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은 조선 시대 양화진 나루터와 잠두봉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풍류객들이 찾던 명승지였으나, 1860년대 후반 대원군 집권 시기 천주교 박해로 인해 가톨릭 신자들의 처형 장소로 사용되었다. 특히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곳으로, 이후 잠두봉은 절두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는 순교자들을 기리는 절두산 순교성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기념관에는 순교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67년 설립된 박물관 - 컨트리 음악 명예의 전당 박물관
컨트리 음악 명예의 전당 박물관은 컨트리 음악의 역사와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을 기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컨트리 음악 유물 보관소이자 명예의 전당으로, 다양한 소장품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컨트리 음악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경험을 제공한다. - 1967년 설립된 박물관 - 석주선기념박물관
단국대학교에 위치한 석주선기념박물관은 고고 미술, 민속 복식 등 4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석주선 박사 기증품은 대한민국 민속 복식 분야의 토대가 되었다. - 한국의 반가톨릭주의 - 흥선대원군
조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 종식 후 권력을 장악하여 개혁을 추진했으나, 쇄국정책과 독재적 통치로 비판받았고, 실각 후 재집권을 시도하다 톈진으로 압송, 명성황후 암살 의혹 등 격변기 조선의 대표적 인물로 긍정·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 한국의 반가톨릭주의 - 병인박해
병인박해는 1866년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한 사건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천주교 전파와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한 우려 등으로 인해 발생하여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으며,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 서울 마포구 - 효창공원
효창공원은 조선 시대 문효세자의 묘에서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시설이 있었고, 현재는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을 중심으로 공원, 운동 시설, 기념관 등이 공존하며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다. - 서울 마포구 - 월드컵공원
월드컵공원은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대규모 생태공원으로, 과거 쓰레기 매립지였던 난지도를 복원하여 2002년 월드컵을 기념하며 평화의 공원, 하늘공원, 노을공원, 난지천공원, 난지한강공원 등 5개의 테마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종류 | 박물관 & 사당 |
위치 |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96-1 |
설립 | 1967년 |
웹사이트 | 절두산 |
문화재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유형 | 사적 |
이름 |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
지정 번호 | 399 |
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96-1 외 |
지정 면적 | 36,245m2 |
지정일 | 1997년 11월 11일 |
2. 양화진과 잠두봉
2. 1. 양화진
양화진(楊花津) 또는 양화나루는 잠두봉과 주변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본래 양화진은 양천 양화리의 선유봉 아래 있는 백사장에 있던 나루를 일컫는 이름이었는데, 강의 반대편 쪽 잠두봉 아래의 나루도 양화나루로 부르게 되었다. 양천의 양화리는 버드나무가 우거져 버들꽃이 필 무렵 장관을 이루어서 양화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고 일컫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중국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사대부들의 별장이나 정자도 강변에 많이 세워져 있었다. 이미 세종때에 태종의 제 7왕자인 온녕군이 잠두봉 일대에 정자를 지어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양화진 일대는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할 수 있는 개시장(開市場)이 되었다.2. 2. 잠두봉
잠두봉(蠶頭峰)은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로 아래 양화진나루터에는 한강을 통해서 각 지방에서 조세곡 수송선과 어물, 채소 등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5] 원래 이 곳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5]3. 천주교 박해와 절두산
1860년대 후반 대원군 집권 시기, 조선은 주로 한국인 가톨릭교 개종자들을 처형하는 장소로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을 사용하였다.[1]
유교적 가치를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산은 조선의 지배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6]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이후 회복되던 교세는, 1866년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다.[7] 청나라의 천주교 박해 정책과 반대 세력의 공세에 흥선대원군은 정권 유지를 위해 박해를 결정했다.[7]
병인박해는 8,000명이 넘는 천주교도들이 처형되어 한국 천주교 역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가 발생한 사건이다.[7]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은 병인박해 당시 가톨릭교 신자들의 처형 장소로 사용되었다.[1]
1866년 병인박해 때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9][10]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공하자, 격노한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더럽혔던 땅을 서학인의 피로 씻음이 마땅하다"며 양화나루 옆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하고 천주교인들을 처형하게 하였다.[9] 수천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져 핏빛으로 변했다고 전해진다.[10] 이후 이곳은 절두산이라 불리게 되었다.[10]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신미양요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더욱 강화시켰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8]
현재의 기념비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으며, 이곳에서 처형된 약 8,000명의 순교자들을 기리고 있다.[1]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방문했으며, 마더 테레사는 그 다음 해에 방문했다.[2] 현재 기념관에는 약 3,000개의 순교자 관련 유물이 안치되어 있다.[3]
3. 1. 병인박해
유교적 가치를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산은 조선의 지배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6]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이후 회복되던 교세는, 1866년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다.[7] 청나라의 천주교 박해 정책과 반대 세력의 공세에 흥선대원군은 정권 유지를 위해 박해를 결정했다.[7]병인박해는 8,000명이 넘는 천주교도들이 처형되어 한국 천주교 역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가 발생한 사건이다.[7]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은 병인박해 당시 가톨릭교 신자들의 처형 장소로 사용되었다.[1]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듬해에는 마더 테레사가 이곳을 방문했다.[2]
3. 2. 절두산 순교
