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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소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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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삭소니아는 고대 게르만 부족인 색슨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다루는 문서이다. 색슨족은 2세기에 처음 언급되었으며, 현재 독일 북부 지역에 거주하며 토지 부족으로 인해 남쪽으로 이동하여 주변 부족들을 흡수했다. 사회는 귀족, 자유 전사, 자유민으로 구성되었으며, 엄격한 사회 규범과 고대 관습을 유지했다. 3~4세기에는 영국 동부 해안을 습격하여 앵글족, 주트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 앵글로색슨 왕국 건설의 기반을 마련했다. 5세기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는 프랑크 왕국과 갈등을 겪었으며, 샤를마뉴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했다. 색슨족은 앙그리아, 베스트팔렌, 동부팔리아, 노르달빙기아 등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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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소니아
지도
1000년경의 작센 공국. 엠스 강, 아이더 강, 엘베 강으로 경계를 이루는 작센족의 전통적인 고향을 기반으로 함.
1000년경의 작센 공국. 엠스 강, 아이더 강, 엘베 강으로 경계를 이루는 작센족의 전통적인 고향을 기반으로 함.
기본 정보
정식 명칭고대 작센
일반 명칭고대 작센
시대초기 중세
지위작센족의 부족 영토
정부 형태부족 연맹
시작 연도6세기
종료 연도804년
시작 사건하두가토, 최초의 기록된 공작
종료 사건작센 전쟁의 종결
종교게르만족 이교
공용어고대 작센어
수도마르클로1차 자료인 비타 레부이니 안티쿠아에 따르면 연례 부족 회의는 베저 강 근처의 마르클로에서 열렸음.
역사
이전 국가잉가에보네스
계승 국가작센 공국

2. 기원

프톨레마이오스가 2세기에 저술한 『지리학』에는 색슨족에 대한 최초의 언급으로 여겨지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일부 사본에는 하부 엘베강 북쪽 지역에 살았던 '삭소네스'(Saxones)라는 부족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삭스(Sax)' 또는 돌칼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2]

가장 초기에 알려진 색슨족은 현재 서부 홀슈타인 지역의 엘베강 하구 북쪽 기슭에 인접한 "북 알빙기아"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토지가 부족해지자 색슨족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케루스키, 카마비, 카티 등 여러 토착 집단을 흡수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넓은 영토를 "구(舊) 색소니"라고 부른다.

2. 1. 명칭의 유래

프톨레마이오스가 2세기에 쓴 『지리학』에는 색슨족에 대한 최초의 언급으로 여겨지는 내용이 있다. 이 책의 일부 사본에는 하부 엘베강 북쪽 지역에 살았던 '삭소네스'(Saxones)라는 부족이 언급되는데, 이 이름은 '삭스(Sax)' 즉, 돌칼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

하지만 다른 사본에서는 같은 부족을 '아크소네스'(Axones)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타키투스가 그의 저서 『게르마니아』에서 언급한 '아비오네스'(Aviones)를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초기의 색슨족은 현재 서부 홀슈타인 지역의 엘베강 하류 북쪽 기슭에 인접한 "북 알빙기아"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토지가 부족해지자 색슨족은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케루스키, 카마비, 카티 부족, 그리고 랑고바르디(롬바르드)와 수에비의 남은 세력 등 토착 집단을 흡수했다. 이렇게 넓어진 영토를 "구(舊) 색소니"라고 부른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차우치 부족 역시 나중에 '구 색소니'로 알려진 지역에 살았으며,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 매우 존경받았다. 그는 차우치 부족이 평화롭고 침착하며 사려 깊다고 묘사했다. 이들은 어느 시점에 색슨족과 합쳐졌거나, 혹은 색슨족과 같은 부족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2. 2. 초기 거주 지역

