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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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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병인박해는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한 사건으로, 1831년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파하자,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와 연관 짓는 양반들의 반발과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한 우려 등으로 인해 발생했다. 대원군은 초기에는 천주교를 묵인했으나,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한 외교적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천주교 확산에 대한 지배층의 반발과 청나라의 천주교 탄압 소식 등을 이유로 탄압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이로 인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으며, 절두산, 해미 등지에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사건은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와 함께 조선 시대 기독교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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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개요
발생 시기1866년
관련 사건병인박해
발생 장소절두산
원인천주교 탄압
결과수많은 천주교 신자 처형
별칭병인사옥(丙寅邪獄)
병인교난(丙寅敎難)
배경
조선 내부 상황대원군의 쇄국정책 및 권력 강화 시도
국제 정세서양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
전개 과정
박해 시작천주교 신자 체포 및 처형
주요 인물 처형프랑스 선교사 및 고위층 신자 처형
박해 범위 확대전국적인 천주교 신자 색출 및 처형
주요 인물
조선대원군
프랑스프랑스 선교사 (이름 명시 필요)
천주교주요 천주교 신자 (이름 명시 필요)
결과 및 영향
천주교 신자 피해 규모수천 명 처형 (정확한 통계 필요)
프랑스의 침공병인양요 발생
천주교 전파 위축일시적인 천주교 활동 억제
기타
관련 유적지절두산 순교성지
관련 문화재(관련 문화재 정보 추가 필요)

2. 원인

흥선대원군은 초기에는 부인(여흥부 대부인 민씨)이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천주교에 우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러시아남하정책에 따라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 내 천주교인들은 흥선대원군에게 조선, 프랑스, 영국의 삼국동맹을 제안했다. 그러나 조·불·영 삼국동맹 계획이 실패하면서,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도를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비난을 종식시키기 위해 일으킨 것이 병인박해이다.[3]

1866년은 조선 고종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를 포함하여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학살되었다.[3] 이 대학살을 직접 지휘한 포도대장 이경하는 이를 통해 무훈을 세웠다고 한다.

2. 1. 대원군과 천주교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탄압할 생각이 없었고 반감도 없었다.[8][9] 오히려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인 천주교를 통해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교류할 생각을 했다. 부인 여흥부 대부인 민씨가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다.[10]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묵인한 이유 중 하나는 천주교를 이용해서 프랑스와 주선하여 남하하는 제정 러시아를 막으려고 했기 때문이다.[10] 그러나 영국-프랑스군이 청나라의 베이징을 점령한 사건으로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11]

1864년(고종 1년) 러시아인이 경흥부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을 때, 조선 정부는 대책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몇몇 천주교인들은 나폴레옹 3세의 힘을 빌려 한·불·영 3국 동맹을 체결하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다고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이들은 동맹이 성사되면 종교의 자유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러시아의 통상 요구도 시간이 지나면서 과장된 우려로 여겨지게 되었다.

오히려 지배층들은 천주교의 교세 확장에 대한 반발을 가지고 있었고, 천주교도들의 미숙한 대처와 무책임한 발언으로 “운현궁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라는 소문이 퍼지면서,[12] 대원군은 정치적 기반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결국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탄압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2. 2.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외세 수용의 좌절

1864년(고종 1년) 러시아가 경흥부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 이하 조선 정부 요원들은 크게 놀라고 당황했다. 이에 대한 대책을 찾지 못하고 있던 중, 일부 천주교 신자들은 프랑스, 영국과의 3국 동맹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나폴레옹 3세의 힘을 빌려 동맹을 체결하면 종교의 자유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대원군에게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12]

그러나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러시아의 통상 요구도 시간이 지나면서 과장된 우려로 여겨지게 되었다. 또한, 조선 지배층은 천주교를 “천국지옥을 주장하며 혹세무민하는 사학(邪學)”으로 여겨 교세 확장에 반발했다. 천주교도들의 미숙한 대처와 무책임한 발언으로 “운현궁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원군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12]

2. 3. 대원군의 입장 변화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 외교적인 이용 가치가 없었다. 또한, 조정에서 우려하던 러시아인의 월경 행위와 통상 요구도 시간이 지나면서 과장된 것으로 여겨졌다. 지배층은 천국지옥을 주장하며 혹세무민하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여겨 교세 확장에 반발했다.[12] 천주교도의 미숙한 대처와 무책임한 발언으로 “운현궁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원군은 정치적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했다.[12]

