 막부의 권위 회복과 체제 유지를 위해 추진된 정치 개혁으로, 존왕양이 운동 격화, 장군 후계자 문제, 시마즈 히사미쓰의 주도, 도자마 다이묘의 압력, 조정과의 권력 다툼 속에서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어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막부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 시마즈 히사미쓰 - 참예회의
참예회의는 1860년대 막말 일본에서 막부 권위 실추와 존왕양이 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유력 다이묘들의 조정 참여 기구였으나, 쇼군의 독선과 다이묘 간 대립으로 성과 없이 와해되어 막부 타도 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 시마즈 히사미쓰 - 나마무기 사건
나마무기 사건은 1862년 나마무기 촌에서 사쓰마 번 행렬과 마주친 영국인들이 무례하다는 이유로 공격받아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막말 정치 혼란 심화, 외국인 배척 운동 격화, 사쓰에이 전쟁의 원인, 대중문화에의 영향 등의 결과를 낳았다.
| 사쓰마번 지사 숙청 사건 | |
|---|---|
| 사건 개요 | |
| 명칭 | 寺田屋事件 (데라다야 사건) |
| 다른 이름 | 사쓰마번 지사 숙청 사건 |
| 발생 장소 | 교토후시미구 여관(船宿) 데라다야 |
| 위도 | 알 수 없음 |
| 경도 | 알 수 없음 |
| 발생 날짜 | 분큐 2년 4월 23일 (1862년 5월 21일) |
| 사건 개요 | 伏見 (후시미)의 여관(船宿) 데라다야에 체류하고 있던 사쓰마번, 구루메번, 오카번, 아키즈키번 등의 존왕양이파 지사 중 사쓰마번에서 탈번한 지사 일부를, 진무사로 온 사쓰마번사가 상의토벌이라 칭하며 살상하고 나머지 대부분을 투항시킨 사건. |
| 원인 | 지사들은 사막파의 간파쿠구죠 히사타다와 교토 쇼시다이사카이 다다요시를 암살하기 위해 데라다야에 집결했다. 사쓰마번주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쓰는 이를 막기 위해 나라하라 시게루 등 9명을 후시미에 보내 대처를 명했다. |
| 수단 | 알 수 없음 |
| 무기 | 刀, 창 |
| 공격 인원 | 9명 |
| 표적 | 존왕양이 과격파 지사 40명 정도 (대부분은 싸우지 않고 투항, 일부는 도망) |
| 사망자 | 진무사 측: 1명, 지사 측: 6명 |
| 부상자 | 진무사 측: 4명, 지사 측: 2명 (중상의 2명은 할복) |
| 행방불명 | 알 수 없음 |
| 피해자 | 알 수 없음 |
| 손해 | 알 수 없음 |
| 범인 | 알 수 없음 |
| 혐의 | 알 수 없음 |
| 동기 | 상의토벌 |
| 관여 | 알 수 없음 |
| 방어 | 알 수 없음 |
| 대처 | 투항한 자 중, 사쓰마번 출신 지사 21명은 귀번 근신, 구루메번 출신 지사 9명은 귀번 근신, 다나카 가와치노스케 등 낭인 지사 6명은 사쓰마번에서 인수한다고 칭하며 해상에서 살해되었다. 그 외, 미타마 산페이 등 수명에서 10명 정도는 도망했다. |
| 사죄 | 알 수 없음 |
| 배상 | 알 수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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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에도 막부 말기, 막부의 권위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특히 도자마 다이묘가 통치하는 번에서는 존왕양이를 주장하며 막부 타도 움직임이 활발했다. 사쓰마번도 이러한 번 중 하나였으나, 전 번주이자 현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아버지인 시마즈 히사미쓰는 공무합체를 주장하며 막부 타도에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2. 1. 사쓰마번의 내부 갈등
에도 막부 말기, 막부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도자마 다이묘를 중심으로 존왕양이를 외치며 막부를 타도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사쓰마번 역시 이러한 움직임의 중심에 있었으나, 번주 시마즈 히사미쓰는 공무합체를 주장하며 막부 타도에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히사미쓰는 질서를 중시하는 인물로, 급진적인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숙청하려는 경향을 보였다.히사미쓰는 사이고 다카모리, 무라타 신파치 등을 체포하여 오사카에서 사쓰마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862년 4월 13일 후시미에 도착한 히사미쓰는 16일 교토에 입성했고, 조정으로부터 지사들을 처리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 사쓰마번 내 급진적 존왕양이파 지사들은 크게 반발했다. 아리마 신시치 등은 마키 야스오미 등과 힘을 합쳐 관백 구조 히사타다와 교토소사대 사카이 다다토시를 습격하여 그들의 목을 히사미쓰에게 바쳐 봉기할 것을 강요하려 했다. 이들은 거사를 실행하기 전, 사쓰마번의 단골 여관이었던 데라다야에 집결하기로 계획했다.