1866년 병인박해 때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9][10]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공하자, 격노한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더럽혔던 땅을 서학인의 피로 씻음이 마땅하다"며 양화나루 옆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하고 천주교인들을 처형하게 하였다.[9] 수천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져 핏빛으로 변했다고 전해진다.[10] 이후 이곳은 절두산이라 불리게 되었다.[10]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신미양요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더욱 강화시켰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8]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약 8,000명의 순교자들을 기리고 있다.[1]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마더 테레사는 그 다음 해에 이곳을 방문했다.[2] 현재 기념관에는 약 3,000개의 순교자 관련 유물이 안치되어 있다.[3]
4. 절두산 순교성지
1966년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천주교회에서 '''절두산순교기념관'''을 세웠다. 2000년에 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 개명했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있다. 그중에서도 최양업 신부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또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박순집(1830 ~ 1911)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11]
1860년대 후반 조선의 대원군 집권 시기, 주로 한국인 가톨릭교 개종자들의 처형 장소로 사용되었다.[1] 현재의 기념비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으며, 이곳에서 처형된 약 8,000명의 순교자들을 기리고 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방문했으며, 마더 테레사는 그 다음 해에 방문했다.[2] 현재 기념관에는 약 3,000개의 순교자 관련 유물이 안치되어 있다.[3]
4. 1. 절두산 순교기념관 및 박물관
1966년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천주교회에서 '''절두산 순교기념관'''을 세웠고, 2000년에 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 개명했다.[11] 3층 높이로 솟은 기념관은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상징하며, 지붕은 갓, 벽은 목칼, 사슬은 족쇄를 형상화한다.[11]기념관은 순례성당,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한국 교회사 전시관으로 구성된다.[11]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 초기 교회 인물들의 유물과 순교자 유품, 형구(刑具) 등 순교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11] 특히 최양업 신부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11]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 동상, 박순집(1830 ~ 1911)의 묘, 남종삼 성인 흉상과 사적비 등이 있다.[11] 박순집 일가 열여섯 명의 순교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도 있다.[11]
4. 2. 주요 전시물
1966년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천주교회에서 세운 절두산순교기념관은 2000년에 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 개명되었다.[11]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1]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 선비들이 쓰던 갓을, 구멍 뚫린 수직 벽은 순교자들의 목칼을, 지붕 위의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11]기념관은 순례성당,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한국 교회 관련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11] 전시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형구(刑具) 등 다양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11] 최양업 신부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11]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박순집(1830 ~ 1911)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등이 있다.[11] 특히, 박순집 일가 열여섯 명의 순교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11]
4. 3. 기타 시설
1966년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천주교회에서 '''절두산순교기념관'''을 세웠고, 2000년에 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 개명했다.[11]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상징한다.[11]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머리에 쓰는 갓을, 지붕 위 수직 벽의 구멍은 순교자들의 목칼을, 지붕 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11]기념관은 순례성당,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한국 교회 발자취를 볼 수 있는 전시관으로 구성된다.[11]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형구(刑具) 등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11] 최양업 신부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11]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박순집(1830 ~ 1911)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등이 있다.[11]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 등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11]
5. 현대의 절두산 순교성지
1860년대 후반 대원군 집권 시기 조선에서는 가톨릭교 신자들을 처형했는데, 주로 한국인 가톨릭교 개종자들이 대상이었다.[1] 현재의 기념비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으며, 이곳에서 처형된 약 8,000명의 순교자들을 기리고 있다.[1][2]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방문했으며, 마더 테레사는 그 다음 해에 방문했다.[2] 현재 기념관에는 약 3,000개의 순교자 관련 유물이 안치되어 있다.[3]
5. 1. 국제적 교류
5. 2. 유물 보존
참조
[1]
웹사이트
HTTP 오류 404 - 페이지를 찾을 수 없음.
http://www.jeoldusan[...]
2017-05-30
[2]
웹사이트
Official Site of Korean Tourism Jeoldusan Martyrs Grounds
http://english.visit[...]
[3]
웹사이트
Galbijim
http://wiki.galbijim[...]
[4]
서적
겸재의 한양진경
동아일보사
[5]
웹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절두산 순교성지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https://terms.naver.[...]
[6]
백과사전
병인사옥
[7]
웹사이트
병인박해 [丙寅迫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
[8]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9]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10]
웹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문명과 야만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2011. 8. 8., 김육훈)'
https://terms.naver.[...]
[11]
문서
2000년 11월말 절두산 순교 기념관과 꾸르실료 회관 사이에 웅장한 절두산 순교 기념비가 제작 설치되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