프톨레마이오스가 2세기에 저술한 『지리학』에는 색슨족에 대한 첫 기록으로 보이는 내용이 있다. 이 책의 일부 사본에는 하부 엘베강 북쪽 지역에 살았던 '삭소네스'(Saxones)라는 부족이 언급되는데, 이 이름은 '삭스'(Sax) 즉, 돌 칼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

그러나 다른 사본에서는 이 부족을 '아크소네스'(Axones)라고 표기하고 있어,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에서 언급한 '아비오네스'(Aviones)를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기록상 가장 초기의 색슨족은 현재 서부 홀슈타인 지역의 엘베강 하구 북쪽 기슭에 인접한 "북 알빙기아"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토지가 부족해지자 색슨족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케루스키, 카마비, 카티 부족과 랑고바르디(롬바르드족), 수에비족의 잔여 세력 등 토착 집단을 흡수했다. 이 넓어진 영역을 "구 색소니"라고 부른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차우치족 역시 나중에 '구 색소니'로 알려진 지역에 살았으며,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 높은 평판을 얻었다. 타키투스는 차우치족을 평화롭고 침착하며 사려 깊은 부족으로 묘사했다. 차우치족은 어느 시점에 색슨족과 합쳐졌거나, 혹은 색슨족과 같은 부족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구 색슨족 사회는 귀족, 명망 높은 자유 전사 계급, 그리고 자유민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친족과 씨족 중심의 고대 관습에 따라 생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적 신분 질서는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과 결혼하면 사형에 처해졌고, 낮은 신분과의 결혼은 강하게 비난받았으며, 사생아는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색슨족은 다른 게르만 부족과의 결혼을 꺼렸고 이방인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고대 관습법을 완강하게 고수했으며, 이러한 사회적 특징은 중세 시대까지 색소니 지역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3]

3. 브리튼 섬으로의 이주

(내용 없음)

3. 1. 배경

색슨족은 3세기와 4세기 동안 영국의 동부 해안을 습격했으며, 이로 인해 영국 동부에는 색슨 해안이라고 불리는 해상 방어 시설이 건설되기도 했다. 407년 로마 제국라인강 방어 시설이 붕괴된 후, 동쪽에서의 인구 이동으로 인해 색슨족과 인접 부족인 앵글족 및 주트족이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이주하여 영국의 비옥한 저지대를 침략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침략의 전통적인 시작 시기는 449년이며, 이를 아벤투스 색소눔( Adventus Saxonum|아드벤투스 삭소눔la )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후 장기간 이어진 갈등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거의 없으며, 대규모 게르만족의 영국 이주에 대한 증거도 마찬가지로 부족하다. 따라서 이주의 수준이 비교적 작았고 로마 이후 영국의 인종 구성이 크게 변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4]

문화적, 언어적 변화는 뚜렷했으며, 잉글랜드에는 사우스 색슨족(서식스), 웨스트 색슨족(웨섹스) 및 이스트 색슨족(에식스)을 포함한 다양한 색슨족 왕국이 세워졌다. 이 왕국들은 앵글족과 주트족에 의해 설립된 왕국들과 함께 현대 영국의 기초가 되었다.

3. 2. 앵글로색슨 왕국 건설

색슨족은 3세기와 4세기에 걸쳐 영국 동부 해안을 자주 습격했다. 이로 인해 로마는 영국 동부에 색슨 해안이라 불리는 해상 방어 시설을 건설해야 했다. 407년 로마 제국라인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동쪽으로부터의 인구 이동 압력으로 인해 색슨족과 이웃한 앵글족, 주트족이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이동하여 영국의 비옥한 저지대를 침략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침략이 시작된 시기는 449년으로, 이를 Adventu Saxonum|아벤투스 삭소눔lat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이후 오랫동안 지속된 갈등의 증거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며, 게르만족이 대규모로 영국으로 이주했다는 증거 역시 부족하다. 따라서 실제 이주 규모는 비교적 작았고, 로마 이후 영국 인구의 인종 구성에는 큰 변화가 없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언어적 변화는 뚜렷하게 나타났다. 잉글랜드에는 사우스 색슨족이 세운 서식스, 웨스트 색슨족(웨섹스) 및 이스트 색슨족(에식스)을 포함한 여러 색슨족 왕국이 들어섰다. 이들 왕국은 앵글족과 주트족이 세운 왕국들과 함께 현대 영국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4.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

5세기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게르마니아에 잔존한 작센족은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과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실상 독립적인 상태를 지켰다. 작센족과 프랑크족 사이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아 오랜 기간 부족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으며, 프랑크 왕들과의 관계는 전쟁과 동맹을 반복하는 양상을 보였다.