지사들의 움직임을 보고받은 히사미쓰는 오쿠보 도시미치 등을 보내 지사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설득이 실패하자 히사미쓰는 검술에 능한 번사 9명을 진무사로 임명하여 사쓰마번에 파견했다. 이들은 지사들을 설득하고, 실패할 경우 무력 진압할 계획이었다.
2. 2. 존왕양이파 지사들의 불만
에도 막부 말기, 막부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도자마 다이묘가 통치하는 번을 중심으로 존왕양이를 주장하며 막부 타도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았다. 사쓰마번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전 번주이자 현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아버지인 시마즈 히사미쓰는 공무합체를 주장하며 막부 타도에는 관심이 없었다.[1]이러한 상황에서 사쓰마번 내 급진적인 존왕양이파 지사들은 히사미쓰의 태도에 불만을 품었다. 아리마 신시치, 시바야마 아이지로, 하시구치 소스케 등은 마키 야스오미, 다나카 가와치노스케 등과 함께 관백 구조 히사타다와 교토소사대 사카이 다다토시를 암살하고 그 목을 히사미쓰에게 바쳐 봉기를 강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거사 전에 사쓰마번의 단골 여관인 데라다야에 모이기로 했다.[1]
3. 과정
에도 막부 말기, 막부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도자마 다이묘가 통치하는 번을 중심으로 존왕양이를 외치며 막부 타도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사쓰마번도 이에 해당했지만,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아버지 히사미쓰는 공무합체를 주장하며 막부 타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히사미쓰는 질서를 중시하는 성격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체포하여 오사카에서 사쓰마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862년 4월 13일 후시미에 도착한 히사미쓰는 4월 16일 교토에 입성하여 조정으로부터 지사들을 처리하라는 명을 받았다.[1]
이에 사쓰마번 내 급진적 존왕양이파 지사들은 아리마 신시치 등을 중심으로 마키 야스오미, 다나카 가와치노스케 등과 함께 관백 구조 히사타다와 교토소사대 사카이 다다토시를 습격하여 그들의 목을 히사미쓰에게 바쳐 봉기를 강요할 계획을 세우고, 거사 전 데라다야에 모이기로 했다.[1]
히사미쓰는 지사들의 움직임을 보고받고 오쿠보 도시미치, 가이에다 노부요시, 나라하라 기자에몬을 차례로 보내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4월 23일, 지사들 중 한 명이 봉기를 막으려다 실패하고 할복하자, 다카사키 마사카제 등이 히사미쓰에게 이를 알렸다.[1] 히사미쓰는 다시 한번 지사들을 설득하고자 했지만, 이번에도 설득되지 않으면 이들을 제거할 결심을 하고 나라하라 시게루 등 검술에 능한 번사 9명을 진무사로 임명하여 파견했다.[1]
3. 1. 설득과 실패
에도 막부 말기, 막부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도자마 다이묘를 중심으로 존왕양이를 외치며 막부 타도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사쓰마번도 마찬가지였지만,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아버지 히사미쓰는 공무합체를 주장하며 막부 타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히사미쓰는 질서를 중시하는 성격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체포하여 사쓰마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862년 4월 13일에는 후시미에 도착, 4월 16일에는 교토에 입성하여 조정으로부터 지사들을 처리하라는 명을 받았다.[1]이에 사쓰마번 내 급진적 존왕양이파 지사들은 아리마 신시치 등을 중심으로 마키 야스오미, 다나카 가와치노스케 등과 함께 관백 구조 히사타다와 교토소사대 사카이 다다토시를 습격하여 히사미쓰에게 봉기를 강요할 계획을 세우고, 거사 전 데라다야에 모이기로 했다.[1]
히사미쓰는 지사들의 움직임을 보고받고 오쿠보 도시미치, 가이에다 노부요시, 나라하라 기자에몬을 차례로 보내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4월 23일, 지사들 중 한 명이 봉기를 막으려다 실패하고 할복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다카사키 마사카제 등이 히사미쓰에게 급히 이 사실을 알렸다.[1] 히사미쓰는 다시 한번 지사들을 설득하고자 했지만, 이번에도 설득되지 않으면 이들을 제거할 결심을 하고 나라하라 시게루 등 검술에 능한 번사 9명을 진무사로 임명하여 파견했다.[1]
