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복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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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 수복 전투는 1950년 9월, 6.25 전쟁 중 유엔군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던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벌인 군사 작전이다. 북한군의 방어선 구축에도 불구하고,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과 미 제10군단의 한강 도하 작전, 영등포 전투, 서울 서부 및 남부 공격 등을 통해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이 전투는 대한민국 정부의 서울 복귀와 전쟁 주도권 확보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나, 많은 민간인 희생과 재산 피해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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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 인천 상륙 작전
인천 상륙 작전은 1950년 9월 15일 한국 전쟁 중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킨 작전으로,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으나 지형적 어려움, 서울 진격 속도, 민간인 피해 등에 대한 논란도 있다. - 1950년 9월 - 영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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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복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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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전투 이름 | 제2차 서울 전투 |
부분전 | 한국 전쟁 |
위치 | 서울, 대한민국 |
날짜 | 1950년 9월 20일 ~ 9월 28일 |
결과 | 국제연합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국제연합 미국 대한민국 |
교전국 2 | 북한 |
지휘관 | |
지휘관 1 | 더글러스 맥아더 아서 듀이 스트러블 에드워드 M. 아몬드 올리버 P. 스미스 데이비드 G. 바 백선엽 |
지휘관 2 | 최용건 월기찬 완용 |
병력 규모 | |
병력 1 | 미국 해병대 제1사단 미국 육군 제7보병사단 대한민국 해병대 대한민국 육군 제17연대 |
병력 2 | 조선인민군 제9사단 조선인민군 제18사단 조선인민군 제25보병여단 7,000명~30,000명 미상의 포병, 탱크, 항공기 |
피해 규모 | |
사상자 1 | 미국: 313명 전사 대한민국: 50명 전사 |
사상자 2 | 약 14,000명 전사 약 7,000명 포로 |
2. 배경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은 빠르게 남하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남쪽으로 피난해야 했다. 유엔군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키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UN군은 서울 탈환을 목표로 진격했다.[2]
북한군은 서울 방어를 위해 약 2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최용건 대장의 지휘 아래, 제18사단, 제70연대, 제107치안연대, 제25여단, 제78독립연대 등이 서울 방어에 투입되었다.[3] 이들은 서울 서쪽의 안산(296고지)에서 연희고지(56고지), 터널고지(105고지 북쪽), 노고산(105고지 중앙), 와우산(105고지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3]
전투에 앞서, 북한은 수도 남쪽에 주력 부대를 배치하고 있었고, 서울에는 병력이 부족한 조선인민군(KPA) 사단 하나만 배치되어 있었다.[3]
3. 전투 전 계획
3. 1. UN군
에드워드 앨먼드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10군단은 서울 탈환 작전을 주도했다.[3] 초기 계획은 제1해병사단 단독으로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었으나, 이후 한국군 해병대와 제17연대가 작전에 투입되었다.[3] 제1해병사단은 서울 서쪽, 제7보병사단은 서울 남쪽과 동쪽을 공격하는 계획이었다.