이와 함께, 대원군의 출세를 지지했던 조대비와 요직 관리들도 천주교의 움직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에서 천주교 탄압이 다시 시작되자, 대원군은 정치적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모험을 피하고자 했다.[12] 결국 천주교도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여론에 순응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하여, 묵인 정책에서 탄압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이 심화되면서, 중화사대 사상을 가진 조선인들 사이에서 천주교 탄압의 분위기가 조성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3. 경과

흥선대원군은 초기에는 부인이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기독교에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추진하며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 내 기독교인들은 흥선대원군에게 조선, 프랑스, 영국의 삼국동맹을 제안했다. 그러나 조불영 삼국동맹 계획이 실패하면서, 흥선대원군은 기독교도를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병인박해를 일으켰다.[3]

1866년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해였으며,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조선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 등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학살되었다.[3] 포도대장 이경하는 이 대학살을 직접 지휘하여 무훈을 세웠다.

프랑스는 병인양요를 일으켜 군함 7척과 병력 약 1300명을 동원, 살해에 대한 배상, 책임자 처벌, 통상 조약 체결 등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점령했다. 대원군은 이를 거부하고 격퇴했다.[3] 이후 서구 열강의 군사적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강화하고 1871년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고,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척화비를 전국 주요 도시에 세웠다.[4]

3. 1. 천주교 탄압

1866년(고종 3) 정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교령(敎令)이 포고되자,[12]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었고, 수개월 동안 국내 천주교 신도 8,000여 명이 처형되었다.[9] 많은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산속으로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거나 굶주림에 쓰러졌으며, 신도가 아닌데도 박해당한 사람도 많았다. 다블뤼 등 3명의 프랑스 신부는 충청도 수영에서 참수되었다.[13]

배교자가 속출했고, 천주교 관련 서적은 압수되어 불태워졌으며, 십자가와 마리아상은 짓밟혔다. 1866년 10월에 병인양요가 벌어지고,[14] 1868년 5월에는 독일인 오페르트에 의해 남연군의 분묘 도굴 사건이 일어나자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15] 천주교 탄압은 6년간 지속되었으며,[16] 탄압이 심했던 곳은 서울 합정, 황해도 옹진, 풍천, 장연, 충청남도 내포[17]와 서산 해미면 주변이었다.[13]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부인이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기독교에 우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따라 러시아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 내 기독교인들은 흥선대원군에게 조선, 프랑스, 영국의 삼국동맹을 제안했다. 그러나 조불영 삼국동맹 계획이 실패하자, 흥선대원군은 기독교도를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이 비난을 종식시키기 위해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1866년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해였으며,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파견되어 조선에 잠입하여 포교 활동을 펼치던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고종의 유모(朴マルタ)를 포함하여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학살되었다.[3] 이 대학살을 직접 지휘한 포도대장 이경하(李景夏)는 이를 통해 무훈을 세웠다.

3. 2. 절두산 순교

병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더럽혔던 땅을 서학인의 피로 씻음이 마땅하다"고 하며 양화진(현재의 절두산)에 형장을 설치해 천주교인들을 대규모로 처형하게 하였다.[20] 이때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죽었으며, 그 뒤로 절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21]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졌고, 머리가 산을 이루며 한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진다.

절두산 순교 성지

3. 3. 해미 순교(생매장)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조산리에 있는 '여숫골'이라 불리는 골짜기에서는 1,000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처형되거나 생매장당했다.[22] 당시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천주교도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충청도와 경기도 평택에 이르는 해미현 관아 관할 지역에서 붙잡힌 천주교도들은 해미읍성으로 끌려왔다.[22] 이들은 옥사에 갇혔다가 서문 밖에서 처형되었는데, 숫자가 너무 많아지자 시체 처리의 편의를 위해 읍성 바깥의 해미천변에 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였다.[22] 이러한 사실은 1935년 서산성당 범바로(P, Barraux) 신부의 조사와 발굴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22]