3. 2. 데라다야에서의 충돌
1862년 4월 23일 밤, 데라다야(寺田屋)에서 사쓰마번의 급진 존왕양이파 지사들과 시마즈 히사미쓰가 보낸 진무사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히사미쓰는 지사들을 설득하고자 오쿠보 도시미치 등을 보냈으나 실패했고, 결국 검술에 능한 번사 9명을 진무사로 임명하여 데라다야로 보냈다. 진무사들은 지사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3. 2. 1. 1층에서의 격돌
23일 밤, 데라다야에 도착한 진무사 나라하라 기하치로 등 4명은 아리마 신시치에게 면회를 요청했지만, 2층에서 하시구치 덴조가 "없다"고 하여 거절했다. 이에 에나쓰와 모리오카가 힘으로 2층으로 올라가려다 실랑이가 벌어졌다. 시바야마 아이지로가 응대하여 1층에서 면담하기로 했다. 아리마와 다나카 겐스케, 하시구치 소스케가 내려와 논쟁에 참여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사쓰마번사들은 어쨌든 번저(藩邸)에 동행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것이 거부되었다. 그러자 오야마 등 4명이 따라와 데라다야에 들어왔다. 나라하라는 설득을 계속했지만, 군령에 따르지 않는 것이냐고 격분한 도지마가 "상명"이라고 외치며 칼을 뽑아 다나카 겐스케의 머리를 베면서 "동지끼리 죽이는" 격렬한 칼부림이 시작되었다.베인 다나카 겐스케는 안구가 튀어나온 채 기절했다. 야마구치도 칼을 뽑아 뒤에서 시바야마 아이지로를 베어 죽였고, 이것을 본 아리마 신시치는 격분하여 도지마에게, 하시구치 소스케는 나라하라에게 덤벼들었다. 아리마는 검술의 달인이었지만, 싸우는 과정에서 칼이 부러지자, 도지마를 붙잡고 몸싸움을 벌여 벽에 밀어붙였다. 근처에 있던 하시구치 키치노조는 당황해서인지 가세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리마가 "나처럼 찔러라"라고 명령하자, 하시구치 키치노조는 그 말에 따라 아리마의 등 뒤에서 도지마와 함께 관통하여 두 사람을 절명시켰다. 한편, 하시구치 소스케는 분전했지만, 나라하라에게 어깨에서 가슴까지 베여 쓰러졌고, 마지막으로 물을 청해 마신 후 숨을 거두었다. 모리야마 신고자에몬은 마침 변소에 내려온 참이었는데, 이런 칼부림이 시작되어 베여 중상을 입었다. 오야마 가쿠노스케는 사다리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소동을 듣고 내려온 데시마루 류스케를 찔러 죽였고, 더 내려온 하시구치 덴조의 발을 걸었다. 하시구치 덴조는 일어서서 칼을 휘둘러 스즈키 유에몬의 귀를 베어 떨어뜨렸지만, 스즈키 마사노스케에게 찔려 절명했다. 그러자 또 내려온 니시다 나오고로를 모리오카가 창으로 찔렀고, 니시다는 굴러 떨어졌지만, 칼을 휘둘러 모리오카와 서로 찔러 죽는 형태로 숨을 거두었다.[1]
3. 2. 2. 2층에서의 상황
2층에서는 아래층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미타마 산페이(다카하시 친스케)는 후시미 봉행의 포졸이 왔다고 오해하여 "포졸이다, 방어하라"고 외쳤다. 시바야마 류고로를 선두로 각자 칼을 뽑아 1층으로 내려오려고 하자, 나라하라 기하치로[2]는 칼을 던져 버리고 막아서며, "기다려 주게, 군령이다, 동지끼리 죽여봐야 소용없다"라고 말하며 설득했다. 그리고 어쨌든 칼을 거두고 동행할 것을 요구하며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히사미쓰 공에게 들어달라"고 호소했다. 1층의 다른 방에 있던 마키 이즈미와 다나카 가와치스케가 나와 이에 동조하여 설득했기에, 겨우 진정되었다.4. 결과
이 사건으로 시마즈 히사미쓰는 조정의 신뢰를 크게 얻었고, 공무합체를 실현하기 위한 분큐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4. 1. 인명 피해
진무사 측에서는 미치시마 고로베[3]가 사망하고, 모리오카 젠스케[4]가 중상을 입었으며, 나라하라 키하치로, 야마구치 카네노신, 스즈키 유에몬, 에나츠 츄사에몬 4명이 경상을 입었다. 나머지 3명은 무사했다. 지사 측에서는 아리마 신시치, 시바야마 아이지로, 하시구치 소스케, 니시다 나오고로, 데시마루 류스케, 하시구치 덴조 6명이 사망하고, 다나카 겐스케, 모리야마 신고자에몬 2명이 중상을 입었으나, 이 부상자 2명은 후에 할복했다.4. 2. 투항과 도주
2층에 있던 지사들 대부분은 투항했고, 일부는 도주했다.[3] 교토에 있던 사쓰마 번사 1명도 지사들에게 가담할 예정이었다는 것이 드러나 번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받았지만 이에 불복종하여 결국 할복되었다.[4] 이렇게 죽은 9명의 지사들은 훗날 열사가 되었다.아직 2층에 있던 존왕파 사쓰마번사 대부분은 투항했고, 미야마 미헤이 등은 도망쳤다.[5] 사이고 신고, 오야마 야스케, 미시마 야헤이를 포함한 21명이 귀번 근신을 명령받았다.