4. 1. 갈등과 복속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게르마니아 지역에 남아 있던 옛 작센족은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프랑크 왕국과 느슨한 관계를 맺었지만, 사실상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며 그들 고유의 이교도 신앙을 지켰다. 작센족의 신앙은 이르민술(Irminsul), 즉 '위대한 기둥' 숭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천국지구를 연결하는 신성한 나무로 여겨졌으며, 오늘날의 오버마르스베르크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작센족이 거주하던 땅은 대부분 광활한 평원이었으나, 남쪽으로는 언덕 지형과 하르츠 산맥, 헤센의 낮은 산악 지대로 이어졌다. 이 지리적 경계는 작센족과 그들의 오랜 경쟁 상대이자 결국 그들을 정복하게 되는 프랑크족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 경계선은 명확하지 않아 두 부족 간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날의 북부 독일 지역에 살았던 작센족은 555년, 프랑크 왕 테우데발트가 사망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전쟁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작센족은 테우데발트의 뒤를 이은 클로타르 1세에게 패배했다. 이후 일부 프랑크 왕들은 작센족과 계속 싸웠고, 다른 왕들은 동맹을 맺기도 했으며, 클로타르 2세는 작센족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4. 2. 작센 전쟁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게르마니아 지역에 남아 있던 옛 작센족은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과 느슨한 관계를 맺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유지하며 그들의 전통적인 이교도 신앙을 지켰다. 작센족의 신앙은 이르민술(Irminsul), 즉 '위대한 기둥' 숭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는 하늘을 연결하는 신성한 나무로 여겨졌다. 오늘날의 오버마르스베르크 근처에 이 이르민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작센족이 거주하던 땅은 대부분 넓은 평원이었지만, 남쪽으로는 언덕 지형과 하르츠 산맥, 그리고 헤센의 낮은 산악 지대로 이어졌다. 이 자연적인 경계는 작센족과 그들의 오랜 숙적이자 최종적인 정복자가 되는 프랑크족을 나누는 기준선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아 두 부족 간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555년 프랑크 왕 테우데발트가 사망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작센족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작센족은 테우데발트의 후계자인 클로타르 1세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프랑크 왕국의 일부 후계자들은 작센족과 계속해서 싸웠고, 다른 이들은 동맹을 맺기도 했으며, 클로타르 2세는 작센족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5. 종교

작센족의 초기 종교는 게르만 전통 신앙이었으나, 7세기 말부터 외부로부터 기독교 개종 시도가 있었다. 이러한 시도는 작센족의 강한 반발을 샀으며, 결국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이끄는 군대와의 오랜 작센 전쟁(772년~804년)으로 이어졌다. 전쟁 결과 작센족은 샤를마뉴에게 정복당하고 강제로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작센족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은 상당한 영향을 받았지만, 강한 친족 중심의 사회 구조는 이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5]

5. 1. 초기 종교

작센족의 개종, A. de Neuville, 1869년경


690년, 노섬브리아에서 온 두 사제, 검은 에발트와 하얀 에발트는 옛 작센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옛 작센은 뮌스터, 오스나브뤼크, 파더보른의 고대 교구로 나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695년경, 작센족은 기독교 사제와 선교사들의 목표가 자신들의 지배자를 개종시키고 전통 신앙과 사원을 파괴하려는 것임을 인지하고 극심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 하얀 에발트는 즉시 살해당했으며, 검은 에발트는 고문을 당한 뒤 팔다리가 찢겨 라인강에 던져졌다. 이 사건은 695년 10월 3일, 도르트문트 근처 아플러베크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그 자리에는 예배당이 남아 있다. 두 에발트는 오늘날 베스트팔렌 지역에서 성인으로 추모받고 있다.