3. 4. 순교자 명단

번호[23]이름 및 세례명신분순교일 및 순교 동기
80유정률 베드로비서1866년 2월 17일 장살
81베르뇌 시몬주교1866년 3월 7일 군문 효수형
82랑페르 유스토신부1866년 3월 7일 군문 효수형
83도리 헨리코신부1866년 3월 7일 군문 효수형
84볼리외 루도비코신부1866년 3월 7일 군문 효수형
85남종삼 세례자 요한승지1866년 3월 7일 참수형
86전장운 세례자 요한상인1866년 3월 9일 참수형
87최형 베드로회장1866년 3월 9일 참수형
88정의배 마르코회장1866년 3월 11일 군문 효수형
89우세영 알렉시오역관(번역가)1866년 3월 11일 군문 효수형
90다블뤼 안토니오제5대 조선교구장, 주교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91위앵 마르티노 루카신부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92오메트르 베드로신부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93장주기 요셉회장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94황석두 루카회장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95손자선 토마스농부1866년 5월 18일 교수형
96정문호 바르톨로메오원님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97조화서 베드로농부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98손선지 베드로회장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99이명서 베드로농부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100한재권 요셉회장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101정원지 베드로농부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102조윤호 요셉농부1866년 12월 23일 참수형
103이윤일 요한회장1867년 1월 21일 참수형


4. 사건의 여파와 평가

조선에서 8천여 명의 천주교인과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었다. 살아남은 리델은 청나라로 탈출해 천진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고, 이는 그해 11월 발생한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9][24][25][26]

프랑스는 이 사건에 항의하여 군함 7척과 병력 약 1300명을 파견하여 강화부를 점령하고, 살해에 대한 배상, 책임자 처벌, 통상 조약 체결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프랑스군을 격퇴시켰다.[3] 대원군은 이후 서구 열강의 군사적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함으로써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고, 1871년부터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고,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새긴 척화비를 전국 주요 도시에 세웠다.[4]

5. 기타

병인박해는 1866년부터 1871년까지 6년간 지속되었다.[16] 1868년의 무진사옥, 1871년의 신미사옥도 병인박해에 포함된다.[27] 서구 사회에서도 병인박해는 널리 알려진 사건이었다.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흥선대원군을 기독교인들의 순교조선이 순교자의 나라가 되게 한 인물이라고 묘사하였다.

6. 이씨 조선에 의한 기타 기독교 탄압

조선(1392년 ~ 1910년)은 19세기에 기독교를 금지했지만, 선교사들은 잠입했고 신자들도 끊이지 않았기에 여러 차례 박해를 가했다.

연도사건내용
1801년신유박해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진사 황사영 등 300여 명을 처형
1839년기해박해프랑스 선교사 앙베르 등 200여 명을 처형
1846년병오박해김대건 등 20여 명을 처형


참조

[1] 웹사이트 切頭山殉教聖地 절두산 순교성지 : トリップポーズ https://www.trippose[...] 2020-08-02
[2] 웹사이트 切頭山 / チョルトゥサン https://www.seoulnav[...] 2020-08-02
[3] 뉴스 【설왕설래】 병인양요 http://www.segye.com[...] 세계日報 2008-09-09
[4] 웹사이트 洋擾とは https://kotobank.jp/[...] 2022-08-30
[5] 서적 한국사 이야기 17 한길사 2009-04-10
[6] 서적 한국사 이야기 17 한길사 2009-04-10
[7] 백과사전 에른스트 오페르트 [Ernst Jacob Oppert] 네이버 지식백과
[8]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상) 2008-07-30
[9] 백과사전 병인사옥
[10]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11]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12]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13] 서적 한국사 이야기 17 한길사 2009-04-10
[14] 백과사전 병인박해 [丙寅迫害] 네이버 지식백과
[15] 백과사전 남연군분묘도굴사건 [南延君墳墓盜掘事件] 네이버 지식백과
[16] 백과사전 병인박해 [丙寅迫害] 네이버 지식백과
[17] 백과사전 병인박해 [丙寅迫害] https://terms.naver.[...] 네이버 지식백과
[18]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19] 서적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 휴머니스트 2003-04-28
[20]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21] 백과사전 문명과 야만 https://terms.naver.[...] 2011-08-08
[22] 백과사전 여숫골 [Yeosutgol] 네이버 지식백과 2010-02
[23] 문서 103위 순교 성인 목록에 따른 번호를 말한다.
[24] 뉴스 [설왕설래]병인양요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세계일보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5] 웹사이트 병인사옥 http://enc.daum.net/[...] 한국브리태니커회사 2009-01-24
[26] 웹사이트 병인박해 http://www.encyber.c[...] 2008-06-20
[27] 백과사전 병인박해 [丙寅迫害] https://terms.naver.[...]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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