교토 번저에서 요양 중이던 사쓰마 번사 야마모토 시로(요시노리)도 가담할 예정이었기에 귀번 근신이 명령되었지만, 그는 이를 좋게 여기지 않고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할복했다. (그를 포함하여 9명의 순난자가 열사로 여겨졌다.)
남은 다른 번의 존왕파 지사들 대부분도 투항했고, 몇 명은 도망쳤다. 마키 이즈미와 그의 아들 마키 키쿠시로, 사카이 덴지로 등은 구루메 번에 인도되었고, 다른 여러 명은 도사번 등의 소속 번에 인도되었다.
4. 3. 추가 처벌
교토에 있던 사쓰마 번사 야마모토 시로(요시노리)는 지사들에게 가담하려 했다는 이유로 귀번 근신 명령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하고 할복했다.[5] 다른 번 출신 존왕양이파 지사들 대부분도 투항했고, 일부는 도주했다. 마키 이즈미 등은 구루메 번에 인도되었고, 다른 여러 명은 도사 번 등 소속 번에 인도되었다.인수자가 없는 낭인들은 가고시마로 송환되었다. 시마즈 히사미츠에게 낭인 처벌을 요청하여 승인받은[5] 사쓰마 번사들은 낭인들을 배에 태워 참살하고 바다에 유기했다. 1862년(분큐 2년) 5월 2일, 타나카 카와치스케와 그의 아들 타나카 사마스케는 사쓰마 번사에 의해 참살되어 바다에 던져졌다.[7][8][9] 유해는 아와지 섬에 표류하여 매장되었다. 카이가 미야토, 치바 이쿠타로, 나카무라 슈케이는 5월 7일 휴가 호소시마 앞바다에서 참살되어 바다에 버려졌고,[7][8][9] 유해는 근처의 카네가하마에 표류하여 매장되었다. 아오키 요리모는 타나카 부자와 같은 배에서 참살되었으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5. 영향
이 사건으로 시마즈 히사미쓰는 조정을 신뢰를 얻어 공무합체 운동을 추진, 분큐 개혁을 단행한다.
5. 1. 히사미쓰의 신뢰 획득
이 사건으로 시마즈 히사미쓰는 조정의 신뢰를 얻게 되었고, 공무합체 실현을 위한 분큐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5. 2. 메이지 유신으로의 영향
이 사건으로 시마즈 히사미쓰는 조정의 신뢰를 얻어 공무합체 운동을 추진, 분큐 개혁을 단행한다.6. 역사적 평가
(요약 및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역사적 평가를 작성할 수 없습니다.)
참조
[1]
문서
自分も一緒に突き刺せの意味。
[2]
문서
『大久保利通日記』
[3]
문서
彼はこの事件で亡くなった人物で唯一、烈士とされていない。
[4]
문서
森岡は重創を負って一時危篤に陥ったが、後日快方に向かって生存した。
[5]
서적
島津久光 幕末政治の焦点
講談社選書メチエ
2009-01-08
[6]
간행물
大礼記念長崎県人物伝
https://dl.ndl.go.jp[...]
長崎県教
[7]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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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l.ndl.go.jp[...]
宮崎県
[8]
간행물
京都の維新史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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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市教育局文化課
[9]
문서
田中は大納言[[中山忠能]]の旧臣であるだけでなく後の[[明治天皇]]の教育係であって、西郷隆盛はこの久光の暴挙に憤激したと伝え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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