제5 해병 연대는 김포 비행장 북동쪽 약 약 4.83km 지점, 서울 서쪽 약 약 12.87km 지점에서 한강 도하를 시작했다.[3] 9월 20일, 제5 해병 연대 I 중대는 125고지에 대한 집중적인 포병 사격 지원 후 돌격 도하를 시작하여, 적의 자동화기와 소화기 사격으로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9시 40분에 고지를 확보했다.[3] 제3 대대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내륙으로 약 1.61km 진격하여 서울-개성 철도와 능동(Neunggok station/Nung-dong) 마을의 도로를 차단했다.[3]
9월 21일, 제5 해병 연대는 한강과 평행한 철도와 도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진격하며 적의 저항을 격퇴했다.[3] 제3 대대는 104고지를 점령하여 대한민국 해병대에 인계한 후, 서울 북서쪽 끝에 있는 안산(Ansan (Seoul)) 296고지로 이동했다.[3]
제1해병연대는 제5해병대의 우측(남쪽)에서 진격하여 영등포에 접근했다.[3] 9월 19일, 제1해병대 제1대대는 제5해병대가 점령한 고지로 이동했다.[3] 인민군은 새벽에 역공격을 가했지만, 해병대는 치열한 근접전 끝에 85고지를 탈환했다.[3]
인민군은 T-34 전차 5대를 앞세워 영등포에서 역공격을 시도했으나, 해병대는 바주카포 등으로 이를 격퇴했다.[3] 9월 21일, 제1해병대는 영등포 서쪽 고지에 도착했고, 풀러 대령과의 회의 후 앨몬드 장군은 영등포에 대한 포격을 승인했다.[3]
9월 21일 새벽, 제1해병대는 영등포 공격을 개시했다.[3] 제1대대는 논과 갈천(Kal-ch'on Creek)을 건너 영등포 가장자리로 진격했으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3] 제2대대 역시 큰 피해를 입었고, 제3대대가 공격을 이어갔다.[3]
A중대는 낮은 산을 통해 영등포 본거지 서쪽 논의 제방 시스템에 접근, 제방을 넘어 도시 거리로 진입했다.[3] A중대는 적의 후방에서 인민군 증원 부대를 섬멸하거나 분산시켰다.[3] 인민군은 A중대를 공격했으나, A중대는 바주카포를 사용하여 전차를 격파하는 등 공격을 격퇴했다.[3]
9월 21일, 제7해병연대가 인천항에 도착했고, 작전 지휘권이 스트러블 제독에서 앨몬드 장군으로 이양되었다.[3]
9월 22일, 제1해병대는 영등포를 점령하고 한강 동쪽의 파괴된 철도와 고속도로 다리에 도착했다.[3] 영등포를 방어하던 인민군 제9사단 제87연대와 제18사단의 일부는 큰 피해를 입었다.[3]
제1해병사단은 서울 점령 계획을 제시하는 작전 명령을 발령했고, 한국 해병대와 제17연대도 도시 확보에 투입될 것이었다.[3]
'''제10군단'''3. 2. 북한군
조선인민군(북한군)은 서울 방어를 위해 약 2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서해안 지구 사령관 최용건 대장의 지휘 아래, 제18사단, 제70연대, 제107치안연대, 제25여단, 제78독립연대 등이 서울 방어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서울 서쪽의 안산(296고지)에서 연희고지(56고지), 터널고지(105고지 북쪽), 노고산(105고지 중앙), 와우산(105고지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3]
4. 주요 전투 경과
19일 안양천에 진출한 제1해병연대는 제1대대가 한강과의 합류점 부근 118고지를 중심으로 한 고지군을 제5해병연대에서 인계받아 방어하고 있었고, 제2대대는 덕고개 일대에서 경인국도를 차단하며 영등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3대대는 연대 예비대로서 제2대대에 뒤따랐다.[3]
9월 20일, 인민군은 118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제1대대가 아직 부대를 배치하지 않은 80고지와 85고지를 점령하고 118고지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를 격퇴한 제1대대는 85고지를 점령했다. 제2대대에도 전차 5대를 앞세운 1개 대대 규모의 인민군이 나타났지만, 지형을 활용해 격퇴했다.[3]
9월 21일, 포병의 준비 사격 후 영등포 시가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제1대대와 제2대대는 인민군의 포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고전했다. 그동안 제1대대 A중대는 인민군 진지 후방 한강 남쪽 제방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야간 공격을 격퇴한 후, 포위 위험을 느낀 인민군은 영등포에서 퇴각했다.[3]
4. 1. 한강 도하 작전 (9월 20일 ~ 21일)
9월 20일, 미 제5해병연대는 김포공항 북동쪽에서 한강을 건너 서울 서쪽으로 진격했다. 제5해병연대는 125고지를 점령하고, 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차단했다.[3] 9월 21일, 제5해병연대는 안산(296고지), 68고지, 104고지 등을 점령하고 서울 중심부를 향해 진격했다.[3]4. 2. 영등포 전투 (9월 19일 ~ 22일)