작센족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 수용을 꺼렸으며, 이웃 지역을 침략하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결국 프랑크의 강력한 군주이자 훗날 황제가 되는 샤를마뉴와 직접적인 충돌을 빚게 되었다. 772년부터 804년까지 30여 년간 이어진 피비린내 나는 작센 전쟁 끝에, 비두킨트가 이끌던 작센족은 샤를마뉴에게 굴복하고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해야 했다.

작센족 사회는 친족과 씨족 간의 유대가 매우 강했으며, 여러 분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8세기까지 타키투스가 저서 ''게르마니아''에서 묘사한 초기 게르만족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동질적인 민족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프랑크족과의 오랜 전쟁은 작센족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크게 약화시켰지만,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11세기 역사가 브레멘의 아담은 옛 작센의 지형을 삼각형에 비유하며, 각 꼭짓점 사이의 거리가 8일 여정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옛 작센은 면적상 독일의 부족 공작령 중 가장 넓었으며, 하부 엘베강잘레강 사이부터 라인강 근처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포함했다. 엘베강과 베저강 하구 사이에서는 북해와 접경했다. 엘베강 너머에는 홀슈타인과 디트마르슈 지역만이 있었다. 작센 부족 영토는 크게 네 개의 친족 집단으로 나뉘었다. 베저강 우안을 따라 거주한 ''앙그리아''족, 엠스강리페강 유역의 ''베스트팔렌''족, 베저강 좌안의 ''동부팔리아''족, 그리고 현재의 홀슈타인 지역에 살았던 ''노르달빙기아''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네 집단조차도 명확한 부족 단위라기보다는, 혈연에 기반한 씨족들의 느슨한 연합체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노르달빙기아인만 해도 ''홀스타이너''족, ''슈투르마리''족, ''바르디''족, ''디트마르슈''인 등 더 작은 집단으로 나뉘었다.[5]

5. 2. 기독교로의 개종



690년, 두 사제인 검은 에발트와 하얀 에발트가 노섬브리아에서 와서 옛 작센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다. 당시 옛 작센은 뮌스터, 오스나브뤼크, 파더보른의 고대 교구로 나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695년경, 이교도였던 작센족은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지배자를 개종시키고 전통 신앙과 사원을 파괴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얀 에발트는 즉시 살해당했고, 검은 에발트는 고문을 당한 뒤 팔다리가 찢겨 살해되었다. 두 사람의 시신은 라인강에 던져졌다. 이 사건은 695년 10월 3일, 도르트문트 근처 아플러베크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그곳에는 여전히 추모 예배당이 있다. 두 에발트는 오늘날 베스트팔렌 지역에서 성인으로 기려지고 있다.

작센족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를 꺼렸고, 주변 지역을 침략하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결국 프랑크의 강력한 왕이자 훗날 황제가 되는 샤를마뉴와 직접적인 충돌을 빚게 되었다. 772년부터 804년까지 30년 이상 이어진 피비린내 나는 작센 전쟁 끝에, 비두킨트가 이끌던 옛 작센족은 샤를마뉴에게 굴복하고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해야 했다.

작센족은 강한 친족 및 씨족 유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여러 분파가 있었음에도 8세기까지는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에서 묘사한 초기 게르만족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크족과의 오랜 전쟁은 작센족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5]

참조

[1] 문서 Vita Lebuini antiqua
[2] 간행물 Saxony CathEncy
[3] 서적 Feudal Germany https://books.google[...] 1928
[4] 서적 The Emergence of the English Arc Humanities Press
[5] 서적 Feudal Germany https://books.google[...]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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