9월 19일, 안양천에 진출한 제1해병연대는 제1대대가 한강과의 합류점 부근 118고지를 중심으로 한 고지군을 제5해병연대로부터 인계받아 방어에 들어갔고, 제2대대는 덕고개 일대에서 경인국도를 차단하는 태세로 영등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3대대는 연대 예비대로서 제2대대에 뒤따랐다.[3]9월 20일, 북한군은 118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부대를 집결시켜 제1대대가 아직 부대를 배치하지 않은 80고지와 85고지를 점령하고 118고지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 공격을 격퇴한 제1대대는 이어서 80고지와 85고지를 공격하여 격전 끝에 85고지를 점령했다. 제2대대에도 전차 5대를 앞세운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나타났지만, 지형의 이점을 활용한 배치로 즉시 격퇴했다.[3]
9월 21일 아침, 포병의 준비 사격 후 영등포 시가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제1대대와 제2대대는 북한군의 포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고전했다. 제1, 2대대가 격전을 벌이는 동안 제1대대 A중대는 북한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안양천을 건너 북한군 진지 후방 한강 남쪽 제방에 도착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밤에 북한군이 A중대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영등포 북측을 점령당하고 포위될 위험을 느낀 북한군은 영등포를 버리고 퇴각했다.[3]
9월 22일, 제1해병연대는 영등포를 점령하고 한강 위의 파괴된 철도와 고속도로 다리에 도착했다.[3]
4. 3. 서울 서부 공격 (9월 22일 ~ 25일)
9월 22일 아침, 제5해병연대는 서울 서쪽의 주요 고지들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다. 북쪽에서 제3대대는 296고지를, 중앙에서 대한민국 해병대 제2대대는 105고지 중앙을 목표로 했지만, 그전에 56고지와 88고지를 점령해야 했다. 남쪽에서는 제5해병연대 제1대대가 105고지 남쪽을 공격했다.[3]두 시간 후, 제3대대는 296고지 남쪽 사면을 확보하지 못한 채 목표를 점령했다고 보고했다. 제1대대는 인민군의 집중 포격으로 멈췄지만, 늦은 오후 105고지 남쪽을 점령했다. 이날 제1대대는 39명의 사상자를 냈다.[3]
중앙에서는 인민군의 포격이 56고지를 공격하는 대한민국 해병대 대대를 궤멸시켰다. 104고지에서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인민군은 엄청난 포격을 퍼부었다.[4] 해병대 공습은 인민군 진지 파괴에 실패했고, 북한 포로들은 25여단이 이날 40%의 사상자를 기록했다고 말했다.[3] 저녁에 한국 해병대는 104고지로 후퇴해야 했다.[4]
9월 23일, 제5해병연대 제1, 3대대는 사격 지원을 하고, 한국 해병대는 56고지 공격을 재개했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고 중단되었다. 제5해병대 제2대대장 해롤드 S. 로이스 중령은 제2해병대대가 공격을 재개하도록 명령했다. 제1해병대대는 재편성 후 제5해병대 제2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다.[4]
한국 해병대 고문 찰스 W. 해리슨 중령은 한국 해병대의 제한된 훈련과 지원 무기 부족이 강력하게 방어된 지점 공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4]
오후 중반, 제5해병대 제2대대가 공격을 이어받았으나 큰 이득 없이 많은 사상자를 냈다. F중대 한 소대는 7명만 남았다. 연대는 반격을 격퇴했다.[3]

9월 24일 일출 후, 제5해병대 제3대대 일부가 296고지에서 제2대대 앞 인민군을 측면 공격하려 했다. D중대는 짙은 아침 안개 속에서 56고지 기저부에 도달, 참호 속 인민군과 조우하여 수류탄 전투를 벌였다. 해병대 공습이 반복되었으나, 북한군 대공포 사격으로 항공기 5대가 피해를 입었다.[3]
오후 초, D중대 소총 소대 30명, 무기 소대, 탄약 운반병, 중대 본부 14명이 56고지 능선에 대한 필사적인 돌격을 준비했다. 33명이 경사를 돌격하고, 11명이 뒤따랐다. F4U 콜세어의 공격 후, 33명은 길이의 대열을 지어 돌격했다. D중대장은 전사했지만, 26명이 정상에 도달했다. 이 돌격은 북한군을 놀라게 했고, 많은 병사들이 달아났다. D중대원 56명이 방어했고, 그중 26명은 부상당했지만 후송을 거부했다. 이날 D중대는 176명의 사상자를 냈다.[3]
9월 24일 오후 D중대의 56고지 점령은 결정적이었다. 9월 25일 아침 제2대대는 105고지 중앙 공격을 재개했다. D중대는 66고지에서 88고지를 점령했다. 오후 중반까지 제2대대는 105고지 중앙을, 제3대대는 105고지 북쪽을 점령했다. 포로들에 따르면, 인민군 대대 3개가 북쪽 언덕을 사수하며 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서울 서쪽 방어선이 무너졌다. 해병대는 인민군 총 사망자 수를 1,750명으로 추산했다.[3]
4. 4. 서울 남부 및 동부 공격 (9월 25일 ~ 26일)
미 제7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는 한강을 도하하여 남산을 점령하고 서울 남동쪽으로 진격했다.[3] 9월 25일, 제32보병연대는 남산을 점령하고, 한국군 제17연대는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동쪽으로 진격했다.[3] 9월 26일, 북한군은 남산에서 제32보병연대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제32보병연대와 한국군 제17연대는 서울 동쪽의 주요 고지들을 점령했다.[3]4. 5. 서울 시가전 (9월 26일 ~ 28일)
제1해병사단과 제5해병연대는 서울 시내로 진입하여 북한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3] 북한군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건물에서 저격하며 저항했다.[3] UN군은 탱크와 화염방사기 등을 동원하여 북한군의 저항을 돌파했다.[3]9월 27일, 제1해병연대는 주한프랑스대사관, 주한 미국대사관, 주러시아 대한민국 대사관(당시 소련)에 성조기를 게양하고,[3] 제5해병연대는 국회의사당을 점령했다.[3]
9월 28일, 제1해병사단은 서울 북동쪽의 132고지와 133고지를 점령하고 서울-의정부-철원 고속도로를 장악하며 서울 수복을 완료했다.[3]
5. 서울 수복 이후
서울 수복 이후, 유엔군은 서울 주변 지역에서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고 남쪽으로 진격하는 작전을 펼쳤다.
9월 29일,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로 복귀했다. 맥아더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정부 복귀 기념식에 참석하여 서울 환수를 축하했다.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사령부를 대표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부 청사를 돌려준다고 연설했고,[3]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대한민국의 감사를 표했다.[3]
미 제7사단은 수원과 오산 일대에서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며 남하했다. 9월 24일 밤, 수원 비행장 남쪽에서 북한군 기갑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포병 지원을 받아 격퇴하고 T-34 전차 4대를 파괴했다.[3] 9월 27일에는 오산에서 북한군 전차 1대를 파괴했고, 도로를 따라 공격한 부대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지만 결국 북한군을 격퇴하고 300명의 사상자를 냈다.[3] 9월 29일에는 서울 남동쪽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여 79명의 사상자를 냈다.[3]
제1해병사단은 서울 북부 외곽 지역에서 북한군 잔당 소탕 작전을 수행했다. 10월 1일, 문산과 의정부 방면으로 진격했으나 큰 저항은 없었다.[3] 10월 2일, 의정부 남쪽 누원리 부근에서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으나, 다음 날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10월 3일 의정부에 진입했다. 의정부 전방에서의 전투는 인천-서울 작전에서 제1해병사단이 겪은 마지막 조직적인 저항이었다.[3]
5. 1. 대한민국 정부 복귀 (9월 29일)
9월 29일 오전 10시, 맥아더와 그의 일행은 도쿄에서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다. 알몬드 장군을 비롯한 고위 장교들이 그들을 맞이하여 서울로 향했다. 밤새 불도저가 주요 도로의 바리케이드와 전투 잔해를 치웠고, 폐허가 된 도시의 거리에는 환호하는 한국인들이 늘어섰다. 제1해병사단 제3대대는 한강의 폰툰 다리에서부터 서울까지의 이동 경로를, 제5해병사단 제3대대는 국회의사당 주변의 경비를 담당했다.[3]
국회의사당 건물은 서울을 해방시킨 한국 관리들과 시민들, 그리고 전투 부대 대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오 12시,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와 중요 장교와 관리들이 앉아 있는 단상으로 향했다. 여기에는 맥아더의 초청으로 서울에 온 월턴 워커 장군과 제8군 장교 몇 명도 있었다. 맥아더는 짧은 연설을 통해 "유엔군 사령부를 대표하여, 대통령께서 헌법적 책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정부의 중심지를 돌려드리게 되어 기쁩니다."라고 말했다.[3]
이어서 참석자들은 맥아더와 함께 주기도문을 낭송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수도 해방에 대한 대한민국의 감사를 표명하기 위해 일어섰고, "어떻게 여러분께 그리고 한국 국민들에게 저의 영원한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짧은 의식이 끝나고 맥아더는 곧바로 김포 비행장으로 떠나 오후 1시 35분 도쿄로 출발했다.[3]
5. 2. 서울 이남 지역 작전
9월 23일, 미 제7사단 제31보병연대는 수원과 수원비행장을 확보하고 남쪽 고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105전차사단의 한 연대가 남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연대는 수원 남쪽 지역을 면밀히 감시했다.[3]9월 24일 밤, 수원 비행장 남쪽 약 3km 지점의 142고지에 있던 제31보병연대 제2대대는 조선인민군 기갑부대의 공격을 받았다. 제57야전포병대대와 제15야전포병대대 B포대의 지원 포격으로 대대는 공격을 격퇴하고 T-34 전차 4대를 격파했다. 9월 25일에는 제92야전포병연대가 수원으로 이동하여 병력을 강화했다.[3]
9월 26일, 오븐샤인 제31보병연대장은 제2대대에게 오산 근처 조선인민군 점령 고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지역은 7월 5일 스미스 특수부대가 조선인민군과 교전했던 곳이었다. 제2대대 특수부대는 오산으로 우회하여 적 후방을 공격하고, 또 다른 공격부대는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공격하도록 편성되었다.[3]
9월 27일, 우회부대는 오산에서 조선인민군 전차 1대를 파괴하고 북쪽 언덕의 조선인민군과 교전했다. 도로를 따라 공격한 제2부대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제31보병연대는 전차 14대, 대전차포 6문 등을 파괴하고 3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주장했다.[3]
9월 28일, 미군은 공습과 포격을 가한 후 113고지와 92고지를 점령했다. 남은 조선인민군은 동쪽으로 후퇴했고, 수원과 오산 사이의 도로가 확보되었다. 9월 29일, 제7사단 제17보병연대 제2대대는 서울 남동쪽에서 조선인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 79명의 사상자를 냈다.[3]
5. 3. 북한군 잔당 소탕
서울 수복 이후, 제1해병사단은 서울 북부 외곽에서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았다.[3]10월 1일, 제5해병대대 일부는 평양 고속도로를 따라 문산과 임진강까지 순찰했다. 이들은 문산 근처를 제외하고는 산발적인 적 소총병만 만났을 정도로 큰 저항을 받지 않았다. 같은 날, 제7해병대대는 서울 시내 북쪽의 의정부 도로를 따라 진격했다. 이들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지만, 지뢰 때문에 진격이 다소 지연되었다.[3]
10월 2일, 제7해병대대는 의정부 남쪽 약 5km 지점인 누원리 부근에서 북한군 제31사단 제31연대 3개 대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고속도로 양쪽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천연 요새를 형성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제7해병대대는 사실상 전진하지 못했다. 그러나 밤 동안 북한군 차단 부대가 북쪽으로 철수했다.[3]
10월 3일 오후, 전차를 앞세운 제2대대가 의정부에 진입했다. 해병대와 해군의 공습으로 마을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제7해병대대는 의정부 바로 북쪽의 고지를 점령하고 그날 밤 마을 주변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10월 2일과 3일, 의정부 전방에서 벌어진 전투는 인천-서울 작전에서 제1해병사단이 맞닥뜨린 마지막 조직적인 저항이었다.[3]
6. 결과 및 영향
서울 수복은 6.25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도로 복귀하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주권을 국제사회에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UN군은 서울 수복을 통해 전쟁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북진의 발판을 마련했다.
북한군은 서울 방어에 실패하고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전력 약화로 이어졌다. X군단은 전투에서 7,000명의 북한군 포로를 확보했고, 사망자는 14,000명으로 추산했다.[3] 제1해병사단은 120mm 박격포 23문, 45mm 대전차포 19문, 중기관총 56정, 경기관총 및 기관단총 337정, 14.5mm 대전차 소총 59정, 소총 7,543정을 파괴하거나 노획했다.[3]
인천-서울 작전에서 유엔군은 약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제7보병사단은 전사자 106명, 부상자 409명, 실종자 57명으로 총 572명의 전투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 중 166명은 대한민국군 병사였다. X군단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제1해병사단은 전사자 364명, 부상으로 인한 사망자 53명, 부상자 1,961명, 실종자 5명으로 총 2,383명의 사상자를 냈다.[3]
전투 후, 대한민국 경찰은 공산주의자와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시민과 그 가족들을 고양 금정굴 학살, 남양주 학살 등에서 처형했다.[6][7]
7. 관련 도서
참조
[1]
서적
On To The Ya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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